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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꿈 이야기

성령강림절 조회 수 18160 추천 수 0 2009.08.31 16: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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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열왕기상 3:3-15 
 

솔로몬의 꿈 이야기

(왕상 3:3-15)


성경을 잘 알던 모르던 상관없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그는 두 가지 사건으로 그 명성이 자자합니다. 하나는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지혜로운 왕을 대표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민족의 모든 것을 통합하는 정신적 모태와 같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오늘의 유대교, 오늘의 이스라엘 국가도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솔로몬은 유대인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 이야기는 예루살렘 성전 사건과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성전이 유대 민족 전체와 연결되는 사건이라면 지혜 문제는 솔로몬 개인에게 해당됩니다. 그렇지만 지혜도 성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잘 다스렸고 나라를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의 지혜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스바 여왕이 그를 찾아와서 한 수 배울 정도였습니다.(왕상 10:1 이하)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 성전보다는 솔로몬의 지혜 이야기를 더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기독교인들 개인과 별로 상관이 없는 반면에 지혜는 아주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달라는 기도가 신앙생활에서 흔하게 거론됩니다. 특히 어린 자녀들을 위한 기도에서는 솔로몬의 기도가 빠지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도 지혜지만 솔로몬이 그 지혜를 얻게 되는 과정이 감동적이어서 기독교 신자들에게 이 이야기는 인기가 높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천번제와 꿈

솔로몬은 왕으로 즉위한 뒤에 기브온에서 하나님에게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없었고 각 지역마다 산당이 있었습니다. 성경본문은 일천번제를 드린 날 밤에 여호와 하나님이 솔로몬의 꿈에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히브리어 성경 원본에 따르면 일천번제를 드린 것과 꿈에 나타난 것은 다른 이야기인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둘을 일치시켜서 읽을 때가 많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천번제가 유난히 강조됩니다. 솔로몬이 천 번의 번제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지혜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천번제를 흉내 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배 및 기도회 때마다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일공동예배는 물론이고, 주일 밤, 삼일 밤, 심지어 새벽기도회에서도 번호를 붙여서 봉투에 담은 헌금을 드립니다. 매번 만원씩의 헌금을 드린다고 하더라도 전부 합하면 천만 원이나 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순수성과 진정성이 있는 일이니 무조건 잘못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겠지만 별로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열정은 개인의 영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열정으로만 말한다면 사이비 이단들이 우리보다 한수 윗길이겠지요.

성서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에 따르면 일천번제에서 천이라는 숫자는 제사 횟수가 아니라 번제로 바쳐진 동물의 마리수라고 합니다. 천 마리의 소나 양을 바쳤다는 뜻이겠지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확하게 천 마리가 아니라 많은 숫자를 가리킵니다. 현실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천 마리를 번제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산당에는 번제 단이 하나씩밖에 없습니다. 천 마리를 번제로 드리려면 쉬지 않고 동물을 태운다고 하더라도 하루에 열 마리 이상을 드릴 수는 없을 겁니다. 성서기자는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돈독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어쨌든지 솔로몬의 믿음을 아셨는지 여호와 하나님은 솔로몬의 꿈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은 자기가 왕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말한 뒤에 ‘선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9절) 그는 자신을 일컬어 ‘작은 아이’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태도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많은 백성을 재판하려면 ‘듣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도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는 태도가 엿보입니다. 솔로몬의 이런 대답을 하나님은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솔로몬은 당시 왕들의 일반적인 소원인 무병장수, 부, 원수박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만 구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자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부귀, 영광도 덤으로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정말 지혜로운 왕이었을까요?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는 사실을(왕상 10:1-10) 저는 앞에서 잠시 말씀드렸습니다. 스바는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했던 하트셉수트 여왕(Queen Hatshepsut)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그녀의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스바 여왕은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가 들은 소문보다 더 하도다.”고 하면서 온갖 선물을 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많은 예물을 들고 왔습니다. 성서기자는 솔로몬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어느 왕보다 크다고 말합니다.(왕상 10:23)

