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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으로부터의 해방 (눅 8:26-39)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591 추천 수 0 2013.06.24 10: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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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8:26-39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눅 8:26-39, 성령강림절후 제5주, 6월23일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여러분은 혹시 귀신들린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엑소시스트>라는 영화가 그것을 주제로 합니다. 성당의 사제가 소녀를 괴롭히고 있는 귀신을 내쫓기 위해서 애를 쓰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소녀에게서 쫓겨난 귀신은 사제에게 들어갔고, 결국 사제가 자살하는 것으로 모든 소동이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교회에서도 이런 축귀 사건이 종종 있었습니다. 특히 기도원 같은 곳에서 열리는 특별 집회 때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집회를 인도하는 분이 귀신 들린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고 크게 외칩니다.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여러분이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귀신 들린다는 게 무엇일까요? 그게 실제로는 보통 우리가 미쳤다고 하는 정신병일까요?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비슷합니다. 이 현상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귀신 들린 사람은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이성적인 판단도 안 되고, 판단했다고 해도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둘째, 자해입니다. 혼자 중얼거리거나 헛소리를 지르고, 옷을 벗고, 몸에 상처를 내고, 발작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귀신 들렸다거나 미쳤다고 말합니다.


의학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현상은 분명히 정신병입니다. 관절염에 걸린 사람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듯이 정신병에 걸린 사람은 정신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기도나 안수, 또는 안찰로 고친다고 하다가 증상이 더 심해지거나 더 나쁜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귀신 들렸다는 성서 이야기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성서는 인간과 세계를 의학보다 더 심층적으로 봅니다. 귀신 들렸다는 말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훨씬 근원적인 힘이 작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제압할 수 없는 존재론적 능력이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근거 있는 이야기입니다. 의학이 정신병 자체를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정신병만이 아니라 질병을 제압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는 첨단 의학의 세상에서 삽니다. 그래도 여전히 아픈 사람은 계속됩니다. 내와 외과 할 거 없이 인간은 병에 계속적으로 시달립니다. 의학이 하나의 질병을 극복하면 또 다른 질병이 나옵니다. 그런 능력을 성서는 귀신이나 악령이라고 말합니다.

 

군대귀신

오늘 설교 본문에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마치 엑소시스트, 즉 퇴마사처럼 활동하십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그곳에서 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의 행색에 대해서 본문은 27b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9b절에 따르면 사람이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사람을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 두었다고 합니다. 미친 사람은 그럴 때마다 사슬을 끊어내고 광야로 돌아다녔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예수님은 그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각주에 보면 군대는 여단 급 규모의 로마 군대를 일컫는 ‘레기온’의 번역입니다. 본문의 대화를 보면 무당들의 신들림 현상과 비슷합니다. 무당들은 죽은 이의 영혼을 불러내서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하게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지금 우리 눈에 유치하게 보이지만 인간의 영혼이 아주 심층적으로 움직인다는 증거입니다. 현대과학에서도 인간의 심층심리학이나 무의식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범죄 조사에서도 최면 기술을 사용해서 단서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거라사 지역에서 14 사단에 속한 사람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로마 군대가 주둔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미친 사람, 또는 귀신 들린 사람은 어렸을 때 로마 군대가 저지른 악행을 보고 정신이 이상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레기온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이라는 뜻의 질병을 가리킵니다. 어떤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을 때 그것이 잊히지 않고 그 사람의 무의식에 남아서 생각과 행동을 파괴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월남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에 참가했던 미군들 중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질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전쟁터에서는 전우가 옆에서 죽어가는 걸 봐야하고, 자기도 직접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육이오 한국전쟁은 민족적인 차원에서 트라우마입니다. 남북 모두 제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제압당한 더러운 귀신은 그곳 돼지 농장에 있던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귀신들이 이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몰사했다고 합니다. 이런 장면은 어린아이들의 생각에 어울리는 만화처럼 보일 겁니다. 귀신이 누구에게서 나와서 다른 누구에게로 들어간다는 식의 이야기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는 맞지 않습니다. 저도 그걸 사실적인 것으로 믿지 않습니다.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의 행색이 얼마나 거칠었는지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쇠사슬을 끊어낼 정도로 힘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부르짖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시 언덕에서 방목되던 돼지들이 미친 사람의 거친 행동에 놀라서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가다가 낭떠러지에서 호수에 빠진 것인지 모릅니다. 사실 호수에 빠졌다고 해도 돼지는 수영을 잘 하기 때문에 익사하지는 않습니다. 성서기자는 이런 방식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돼지는 이방인들의 먹을거리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부정한 가축인 돼지가 몰사했다는 사실에서 유대인들은 어떤 쾌감을 느꼈을 겁니다.


