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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구원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461 추천 수 3 2010.10.24 22:5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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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엘 2:23-32 

영과 구원

(욜 2:23-32), 10월24일, 성령강림절 후 22째 주일

 

 

    이른 비와 늦은 비

    요엘서는 고대인들이 당한 끔찍한 재앙을 역사적 배경으로 두고 있습니다. 곤충 떼의 습격과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그것입니다. 욜 1:4절은 곤충 떼의 습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가 먹었도다.” 사람이 먹어야 할 곡식을 곤충이 모두 먹어치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망연자실했겠지요. 욜 1:2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가뭄이 심하면 견디기 힘든 법인데, 요엘서가 기록되던 2천4백 년 전 사람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앞에서 그들이 겪었을 두려움과 공포는 지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정도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서 고대인들의 이런 두려움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인류가 이렇게 수백만 년을 거치면서 지구에 살아남았다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깝습니다. 인류멸절의 위기가 그동안 많았습니다. 지구에 살았던 많은 동물 중에서 사라진 종이 적지 않습니다. 공룡도 오랫동안 지구를 지배했지만 결국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학자들은 그 원인을 혜성과의 충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 또는 호모 에렉투스로 불리는 유인원들이 겪은 가장 큰 위기는 지구의 빙하기입니다. 빙하기를 용케 버텨낸 유인원이 지금 우리 인류의 조상입니다. 만약 빙하기에 모든 유인원이 죽고 말았다면 지금 우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유인원들이 빙하기를 거치면서 어떤 두려움에 빠졌을지 상상이 갑니다. 치매가 오는 걸 느끼는 노인이나 죽음이 다가오는 걸 절감하는 말기 암환자의 상태와 비슷합니다. 곤충 떼의 습격과 가뭄으로 인해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할 두려움도 이런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 본문 23절 이하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외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를 풍족히 먹고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고 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농사와 목축의 필수조건입니다. 그것으로 사람들의 생존은 보장됩니다. 생존 보장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생존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마당에 밀이 가득하고 독에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친다는 요엘의 말을 부자가 된다는 말로 알아들으면 곤란합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넘치는 곳이라고 성서가 말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의미입니다. 광야의 궁핍한 삶과 비교할 때 풍요로운 곳이지 실제로는 살기에 척박한 곳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 풍요롭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먹을 게 없어서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하던 상태에서 두 끼를 다 찾아 먹을 수 있다면 젖과 꿀이 넘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나가서 세 끼를 먹을 수 있다면 마당에 밀이 가득하고, 독에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말하는 풍요는 최소한의 생존 조건이 보장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책임지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 생존의 보장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신앙을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겨우 생존에 급급한 것으로 만족한다면 부흥과 축복은 언제 받느냐 하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잘 사는 것은 곧 하나님을 잘 믿었기 때문이고, 동남아 사람들이 못 사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도 큰 부자들이 등장합니다. 출세한 사람들도 나옵니다.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건강하고, 더 풍족하게 살려는 것은 본능입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본능인 식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소유욕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사람이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하루에 세 끼 이상을 먹지 못합니다. 먹지 못할 것을 쌓아놓는 일에 삶의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최소한의 생존 조건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풍요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에 집중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믿는 것입니다.

 

    영의 부여

     요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셔서 마당에 밀이 가득하고 독에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런 상태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많이 하고, 행운이 임한다고 해도 곤충과 가뭄은 또 밀려옵니다. 밀과 포도주와 기름이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생존의 위기는 반복됩니다. 이건 상식적으로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우리는 밀, 포도주, 기름이 소용없는 순간을 맞을 겁니다. 순식간에 늙고 곧 죽습니다. 지구의 차원에서 보면 지구는 결국 언젠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없는 세상이 될 겁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인한 밀과 포도주와 기름도 우리의 참된 생명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것과 다른 근원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요엘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영의 부여입니다. 28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뿐만 아니라 종들에게도 영을 부어준다고 했습니다. 영이 모든 이들에게 임할 때 일어나는 현상을 30절과 31절에서 설명합니다.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 나타납니다. 해가 빛을 잃고 달이 핏빛으로 변합니다. 이런 현상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할 조짐입니다. 우주가 해체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우주의 비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주의 해체를 내다보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랐습니다. 이런 진술이 현대 물리학에서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태양도 사라집니다. 태양이 사라지기 전에 수성, 금성, 지구 등, 태양계의 행성들도 먼저 사라집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생명을 잃습니다. 인간 문명과 기술도 해일이 이는 바닷가에 세워진 모래 위의 집과 같은 운명에 처해집니다. 우주가 해체되는 날은 ‘크고 두려운 날’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우주의 해체라는 말이 너무 거리가 멀다고 느끼시나요?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실제 우리의 일상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럴 수 있습니다. 지금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합니다. 결혼해야 하고, 자식 낳아야 하고, 사업을 잘 꾸려야 합니다. 우주의 해체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다가는 허무주의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거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와 종말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다음의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주의 해체가 지금 당장 나의 일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앞의 모든 역사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지만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고대인과 중세기 사람들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를 가슴에 담고 살았다고 합니다.

