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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의 신비 (요 1:1-14)

성탄절 조회 수 14044 추천 수 0 2013.12.25 22:2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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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1:1-14 

성육신의 신비

요 1:1-14, 성탄절, 2013년 12월25일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탄절’ 하면 떠오르는 느낌들이 제각각일 겁니다. 제가 교회 학생회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성탄절 즈음에 카드를 만들어서 교우들에게 팔아 기금을 만들어 고아원 등의 시설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성탄절 전날 모임도 많았고, 새벽송도 즐거운 추억이었습니다. 성탄절을 가장 반기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백화점 사장님들일지 모릅니다. 연만연시와 맞물려 매출액을 높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짝사랑하던 이에게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찾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린아이들은 산타클로스에게서 받을 선물을 기대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성탄절은 기독교 신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낭만적인 절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거꾸로 성탄절을 더 쓸쓸하게 지내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원래 성탄절은 기독교적인 전통이라기보다는 이교적인 전통에 가깝습니다. 교회는 성탄절보다 부활절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근거로 본다 해도 부활절은 확실하지만 성탄절을 그렇지 못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12월25일을 성탄절로 지키지만 러시아 정교회는 1월6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12월25일을 성탄절로 지키게 된 역사적 배경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된 것과 연관됩니다. 로마는 동지가 지나서 다시 낮의 길이가 늘어나기 시작한다고 생각했던 12월25일을 특별한 날로 여겼습니다. 일종의 태양숭배 절기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로마가 중요하게 생각한 12월25일을 성탄절로 정했습니다. 로마의 태양 숭배와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이 결합된 겁니다.


이런 문제를 어떤 기독교인들은 꺼림칙하게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을 허무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는 본질과 형태로 구분됩니다. 본질은 그대로 유지하되 형태는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폴 틸리히의 표현을 빌리면 본질은 몸이고 형태는 옷입니다. 옷은 문화입니다. 기독교는 문화라는 옷을 입는다는 겁니다. 12월25이냐, 아니면 1월6일이냐 하는 것은 문화적인 형태에 속합니다. 그건 사람이 옷을 갈아입듯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의 본질은 바뀔 수 없습니다. 그게 바뀌면 변질되는 겁니다. 사이비가 되는 거지요. 오늘 우리는 성탄절의 본질이 뭐냐에 대해서 요한복음 기자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합니다.


