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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에게도 세례를!

부활절 조회 수 10509 추천 수 0 2009.05.18 18: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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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도행전 10:44-48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행 10:44-48)


고넬료 이야기

사도행전 10장은 로마 백부장 장교인 고넬료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좀 특이합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장교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일제 치하에서 활동하던 일본 헌병 장교인 셈입니다. 이방인이지만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이렇게 일렀습니다. 욥바에 사람을 보내서 시몬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말입니다. 비슷한 시간에 시몬 베드로도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에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유대인이 먹지 못할 부정한 짐승과 새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잡아먹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베드로는 먹을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환상이 끝나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에게 전후사정을 들은 베드로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짐승에 대한 환상을 기억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일행과 함께 고넬료 집에 가서 고넬료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행 10:1-43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가 서로 비슷한 시간에 하나님의 사자에 관한 환상을 보았다는 게 무슨 일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자신들도 환상을 본다고 말합니다. 그 환상에 따라서 전도도 하고, 돈 버는 사업도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평소에 아는 사람을 찾아가서, 또는 모르는 사람을 찾아가서 하나님이 가라는 환상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으니까 이런 환상을 무조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거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텔레파시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넬료와 베드로 이야기에서 그런 환상에 관심을 보이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환상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인들의 일반적인 글쓰기입니다. 성서도 그런 글쓰기를 따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기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는 것은 이방인 장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것뿐입니다. 드라마틱한 줄거리는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드라마틱한 줄거리는 내려놓고 그 중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드라마틱한 줄거리는 우리의 호기심을 끌지만 그 중심 메시지는 너무 단순해서 재미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서를 호기심 천국 정도로 접근합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왔습니다. 그 안에 부정한 여러 짐승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흥미를 끌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다가 고넬료와 베드로가 비슷한 시간에 환상을 보았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흥미를 끌만 합니다. 이에 반해 이방인 장교가 복음을 들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단순해보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이방인 장교가 복음을 들었다는 사실이 왜 단순한 게 아닌지를 알려면 초기 기독교가 처한 삶의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원시 기독교는 유대인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전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군요. 행 1:8절에 따르면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거라고 했습니다. 막 16:15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구절을 근거로 초기 기독교가 처음부터 이방인 전도에 최선을 기울였다고 주장하면 곤란합니다. 이런 구절들은 모두 이방인 전도가 시작된 다음에 교회 공동체에 의해서 추가된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공동체는 일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 전도를 별로 시급하게 생각하지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이방인 전도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중심을 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원하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태는 그들에게 매우 귀찮은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걸 무조건 거부하기도 어려웠을 테니까요. 또 하나의 문제는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복음의 내용이 마뜩찮았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토라와 할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불어 지키고 있었지만 이방-기독교인들은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갈라디아서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방-기독교를 대표하는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의 잘못된 선교 정책을 크게 비판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유대-기독교의 주장은 복음의 변질이었습니다.(갈 1:7)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절대성을 토라와 할례라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기득권으로 상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 유대-기독교인들과 이방-기독교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 장벽으로 인해서 이방인 전도가 전체 기독교에서 부정되었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역사에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방인 전도가 결국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사실은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대(大) 전환점이었습니다. 당대의 기독교 역사학자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 사실을 고넬료와 베드로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

누가는 이방인 전도의 정당성이 무엇인지 제시해야만 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받아들였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누가의 대답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이방인에게 임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근거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행 10:44-48절은 바로 그 사실에 대한 해명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족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의 설교가 끝나자 성령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다고 합니다.(행 10:44) 베드로와 함께 온 다른 유대-기독교인들도 그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성령이 내려왔다는 것을 누가는 방언과 하나님 높임이라는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방언은 몰아지경에서 나오는 외침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방언과 예언을 행했다고 합니다.(행 19:6) 고린도교회 처럼 열광적인 기질이 강한 공동체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우리는 성서가 고대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듯이, 또는 고함치듯이 외치는 그 현상 자체를 성령 체험의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것을 굳이 흉내 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전하는 성서의 핵심은 성령의 임재, 또는 성령 체험이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 자체는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성령 체험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는 열매로 나타납니다.(5:22,23) 소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모두 인격적인 것들입니다. 더구나 목록은 사랑만 제외한다면 기독교의 독점적인 게 아니라 당시 로마 문명권에서 일반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모두 사람과의 관계와 개인 삶의 내면적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삶의 능력들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가 성령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바로 진리의 영에 사로잡힌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깊이와 신비와 만나는 것이 곧 성령 경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성령이 우리에게 내렸다는 증거입니다. 성령 체험을 방언이나 입신 같이 오순절적 계통의 교회에서 강조하는 은사에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그건 성령을 크게 오해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식구들에게 성령이 내리는 걸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놀랄만합니다. 고넬료가 누굽니까?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을 군사력으로 장악하고 있는 로마 제국의 장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다니, 베드로와 그 일행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오.”(행 10:47)