한바탕 돼지 소동이 일어난 후에 이제 귀신 들렸던 이 사람은 옷을 단정히 입고 정신이 온전해 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모든 복잡한 일들이 해결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악령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귀신은 부정한 가축인 돼지와 함께 몰사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악령을 굴복시키는 승리자라는 사실에 감격했을 겁니다. 이제 이 이야기는 일단락된 것으로 봐도 됩니다.

 

동네 사람들

그러나 예상외로 이야기가 더 계속됩니다.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께 감사해야했습니다. 그 동네의 골칫거리를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었으니까요. 미쳤던 사람의 가족들이 빨리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해하고, 식사라도 대접해야만 했습니다. 이야기의 진행이 독자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갑니다. 가족들은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동네사람들은 기뻐하거나 감사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35절과 37절에서 그 말이 반복됩니다. 그들은 왜 두려워했을까요? 하나님의 존엄을 경험했기 때문일까요? 그랬다면 오죽이나 좋았겠습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는 구절에서(37b)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빠서 그만 가보아야겠다고 해도 사람들이 말려야 합니다. 제발 우리 동네에 들어와서 좀 쉬시고, 좋은 말씀도 전해달라고 했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말한 것일까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불편한 존재였다는 게 대답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질서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것입니다. 그들에게 미친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머물러 있는 게 좋습니다. 그들이 가끔 불쌍하게 여기고, 때로는 쇠사슬로 묶어 놓고, 자신들의 동정심을 만끽할 수 있는 대상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 미친 사람이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자신들이 미친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어지는 건 바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기존 질서가 허물어지는 걸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유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다 상식적이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경우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거부된 경우는 대개 이와 비슷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보십시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던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율법에 살고 율법에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율법을 상대화했습니다.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근거가 예수님에 의해서 허물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옹호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수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요즘에도 일상으로 일어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더 근본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만이 아니라 나름으로 정신 말짱하게 산다고 생각했던 그 거라사 주민들도 역시 귀신 들린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스스로 귀신 들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 사람보다 자신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그 주민들의 상황이 더 심각한 것은 아닐까요? 귀신 들렸던 사람은 정신을 차린 뒤에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지만 거라사 주민들은 정색하고 예수님에게 자기들 동네를 떠나라고 요구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쪽인가요? 실제로 미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겉으로는 건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미친 사람보다 더 미친 방식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광기는 단순히 그 시대와 반목하는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대단히 잘 어울리는 방식으로도 나타납니다. 미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서로 겹쳐 있습니다. 저는 설교 앞부분에서 미친 현상을 두 가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자기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생명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이성적으로 반듯하게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십시오. 몇 주 전 수요 공부시간에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식에게 두 가지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자식으로 인해서 기쁘기도 하지만, 자식들이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미쳤어!’라는 말이 어울리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여러 차원에서 폭력적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는 생명 파괴의 폭력들이 곳곳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무식한 방식으로, 다른 한편으로 세련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폭력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연민과 조롱의 대상에 불과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서 바른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라사 주민 중에서 이 한 사람만이 바른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한 사람일까요?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는 개인과 사회를 파괴하는 악령에 더 이상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비록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제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미쳤다가 다시 정신 차린 이 사람은 자기 고향인 거라사 동네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나서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39a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온갖 종류의 귀신이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생명을 파괴하는 악령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는 사실을 주변에 전해야 합니다. 이 말은 직접 노방전도에 나서라거나 선교사가 되라거나 여기저기 간증하러 다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도 부분적으로 필요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개인과 사회의 생명을 파괴하는 악령과 싸우라는 뜻입니다. 그럴만한 지혜와 용기가 없다고요? 팍팍한 현실에 주눅 들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까요? 그런 태도가 악령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악령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사회적 신분과 상관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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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June 25, 2013
*.18.118.229

미친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머무르게 하려는 동네사람 ...
망치에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입니다!

