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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하나님

사순절 조회 수 11631 추천 수 0 2009.03.09 1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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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세기 17:1-8 
 

약속의 하나님

(창 17:1-8)


아브라함 전승

지난 사순절 첫 주일에 우리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의 명령을 내린 이야기를 설교의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신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여러 전승 중에서 아브라함 이야기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은 바로 이 아브라함의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아브라함 이야기는 모든 부르심의 원초적 형태라 할 만합니다. 성서의 연대기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이야기가 가장 빨랐고, 전승 자료의 양적인 점에서도 가장 풍부합니다. 창 12장, 15장, 그리고 오늘 본문인 17장에 거듭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확하게는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창 12장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 조카 롯, 그리고 아내 사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해서 살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2) 그는 이 약속의 말씀을 듣고 하란을 떠났는데, 그 때 나이가 75세였습니다. 창 15장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헤브론에 거처를 잡았으나 자식이 없었을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게 한 후 많은 후손과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86세였습니다. 

창 17장의 이야기도 기본적으로 앞에서 나온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약속을 하십니다. 세 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크게 번성하게 할 것이며, 그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올 것이고, 가나안 땅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였는데, 그 나이에 할례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창 17장의 약속 이야기에서 앞의 것들과 가장 크게 구분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이름이 여기서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내 아버지 하나님은 존귀하시다.”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되었다는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고대인들의 글쓰기 방식인 언어유희입니다. 성서기자는 이런 개명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보다 더 뛰어나게 하신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자신들이 온 세상의 주인이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가나안 땅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것이야 모든 문명국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태도입니다. 중국의 중화사상도 그런 주장에 속하며,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로 자칭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지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지역에 국가를 세운 이후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틴 원주민들과의 크고 작은 전쟁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이 군사력을 앞세워 팔레스틴 원주민들을 박해하는 이유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문자의 차원에서 역사적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유대교인들과 똑같이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기독교인은 이들의 주장 앞에서 곤혹스럽습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할 수도 없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행하는 폭력에 동조할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나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가나안 땅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주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할까요? 


엘 샤다이

우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이 성취되었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간단히 생각해서 그것이 성취되었다면 그 약속은 옳은 것이고, 성취되지 않았다면 잘못일 테니까 말입니다. 본문에서 그 약속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대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번성케 하리라.” 2절의 약속은 번성하게 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번성은 주로 후손들이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후손을 많게 하겠다는 두 번째 약속이나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첫 번째 약속이나 모두 후손을 많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자식이 많다는 건 민족의 생존에 걸린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많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건 다른 민족도 마찬가지였으니,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2)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4,5절의 약속은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중동의 이슬람교도들도 자신들의 조상을 아브라함으로 보고 있다 하니, 그리고 기독교인들도 아브라함을 영적인 차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믿고 있으니 이 말은 그대로 성취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3) “가나안 온 땅을 주겠다.” 8절의 약속은 땅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이 약속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으며, 성취될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근동의 역사에서 어느 한 순간도 가나안을 완전히 지배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 민족이 어울려서 살았습니다. 이미 성경에도 가나안에 가나안 족, 헷 족, 아모리 족, 브리스 족, 히위 족, 여부스 족 등이 살고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국력을 크게 떨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도 과장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주변의 강한 제국에 의해서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히브리어는 이미 일상에서 사용되지 않는 사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원 후 70년에 일어난 유대 전쟁에서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로는 이스라엘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가나안의 일부만을 그들이 지배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크게 축복받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후손도 많아지고, 땅도 넉넉하게 차지하고, 명성도 떨치고, 모든 게 잘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걸 마다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런 약속은 부분적으로 성취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취될 수 없는 것을 약속으로 주셨다는 말일까요? 이 약속은 공수표인가요?