이방인들도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다는 베드로의 이 고백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모두의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성령이 임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3:2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고넬료나 베드로나 다른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령 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율법의 특권이 무의미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위대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깼습니다. 이런 결단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런 결단이 왜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방인 선교가 처음부터 명확하게 주어진, 구체적인 사명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문제를 제자들에게 일일이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거기에 근거해서 행동하셨을 뿐입니다. 제자들을 향해서 앞으로 교회를 세워서 예수님 당신의 사명을 이어가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앞으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될 것을 미리 예측해서 준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모든 삶을 책임질 수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삶은 제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전혀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소박하게 예수님의 재림만 기다리면서 유대교 전통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한 제자들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방인 전도를 적극적으로 전개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위대한 결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의 선봉장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 전도를 소극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그래서 태클을 걸어오는 유대-기독교인들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오해도 받고 왕따도 당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그리스의 여러 거점 도시에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로 여러 이방인 기독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는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스페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피력하기도 했는데, 그 꿈이 이뤄졌는지는 알려진 게 없습니다. 바울의 이방인 전도가 어떻게 전개되었고, 그게 왜 타당한지에 대한 선교 보고서가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역사적 결단

지금까지의 설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까요? 바울처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선교활동을 쉬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소극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선교사들이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덕분으로 오늘 극동의 작은 나라인 한민족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선교사들에게 감사해야겠지요.

그러나 적극적인 차원에서 이 말씀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교개념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달라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본 선교는 이방인 선교였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잘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이 오늘 우리에게도 무조건 그대로 반복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와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가 다릅니다. 초기 기독교의 문제는 그들이 책임을 져야했다면, 오늘의 문제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복음의 본질이 달라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의 전달 방식이 달라진다는, 그 대상이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타종교인을 개종시키는 선교 개념은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을 개종시키는 일은 이제 그만 두는 게 좋습니다. 이슬람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기독교신자들을 개종시키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런 일을 하면 안 되겠지요. 우리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소금과 빛으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영향으로 그들이 스스로 개종한다면 그건 기쁜 일이구요.

이방인 전도를 오늘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이방인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이방인들이 누굴까요? 노숙자들인가요? 그들과 우리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동성애자들, 양심적인 병역 거부자들, 공산주의자, 미혼모, 가난한 사람들인가요? 그들과 우리는 성령 안에서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동성애자이면서 기독교인일 수 있고, 공산주의자이면서 기독교인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들을 거부하고, 그들에게 모욕을 줍니다. 예수님을 적대했던 바리새인들처럼 자기와 조금만 달라도 무시합니다.       

여러분, 초기 기독교는 이방인들에게도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에게 임하는 성령을, 그 구원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기독교 전통과 역사의 후예들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이 사실이 여러분의 영혼을 요동치게 할 겁니다. 이런 뜨거운 영혼으로 오늘 한국 땅의 이방인들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시다. 아멘!(2009.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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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오명철

May 18, 2009
*.243.153.4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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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늘노래

May 18, 2009
*.200.144.123

이슬람 교도들을 개종시키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다음 줄에 가서는 "우리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하는 설교내용이 상충되는 것 같아서 질문합니다. 설교내용이 일관성을 갖추려면 "이슬람교도들은 제외하고 예수님에게 일어난 구원사건을 전해야 합니다." 하는 식으로 글이 전개되어야 하지 않는지요? 위의 설교에서 "개종"과 "전한다"는 표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예수에게 일어난 구원사건을 전한다는 건, 결국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나요? 초대 기독교가 수모를 당하면서 유대교 제사장들에게까지 그리스도를 선포했다면 오늘날에도 타종교인들에게도 그리스도를 (강요가 아니라)선포하는 건 당연한게 아닌가 싶은데요.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열광주의자들을 옹호하는 차원에서 이런 질문을 드리는 건 결코 아닙니다.

복음 안에는 선포의 기능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요?

만일 선포의 기능이 있다면 선포의 대상에서 유독 이슬람교만 제외시켜야 하는지,

아니면 불교도까지 포함시켜야 하는지,

아니면 종교적인 확신이 뚜렷한 단체들은 제외하고

교양을 갖춘 무신론자들에게 전하는 것을 허용해야 하는지...

그 기준은 누가 결정하는가요?

위의 글에서 이슬람교도들을 개종시키는 걸 막아야 한다면

현대의 교양을 갖춘 무신론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행위는 예의에 벗어나는 게 아닐런지.

위에서 목사님이 막연하게 예수에게 일어난 구원의 사건을 전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듣기 쉽게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설마 이슬람교만 제외하고 말씀하신 건 아니겠지요?

하나만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타종교인들을 개종시키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미국 선교사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맞닥뜨립니다. 복음이 들어 온 후 한국의 전통문화가 파괴당한 일은 차치하고서 말입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 역시 목사님이 말씀하신 타종교 세계가 아니었던가요?

그 범주 안에는 목사님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포함 될텐데요.

그리고 지금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동남아,아프리카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철수시켜야 하는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단순히 가난한 나라에 쌀이나 퍼주고 의약품이나 제공하는 방식으로 휴머니즘 차원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단 말인가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노숙자, 동성연애자, 공산주의자들을 거론하셨는데 너무 갑작스런 비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듭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너무 치중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나님이 이방인 고넬료를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중간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데 , 마지막에 가서 중간 설명없이 곧바로 동성연애자,공산주의자들을 이방인과 연결시킨게 좀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동성연애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도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면 고넬료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중간단계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지요? 그걸 생략한다면 목사님께서 그토록 줄기차게 비판하시던 복음이 아닌 휴머니즘과 다를게 뭐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늦은 밤에 이런 질문을 올립니다. 급하게 쓰느라 글이 좀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정목사님은 워낙 해독능력이 뛰어난 분이라 척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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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사띠아

May 19, 2009
*.162.49.148

늘노래님.

