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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생명이다! (신 30:15-20)

주현절 조회 수 10372 추천 수 0 2014.02.16 18:44:08
설교듣기 : https://youtu.be/c7BZS2Bmgp4 
성경본문 : 신명기 30:15-20 

하나님은 생명이다!

신 30:15-20, 주현절 여섯째 주일, 2014년 2월16일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구약성경은 분량도 방대하고 내용도 복잡해서 총괄적으로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과 같은 족장들이나 사울,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여로보암 같은 왕들의 이야기는 서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지만, 레위기와 신명기, 그리고 여러 예언서 등은 설교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공자 왈’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도 그렇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라는 20절 말씀도 너무 자주 들은 탓인지 따분하게 들리거나 우리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말씀은 죽은 겁니다. 이를 살아있는 말씀으로 읽으려면 본문이 기록된 역사적 배경을 어느 정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의 역사적 배경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출애굽입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40년을 광야에서 보낸 뒤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압 광야에서 모세가 행한 연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만감이 교차했을 겁니다. 가나안은 원래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던 땅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조상들은 그 땅을 지켜내지 못하고 애굽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 속사정은 창세기에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나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에 얽힌 설화가 그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애굽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무총리에 오르게 되었고, 야곱을 비롯한 그의 여러 아들들과 가족들은 극심한 흉년으로 고생하던 중에 요셉 덕분으로 애굽의 고센 지역에 터전을 잡고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가서 출세한 아들 덕분으로 온 가족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잘살게 된 어느 미국 교포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애굽이 아무리 살기 좋아도 약속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애굽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정책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세의 등장으로 그 유명한 엑소더스, 즉 출애굽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보름이면 가나안에 이를 것으로 생각했지만 40년이나 광야를 배회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겪었을 고생,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대략 4백년 만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감회가 어땠을까요? 그러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는 게 마냥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자신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나쁠 수도 있습니다. 4백년이 흐르는 동안 가나안 땅은 다른 민족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문명,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야만 합니다. 새로운 도전이자 위기였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마치 유언을 남기듯이 모압 광야에서 쏟아냈습니다. 이게 본문의 첫 번째 배경이자, 표면적인 배경입니다.

 

본문의 실제적인 배경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출애굽 사건은 기원전 13세기에 일어났고, 지금 설명하는 바벨론 포로 사건은 기원전 6세기에 일어났습니다. 두 사건은 대략 8백 년의 차이가 납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신명기는 바벨론 포로 사건과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형식적으로는 기원전 13세기에 있었던 모세의 연설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6세기의 바벨론 포로라는 상황에서 익명의 어떤 사람에 의해서 행해진 설교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신 30:3, 4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네 쫓겨 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우리가 신명기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모세의 모압 연설로부터 시작되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경험, 그리고 그 이후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과 바벨론 포로에 이르는 전체 역사경험을 배경에 두어야 합니다. 특히 바벨론 포로 사건이 중요합니다. 바벨론은 당시에 일대를 호령하던 제국이었습니다. 이들 앞에서 이스라엘은 명함조차 내밀 수 없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이스라엘은, 더 정확히 말해서 남유다는 신흥제국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패망했습니다.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궁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보물 등은 강탈당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가거나 볼모로 잡혀 갔습니다. 패전 국가의 운명이 어떤지는 제가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명기 기자는 이런 운명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제 모세 전승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성능 좋은 무기를 구입하고 군인 숫자를 늘려서 바벨론을 격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외쳐야만 했을까요? 출중한 지도자를 뽑아서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요? 바벨론보다 더 강한 나라로부터 원병을 끌어와야 했을까요? 이 절박한 순간에 신명기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든 구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16절은 이렇습니다.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이게 말이 될까요? 지금 나라의 형편은 풍전등화와 같고 바벨론의 위협은 점점 노골화되고 있는 마당에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니, 이게 말이 되나요? 때가 어느 땐데, 너무 한가하게 들립니다. 이걸 우리의 일상으로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밤낮 가리지 않고 사업에 전념하던 사람이 다른 업체와 경쟁을 벌이다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어떻게 해서라도 상대와 싸워서 이길 방도를 찾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원리가 다 이렇습니다. 우리도 천문학적 금액이 나가는 각종 무기를 미국에서 구입하고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의 위기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수단을 많이 찾아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신명기 기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당시 청중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말일까요? ‘설교하고 있네!’ 하는 조롱을 받지는 않았을까요? 그리고 신명기 기자의 설명대로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대로 살면 복 받고 잘 살게 될까요?