그 이외에 보다 구체적인 증거는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입니다.(왕상 3:16-28) 창기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 재판을 청했습니다. 두 여자는 한 집에 살았습니다. 이들은 사흘을 간격으로 각각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죽었습니다. 죽은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바꿔치기했습니다. 살아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서로 우겼습니다. 요즘처럼 유전자 검식을 할 수 있었다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였으나 당시에는 아무도 본 사람도 없고 해서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신하에게 칼로 아이를 반으로 잘라서 각각 나눠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한 여자는 아이를 죽이지 말고 다른 여자에게 주라고 했고, 다른 여자는 그렇게 잘라 달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다른 여자에게 아이를 주라고 한 여자가 진짜 어머니라고 선고했습니다. 이 판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의 판결에 하나님의 지혜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 왕상 3-10장에는 솔로몬에 대한 칭찬이 가득합니다. 그는 지혜로웠고, 재물도 많았고, 명예를 얻었습니다. 더구나 믿음이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알았습니다. 그의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잠언, 전도서, 아가서는 모두 솔로몬이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리더십도 뛰어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만 지은 게 아니라 왕궁도 지었습니다. 그런 대규모 건축에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성서기자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가 믿음으로 큰 축복을 얻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일까요? 그 이야기를 읽는 우리도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여 멋진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심판

10장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성서기자는 11장부터 저주에 가까운 비판을 쏟아냅니다. 인생 성공의 장본인처럼 보이는 솔로몬은 실패의 장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방 여인을 후궁과 첩으로 삼았습니다. 후궁이 칠백이고, 첩이 삼백이었습니다.(왕상 11:3) 그 여인들로 인해서 그는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솔로몬을 심판하십니다. 솔로몬의 나라를 빼앗아서 신하에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모든 부귀영화가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다만 다윗의 체면을 생각해서 솔로몬 당대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그의 아들 대에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속된 말로 이제 쪽박을 찬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실제의 역사에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여로보암 장군이 반역을 일으켰고, 대다수의 지파는 여로보암을 따랐습니다. 성서기자는 남북 왕조가 분열되는 책임이, 즉 나라를 말아먹은 책임이 바로 솔로몬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솔로몬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우리가 본받을 사람인가요, 아니면 경계해야 할 대상인가요? 대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겁니다. 솔로몬에게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과 지혜로운 왕이라는 밝은 면과 이스라엘을 두 쪽 나게 한 우상숭배라는 어두운 면이 있으니, 각각 나누어서 판단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의 우상숭배만 조심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에는 비록 부도덕해도 지혜와 부와 명예만은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우리의 절박한 심정이 담겨 있는 건지 모릅니다.