님의 글을 읽으면서 늘노래님의 의문은 선교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배우고 알아왔던 선교는
늘노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알아왔습니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구요.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되신 예수님이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따라야 하는 삶은 어떤 삶이셨을까요?
하나님의 나라 선포를 하시다가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철저한 버림을 당하시고
결국 그 하나님 나라가 되어 버리신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에는 자유가 있었고
평화가 있었고 참된 안식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예수님의 지인들은
예수님과의 짧았던 시간들을 반추하면서
예수님을 통해 열려진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각종 병자와 고아와 과부와 억눌린 자와 창녀와 세리와 억눌린 자들과 함께 하시며
이들에게 자유와 쉼을 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그런 삶을 사셨고 따르는 이들은 그런 삶을 배우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빛처럼 소금처럼 세상으로 퍼졌습니다.
태초의 생명의 원천이었던 빛처럼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기 집중, 자기완성의 어두움속에서 방황하던 이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일상적인 삶속에서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에로의 집중은
고달픈 현실을 뛰어넘어 잘 차려진 잔치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축복을 보게 하였습니다.
가시에 찔려 장님이 되어서도,
듣도 보도 못한 상태가 되었어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현실의 엄청난 축복을 보고
들리지 않는 귀로 들리지 않는 하늘의 소리를 듣자 그 인생들이 찬양으로 뒤덮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전파가 선교라면 힌두와 스님과 무슬림을 개종시키는 것보다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리며(자기 구원에의 천착) 이들과 함께 살아가면 됩니다.
생명이 있는 겨자씨는 새들이 깃들만큼 자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생명의 영이 그 나라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이런 선교사가 이 땅에 많이 필요합니다.
힌두와 무슬림과 스님들을 향하여 마귀의 자식의 눈으로 보며
개종의 대상으로 보는 선교사는 이 땅에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무엇을 하실까요?
아마 여호와의 증인을 향하여 실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판사를 찾아가 깊은 위로를 하지 않으셨을까요?
새터민로 불리기를 거부하는 탈북자들의 모임에 나타나셨을 지도 모르겠고요.
지하철 노숙자들과 소주잔 기울이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도 있겠군요.(신성모독일까요?)
동성연애자들의 결혼식 하객자리 맨 앞에 앉아 계셨을 수도 있고요.
도덕과 윤리의 파괴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 그 생명의 세계의 우주적 울림이 우리의 심령을 파고들면
그 울림만이 우리를 움직일 뿐입니다.
그 울림의 파장이 설교자에게 다가갔던 것이 아닌가 지레 짐작해 봅니다.

늘노래님.
별로 답이 되는 것 같지도 않는데 주제넘게 끼어들었다면 용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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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권요안

May 19, 2009
*.62.121.17

늘노래 님의 질문과 유사한 질문들이 제 머리 속에도 두서없이 떠올라 생각을 나눈다는 차원에서 한마디 거듭니다.

""개종"과 "전한다"는 표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저는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준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봤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가 먼저 고넬료를 "개종"시키기 위해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가 환상 중에 고넬료에게 나타났고, 그 다음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한"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전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준비해 놓으신 자리에 가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고, "개종"은 하나님, 즉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그러한 차이가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선포의 대상"은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딱히 누구라고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처럼 당시에는 베드로 조차도 "선포의 대상'에 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모든 사람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선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선포의 대상"을 확실하게 정하는 것보다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깨고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여 "우리가 책임을 져야"할 "오늘의 문제"를 찾는 노력이 더욱 중요할 것 같습니다.

노숙자들, 동성애자들, 양심적인 병역 거부자들, 공산주의자, 미혼모, 가난한 사람들이 중요한 오늘의 문제들 중 하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그들을 거부하고, 그들에게 모욕을" 준다는 점에서 그들은 타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에게 이방인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고넬료가 환상을 보고 베드로를 초청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막무가내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차아간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교도들을 개종시키는 일" 보다는 "동성애자이면서 기독교인", 공산주의자이면서 기독교인"인 이방인들을 찾아가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고넬료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중간단계"는 정용섭 목사님이 설교에서 언급하신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족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의 설교가 끝나자 성령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다고 합니다.(행 10:44)"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그리고 그 역사하심에 의해 "그들과 우리는 성령 안에서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중간단계를 거쳐 유대-기독교인들은 이방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복음과 휴머니즘을 구별짓는 중요한 차이도 이 "성령의 역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 겉모습만으로는 그 둘을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복음과 휴머니즘이 완전히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령의 역사에 의해 발휘되는 휴머니즘이 복음에 가까운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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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y 19, 2009
*.139.165.36

 늘노래 님의 반박에 대한 중요한 해명은

이미 위의 다른 대글자 님들의 글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다만 내 글에서 논리성이 떨어지고 비약이 심하다는 지적은