여기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이 약속이 언제 주어졌는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런 약속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은 성서기자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어땠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역사적 상황에서만 이 말씀은 바르게 이해될 수 있으며, 그럴 때만 그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성서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에 따르면 창 17장의 아브라함 전승은 P(제사장)문서에 속합니다. 이것을 편집한 P기자의 활동 시기는 기원전 6세기의 바벨론 포로 시대나 그 뒤 시대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아브라함의 시대와는 크게 차이가 납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는 이스라엘이 기억조차 하기 싫은 시절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근근이 다윗 왕조의 명맥을 이어오던 남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그들의 민족 전통이 모두 파괴당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허물어지고 많은 성전 집기들도 약탈당했으며, 귀족과 예술가와 학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나라가 통째로 없어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사장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들 민족의 관계를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그 순간에 그들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족장 전승을 기억해냈습니다. 거기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약속은 변할 수 없으며, 포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현재의 상황이 암울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살아있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이 제사장 편집자들을 웃긴다고 조롱했을지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자신들을 포로로 잡고 있는 바벨론이 어떤 나라입니까? 고대 4대 문명 중의 하나가 바빌로니아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아주 유명합니다. 그들에 비하면 유대는 한줌도 안 됩니다. 더구나 지금은 포로 신세입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민족들이 결국 제국에 의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그 나라에 동화되고 말았는데,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풍전등화의 순간에 앞으로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믿기 힘듭니다.

제사장 편집자들을 동키호테처럼 몽상가라거나 레닌이나 모택동처럼 정치적 선동가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런 인식에서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한 것으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인식은 곧 ‘엘 샤다이’입니다. 개역개정은 이 단어를 70인 역에 따라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창 17:1) 번역했습니다.

모세오경의 편집에 깊이 관여한 P기자들은 창조사건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견해를 분명하게 피력했습니다. 창 2:1-3절은 안식일을 설명합니다. 세계 창조가 끝난 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전능을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무(無)에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능력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바벨론 포로라는 어두운 시절에 제사장 편집자들은 바로 그 창조의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가 엘 샤다이입니다. 세상을 창조한 바로 그 하나님이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고 생존할 수 있는 땅을 허락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창조의 능력이 있는 분만이 그들에게 번영과 축복으로 약속하실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서기자들은 바로 그것을 인식하고 느끼고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영성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저는 앞에서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팔레스틴 원주민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 말씀을 아전이수로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로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즉 그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후손이 잘되고, 우리 이름이 만방에 드러나고, 우리의 부동산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번영의 신학이 오늘 우리의 신앙행태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수천 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할 것이며, 홀로코스트의 참극도 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런 고난은 모두 비켜가고 아브라함의 축복만 받겠다는 생각은 성서와 완전히 어긋납니다.


약속의 성취

우리는 지금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입니다. 그의 삶과 운명에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실행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과 축복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새로운 것이 왔을 때 옛 것은 물러가야 하듯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야 하듯이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약속에 의해서 대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폐기처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비록 그 약속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주의적 한계와 고대인들의 인식론적 한계를 보이지만 그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과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모두 하나님을 약속의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형편에 따라서 다르지만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사실만은 똑같습니다. 그들은 후손과 땅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우리는 부활생명의 약속을 신앙의 본질로 생각합니다. 양쪽 모두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이 신앙을 상투적인 것으로 생각할 분은 없겠지요. 사람들은 약속의 하나님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배부르고 출세하는 일에만 마음을 쏟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약속의 하나님을 현실적으로 인식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매우 무기력해보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 전승을 전하는 P편집자들이 처한 형편은 흑암과 같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죽은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무기력한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저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하소연이 이어집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 게 아니라 부자가 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죄한 사람들의 고난도 계속됩니다. 선천적, 또는 중도 장애인들은 왜 그리 많은지요. 평생 병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계신가요?

창세기 기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a) 우리가 믿는 그분은 엘 샤다이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분의 전능이 훼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시는, 완성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그분 앞에서 행하라고 합니다. 그의 능력을 목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완전하라고 합니다. 그분의 약속을 온전히 믿는 것이 완전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어둡습니까? 그럴수록 약속의 하나님에게 마음을 여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분의 말씀에, 그분의 약속에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순절 둘째 주일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아멘! (0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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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철학본색

March 09, 2009
*.67.83.42

어제 말씀을 들으며 '무기력한 하나님',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숙고해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처절하리만큼 어둡고 회의적임에도 불구하고 '엘 샤다이'를 고백하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공수표같은 약속이라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일까요. 지난 주 '부르심'에 이어 이번 사순절 둘째 주간에 다시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묵상해봐야겠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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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09, 2009
*.120.170.239

권영민 님,
3월 대구샘터교회 가정예배는
그쪽으로 한 거지요?
부인되는 이은희 님과 어떻게 재미있게 사는지
그때 가서 좀 확인해봐야겠어요.
철학도와 음악도가 가정을 이뤘으니
직접 확인해지 않아도, 뭐....
절망의 어둠을 뚫고 엘 샤다이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야말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배워야할 핵심이겠지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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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늘오늘

March 09, 2009
*.239.101.250

 

breeze 님의 느긋한 토론에서 촉발된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히브리 성서의 하나님, 그분의 약속, 그 약속과 오늘의 현실, 오늘의 우리들.