솔로몬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나눠서 볼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에게서 선과 악이 동시에 나올 수는 없습니다. 그걸 구분해서 보는 건 우리가 그 깊이를 잘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고 나무가 좋으면 열매도 좋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다면 솔로몬은 나쁜 나무입니다. 한 인생을 평가할 때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그의 말년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했습니다. 다윗만 아니었다면 그는 당장 요절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에 쌓아놓은 모든 신앙적 행위와 정치적 행위는 모래 위의 집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솔로몬을 너무 나쁜 쪽으로만 보는 건가요? 성서기자들의 판단이 중요하겠지요. 솔로몬이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한 초기의 역사로 돌아가 봅시다. 솔로몬이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던 시절입니다. 왕상 3:1은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혼인을 맺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잘 보십시오. 성서기자는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과 마지막을 동일한 주제로 설정했습니다. 솔로몬은 이방 여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금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 모암, 암몬, 에돔, 시돈, 헷 여자를 천 명이나 데려다가 후궁과 첩으로 삼게 된 단초는 이미 왕위가 시작할 때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방과 통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이 사실을 성서기자는 그의 말년에 대한 설명인 11장에서는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시작에 대한 설명인 3장에서는 암시적으로 지적하지만, 그 평가는 똑같은 것입니다. 솔로몬에 대한 평가는 말년만이 아니라 처음도 똑같이 부정적인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솔로몬의 지혜만은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솔로몬의 지혜와 그가 지혜를 구하는 태도는 누가 보더라도 인정받을만해 보입니다. 솔로몬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지혜를 구했으니까요. 성서기자들도 최소한 그것만은 인정한 게 아닐까요? 이에 대해서는 제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판단하도록 이런 정도에서 제 설교를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지혜 이야기는 신자들에게 오용되는 경우가 많기에 과유불급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라도 설교의 진도를 한 걸음 더 나가겠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에게 구한 것을 보십시오.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9절)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은 최초 인간의 타락 설화와 연결됩니다. 뱀은 선악과를 먹으라는 요구를 받고 머뭇거리는 하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선악과 설화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면 그 메시지의 중심을 놓칩니다. 선악을 알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이, 즉 분별지의 욕망이 바로 죄입니다. 선악 분별의 능력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능력에 대한 열망을 안고 삽니다. 신이 되려는 욕망입니다. 앎의 본질이 그것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그것이 바로 최초 인간의 범죄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는 사실은 모든 사물과 사건의 본질을 꿰뚫고 싶다는 인류의 원초적 열망을 가리킵니다. 두 창기의 재판이 끝난 뒤에서 사람들이 솔로몬을 두려워했다는 사실도 이를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왕에게는 그런 유혹이 아주 강렬합니다. 왕들은 자신을 무소불위의 존재로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성서가 말하는 죄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솔로몬이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구한 것은 심리적으로 콤플렉스의 한 작용이기도 합니다. 그는 다윗의 직계 왕세자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뛰어난 배다른 형들이 많았습니다. 솔로몬은 운이 좋아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말년에 민심이 떠났다는 사실과 그의 아들 대에 결국 나라가 두 쪽이 났다는 역사적 사실에서도 솔로몬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그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지혜를 통해서 강력한 왕이 되려는 생각을 했겠지요.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John Gray, 국제성서주석, 열왕기상, 192 쪽 이하 참조) 솔로몬의 지혜 전승은 왕권의 신적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한 조처라고 합니다. 스핑크스 상(像)에 새겨진 토트메스 4세 비문에 따르면 토트메스 4세는 멤피스 근처의 스핑크스 상 바로 옆에서 자다가 계시를 받고 곧 도시로 돌아와서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는데, 솔로몬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솔로몬의 지혜 이야기를 제2의 선악과라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보더라도 그는 이 지혜를 마음껏 누리다가 비극적인 말년을 맞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솔로몬의 꿈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지혜와 절대권력과 부귀와 명예도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헛된 꿈, 자기성취의 욕망에 불과합니다.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 바울이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참된 지혜입니다. 그것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3,24) 왜 그런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만 ‘선악 분별’을 넘는 궁극적인 생명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의 영혼을 맡기십시오.(2009.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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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모통이돌

August 31, 2009
*.46.125.253

이번 설교를 통해 인문학적 통찰에 의해 성서해석의 토대가 다져져 있지 않을때,

우리는 자기주관적이다 못해 하나님이 없는 신앙생활로 빠져들수 있는지를 알게되었습니다.

해석적 토대가 허약할 때,  그 공백이 주는 불안감을 

자기암시와 기복성취, 맹목적 율법준수와 세속적 욕망 등과 같은

허황된 감성들로 마구마구 채워넣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안심"이 되니까 말입니다. 

설교후 습관적으로 쓰던 "솔로몬의 지혜"는 참으로 교만한 표현이 아니었나 되새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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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31, 2009
*.120.170.243

모퉁이돌 님,

그렇지요?

신학은 해석이죠.

성서 자체가 해석이구요.

역사도 해석이죠.

해석행위에는 지평이 중요합니다.

성서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작업이 바로 역사비평이고,

독자들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작업이 인문학이고,

그 둘을 묶어내는 작업이 신학, 특히 조직신학이겠지요.

설교자의 주관을 넘어 역사 전체로 자기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계시에

풍덩하고 빠지는 경험이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 같네요.

그 경험이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추상적인 것 같아서

많은 설교자들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게 아쉬운 일이죠.

자, 가봅시다.