내 글의 한계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제 설교를 자세하게 검토해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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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우디

May 19, 2009
*.15.172.34

얼마전 콰미님의 수고로운 제본작업으로 읽고있는 "하느님의 기쁨, 사람의 희망"중에서

"하느님의 딸" 이라는 설교편에 소개되어있는 하나의 시에서도 내 마음의 이방인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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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가계 - 조수순

연분홍 화장지로 우스꽝스럽게 접어 만든
큼지막한 장미 두 송이를 머리에 꽂고
다소곳이 에배당 앞자리에 나와 앉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절절히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설교자의 말끝마다 아멘으로 화답하는 그는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느님의 딸이다.
그런데
집에서는 천덕꾸러기요
동네에서는 악귀 들린 년 혹은 미친년으로 통한다
빈농에서 자라나 이웃 마을 빈농의 총각에게
시집간 지 이레 만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새색시 품을 파고드는 신랑에게
갑자기 금침 밑에 감춰 둔 식칼을 꺼내 위협하고
시모 밥 그릇에 몰래 똥을 누어 조반상에 올려 놓아
시집살이 보름도 못 채우고 소박맞은 후
친정 오라비 그늘에 들어 애옥살이하면서
정신병원 근처에도 못 가 본 채
살얼음 잡힌 동네 개천에서 가끔씩 벌거벗고 목욕하다
난폭한 오라비 매질에라도 걸리면
푸른 멍 두드러기 돋아난 얼굴 부끄러워
치렁대는 긴 머리단으로 살포시 가리고
인적 드문 산모롱이를 돌아 예배당으로 오곤 하는데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느님의 딸이다.
오늘 따라 홍조 띤 얼굴에
큼지막한 장미 두 송이를 머리에 꽂고
다른 하느님의 아들딸들과 같이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주기도문을 읊조리는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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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시드니

May 19, 2009
*.45.80.74

목사님, 설교 감사드립니다.

저도 이제 다비아에 많이 적응이 된 듯, 목사님의 설교에 걸림이 별로 없습니다.

특히 댓글 중에 Satya님의 글에는 깊이 동감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은,

<막 16:15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구절을 근거로 초기 기독교가 처음부터 이방인 전도에 최선을 기울였다고 주장하면 곤란합니다. 이런 구절들은 모두 이방인 전도가 시작된 다음에 교회 공동체에 의해서 추가된 것들입니다.>

윗글에서 추가되었다는 것은 정황적인 근거에서입니까? 아니면 학문적(문서학?)으로 어느 정도 증명이 된 것인가요?

그렇다면 어떤 책을 보아야 그런 것을 알 수 있나요?

저로서는 문자주의에서 인문학적 성경읽기로 나아가는데 큰 벽을 깨뜨리는 순간이 될 수도 있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신학에서 이 문서학적인 증거가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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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y 19, 2009
*.139.165.36

시드니 님,

좋은 질문이군요.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기하신 질문에 대해서

구체적인 문헌을 찾아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제 신학의 세계에서 논 시간이 37년이 되어, ㅎㅎ

그냥 느낌만으로도 어느 정도 근거를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테니스에서도 '구력'이라는 거가 무섭답니다. 음흠.

원래 마가복음은 16:8절로 끝납니다.

그 뒤는 훗날 펀집의 과정을 통해서 들어온 거랍니다.

본문 비평으로도 그건 정확한 이야기에요.

우리말 성경에 막 16:9-20절이 괄호 안에 들어가 있을 거에요.

난외 주에 "어떤 사본에는 9-20절이 없음"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4세기의 바티칸 사본, 시나이 사본, 그리고 12세기의 소문자 사본 304에

이 구절이 없다는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는 웬만큼 학문적인 토대로 집필된 성서주석에는 모두 있어요.

제가 보는 주석 '국제성서주석'에 그닐카가 쓴 "마르코복음(2)"에도 나오고요.

이런 증거가 얼마나 신뢰할만한 것인지, 하고 물으셨지요?

글쎄요.

지동설을 얼마나 믿을만 한 건가 하고 물으면

저 처럼 물리학에 문외한인 사람은 대답하기가 참 곤란하겠지요? ㅎㅎ

마지막으로,

그렇다고 해서 막 16:9-20절이 정경으로 자격 미비라는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바르게 해석해야 할 책임이 있는 거구요.

이런 점에서 저는 "해석없이 설교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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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늘노래

May 19, 2009
*.200.144.123

내심 기대를 걸고 질문을 던졌는데 안타깝군요.

몇 분께서 정성스레 댓글을 달아주긴 하셨는데 제가 기대한 답이 아니네요.

난 등이 가려워서 등을 내밀었는데 

몇 분들은 내 팔뚝을 자꾸 긁어주려하시는군요.

팔뚝은 내 손으로도 얼마든지 긁을 수 있는 부윈데 말입니다.

제 글이 좀 건방지게 느껴져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좀 듭니다.

정목사님께서 성가시다고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덧글에서 상종을 안하려는 뉘앙스가 좀 풍기네요. (일방적인 지레짐직입니다)

암튼 정목사님께 듣고 싶은게 있었는데

여전히 개운치 않습니다.