     요엘이 왜 영을 말하면서 동시에 우주의 해체를 말하는 걸까요? 28절에 따르면 영의 일은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며, 이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우리가 일상에서 확인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장래 일은 아직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았고, 꿈은 우리가 일상에서 실현할 수 없는 세계이고, 이상(異像)은 마지막 때 나타날 어떤 형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없기에 장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어떤 일을 이루실지에 대한 영적 관심이 없습니다. 꿈을 꾼다는 것은 현실 너머의 세계를 향한 강렬한 열망을 가리킵니다. 현실에서 먹고 사는 것에만 영혼이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꿈을 꾸지 않습니다. 이상도 우리의 관심 밖입니다. 지금의 이런 상태가 그대로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기의 살 길을 찾을 뿐입니다. 예컨대 일등과 꼴찌가 아무런 차이도 없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 세상은 일종의 ‘이상’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이런 이상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장래 일, 꿈, 이상에 대한 관심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영이 임해야 합니다. 마치 시인이 되려면 시적 영감을 경험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바로 위에서 영과 우주의 해체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사람은 장래 일, 꿈, 이상을 본다고 요엘이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전혀 새로운 세상을 향한 강렬한 욕구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이 세상과 우주는 새롭습니다. 매일 새로워집니다. 이 세상이 새로워지려면 이전 것은 해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 일어나고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합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을 받았지만 아직 우주의 해체가 일어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겠지요.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너무 짧은 시간에서만 살기 때문에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뿐이지 우주의 해체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미 오래 전에 본 사람들이 묵시사상가들이며, 더 근본적으로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았던 모든 이들입니다.

 

    여호와의 이름

     이런 사람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우주의 해체와 새로운 세상의 도래 앞에서 무엇을 해야만 하나요? 요엘은 정확하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욜 2:32a)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해와 달이 빛을 잃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매달리던 것들이 빛을 잃는 것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이름을 부르는 시늉은 낼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부른다고 해도 영혼을 담지는 못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성령을 부여받은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요엘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이 말을 상투적으로 듣지 마십시오. 구원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아직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설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됩니다. 구원은 우리의 언어와 사유를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세상을 마치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런 영혼을 소유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상대화합니다. 자신의 모든 업적과 소유를 땅에 내려놓습니다. 자기의 인생설계와 의지와 인격마저도 내려놓습니다. 궁극적으로 구원의 확신마저 내려놓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행하실 그 순간, 그 사건에만 영적인 촉수를 맞춥니다. 거기서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이런 삶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요엘의 신탁은 옳습니다.

     요엘은 지금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역사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역사를 끌어가는 힘인지를 그는 보았습니다. 참된 구원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알았습니다. 구원의 출처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이 일으키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만이 우리를 구원의 출처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합니다. 여기서만 우리는 비루하고 궁핍한 이 역사를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우리에게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성령과의 일치입니다. 성령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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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October 24, 2010
*.62.24.93

정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며 생각난 두 가지 말.

인생아, 기억하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성공회 기도서의 재의 수요일 예식문.

사람들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것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톨릭 문인 정채봉 선생께서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서 하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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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6, 2010
*.120.170.243

바우로 님,

정채봉 작가의 말이 인상 깊군요.

알지만 미래의 일로만 생각한다는 말이죠.

그 미래가 현재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느 때가 되어야

실질로 깨닫게 될른지요.

좋은 한 주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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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둘로스

October 26, 2010
*.232.232.101

잔잔하지만 깊은 곳에서 가슴 을 뛰게 합니다.

성령의 도래하심으로  세상적인 질서가 해체되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고 있다고 이해가 됩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인정하고

세상 나라의 가치를 거부하는데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라고 여깁니다.

어린 양, 염소, 어린 아이가 이리, 곰, 독사, 사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메시야의 나라를 예고하는 이사야 11장이 떠오릅니다.

 

 성령의 시대인 오늘날,

지배와 억압으로 대표되는 세상 질서의 힘을 무력화하고

평화의 나라를 가져오는 하느님나라 공동체 교회가 출현하기를

희망하는 것은 무리한 기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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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6, 2010
*.120.170.243

둘로스 님,

나도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인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 공동체로서 자리가 잡히기를 희망합니다.

단지 싸움이 없는 소극적인 평화가 아니라

정의를 향해 영적 촉수를 내뻗는 적극적인 평화 공동체말입니다.

