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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하지 못한 은총 (요 12:1-8)

사순절 조회 수 15502 추천 수 2 2013.03.18 00:20:08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0317.mp3 
성경본문 : 요한복음 12:1-8 

의식하지 못한 은총

요한복음 12:1-8, 사순절 제5주, 3월17일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2)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은전의 명칭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설교 본문인 요한복음 12:1-8절에는 일종의 삽화와 같은 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을 엿새 앞둔 어느 날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이 가까운 베다니까지 오셨습니다. 그곳에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이들 남매들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르다는 늘 그렇듯이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음식을 마련하고 있었고, 나사로는 예수님 일행과 함께 앉아서 담소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어디에서나 있을만한 행복하고 평화로운 일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상이 깨집니다. 마리아가 최고급 향유를 들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향기가 집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이런 향유는 혼수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혼수품 중에서도 아주 비싼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귀한 손님이었다고 해도 향유를 한꺼번에 소비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일반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젊은 여자가 머리를 푸는 행동도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마리아 남매와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전제해야만 마리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는 죽었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앞장인 요 11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전체 복음서의 핵심 주제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평소에 예수님과 잘 알고 지내던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도와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집에 가는 중에 나사로는 이미 죽었고, 예수님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가 동굴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게 아니라 잠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뒤에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셨고, 그러자 나사로가 수의를 입은 채 일어나 동굴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오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을 때 마리아의 느낌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혼수상태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다시 깨어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사로 사건 이후에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특별하고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그 예수님이 다시 자신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헌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마리아는 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귀한 물품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머리털로 발을 닦았습니다.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극도의 예의였습니다.


이것으로 일이 끝났으면 아름다운 에피소드로 기억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나서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5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삼백 데나리온 삼천만 원 정도에 해당됩니다. 상당히 큰 액수입니다. 그것을 한꺼번에 쏟아 붓는다는 것은 낭비입니다. 그만한 정도의 돈으로는 작은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고, 장학금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유다는 구제 사업으로 쓸 것을 제안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도 마리아의 행동을 어리석다고 나무라시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줄 것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기대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리아를 가만 두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한 행위는 예수님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어서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이런 말씀은 이해하기가 곤란합니다. 예수님이 마치 사이비 교주들이 하듯이 자기를 신격화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의 이런 태도는 원래 예수님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의 말씀을 주시기만 했지 당신을 위한 어떤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 무엇을 바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제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 구제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실 리가 없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읽으면 오해할만한 이런 이야기를 요한복음 기자가 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다의 주장을 좀더 세밀하게 분석해야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유다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도둑이라서 나중에 그 돈을 훔칠 욕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유다는 예수 공동체의 재정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재정은 한 공동체에서 여러모로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이 맡습니다. 유다는 제자들을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 때문에 처음부터 문제가 많은 인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그를 도둑으로 몬 것은 과장된 겁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유다의 주장은 누가 봐도 옳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자는 유다의 주장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주장은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을만한 휴머니즘을 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의식이 투철한 지성적인 기독교인을 대표합니다. 제2의 유다, 제3의 유다는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개혁이 문제가 될 때 빠지지 않는 주장이 교회의 사회봉사와 구제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고립되어서 자기들끼리만 종교적 만족감에 떨어지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대한민국 교회 중에서 비교적 개혁적인 교회는 구제와 봉사에 열심을 냅니다. 결식자들에게 교회가 직접 밥을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장애인 단체를 찾아가서 몸으로 돕거나 재정적으로 돕기도 합니다. 우리교회도 충분하지는 않지만 교회 재정이 교회 밖의 구제와 봉사를 위해서 사용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정부의 책임입니다. 교회가 정부와 경쟁하듯이 구제와 봉사에 치우치는 건 본질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제와 봉사 사역은 정부가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대신하는 것뿐이지 교회의 고유한 업무가 아닙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구제와 봉사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본질적 업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고 있는 유다의 합리적이고 계몽적이고 그럴듯한 주장이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현실적인 문제로, 교회의 재정적인 한계입니다. 교회는 아무리 구제에 힘을 써도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시민들의 세금은 국가가 관리합니다. 국가가 재정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복지와 구제 사업에서 훨씬 효과적입니다. 교회는 정부로 하여금 재정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예언자적 역할을 하는데 만족해야 합니다. 둘째는 근본적인 문제로, 구제활동이 일종의 율법으로 작동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경험한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율법은 우리의 양심을 불안하게 합니다. 자유를 파괴합니다. 거꾸로 자만하게도 만듭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하도에서 구걸하는 분들이나 역에서 노숙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하십니까? 그들에게 비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했습니다. 좀더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노숙자 한분이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면서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반응할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모두 도덕적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극단의 휴머니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즉 휴머니즘은 선하기는 하되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휴머니즘은 교양의 문제입니다. 교양은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양으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교양으로 칭의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교양으로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인간 구원문제에서 더 근원적인 차원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예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운명에 집중합니다. 예수의 운명 앞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존재론적 가치를 잃습니다. 유다의 휴머니즘이 아무리 고귀해도 인간 구원에서는 무기력합니다. 예수님의 운명에 가담하려는 사람은 거기서 선택해야 합니다. 그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은 예수님의 운명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눅 9:59-62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어떤 사람은 먼저 자기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야속한, 인정머리 없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수의 운명에 참여하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서 속으로 불편하게 생각되는 대목이 있을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삶과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는 거냐, 하고 말입니다. 가족도 내팽개치고, 인간관계도 다 포기하라는 말이냐, 세상의 모든 도덕적 가치들을 부정하라는 말이야, 하고 말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한 기독교 소종파들이 없진 않았습니다. 특히 사이비 이단들에게 그런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통 기독교인들은 그런 기독교 소종파들의 극단적인 행태와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난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세상에서도 존경받고 인정받도록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풀기 어렵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방법 문제는 각자가 처한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답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출가해서 수도사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업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운명의 절대성만은 결코 유보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거기서만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마리아의 향유 사건을 옹호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마리아처럼 향유를 바칠 용기가 없습니다. 혹시 헌금을 많이 하라는 말씀으로 들리시나요? 돈은 여러분이 살아가는데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헌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단 한번으로 하나님께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차원에서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도움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마리아가 주변의 수상한 분위기에 상관없이 향유를 쏟았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온전히 맡겼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돈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맡긴 것입니다. 그건 거룩한 용기입니다. 절대적인 것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참된 헌신이자 결단입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사람들의 판단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입니다. 이런 영적인 시각과 경험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우리는 유다에 가깝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살아온 삶의 기준에서만 평가합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은 알지만 생명과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경험은 없습니다. 그래서 마리아 같은 사람을 충고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향해서 마리아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더 놀라운 말씀도 하셨습니다.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마태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 마가복음 병행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 14:8) 놀라운 반전입니다. 세상 실정 모르는 젊은 여자의 철없는 행동처럼 비쳐진 마리아의 향유 사건이 예수님의 장례 준비였습니다. 그 장례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준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훗날 제자들은 이 대목에서 부끄러워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행위는 메시아 사건의 한 징표가 되어서 지난 2천년 동안 모든 기독교인들의 영혼에 강한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실제로 얼마나 깊이 알고 이런 행동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나름으로 존경했고,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신 분으로 경외했겠지만 메시아로 정확하게 인식하지는 못했겠지요. 예수님의 운명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미처 다 알지 못했습니다. 이게 더 큰 은총의 신비입니다. 그녀는 자기도 다 알지 못한 가운데 예수 운명의 결정적인 순간에 깊숙이 연루된 것입니다. 의식하지 못한 채 인류 역사에서 가장 거룩한 사건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이런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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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流水不爭先