날씨가 덥습니다. 대글 주신분들께 공연히 시간만 뺏은것 같아 미안한 맘이 드네요.

모두들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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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삶에서..

May 19, 2009
*.140.185.182

내심 무슨 기대를 걸고 질문을 하셨을까요??

 

팔뚝, 등 예화는 아주 좋은 예화인거 같긴한데..

늘노래님은 정확히 등을 내밀지 않았답니다..

애써 늘노래님이 내민 등을 살펴보면

 

1. 복음 안에는 선포의 기능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요?


2. 그 기준은 누가 결정하는가요?

설마 이슬람교만 제외하고 말씀하신 건 아니겠지요?

 

3.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 역시 목사님이 말씀하신 타종교 세계가 아니었던가요?

그 범주 안에는 목사님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포함 될텐데요.

그리고 지금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동남아,아프리카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철수시켜야 하는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단순히 가난한 나라에 쌀이나 퍼주고 의약품이나 제공하는 방식으로 휴머니즘 차원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단 말인가요?

 

문자적으로 접근했다고 타박하실껀가요??

 

문자적으로 접근하든 전체적인 글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든 간에 저는 내미신 등이 잘 안보이고 팔뚝만 보이네요..

그래서 윗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심이 오히려 어느정도 답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등이 가려우시면 등을 내미세요..

그럼 긁어주실텐데요..

저를 비롯해 댓글을 다신 분들이 난독증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느정도 같은 맥락으로 이야기를 했다면 그건 댓글을 단 사람이 난독증이여서 늘노래님의 팔뚝을 긁은게 아니라

늘노래님이 처음부터 등을 내민게 아니라 팔뚝을 내민겁니다.

윗글에서 건방지게 질문을 하신게 아니라 오히려

아래 댓글에서 건방지셨습니다.

시간을 빼앗은 것같아 미안해 하지 마시고

진심을 담지 않은 사람 떠보기식 질문을 하신걸 죄송해 하십시오.

첫번 질문을 보고 참 감사히 여겼는데

두번째 댓글을 보고 기분이 팍 상했습니다.

다비아는 신앙의 견해가 보편적인 분들과 조금 다른 부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 짤막한 경험으로 볼 때 다비안들은 최소한 진심으로 대하는 분들이라는 사실을 느낍니다.

늘노래님이 기분이 상하셨다고 해도 별 수 없습니다.

전 이미 기분이 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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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만남과나눔

May 19, 2009
*.208.230.203

사도행전 10장의 중심

성령의 권능을 받은 승천하신 주님의 증인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내용이다. 그 가운데 사도행전 9장까지 사마리아 전파가 대적자인 사울을 사로잡아 이방인을 위한 예수의 군사로 쓰게 되었다고 함으로 완성되고, 사도행전 10장은 이제 이방인을 위한 땅끝까지 복음 전파가 고넬료의 가정이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열리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미국과 중국과의 핑퐁외교를 생각하면 된다. 20여년 동안 서로 막혔던 외교 관계가 핑퐁을 통해서 양국이 수교에 이르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시작이 고넬료의 가정에서부터 열렸다고 사도행전은 말한다.

이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돌아가 회의에서 이를 확정한다. 행 11:18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은 원래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엡 2:11-22절이 이를 말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의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4-16)

 

그러므로 정목사님의 예수님의 선교상황과 제자들의 상황이 다르다는 말씀은 맞지 않는다. 예수님의 선교상황은 부활하시기 전과 부활하신 후가 다르기는 하다. 이는 아직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보좌 우편에 등극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며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은 양에게로 가라'고 한정시키는 것이고, 그가 왕권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후, 즉 그가 만유의 주로 오르신 후에는 모든 천하만민이 그에게로 돌아오고 그에게 경배해야 하는 것이다.

 

막 12장의 포도원 비유에서 처음 악한 농부를 말하고 주인이 와서 악한 농부를 진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겠다는 것도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요 12:20절 이하에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뵈오려고 왔을 때 주님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며 그의 사역의 목표가 여기에 있음을 '진실로 진실로'를 통해 확인시키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도 백부장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을 하였던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방인 선교를 예상치 않다가 선택하게 되었다는 정목사님의 말씀은 성경 전반에 걸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환상이야기

글을 쓰는 저자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라고 정목사님은 보셨는데, 보자기에 내려 온 것은 실제 유대인이 갖고 있던 율법 질서를 말하고 있다.

레위기에 나타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그대로 보인 것이고 베드로는 이 질서를 따라 살았는데, 이제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더 이상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제한이 없어졌으니 다 먹으라고 하며, 이것은 곧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가 행 10:28절에 말하는 것처럼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함이 위법'이었을 옛 질서가 끝나고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한 새 사람이 되는 질서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의 경계가 있었던 옛 하나님 나라는 끝이 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 나라가 열렸으므로 이방인도 부정하였던 짐승이었으나 함께 후사가 되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행 10:36절에서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라고 하는 것이다.

 

선교문제

우리 주님께서 영광을 얻으심은 죽고 부활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오르심이다. 천하만민이 그 앞에 경배하며 이전에 거짓된 우상을 섬기던 것으로부터 회개하여 그를 믿고 그 나라에 참여하여 구원을 누려야 한다.