교회가 자기를 목적으로 할 때

이런 평화 공동체로서 자리를 잡기 힘들겠지요.

투명한 영혼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자기를 낮춰야겠지요.

힘을 냅시다.

주님이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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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삼송

October 26, 2010
*.109.42.170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나에게 부어주시는 축복을 잊어버리고 더달라는 우상을 가지고 생활을 했던 것 같아 반성이 됩니다.

기존 교회는 복을 갈망하고 더 많은 복을 누리기를 열망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이러한 태도는 모든 것이 우상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만 부어주시는 분이시고 사람은 더 소유하면 안되고 그것에만 한계를 가지고 만족하라고만  하실까요? 사실 이러한 질문이 끊임없이 생깁니다. 욕망 그자체가 죄인 것인지에 대해서요! 

  욕망을 잘 다스리는 것도 인간 본인의 책임일 것입니다.

 물론 교회마다 어떤 부분은 옳고 그른 부분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 성도의 몫이니까요

정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분명히 맞는 말씀이신데 제가 기존교회 성도라 조금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너무 기존 교단에 세뇌가 되었는지 사실 고민이 됩니다. 목사님께서는 분명 옳고 그름에 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깨닫게 해주실려고 애쓰시는 것 같은데 제 수준이 낮아서 받아들이기가 사실  겁이 납니다.

기존교회에서 목사님들이 목회하는 태도는 전부 잘못된 것인지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도 조금씩 껍질을 벗는 연습을 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요즈음 십일조 때문에 사실 고민이 많습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것도  한번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괜한 질문 드렸는지 죄송하네요 항상 건강하세요 울산에서 마음 좁은 평신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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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7, 2010
*.120.170.243

삼송 님,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잘못이냐, 하는 질문이지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일용할 양식의 범주가 무엇인지를 정하기가 복잡한 거지요.

신앙은 자로 재면서 어디까지 해야 하고 말아야 하고 하는 규범(율법)이 아니라

부족한 상태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는 복음이랍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을 문자로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의 물질 숭배에 대한 적극적인 항거랍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런 영성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만

소유와 물질이 허락하지 못하는 삶의 자유가 가능합니다.

왜 그런지는 삼송 님이 잘 아시겠지요.

십일조에 대해서는 여기 다비아에 많은 글이 있습니다.

검색 창에서 찾아보세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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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필그림2

October 30, 2010
*.53.70.87

다른 블로거의 추천으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여기저기 살펴보지 못하고 말씀이 있어 읽어보던 중 이상한 점이 있어서 목사님께 여쭙기 위해서 글을 적어봅니다. 제가 창조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요. 말씀 중에 유인원에 대한 부분이 있어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제가 알고 있는 유인원이면 진화론에서 말하는 인류의 조상인데 하나님의 창조에 어긋나는 이론이라고 짧은 지식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요?  길게 말씀드릴 수가 없어서 간단히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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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30, 2010
*.120.170.243

필그림2 님,

안녕하세요?

추천을 받아서 들어오자마자

이상한 점을 발견하셨군요.

아마 인내심을 갖고 여기의 글을 좀더 읽다보면

이상한 점을 더 많이 발견할 것 같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더 진도를 나가다보면

해결될 것으로 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지요?

진화의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해나가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가리키는 거에요.

유인원은 고고학이 밝히고 있는

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북경인, 네안데르탈인 등등이지요.

그런 유인원으로부터 오늘 우리 인간까지

꾸준히 진화해왔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지요?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그렇게 놀랍답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부활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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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필그림2

October 31, 2010
*.53.70.87

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기는 네안데르탈인이나 북경인 자바인 크로마뇽인 등은 정확히 사람 또는 원숭이로 분류되었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에도 나와 있는데요. 요즘 읽고 있는 창조과학 서적으로 보면 처음 아담부터 우리와 형상이 똑같고 진화론에서 말하는 지구는 46억년전에 만들어졌고 38억년전에 지표가 드러나서 지질시대의 시작으로 그때 비로소 물속에 단세포 생물이 생겼으며 오직 수중생물만이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이를 선캄브리아시대라 하고 그다음으로 고생대라하여 육지생물이 등장하고 중생대에는 공룡의 시대 신생대에는 포유류가 나타나며 만년전 사람이 나왔다라는 것이 진화론의 주장입니다 신생대 후반에 유인원 즉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북경인 등이 나왔고 그들은 화석으로 분류하고 인간은 역사시대이므로 화석으로 분류하지 않는 것이 진화론의 이론입니다  창조론에서 밝혀 발표한 내용과는 많이 상이합니다 혹 제가 잘못 기술한 것이 있으면 바로 잡아주시기를 부탁드리며 날마다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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