시종 박진감마저 느끼며 설교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이스윤님과의 잠깐의 얘기에서 비친 토로였는데,

“결국은 믿으라는 얘기잖아, 이제껏 들어온 설교들과 다를 바 없는.

물론, 상식 이하의 무조건 믿어라가 아닌, 삶에 대한 깊은 이해,

그 위에서 맞닥뜨리는 ‘믿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결론. ..”


동의합니다.

무능한 사람들, 무능한 하나님,

그들의 믿음, 아니

그분의 약속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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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09, 2009
*.120.170.239

몇 줄로 설교를 완벽하게 요약해버렸군요.
결국은 믿음.
그렇지요.
기다림의 믿음.
그렇지요.
무엇을 믿느냐,
무엇을 기다리느냐가 관건이겠구요.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위로받고 배신당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분의 구원 통치를
온전히 기다리고 그것을 믿으며 살아갈 밖에요.
"믿음이 너를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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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라크리매

March 09, 2009
*.138.56.66

토라가 "말씀으로 관통되는 것"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던데...
정작 저의 편견으로 아직 정독도 못해봤네요
목사님 말씀을 듣고 모세오경의 사실과 역사성여부를 떠나서
그안에 담긴 깊은 영적 메세지에 집중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버려야할 것들이 아직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추신;말씀해 주신 단어 ruck+sichtig-en 이 맞나요?
          sicht나 sichtig에서 파생된 단어같은데 사전엔 없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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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09, 2009
*.120.170.239

성경말씀 안에 있는 깊은 영적 메시지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라크리매 님이 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제가 뭔가 정확하게 설교를 한 셈이군요.
설교, 또는 가르침은
정보를 많이 알리는 게 아니라
청중들로 하여금 뭔가를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니까요.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에 우리의 인생을 걸어도
아까운 일도 없으며 후회할 일도 없을 겁니다.
rucksichtigen(u에 우물라우트가 있어야 함)이라는 단어가
독일어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구요.
나중에 내가 확인해보겠어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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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1]유니스

March 09, 2009
*.104.194.70

솔직히 저도 시오니즘에 긍적적인 편이었습니다.
성서와 하나님, 이 공통된 대전제 앞에서,
바울 사도로 인해 이방인에게 먼저 신앙되는 복음의 경로 앞에서,
복음적인 유대 입장에서 열방을 부르는 외침 앞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팔전쟁을 비롯한 중동전은 
저에게는 항상 부조리하게만 보였습니다.

앞으로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세계와 종말에 대한 비젼이 없이 민족이 살아가는 것은
무풍지대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스라엘은 신적인 종말의 미래를 향해 나비의 날개짓을 계속할 때
그들이 붙잡고 있는 약속을 이루어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중동의 날개짓이 이미 세계의 풍향을 형성해내니까요.
그들이 고수하는 약속을 향한 날개짓이 이제는 태풍의 눈이 충분히 되었고
정치, 경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등에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인의 문제해결방식은 구약과 여전하여
신약을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에서 참으로 언발란스해서
지켜보는 국가들이 심한 괴리감을 동반하리라 생각합니다.

설교에서 말씀하신대로 
새로운 약속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율법도 폐해지고 오히려 완성을 이룬 것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한다면
오늘날 유대인의 약속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또한 그 약속을 완전히 폐할 것이 아닌 것은
우리의 신앙과 맞다아 있슴이라고 하신 것도요...

특별히 오늘의 본문의 촛점이
유대민족의 약속의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엘 샤다이, 전능자 주님,
암흑과같은 상황에서 엘 샤다이를 기억해내고
어둠과 좌절의 동족에게 엘 샤다이를 선포하는 그들의 영성,
그리고 오늘 엘 샤다이께 삶을 열어드리는 우리의 삶에 있슴을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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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09, 2009
*.120.170.239

유니스 님의 대글을 통해서
내 설교의 피드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어서 좋군요.
어제 어떤 덩치 큰 사람 뒤에 앉았지요?
그래서 강단이 잘 보이지 않은 것 같던데요.
키가 작은 사람들은 예배에서도
미리미리 잘 보이는 곳에 앉아야 한답니다. ㅎㅎ
우리 모든 공동체가 더불어
엘 샤다이의 영성 안으로 들어가보도록 합시다.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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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0]웃겨