이슬람교를 그대로 남겨 두고 우리 대로 선교하자는 것은 주님의 선교명령에 맞지 않다. 더군다나 자기 내면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자고 함은 더더욱 맞지 않다. 그게 오히려 이방 종교다.

 

바울의 아덴 선교(행 17:16-34)는 정목사님 의견과 상반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아덴에 가득한 우상을 보고 바울은 분노를 느꼈다. 또한 그는 30-31절에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바울의 선교 역사 개념은 '알지 못하던 시대'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시대'로 구분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허물치 않으셨지만, 죽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허물을 묻고 재판하겠다고 하신다. 말 그대로 땅의 왕국인 가나안 땅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승천하사 보좌 우편에 등극하신 하늘과 땅의 권세를 얻으신 하늘 나라에는 모든 백성이 다 경배하고 그 왕으로부터 나는 생명을 구원으로 누려야 한다.

어느 나라에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백성이 그 나라에 살 수가 있는가? 그는 귀양을 가든지 반역죄로 죽임을 당해야 마땅하다. 천하 만국의 왕으로 오르신 우리 주님의 나라의 긍휼은 원수와 대적자가 회개하여 하나님과 화해토록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끝까지 거절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자에게 무조건 넓은 아량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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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y 21, 2009
*.54.79.126

제가 볼 떄 목사님께서 "개종" 이라고 이야기하신 것은, '이 문화에서 저 문화로의 이동' 내지는 '구역 획정'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문화적 이동과 구역 획정을 선교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죠... 군부대의 초코파이 선교로 군대 몇 천명을 세례를 주었다는 성과를 보고하는 것이나, 해외에서 이슬람 교인들을 설득해서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하게 하고 그 지역에 크고 작은 분란이 일어나게 한다든가...  

 또 전도하는 사람들 입에서도 그런 이야기 곧잘 나옵니다... '야, 곧 넘어올 거 같으면서도 잘 안넘어오네...'  

 본문을 보아도 복음 전파의 주체는 베드로가 아니거든요... 베드로는 어떤 힘, 즉 성령에 이끌리어 그렇게 간 것 뿐이고, 또한 코르넬리우스도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성령을 받은 것이구요... 

 이건 아무리 봐도 요즘에 우리의 선교 의지로 의욕적으로 상대방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패턴과는 아주 다르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렇다고 도매급으로 선교사님들과 사역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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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데이비

May 22, 2009
*.149.144.151

저도 시드니님의 댓글 처럼 정목사님의 설교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개종시키는것과 그리스도인이 되는것은 다른 의미인것 맞죠? 하지만, 정목사님이 설교중에 말씀하신 기독교로 개종시킨다는 것에 대한 부연설명이 좀더 필요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설교에서 선교에 대해 아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당시 2000년전의 당시 사람들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이해는 교통도 발달하지 않아서 자기가 속한 지역중심이었을것 같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 이방선교에 대해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는것이 이해됩니다. 고작 사는 세계가 유대지역이 전부였을테니까요.

  선교가 주장되고 개념이 정립된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루터도 선교에 대해서는 반대했다고 하더라구요. 요즘도 해외선교 하면 무슨 대단한 일인것 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것 같습니다. 휴가때 외국을 쉽게 드나들고, 유럽과 미국은 한국유학생 천지이고, 또 돈을 벌기위해서는 온세계 어디든지 진출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를 살면서 말입니다.

그동안 선교라는 이름으로 열강들의 주구 노릇을 하고, 상업주의적, 패권주의적 선교 또 타문화를 무시하는 겸손하지 못한 패단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은 고쳐서 새롭게 해나가야할 부분이지 선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타문화권선교가 그렇게 만만하게 볼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현재 처해있는 상황에서 지구촌의 이곳저곳, 힌두교, 이슬람교등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조그만 돈이지만 헌금하고, 이런저런 여기서 할수있는 일을 하는 것이 선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좀더 마음이 와닿으면 더 할 수도 있구요..

 21세기는 미국의 경제위기가 내 호주머니를 텅 비게하고, 비행기등의 교통발달과 지구반대편에 일어나는 사건사고가 실시간으로 인터넷, 뉴스로 보도되고, 하나의 지구촌화 되어가는 글로벌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에 외국의 이슬람도, 힌두교등 타종교인들도 국내의 공산주의자와 노숙자와 마찬가지로 고넬료같은 이방인입니다.

 특히 이슬람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여성들(태어날때부터 히잡을 쓰고 평생억압되어살고, 정신적, 육체적, 성적학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 무시되는 인권등등)의 삶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이슬람국가 가운데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또 인도 힌두교의 카스트제도 아래에서 3억이나 되는 불가촉천민들의 노예적인 삶을 조장하는 힌두교의 폭압성,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권유린등을 생각해 본다면, 좀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좀 주제넘는 말인것 같지만 젊은이의 어리석음으로 너그러이 받아주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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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y 22, 2009
*.139.165.36

데이비 님의 보충 발언이 시의적절하군요.

전반적으로 동의하지만

사족으로 한 마디 하면요.