March 18, 2013
*.173.40.132

목사님 이사 잘 하셨죠
아이디를 thinkbible에서  유수부쟁선으로 바꿨읍니다.
천천히 가자는 목사님의 영향(?) 때문입니다.

거룩한 사건에 연류됨을 인식치 못하는 은총에서 
많은 생각과 감동이 오네요
나로 나 된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목사님을 만났것도 알지 못하는 은총이겠지요.

오늘도 주님의 은총이 목사님과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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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8, 2013
*.94.91.80

유수.. 님,
닉네님이 멋지네요.
덕분에 귀한 한자 경구를 배웠습니다.
어디에 나오는 건지 궁금하군요.
마리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유수 님에게도 늘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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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노큐

March 19, 2013
*.252.201.168

귀한 설교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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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9, 2013
*.94.91.80

하나님의 말씀으로 노큐 님과 영적인 친교를 나눈 것 같아서
서툴게 말씀을 전한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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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삶의 과제

March 19, 2013
*.99.32.30

목사님. 설교말씀 감사합니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은혜를 주시니 은총이요,
그 은총을 조금이나마 알 수있게 해 주시는 것도 은총이며,
살아서 움직이는 것도 은총이요,
죽음 또한 은총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개념은 이 시간, 공간을 뛰어넘는 것임으로......

궂은 날입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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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9, 2013
*.94.91.80

그렇지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부르심을 받아 돌아가는 전체 과정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것마저
은총으로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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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March 21, 2013
*.192.46.240

이번 주 설교말씀은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평소에 궁금했던 부분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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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1, 2013
*.94.91.80

설교가 재미있었다니 다행입니다.
주일에 가능한 교회에 꼭 나오세요.
그게 왜 중요한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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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March 22, 2013
*.36.134.186

일이 4시에 끝나고 가면 지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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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rch 02, 2014
*.220.104.49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2000년역사를 거치면서 증거를 보여도 다시 자기생각으로 기울어집니다. 십자가 사건을 앞에둔 마리아가 예수님께 자기의 모든걸 붓는 모습에 다시 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99도에서 계속 뜨거웠다가 덜 뜨거웠다가 하는 저를 보고 있습니다.

역시, 믿음의 길은 그냥 걷는 길이 아닌가봅니다. 그리고 빨리 걷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나침반을 계속 보면서 걷는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영화와 같은 장면을 보면서 그 속에서 마리아의 향유냄새와 두 손으로 긴 머리칼을 비비는 소리에 감동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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