March 10, 2009
*.153.92.40

오늘따라 목사님 설교를 직접 현장에서 듣고 싶어지네요.
요즘 이상하게 제 컴에서 설교듣기가 안되서 읽고만 있는데
미쳐 제가 알지 못했던 성서의 세계로 안내를 받습니다.
하나님 없는 것 같은 시기에..희망을 품는 것.
그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고 뚜벅 뚜벅 길을 가는 것.
그 황당해 보이면서도 확실한 신뢰에 토대를  두지 않으면
참 세상 살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갈수록 굳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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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10, 2009
*.120.170.239

김혜란 님,
제 설교는 듣는 것보다 읽는 게 더 낫습니다.
"황당하면서도 확실한 신뢰" 그것이 답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실질(reality)로
경험하고 인식하고 체화할 수 있는 거냐 하는 거겠지요.
우리의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엘 샤다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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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김재남

March 10, 2009
*.114.16.4

퓔만의 교의학에서 본 '신앙은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을 참아내는 것이다'  글귀를 곱씹으면서
그 신비에 자리를 새삼 돌아봅니다. 여전히 질문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요즘 하인리히 오트의 '우리시대의 질문'이란 책에 완젼 빠졌습니다.
지금 제 자리의 소리를 다시 들려주는 듯, 여전히 도상 위에서 헤매이는 듯 하나
물음으로 그 분의 사건 속에 들어와 있음을 경험합니다.
 말할 없는 것을 말하는 이들의 사건은 무의식과 언술 넘어 다가오는 지평의 소리에 주목하게 합니다
던져진 시대의 불안 속에 오늘도 그 사건은 다양한 그러나 제한된 인식의 지평 넘어에서 비추며 들려주는 
궁극적 실체에 대한 기다림 속으로 이끄는 듯합니다 . 그 실체가 드러나며, 경계가 허물어지는  사건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말하여 질 수 없는,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자리를 확인시켜 줍니다.

수차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그 기다림이란 도상 속에 비춰지는 현실성에 대해 묻곤 했습니다
확연하게 다가오는 그 현실성. 만물을 규정하는 그 현실성.
분명히 우리의 언술로는 어찌할 수 없고, 우리의 사고로 범접할 수 없는 그 사건의 현실성에 대한
물음이 언제쯤 들려질까요. 
 목사님의 저서  <말씀신학과 역사신학>에 나오는 지평융해에 대한 가다머와 판교수님의 이해차이가
오트와도 이어지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오트의 신학구도 역시 가다머와 같이 언술로의 회귀로 이어지는지 말입니다
 언젠가 여쭈어보았던 문학비평가 몰랑슈란 분에게서도 언어의 개념화에 대한 한계성, 주체로서의 언어의 말걸음 에 대한
단초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오트의 저서에서도 실체가 드러나는 장으로서, 지양되는 시 언어의 이야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만, 이와 같은 입장과 판교수님과의 보편사 해석에 터한 역사라는 개념의 사건이해에   
어떻게 고리가 이어지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지나온 것인지 조금이라도 일러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댓글이 질문이 되어 죄송합니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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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10, 2009
*.120.170.239

나미 군,
오트 책에 빠져들었다니 반가운 소식이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앞으로는 오트처럼 신학적 사유를 할 수 있게 될 거요.
나도 오늘 강의 중에 하이데거 철학을 설명한 오트의 글을 읽었소.
하이데거의 존재는 사유된 것이 아니라 사유되지 않은 것이라고 하더군.
사유되지 않은 것은 사유된 것보다 우선하니 말이오.
언급된 것과 언급되지 않은 것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해서 꼼꼼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소.
위에서 질문한 거는 내가 잘 몰라서 대답하기 힘들군.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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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샘터

March 10, 2009
*.156.61.144

출장을 마치고 밀라노 어느 민박집에서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에 노트북으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도  생생하게 목사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네요..이번주일은 서울샘터교회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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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캔디

March 10, 2009
*.129.46.16

에레마님!
해외 출장중이시군요.
주일날 안 보이시길래
궁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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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10, 2009
*.120.170.239

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계시군요.
부럽네요.
이번 주 중에 강소은 님이 미국에 나가시고,
주말에는 윤광현 님이 유럽으로 돼지농장 시찰단을 끌고 가신다네요.
출장 잘 끝내시고,
주일에 뵙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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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히로