이스람, 힌두교 권의  여러 반문명적 행태를

무조건 우리의 시각으로 비판하는 건 곤란하다는 거지요.

그런 비판이 어쩌면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인지 몰라서요.

더 근본적으로 그런 행태를 이유로

기독교의 정당성을 변호할 수도 없구요.

기독교가 벌린 반문명적 행태를 까발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입도 벙긋하기 힘들지요.

내가 위의 설교에서 선교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던 것은

공격적인 선교, 즉 제국주의적 선교를 그만두자는 것이었지

선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답니다.

그 문제는 이미 데비비 님이 짚어주셨군요.

참고적으로,

고넬료 세례 사건에서 내가 본 것은

이방인 선교의 당위성 유무가 아니라

이방인을 향한 그들의 새로운 태도였어요.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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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늘노래

May 22, 2009
*.200.144.123

외국에서는 간혹 동성애자들이 교회에서 결혼을 한다거나

동성애자들이 목사안수 받는 문제로 언론에서 화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혹시 한국에도 동성애자이면서 기독교인로 살아가는 사람이나 그런 단체가 있는가요?

주위에 혹시 그런 분이 계시거나 그런 모임 또는 단체를 아시는 분은 대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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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닥터케이

May 23, 2009
*.90.149.114

그런 개인이나 단체가 있기는 한데, 본인들이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한국사회 특히 한국교회의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청소년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로뎀나무그늘" 이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요즘도 활동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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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y 22, 2009
*.139.165.36

현시대에서 예수를 말하는 것은 어떠해야하는지.... 어떤 의미일지... 곰곰히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의 껍질을 넘어선 예수를 이야기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지요...

요샌 모든 것이 껍질놀음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무한한 자유와 사랑... 그 것이 흘러 나오는 샘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예수를 어떻게 예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막힌 담을 만들고 너와 나를 갈라버리는 것을 어떻게 예수라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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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만남과나눔

May 22, 2009
*.208.230.203

정목사님의 위의 설교 중에 아래와 같은 말씀은 성경이해 전반에 있어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정목사님글>

이방인 장교가 복음을 들었다는 사실이 왜 단순한 게 아닌지를 알려면 초기 기독교가 처한 삶의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원시 기독교는 유대인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전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군요. 행 1:8절에 따르면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거라고 했습니다. 막 16:15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구절을 근거로 초기 기독교가 처음부터 이방인 전도에 최선을 기울였다고 주장하면 곤란합니다. 이런 구절들은 모두 이방인 전도가 시작된 다음에 교회 공동체에 의해서 추가된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공동체는 일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 전도를 별로 시급하게 생각하지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이방인 전도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중심을 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원하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태는 그들에게 매우 귀찮은 것이었습니다.

 

 

재차 정목사님께 질문합니다. 위의 글이 성경이 말하는 전체적인 의미에 합당합니까?

 

그동안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하여 대단히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이 사이트에 들어와 더 은혜를 누렸는데 위의 설교글을 보고 매우 황당함을 느꼈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다른 교단의 진리가 차이가 남을 감수하면서도 위의 글은 성경 전반에 대한 이해가 매우 달라서 가슴 한쪽 구석이 텅 비는 당혹감으로 이렇게 질문을 드리는 바입니다.

 

정목사님의 설교글은 마가복음의 결론글처럼 괄호 안에 있고 사본학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태복음의 결론 부분인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에 맞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선 이미 예수의 나심부터 동방박사가 경배하러 왔으나 헤롯 왕과 예루살렘 당국자들은 예수를 죽이려 했다고 대비함으로 시작합니다. 또한 복음서 전반에 흐르는 이방인의 구원에 대하여 부정하는 셈이 됩니다(앞의 저의 글에서 이미 예를 간단히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망하게 됨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했는데 그 열매를 맺지 못하고 강도의 굴혈로 삼은 죄 때문입니다. 이는 '남은 자' 언약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서의 '남은 자' 언약은 이새의 뿌리에서 난 자로 말미암아 이제 흑암에 거하고 그늘진 땅에 거하였던 자들에게 빛이 비취실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열방이 그 빛 가운데 돌아오리라고 거듭거듭 말합니다.

 

이사야 49:6절입니다.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를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 선지자는 애굽에서 돌아온 첫 출애굽은 경한 것이지만 이제 이방인이 돌아오는 둘째 출애굽은 만민이 돌아오는 큰 구원임을 예언했습니다.

 

고로 사도행전의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들이 땅 끝까지 이르는 것은 남은 자 언약의 성취로써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성령강림절의 베드로의 설교에서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목사님의 견해를 따르자면 로마서 9-11장의 해석도 달라져야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는 우연히 발생된 상황이 아닙니다. 로마서는 새로운 복음의 의가 나타났고,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이 없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도 정목사님의 견해와 상반됩니다. 벧전 2:9-10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정목사님의 견해는 특히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전도에 대한 말씀에 대한 것이 무슨 착각이 있었던 게 아닌가 보여집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보좌 우편에 등극하시기 전과 등극한 후의 시대적 차이를 같게 보셨기 때문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이를테면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나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씀은 아직 보좌 우편에 취임하시기 전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미 쓴 글에서와 같이 보좌 우편에 오르신 후에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이는 총선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어도 당선되자마자 국정전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함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임 대통령이 아직 퇴임하기 전까지 자기 의견을 내지 않고 자중합니다. 그러나 정식 취임한 후에는 그 대통령의 통치가 비로서 그의 나라 전체에서 시작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땅의 예루살렘에 위임된 통치를 행사하였던 나라였다면, 신약의 하나님 나라는 하늘 성소에 나아가신 아들의 통치가 시작된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는 활발한 전도가 없었고 신약에 와서야 '땅끝까지'의 통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오면 쳐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의 권세의 나라는 이방인이 새 성전의 제사장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성경해석에 있어 약간의 오류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목사님의 위의 설교글은 성경전체의 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이렇게 두 번에 걸쳐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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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y 22, 2009
*.139.165.36