타인의 긍정적 변화에 기뻐하기보다 경계부터하는 모습.
아니 타인보다는 오히려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자녀가 정서적 독립을 이룰 때라든지, 후배나 제자가 자기보다 큰 성공이나 업적을 이룰때라든지 ...
축하하고 기뻐해야할 순간을 시기와 질투의 순간으로 만드는 마음.

때로는 미친 사람으로, 때로는 미친 사람보다 더 미친 동네 사람으로 사는 모습.
대체 몇번이나 예수님을 떠나보냈는지 ...

이런 고민을해서 주눅이 든건지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는
제가 악령과 싸우는 것인지 여전히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지 혼란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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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5, 2013
*.94.91.80

예거 님,
악령과 싸운다는 게 쉽지 않아요.
나도 그렇게 설교했지만
그게 어쩌면 당위로 머물지 몰라요.
이 현실에서는 무엇이 악령인지 분간도 되지 않고,
여기서 일단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도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악령 제거는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요.
우리는 주어진 한계 안에서나마
그런 하나님의 일에 도구가 되도록 노력하는 거겠지요.
겸손하게, 그러나 용감하게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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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June 25, 2013
*.18.118.229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행동 하나하나 가부를 정의하려는 풍토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진짜 신앙은 어떤 흐름을 따라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옳은지 저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고
때로는 의심하고 때로는 흔들리며
때때로 넘어지고 때때로 상처받고
그럼에도 계속하게 되는 어떤 것 ...

게다가 이런 것 조차 꼭 옳다고 볼 수만 없다는게 참 힘든 것 같습니다.
사이비 신흥종교에 빠지는 사람도 있으니 ...

겸손하게 그러나 용감하게 ...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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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Lucia

June 25, 2013
*.111.223.110

설교를 읽으면 오가는길에 남편에게 얘기를 합니다
거라사동네에 귀신들린사람...아,돼지? 응,
아는성경얘기인데 해석이 다르다는걸 주고 받았지요
우리가 미친거라는데 동의하면서 
악령과 싸우러 나가? 시위하는데 동참할까?(브라질에 화난궁중들 시위중)
목사님,하나님이 악령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는데
불편한동행,, 아직도 어색할까요..?
남편이 질문합니다. 근데, 돼지떼에 들어간 귀신은 죽었어?
     ......  맨날 말문을 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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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5, 2013
*.94.91.80

루시아 님은 재미 있게 글을 쓸 줄 아는 분이시군요.
마음이 열려 있다는 증거에요.
마음이 열려 있으면 편하게 되구요.
편하면 세상이 잘 보이거둔요.
그래서 글이 거침이 없고,
구김도 없고, 따뜻하고, 솔직하고, 
그리고 자기 성찰에 이르게 되거든요.
억지로 아는 척하는, 
또는 신앙이 있는 척하는 글은 표시가 나는데요.
(나도 가끔 그런 글을 쓰지만...)
루시아 님의 글은 그냥 물 흘러가는 듯하네요.
우리가 미친 거 맞지요? ㅎㅎ
그 사실만이라도 알고 살아야겠지요.
돼지떼에게 들어간 귀신은
수영을 못해서 죽었지만,
다른 귀신들은 여전히 생생하답니다.
두분의 다정한 대화 장면이 눈에 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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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춰니

June 27, 2013
*.218.236.5

목사님~ 온라인 신자 입니다.^^
거라사의 주민들처럼 제가 악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지 않나...뜨끔해 봅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정신차림이 늘 일어나야 할텐데요...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설교를 몇편 읽었는데요,
모세의 홍해사건, 이번 설교에 있었던 군대귀신 사건들을 실제로 일어났던 기적으로 보고 있지 않으신 것 같은데,
성경에 기록된 기적적인 사건들이 대부분 저자들의 신앙적 차원에서 고백된 것으로 목사님은 보시나요?

한가지 더...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혹은 동정녀 탄생같은 것들을
실제로 믿으시나요?

부활이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궁금해서 여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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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춰니

June 27, 2013
*.218.236.5

목사님...
목사님이 쓰신 부활에 관한 단상들을 정독해 보았습니다.

부활의 실재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길이 아니었군요.
그리고 무엇이라고 실제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군요.