위에서 로마 기독교가 성탄절을 12월25일로 정한 이유는 예수님을 빛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약성서에 빛이라는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요 1: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님을 빛이라고 한 이유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어둠, 즉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져낸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빛을 깨닫지 못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 빛에 취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둠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밝으냐,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으냐, 이런 세상에 더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 사람이 불쌍하지, 하는 기분으로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상을 즐겁게 낙관적으로 사는 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요한복음 기자가 왜 예수님을 빛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왜 어둠인지를 알아야만 예수님을 빛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은 사람은 진수성찬을 보고도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을 어둠으로 본다는 말은 세상을 단지 비관적으로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을 직시하는 겁니다. 그 한계를 뚫어보는 겁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영적인 만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맞서는 겁니다. 이걸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느끼더라도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대개는 그냥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것으로 여기고 삽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걸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둠을 알아야만 빛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왜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라고 말한 것일까요? 요한복음 기자는 그것을 헬라 철학 용어인 ‘로고스’로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로고스라고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요 1: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한 구절에 말씀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으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반복된 말씀은 로고스의 번역입니다. 로고스는 헬라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그들에게 로고스는 이 세상을 조화롭게 끌어가는 힘입니다. 로고스가 있기에 이 세상은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굴러갑니다. 로고스는 존재의 근원이며, 생명의 토대입니다. 로고스가 없다면 세상도 없고, 생명도 없습니다. 로고스는 물론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허황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는 말도 허황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확실한 것으로 인식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허황된 것으로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여기 국화꽃이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들은 국화향기에 취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모양에 취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겉으로 확인되는 것만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국화꽃의 내면적인 활동에 관심을 보입니다. 탄소동화 작용 덕분으로 지금 저 국화꽃이 저런 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탄소동화작용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주 분명한 현실입니다. 이런 탄소동화작용이 스토아 학자들에게는 로고스였습니다. 노자나 장자의 용어로 바꾸면 도(道)이며, 플라톤의 용어로 바꾸면 이데아이고, 화이트헤드의 용어로 바꾸면 과정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기, 존재라고 할 겁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로고스가 바로 예수님이며,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이 1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된 로고스는 곧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게 가능한 말일까요? 로고스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은 보이는 분이셨습니다. 로고스는 태초에 존재했지만 예수님은 2천년 역사 안에서 살았습니다. 양측은 분명히 다릅니다. 로고스는 초월적이지만 예수님은 내재적입니다. 로고스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나 예수님은 받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로고스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좀더 직접적인 말로 바꾸면, 어떻게 초월적인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게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성육신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4절에 나오는 말씀도 헬라어 로고스의 번역입니다. 육신은 헬라어 사르크스의 번역입니다. 사르크스는 단백질로 구성된 구체적인 우리의 몸을 가리킵니다. 로고스가 우리의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틴 루터 번역으로 이 구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안에 거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외아들로서 얻은 영광입니다.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가득했습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안에 거했다는 걸 신학 용어로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의 핵심도 성육신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성육신에 근거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습니다. 온전한 인간(vere homo)이라는 기독교 교리는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약화하고 신성만 강조했던 영지주의가 교부들에 의해서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마리아의 자궁에서 열 달 동안 태아로 계셨고, 출생 후에 우리와 똑같이 희로애락을 겪으셨을 뿐만 아니라 중력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에 기울어진 분들이 아니라면 여기까지는 모두 이해하고, 동의하실 겁니다. 문제는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사실, 즉 이 세상에 초월적인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라는 인간의 육체로 오셨느냐 하는 질문에 있습니다. 그게 실질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해할 수 없는 걸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그는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에게 나타난 영광을 그 근거로 주장합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입니다. 바울도 고후 4: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오늘 설교 본문 요 1:14절과 그 의미가 똑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고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성육신 개념은 영광 개념과 직결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영광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지만 앞에서 언급된 로고스처럼 그걸 우리는 손으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시편기자나 예레미야,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하다고 말했습니다. 영광은 바로 하나님의 현현이기에 우리가 세상에서 사물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루돌프 오토는 <Das Heilige>라는 책에서 그런 경험을 가리켜 ‘누미노제’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분의 현현은 우리에게 그런 두려움으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두려움을 경험해보지 않으셨는지요. 생명 현상의 궁극적인 깊이를 들여다 본 사람들은 다 그런 경험을 합니다. 간단히 이렇게만 질문하겠습니다. 2백 년 전에 여러분은 어디 있었으며, 2백년 후에 여러분은 어디에 있을 겁니까? 깜깜하지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청중들이 놀라워하고 두려워했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현현으로 경험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논리와 합리성을 뛰어넘는 경험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육신 개념은,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사실은 신비입니다. 황당하다는 뜻의 신비가 아니라 궁극적인 현실, 즉 ultimate reality에 맞닿아 있다는 뜻의 신비입니다.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issa)의 합성어입니다. 그리스도께 미사를 드린다, 즉 예배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성탄 축하 카드와 선물을 주고받거나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 아니라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난, 훗날 십자가에 달릴 운명의 한 아기를,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로부터 부활 생명으로 살아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날입니다. 오늘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는 크리스마스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리면서 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을 아는 분은 저에게 말씀해주십시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 즉 그리스도 예배는 우리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고 행하는 사람은 성육신의 신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메리 크리스마스가 늘 가득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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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잠자는회색늑대

December 26, 2013
*.105.156.243

메리 크리스마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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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7, 2013
*.94.91.64

축성탄, 그리스도 예배, 찬양!
우리의 남은 삶이
오직 그분을 향한 예배로 가득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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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December 27, 2013
*.164.11.151

 목사님, 성탄절에 은혜로운 말씀  잘 먹었습니다.
질문방으로 들어갔더니 문제가 생겼는지 들어가지를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질문을 올립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질 때 왜 형제들에게 어머니를 맡기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제자(요한?)에게 맡겼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 운명하신 후에
그때부터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셨다고 기록돼 있군요. 
예수님 부활 후에 친동생 야고보가 초대교회 수장 역할을 할 정도라면
마땅히 친자식인 야고보가 어머니를 모셔야 할 텐데 
다른 제자의 집에서 봉양을 받았다는 것이 더더욱 이해가 안 되네요.