March 10, 2009
*.12.117.229

매주 다비아에 올라오는 설교를 보고, 신학자료를 보면서
정작 한번도 글을 남긴적은 없는것 같네요.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자료만 긁어가는 모습에 죄송한 마음이 들어 댓글올립니다.
이 곳에 있는 많은 글들이 저의 영성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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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10, 2009
*.120.170.239

히로 님,
이 자료들이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마음 편하게 방문해주세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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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토토로

March 11, 2009
*.179.158.18

목사님 책은 2년전부터, 그리고 여기는 몇달전부터 본격적으로 눈팅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이제야 겨우 댓글 하나 남깁니다...
"엘 샤다이" 라는 단어를 보면서 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단어가 떠오름니다.
나의 상황이,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역시 살아계신다... 뭐 이렇게요.
그리고 왜 전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가 오버랩이 되는지...

사족으로 제 집사람도 목사님 설교를 좋아해요, 계속 생각하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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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11, 2009
*.120.170.239

토토로 님,
안녕하세요.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라는 이 신앙의 신비를
우리가 뚫고 들어갈 수 있다면
새로운 영적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저는 지붕위의 바일올린이라는 음악만 들었지
영화를 못 봤습니다.
제 설교에 귀를 기울여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인께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주세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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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수우

March 12, 2009
*.7.141.160

여전히 저는 목사님 설교 말씀으로 영혼이 살아가고 있답니다.
장마에 생수 와 같은 진리의 말씀으로 저는 숨쉬고 있답니다.
제가 흔적을 남기지 않아도 늘 목사님 설교 말씀을 늘 듣고  있음을
기억해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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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박찬선

March 12, 2009
*.109.153.229

와~수우님이다.
한동안 다비아 줌마 전성시대를 열었던 바로 그 분.
이제는 전설속으로 사라지신 줄 알았는데...
살아계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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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12, 2009
*.120.170.239

찬선 님은 수우 님을
어찌 알아보시는가?
신기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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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박찬선

March 12, 2009
*.109.153.233

제가 이래 봬도
좀 됐습니다. 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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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12, 2009
*.120.170.239

와, 수우 님이라.
살아 있었군요.
문단에 데뷔하고 바빠서
다비아에 들릴 겨를이 없겠거니 했는데,
눈팅으로 자리를 잡았군요.
차-암 반갑습니다.
예수뜰도 여전하지요?
수우 님이 그렇게도 고대하던
서울샘터교회가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한번도 발길을 하지 않으시다니
무심한 건지, 두려운 건지, 섭섭한 건지, 세월 탓인지....
아무튼 반갑구요.
언제 서울샘터교회 가족들이 
예수뜰에 찾아갈 날이 있겠지요.
그때까지 그곳을 잘 가꾸고 계세요.
그곳 바뀐 모습이 있으면 사진을 한번 올려주세요.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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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캔디

March 12, 2009
*.129.46.65

수우님!
너~무 오래간만이세요.
별일없이 잘 지내시지요.
수우님 없는 줌마들 앙꼬없는 찐빵입니다.
샘터교회 한번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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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은빛그림자

March 12, 2009
*.141.3.64

예전에 신도제일교회에서 시 낭송하시는 친구분과 함께 계시던 수우 님 얼굴이 기억납니다.
뭐랄까.......범접하지 못할 것 같은, 품어져 나오던 그 포스......
그러나, 남녀 혼합 족구에서 보여주신 앙증맞은 자태들.......^^*
안 보이신지 오래 된 것 같아서 쪽지도 보냈었는데...
모두들 기다리고 계시니 한 번쯤 샘터교회 왕림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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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March 12, 2009
*.64.66.99

감사합니다 목말라서 왔어요 목마르면 또 올게요
제게 약속은요...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지금은 함께 할 수 없어도........ 그 행복이 마지막에 미리 가 있다는.............그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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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12, 2009
*.120.170.239

피에스티 님,
사랑의 열병을 앓고 계시는 건 아닌지.
부럽군요.
그런 젊음이요.
목마를 때만이 아니라
심심할 때도 오세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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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박삼종

April 01, 2009
*.220.233.87

엘 샤다이의 하나님은 욥기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기운이 사라져 돌같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은 새 창조 그 자체입니다. 생명을 낳고 기르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이죠. 약속의 자손인 이삭이 없으면 이스라엘 공동체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선물로 받는 것처럼 우리는 공동체를 선물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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