그들의 단순한 신앙적 고백이 아닌,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었군요.

그런데....이제 부활이 무엇인지 더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그저 단순히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겠거니 생각했었는데...
부활은 제 눈에 하나님의 신비처럼 비칩니다.
알 수 없지만, 실제하고, 영향을 미치는 신비요.

칼융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심리적 진실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부활이, 그것을 보았던 오백여 형제에게는 진실이었을 거라는 사실이 깨달아 집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허전한 마음은 남아있네요.
그리고...이런 사실을...
왜 저는 아직 까지 몰랐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는지....참....

이러한 사유의 길을 열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사유가 심화될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합니다.^^

온라인 신자...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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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7, 2013
*.94.91.80

춰니 님,
안녕하세요.
닉네임이 무슨 뜻이에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초자연적 사건이나 신화는
고대인들이 세상을 읽는 코드였어요.
그들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운 거고
나름으로 합리적인 거였습니다.
성서의 사람들도 거기에 예외가 아니었어요.
중요한 건 기적과 신화가 아니라
그것이 말하려는 어떤 사건, 또는 리얼리티에요.
제가 자주 비유로 말하듯이
기적과 신화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거지요.
이 문제는 대충 아실 테니 그만 하구요.
'아직도 허전한 마음은 남아 있네요.' 하셨네요.
그거 좋은 징조입니다.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가 편안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거에요.
그런 허전함을 피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옛날로 돌아갑니다.
마치 사춘기를 겪기 싫어서
마마보이로 머무는 거과 같지요.
허전하고 외롭고 불안해도
실체적 진실과 마주해야 합니다.
어머니 품을 떠나야 어른이 되는 것처럼
용감하게 새로운 세계로 길을 떠나야 합니다.
영적인 자유가 무언지 알게 될 겁니다.
그게 구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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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춰니

June 28, 2013
*.140.228.140

닉네임 춰니는 제 이름 약자입니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으신 이유는, 저와 목사님이 댓글 외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랫동안 장로교라는 틀에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실체적 진실과 마주할 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어야 할텐데...마마보이로 머물렀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 갈한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었습니다.
설교비평 책을 읽고, 이곳에서 생수를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잠깐씩이나마 찾아보게 되었거든요...
목사님의 설교가 저에게 성경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드리구요...

목사님처럼 성경을 해석하려면 어떤 훈련이 되어야 할까요?
인문학 공부가 선행되어야 겠지만...
어떤 책부터 보아야 할지... 

일단 추천도서를 읽어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궁금한 것들이 생기면 메일로 여쭤봐도 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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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육바금지

June 27, 2013
*.51.18.121

 온라인 신자라는 게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가 목사님의 설교를 수년간 들어보면서 느낀 바로는 성서에 나오는 여러 기적현상에 대해서는 대체로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계시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동정녀 탄생설화도 마찬가지구요. 하지만 부활의 역사성과 실재성에 있어서는 그러지 않았구요. 

가령 오늘날 과학적 입장에서 동정녀 탄생이나 기적설화가 부정되더라도 기독교가 무너지지 않는데요, 만약에 부활이 그저 의미로만 존재하거나 심리적 철학적 효과정도로 이해되어 버리면 기독교는 그날로 무너져버립니다. 

기적이 실재 있었나 없었나에 아직은 너무 관심가지시지는 말고,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종말에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를 완성하실 때에 우리 몸이 새로운 육체를 덧입어서 완전히 새롭게 되는데요, 그 몸이 역사적 시간을 거슬러서 2000년전 예수님께 나타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몸소 경험하고 제자들이 또한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되게 여기게 됩니다. 정목사님께서도 이 부활에 있어서는 양보없이 실재하였음을 역설하십니다.

이 부활을 그저 의미나 환상으로 여기는 것이나, 십자가 고난도 실제 육체에 예수의 영이 없었다는 가현설등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이단이며 정목사님도 전혀 지지하지 않습니다. 