이런 질문에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다른 민족들에 비해서 잘 되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50여년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나라를 다시 세우지만, 그 뒤로 나라의 기운이 살아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특혜를 베풀어주셨다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간혹 이스라엘 민족의 우월성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 중에 유대계가 파격적으로 많다거나 미국의 경제계를 주무르는 사람들도 대개 유대계라고 말입니다. 어떤 교육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가정교육을 높이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을 잘 믿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더 나가서 기독교를 믿는 유럽 국가들은 전체적으로 잘 살고, 불교를 믿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못산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해서 일이 잘 풀린다거나 믿지 않는다고 해서 잘 풀리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잘 믿는 가정에도 장애인이 태어날 수 있고,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과 복 받는 거는 간접적으로는 영향을 끼칠지 몰라도 직접적으로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명령과 규례를 잘 지키면 복 받아 잘되고, 거꾸로 다른 신들을 따르면 망하게 될 거라는 신명기 기자의 선포는 속임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는 바벨론 포로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그 문제를 말할 수밖에 없었지만, 신명기 기자가 실제로 말하려는 것은 더 중요한 어떤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만 생명이 속한다는 사실, 즉 ‘하나님이 생명’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본문은 그래서 반복적으로 사는 길과 죽는 길,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대비시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주장합니다. 19b절에서는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했고, 20a절에서는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를 의지하는 것이 바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이라는 이 사실은 그렇게 간단한 것도 아니고 명백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실제로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게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다른 데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본문 17,18절에서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신은 바벨론의 여러 신들을 가리킵니다. 당시는 황제가 바로 신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신들이 생명을 지켜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내려오는 북한의 왕조는 신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그들 왕조가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준다고 실제로 믿고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자본이 신입니다. 경제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큰 일 날 것처럼 불안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본을 키우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상에 기울어지기 쉽게 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받아들이면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두 가지의 새로운 시각이 필요합니다. 첫째, 생명은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도 있긴 합니다. 의료발전을 통해서 건강을 누리고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경제정의를 증진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귀하다고 하더라도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의 변형이나 개량일 뿐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정도입니다. 그런 변형과 개량으로 생명 자체를 좌지우지할 수는 습니다.


둘째, 생명은 우리 앞에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건 지금 이렇게 숨 쉬고 먹고 배설하고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사는 표면적인 생명현상뿐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모든 것이라거나, 그걸 알면 생명을 다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현대인은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아는 게 많은 탓인지 생명을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절대화해서 그것을 확대하고 강화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게 인생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딥니다.


일상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정을 이룬 사람들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겁니다. 그걸 마련하면 인생 성공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준비를 갖춘 것으로 여깁니다. 집을 마련해본 분들은 알겠지만 그것으로 결코 생명이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열정적으로 추구하던 모든 것은 그것이 성취되는 순간에 시시한 것으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우리이 모든 업적은 시간과 더불어서 낡고, 곧 죽음 앞에 서야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이게 삶의 부조리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오해하면서 어딘가에 매달린 채 살아갑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지금 도사 연하면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살이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가능한 열심히 사시고, 또 세상에서 인정을 받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큰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그것으로 생명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아두십시오. 따라서 큰 업적을 이룬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게 별개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하나님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느끼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희미해질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실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자리에서 속 시원한 대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한 순간의 깨우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우리 옆에 머물러 있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피터 아이혀(P. Eicher)는 <신학의 길잡이>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학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단 하나의 물음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물음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영적인 구도와 수행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영적 실존입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코끼리의 털 하나에 기대서 살아가고 있는 세균이 코끼리 전체를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벨론 포로 사건과 비슷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 걱정거리, 호기심거리도 많습니다. 구체적인 실무를 해결하는 것도 필요하기는 하나 우리에게 실제로 중요한 것은 신명기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신명기 기자가 선포한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종말에 일어날 궁극적인 부활 생명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부활 생명을 약속으로 받았고, 그걸 희망하고, 기다립니다. 이런 신앙인들이 취해야 할 삶의 태도를 오늘 본문 신 30:20절을 빌려서 여러분들에게 똑같이 말씀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를 의지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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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February 17, 2014
*.192.53.116

죽음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인생을 살면서,
그래서 위에서 언급하신대로 '삶의 부조리'를 갈수록  뼈저리게 통감하고 살면서도,

여전히 일상에 매여 사느라,
부활생명에 대한 갈급함이나 절실성을 평소 거의 실감하지 못하고 사는 이들에게,
오늘 본문으로 제시하신 이 생명의 약속은 그리 감격스럽지도,
감사하지도 못한 채 ,덤덤한 선언으로 전해져 옴을 고백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일상에 온 영혼이 갇혀사는 이 실존속에서,
어찌해야 시므온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생명의 완성을 타는 목마름으로 오매불망 고대하며 살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시원한 해결책도 없다는 말씀이 저를 낙담케 하는군요

하긴 이러 이러한 길이 있다...고 혹 제시해 주시더라도
그 길 찾아나서기에 나를 제대로 투신해갈수 있을까... 싶습니다.