만남과나눔 님,

긴 글을 주셨군요.

감사드립니다.

혹시 목사님이세요?

글 내용이 성서연구 전문가다워 보여서요.

말씀하신 내용을 제가 다는 모르겠습니다.

서로의 성서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걸 좁히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고,

님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겠지요.

일일이 따지고 들기에는 이 자리가 좀 어울리지 않는군요.

저는 성서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랍니다.

성서 텍스트를 뚫고 들어가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행위를 보는 게

설교에서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좋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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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만남과나눔

May 22, 2009
*.208.230.203

정목사님,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를 말씀으로 섬기는 목사로서 초면에 인사도 없이 실례가 많았습니다.

 

거듭 죄송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설교비평을 아주 잘 하신 분이셔서 설교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보고 싶었는데

 

원치 않으시는군요.

 

만유의 주요, 화평의 복음을 전하신 분 안에서 몇 개의 글로 영영 평행선 뿐이라 하시니 ...?!

 

물론 저는 성서를 손가락으로 보지를 않고, '하나님 나라와 언약' 관점에서 봅니다. 

마가복음의 복음 선포에서 우리 주님이 제일 처음으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와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 즉 우리 스스로가 성경을 부를 때 가장 흔히 말하는

구약과 신약으로 봅니다.

 

다시 한 번 한국교회에 설교비평을 통해서 귀한 봉사를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정목사님의 귀한 사역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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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May 22, 2009
*.216.20.28

성서에 이미 이방 선교에 대한 코멘트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보다는 제가 볼 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성서에 보면 마태복음 23 장 15절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교인들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것은 유대교도 실제적으로 선교를 했었다는 증거가 되구요...

 따라서 이미 베드로를 만나기도 전에 코르넬리우스는 경건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유대인들을 도와주던 사람이었다면, 코르넬리우스는 이방 유대교인이었던 겁니다... 베드로는 유대교인이었죠...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용적으로는 유대교라는 바운더리를 이미 넘어서 있었지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유대교는, 아니 유대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패턴이란 거죠... 자신들 속으로 복속시키는 것이 목표였단 말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토라의 준수를 요구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베드로 또한 이방인들과의 식사 도중에 야고보를 비롯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오자 자리를 슬쩍 피한 적이 있었던 것을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만만한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바로 드러납니다... 말하자면 환상 및 코르넬리우스와의 만남을 가졌던 베드로는 의식적으로는 이방인들과 하나가 되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여전히 유대적 패턴을 따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죠...

 다시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의 만남 장면을 보면 이건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에게 의욕적으로 접근해서 자신의 주도권 아래로 들어오게 하는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이 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냥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듯 의도치 않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이 이방인을 자신들의 영향 아래로 복속시키는 느낌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둘이 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은 하나가 되면서 오히려 유대인이라는 종교적 특권이 상대화 되어버리는 느낌이란 것입니다... 이 사건에 있어서 베드로에게는 전혀 이니셔티브가 없습니다...

 이 것은 오늘날의 선교 문제와 비기독인들과의 만남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야할 문제라고 봅니다... 하나님 안에서 세상을 향해서 열린 하나가 되고, 또한 기독교인들도 그 하나에 속하는 것이 선교이지, 우리 안으로 닫힌 하나가 되면서 세상과는 담을 쌓고 때로는 적대하는 방식은 전혀 유대교적 선교 패턴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또한 부활을 통해서 세상과는 열린 하나가 되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된 하나님은 기독교 보다도 더 크고, 기독교도 넘어서 계신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천지개벽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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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지우파

May 24, 2009
*.31.139.255

정 목사님의 성령에 대한 견해를 듣고싶어 질문드립니다.

설교내용에
<생명의 깊이와 신비와 만나는 것이 곧 성령 경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성령이 우리에게 내렸다는 증거입니다. 성령 체험을 방언이나 입신 같이 오순절적 계통의 교회에서 강조하는 은사에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그건 성령을 크게 오해하는 일입니다>
에서보면 목사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 성령이 임하셨다는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개신교의 일반적인 성령에 대한 견해라 알고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6:16-17 말씀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기에 따르면 시몬베드로는 분명히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는 성령체험을 한번 또했습니다.
흔히들 전자는 성령받은 상태, 후자는 성령충만 이라고들 하는데 이런 해석은 어떻게 같은 성령님이 충만하시기도 하고 그냥 얌전히(?)계시기도 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목사님의 견해가 매우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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