기적의 사실성을 인정하냐 마냐는 다소 사람들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인정치 못하겠다고 하면 그건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럴바에는 다른 좋은 철학을 지닌 불교같은 걸 믿으시는게 나을겁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아시려면 목사님의 설교만 가지고는 좀 부족하고요, 나름대로 책들을 좀 보셔야 할겁니다. 목사님께 여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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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7, 2013
*.94.91.80

육바금지 님이 내 대신 나보다 더 설명을 잘하셨네요.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혼란을 겪게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세요?
구원, 하나님 나라, 심판, 부활, 죄, 천사, 창조 ...
이런 용어들이 단지 낱말뜻으로만 느껴질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와 닿지 않는 이유 말입니다.
사실 목사님들도 그런 혼란을 똑같이 겪습니다.
문제는 '철학'의 부재입니다.
존재, 시간, 무, 인식, 현실성, 역사 ...
이런 철학적 개념에 대한 최소한의 전이해가 없으면
기독교 신학을 이해할 수 없어요.
이런 문제가 간혹 전문적인 신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예컨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덱거의 명제를 모른다면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교리도 이해할 수 없는 거지요.
철학, 또는 인문학적인 훈련이 안 된 분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명한다는 건 어려운 작업이에요.
어쩌면 아예 불가능하다고보 말할 수 있어요.
철학, 인문학이 그렇게 거창한 거는 아니구요.
그걸 전공하지 않아도 조금만 생각의 틀만 열면 가능한 겁니다.
사실 대학교수도 철학적이지 못할 수 있고,
초등학생도 철학적일 수 있어요.
한국교회에서는 철학이나 신학 자체를 백안시하는 경향이니
로마, 헬라 문명권에서 자리가 잡힌 기독교 교리를 이해할 수 없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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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park20130627

June 27, 2013
*.69.184.167

미친 사람의 특징을 말씀하시는 부분에 많이 공감이 됩니다.

자기 통제가 불가능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모습을 가진다는 부분을 일터에서 매번 봅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의 특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많은 공감이 됩니다.



자기 통제가 불가능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모습을 가진다.


정말 그런 모습을 일터에서 가까이 매번 보고 겪습니다. 


총 칼만 안들었지요, 정말 창끝으로 찌르는듯한 아픔을 주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내심 그들의 영혼이 일곱귀신에게 사로잡힌 성경속 인물과 같다라는 생각이 가집니다.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 하며 오히려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말했다는 부분도

많이 공감이 됩니다. 역시 일터에서 종종 그런 모습을 봤습니다. 아니 매번 봅니다.




목사님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같은 사람에게는 위로가 큽니다.



현장에서 싸워간다는 것은 저같은 소시민, 저같은 공장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나이가 들수록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서 안타깝습니다.

아, 데모나 투쟁을 한다는 뜻보다는 그런 상황에 대해서 영적인 시각으로 대응하는 것이

이제는 힘들게만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점점 생각도 굳어지고 성서의 말씀보다는 기도의 세계보다는

세상살이의 논리가 더 강하게 나 자신에게 영향을 주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제 내면까지는  제 내면의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의 세계까지는 침범하지 못하지만요.

하지만 힘이 많이 드는 것도 사실이더군요.


사회 생활 할수록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잔인할 정도로 강한 사람들 많이 보고 있습니다.

절대로 자기 자신은 틀리지 않았고, 많은 말을 하면서도 결국은 너가 틀렸고 나는 잘못한 것 없다

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출세를 먼저 하고 빨리 하고 일 배우는 기회를 더 가질때가 많더군요.

그렇게 힘을 얻어서 또 다시 아랫사람들을 괴롭힐때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 밑에서 비위 맞추며 살아가는 것도 참 쉽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같은 사람이 인정받지도 못하는 나라이니 무슨 말을 할수 있을까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 또다시 격려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연민과 조롱의 대상에 불과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서 바른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라사 주민 중에서 이 한 사람만이 바른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한 사람일까요?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는 개인과 사회를 파괴하는 악령에 더 이상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비록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제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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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7, 2013
*.94.91.80

박준용 님,
힘들지요?
세상이 참 거칠지요?
사람이 원래 그렇습니다.
아니 사회가 좀 그렇습니다.
근데 박준용 님이 일하는 공장 세계만이 아니라
목사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정신 차린 사람들도 꽤나 많다는 걸 알지요?
주님께서 힘을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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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rch 16, 2014
*.176.175.40

목사님 악령과의 싸움에 치열한 준비 보다는 인내를 가지고 태도를 나타낸 적이 많습니다.  저도 이제 인생을 조금 살다보니 억울해 미칠것 같은 시간도 지나 가더군요. 더구나 그 악령의 실체가 때로는 한없이 불쌍할 |때가 참 많더군요.