 

지금 우리의 처지가  바벨론 시대의 포로된 신분과 방불하고,

작금의 세상의 거대한 교훈과 풍조가 바벨론 제국의 위력과 방불한 가운데

그 한복판에 매일 떼밀려 살고 있으면서,

오늘 결론으로 제시해주신

"그 분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의지하는 것만이 생명을 얻을수 있는 길이다"'는 말씀 앞에서,

누군 모르나요?  누군 그러고 싶지 않나요?  그게 정말 잘 안되니까 그렇죠....  하는 푸념만 가득 나옵니다.


 

오늘도 시원한 처방책(?)이 없는 말씀 앞에서, 

그럼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 한단 말인가?..

매일 일상에 갇혀 사는 자리로부터,  어떻게 해야 늘 시므온의 영성과 시선을 견지하며,

부활생명과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살수 있단 말인가...

하는 거룩한(ㅎㅎ) 의문을 품습니다.

 

구원의 길은 역시 좁은 문임을 새삼 실감케하는 말씀이었으며
풀리지 않는 의문은 그분께 갖고 나가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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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7, 2014
*.94.91.64

ㅎㅎ 재밌는 대글이었습니다.

진솔하구요.

대개 눈팅으로 들렸다가 그냥 나가서 그렇지

많은 분들이 부스러기 님과 비슷할 거로 봅니다.

부스러기 님은 다른 분들을 대표해서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 겁니다.

잘하셨어요. ㅎㅎ

두 가지로 답글을 드리겠어요.

 

1) 자꾸 답을 찾으려면 결국 찾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물을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망해서 돌아갔다는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자기 재산을 지키는 것에 영혼이 기울어져 있으면

예수가 앞에 있어도, 그의 말을 들어도

생명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설교에서도 짚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힘든 거지요.

어쩌면 혁명적인 사고의 변화가 없으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뽕짝으로만 음악 경험을 하는 사람이

갑자기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멍 때리는 거와 비슷합니다.

클래식이 공허하게 들리는 거지요.

간증 유의 글만 읽던 사람이

에크하르트나 루터나 바르트 책을 읽으면

'뭔 소린지 모르겠네.' 하는 거와도 비슷합니다.

 

2) 속시원한 답을 찾지 말고(무의미 한 거는 아니나)

그 답에 이르는 과정으로 들어가세요.

클래식을 듣자마자 황홀한 음악 경험을 하는 게 아니니

클래식의 기초를 배우는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알게 되면 보이게 되고, 보이면 들리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뽕짝은 당분간 밀쳐놓는 게 좋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공식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수학과 물리의 세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기초를 배워야지요.

시므온의 영성을 원하세요? ㅎㅎ

그의 영적인 눈이 갑자기 열린 건 아닙니다.

그는 공부를 좀 한 사람일 겁니다.

신앙의 세계에도 공짜는 없어요. ㅎㅎ

 

이것으로 내 답글은 끝났지만

부스러기 님의 속마음이 보여서 사족이라도 붙여야겠습니다.

일상에 부대끼면서 사는 사람으로서

기독교 영성을 공부하는데 시간을 쓰기가 힘들 겁니다.

물론 모두가 신학자가 될 필요도 없구요.

그런 사람은 소수로 남으면 됩니다.

평신도라고 하더라도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의 문제에 자기 영혼을 다 쏟느냐,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영혼을 쏟느냐를 말이지요.

세상에서 성실하게 노동하고 돈 벌어 먹고 살면서도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그 과정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인들은

재가 수도승의 길을 가는 겁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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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lutecia

February 18, 2014
*.172.105.68

오랜만에 대글 씁니다.  요즘 목사님의 책을 어렵게 구해서 제 처하고 같이 읽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모꼬" 등등의 책 3권인데요, 제 처가 엄청 감동 받았습니다.

지난 해 말 부터 느끼는데, 목사님 얼굴 모습이 많이 빠지셨네여.  걱정이 쪼끔돼요.

항상 건강하시기를 사랑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허 근 드림, 캐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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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18, 2014
*.94.91.64

허근 님,

반갑습니다.

부부가 함께 다비아 팬이시군요.

두 분의 신앙 코드가 비슷한가 봅니다.

제가 살이 좀 빠지긴 했지만

그렇게 염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격려의 말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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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December 07, 2014
*.44.68.212

목사님, 저도 몇 달전부터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기계설계와는 전혀 다른 분야입니다. 미리 주제와 내용을 알려주면 학생들이 와, 어렵다. 이걸 해야하나... 힘들어하는 표정을 대부분 짓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수업을 듣고 나서 끝날 무렵이면 아, 그렇구나 이게 이래서.. 그리고 덤으로 유수한 전문가들의 난이도 있는 동영상이라도 보여주면 내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뜬 구름잡는 듯한 말씀들이 어느 덧 한 줄 한 줄 넘어가다보면 그 뜬구름에서 생명의 비가 쏟아져 내립니다. 눈은 있으되 보지 못하는 눈이요. 엉뚱한 곳을 주시하는 눈을 바르게 자꾸 돌려주시는 목사님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오늘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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