또 한 가지 더,
초대교회때 사도들의 권위가 막강했을터인데, 사도들을 제쳐두고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사도회의를 주재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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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7, 2013
*.94.91.64

아우 님도 성탄절을 잘 지냈겠지요? 
교회력으로 본다면 아직도 성탄절기에요. 
내년 1월5일이 성탄절후 둘째 주일이거든요. 
마리아를 요한이 모셨는지는 별로 정확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어머니를 부탁한 것도 정확한 게 아니구요. 
부탁했다고 하더라도 동생인 야고보를 제쳐두고 
요한이 책임을 지라는 말은 아니었겟지요.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알려진 요한이 
자기가 확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 구절을 썼겠지요. 
사도들의 권위가 처음부터 막강했던 건 아니에요.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12명을 따로 사도로 지명했다는 말이 있기 하나 
그게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는 힘들어요. 
열두 사도들의 권위는 초기 기독교가 자리를 잡으면서
함께 강화되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야고보의 주도권은
사도직이 강화되기 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좀 복잡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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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December 28, 2013
*.164.11.151

 요한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에서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겼다면
당시 12제자들이 다 도망한 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지요? 요한은 현장에서 스승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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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8, 2013
*.94.91.64

요한복음에 나오는 요한이 
예수님의 열두 사도에 속하는 요한은 아니에요. 
요한의 이름을 빌려서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연대가 대략 90년-110년이에요.
예수의 제자들은 이미 다 죽은 시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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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December 28, 2013
*.164.11.151

 목사님~
제가 궁금한 것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아니고
십자가 형틀 위에서 예수님이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맡긴 제자가
누구였는가, 하는 거였어요. 
그가 열 두 제자 중에 포함된 요한이었는지(우뢰의 아들)
아니면 다른 제자였는가, 하는 겁니다.
어쩼든 제가 궁금한 건 예수님 형장에서 모든 남자 제자들이 도망치지 않고 죽음을 지켜 본 제자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 제자를 사도 요한이 아니었나, 추측했던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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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8, 2013
*.94.91.64

ㅎㅎ 그걸 누가 알겠어요.
그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거고, 
아주 사적인 이야기에 속하니
개관적인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거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소에 제자들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은 있어요. 
십자가 처형이 공개적인 거니까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겠지요. 
거기에 관한 정확한 내용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구요. 
그런 에피소드는 복음서가 기록된 당시의 상황을 
전제로 한 교회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요한복음 저자가 궁금하지 않다고 했지요? 
저자가 중요한 거랍니다. 
모든 이야기는 저자에 의해서 
편집, 각색, 추정된 거에요. 
그러니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성서읽기에서도 핵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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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tulip

January 03, 2014
*.244.129.58

목사님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요한은 예수를 그 당시 헬라 철학의 단어를 빌어 "로고스"로, 중국어 성경은 "도()"라고 번역했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서는 왜 "말씀"인가요? 너무 궁금해서 이렇게 몇자 적습니다.

"말씀"하면, 구약의 "지혜"라는 의미와 연관도 안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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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3, 2014
*.94.91.64

로고스, 말씀, 도...
이런 주제로 신학석사 논문이 가능하겠군요. 
요한복음의 로고스를 왜 말씀으로 번역했는지 
제가 충분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잘 모르니까, 그냥 간단히만 설명합니다. 
로고스라는 단어가 복합적인 의미가 있다는 게 답입니다. 
이런저런 단어로의 번역이 가능한 거지요. 
중국 학자들은 도, 
우리 학자들은 말씀,
루터는 Wort가 적합하다고 생각했겠지요. 
우리말 말씀이 주는 뉘앙스가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드시지요?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말의 한계이니까요. 
다른 말로 번역하기도 좀 힘들었을 거에요. 
그냥 로고스라고 할 수도 없고, 
도(헬 호도스)라고 하기도 좀 그렇구요. 
번역은 늘 한계가 있으니 설교자들이 해석을 잘해야겠지요. 
루터가 Wort(언어, 단어)라고 번역한 거는 
서양의 언어 존재론적인 전통에서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언어가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보거든요. 
어딘가 이런 문제를 잘 다룬 논문이 있을 거로 추정됩니다. 
찾으면 알려주세요. 
중국 성경은 도라고 번역했군요. 
한자가 어떤 때는 필요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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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uly 23, 2014
*.220.104.49

폭염주의보가 내리는 날씨입니다.

이날씨에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은 일인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우리 인생은 평생이 크리스마스라고 말하셨습니다.  종교의 본질적인 유연성을 쉽게 알려주시니 저도 생각이 더 유연해지게 되었습니다.

로고스, 도, 말씀이 본질을 닮는 그릇의 차이일 뿐임을 좀더 머리에 깊게 담아서 배우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현현, 영광을 제가 운운하는 것이 두렵지만 전 여러번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체크에 체크를 거듭해서 설계도면을 그려도 실재 동작과 기능을 하는 부품들을 가공해서 조립을 하게되면 살 떨립니다. 마치 생명이 탄생하는 걸 입이 타는 심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생명의 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더운데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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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3, 2014
*.94.91.64

기계 설계도와 실제 작동이라는 비유가 재미있네요.

세상을 단순히 하나님의 설계도로 이해하지 말고 

그 생명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신비로 이해해야겠군요.

살 떨리는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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