대학때 도서관 돌계단에 망국 민정당이란 글씨를 친구들이 페인트로 실하게 적어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왠만하면 누구나 밟고 갈 수 있는 위치였기에 다들 그렇게 하기를 바랬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그 악령집단을 옹호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살벌했습니다. 안기부가 무서워서 살벌한게 아니었고 그 친구들에 대한 감정이 참으로 격했었습니다. 전 광주광역시에서 군생활 을 하였었습니다. 현지 방위병들에게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심지어는 국회의원선거를 치루는데 투표용지를 투표함옆에서 떡하니 앉아있는 중대장에게 펴보이고 함에다 넣었었습니다. 투표용지에 이미 야당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름이 다 기록되었었습니다. 그리고 불려가서 군기교육대가서 입에 단내나게 벌받았는데 그 땐 전부 미친놈들로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누가 알겠는지 기가 막혔으니까요.   84년에 입대를했으니까 전두환 정권이 본격적으로 득새를 할때 였습니다. 우리 또래들이 삼청교육대를 다녀오고 걔네들이 학생회 후보로 나서기도 했었습니다.제대 후 학교에선 더 미친놈들이 많았었습니다.  꽤 친한 친구였는데  안기부에서 대주는 뒷돈으로 단과대 학생회장이 되어서 학교내부 상황을 간첩질해주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그런짓을 하다가 어느날 다른 친구에게 테러 당했습니다.

전두환정권, 그 수하들, 그 수하들에게 매수된 친구들. .. .  한창득세할 때 모습은 7,8월 장맛비에 넘치는 계곡물과 같았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참으로 초라한 모습이죠. 약삭빠르게 안기부 돈에 빌붙은 친구들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에 취업해서도 권력의 맛을 알았기에 권력자들에게 늘 내시짓을 하더니 지금은 전공이 뚜렷하지 못해서 은퇴압박을 가장 많이 받고 여기저기 헤메입니다.  그동안 그런자들을 옹호하는 자들과 다툼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참으로 묘한건 그런 피맺힌 한을 안겨준 세력에 반대를 하던 세력들도 성장과 비대해지면서 내부적으로 부패하는 모습을 가장 밑바닥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곳 울산은 민주노동당의 중요한 거점 도시입니다. 그러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현장 근로자들의 임금에서 4대보험보다 먼저 일괄 원천징수되는 회비,  실력도 없으면서 민주노총회원 가입을 등에 없고 불공정하게 차지하는 일자리..

권력의 언저리를 돌아다니는 작업자들의 모습이  [아큐정전(阿Q正傳]에 나오는 아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런 행태의 누적이 실망스런 결과를 낳아버렸습니다. 그 일련의 결과들은 일일이 말하지않겠습니다.  지금의 설자리를 많이 잃어버린 모습이 많은걸 말해주니까요. 

 

한때는 전 백기완선생님의 광팬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도 리영희 선생님의 "새는 좌우의 날개를 난다"란 책를 만지기에 호감을 먼저 가지게 되었었습니다.

노회찬씨가 직장근처에 와서 근로자들에게 선거유세전을 펼칠 때 점심식사를 하면서 사인받고 지금도 늘 따르고 있습니다. 그때 노회찬씨가 제게 싸인을 해주면서  "변화하는 미래를 두려워 맙시다"라고 썼는 데....

몇년전엔 이정희씨가 울산에 와서 마이크로 자기주장을 하는 걸보고 새로운 진보의 아이콘이 탄생했다고 좋아했었지만 지금은 왠 돌아이 같은 이석기에게 목을 메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어디를 누구를 겨냥해야 할 지를 잃어 버리게 해야하는 상황이 가끔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양쪽에서 비판받는 중립을 지키는 입장으로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조용히 지내지만 분별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좀더 멀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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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6, 2014
*.94.91.64

예, 각자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가 하두 각박해서

상식적으로 살기 힘들게 하는 게 문제네요.

이런 시대를 살아내는 것 자체가

때로는 모욕적이긴 하나

예수 신앙이 있으니 그런 가운데서도

기쁨과 평화를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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