성서의 놀라운 세계와

오늘 삶의 놀라운 신비와 깊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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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퀄리아

September 01, 2009
*.111.173.159

"설교자의 주관을 넘어 역사 전체로 자기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계시"

아~ 이 신학의 끌림 ..... ㅠㅠ

 

아무튼,

들려주신 말씀들은 정말 이시대에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좋은 말씀들 기대하고, 또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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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1, 2009
*.120.170.243

역사 전체로서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꼼꼼이 살펴서 그 깊이와 신비를 심화 확대하는 작업이 신학의 본류겠지요.

그런 신학적 해명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의 깊이로 빠져들 수 있지 않을는지요.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신앙의 문제를

실용의 차원에서만 받아들이려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현묘여, 그 거룩한 두려움이여!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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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arizonasun

September 01, 2009
*.110.11.183

목사님 설교말씀에 늘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의문이 있어 여쭤봅니다.  솔로몬의 기도(3:9)를 창(3:5)과 연관시키시면서 인간이 신이 될려는 욕망을 솔로몬으로 부터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서기자는 왕상(3:10)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요청을 기뻐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본문3:9 와 10절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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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1, 2009
*.120.170.243

아리조나선 님,

중요한 대목을 짚으셨군요.

하나님이 그의 요청을 기뻐하셨다는 말은

왕상 기자의 해석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유대민족의 신앙고백입니다.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그것이 어떤 역사적 한계를 갖는지는

오늘 우리가 판단해야지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레위기서의 말씀을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의 지평에서 해석해야 하듯이요.

하나님이 솔로몬의 요청을 기뻐하셨다는 왕상 기자의 해석은 틀린 게 아닙니다.

그 해석을 제가 다시 해석한 것뿐이에요.

제가 성서기자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왕상 기자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복음의 시대 말이죠.

행위가 아니라 은총의 시대말이죠.

설명이 되었을까요?

내 해석이 정말 정확한 건지에 대한 확신을 없습니다.

설교에서도 말했지만 과유불급의 위험성을 감수하고 시도한 해석이거든요.

그렇게 한 이유는 설교는 어떤 정답을 꼭 짚어서 청중들에게 주는 게 아니라,

그 대답은 늘 오답의 위험성이 있기에,

말씀의 신비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랍니다.

제발 틀린 대답이 아니었기를 성령에 바랄 뿐이죠.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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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September 01, 2009
*.116.154.149

목사님! 

말씀의 주제하고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요.

스바의 여왕을 이집트의 하트셉수트 여왕(Queen Hatshepsut)으로 설명하셔서..

 

얼마 전 내셔널 지오그라픽 잡지에서 이 여왕에 대한 재밌는 기사가 있었어요.

여자로써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여왕이라고..

시대적으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를 강에서 건져 왕궁에서 키운 공주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솔로몬을 찾은 여왕이라 말씀하시니 좀 헷갈려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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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1, 2009
*.120.170.243

모래알 님,

그쪽과 이쪽은 다른 시간이 흐르죠?

여기는 이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답니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와 유대의 역사의 실증적 사실관계를 말하기는 어렵군요.

지금도 고고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하고 있겠지요.

왕상 기자는 당대의 유명한 왕의 이름을 빌려서

솔로몬의 명성을 높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와 솔로몬은 최소한 5백년의 시차가 있는 인물들인데,

하트셉수트 여왕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좀더 사실관계가 드라나야만 알 수 있겠군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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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September 01, 2009
*.116.154.149

고고학자들의 연구가 지금은 훨씬 과학적으로 진일보 했음은 사실일테죠.

미이라를 CT 촬영하여 어떻게 죽었는지 찾아내니까요.

 

성경에 기록된 것과 어떻게 연관관계가 있는지는 좀 더 전문적인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인터넷 백과사전 격인 위키피디아 영어판에 보면

이 여왕의 통치기간이 아마도 1479-1458 BC 경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솔로몬 통치시대의 스바 여왕이 아닐 것 같아서요..

 

오늘의 말씀을 읽고서 질문이 여러 가지 생기는군요.

어제 주일설교 말씀이 내게 배우라 하신 마태복음 말씀이었어요.

주님에게 배우기 위해 우리는 지혜를 간구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봐요.

솔로몬이 정치적으로 불안한 기반을 다지기 위한 자구책으로써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단 생각도 들고..

 

좋은 밤입니다.  풀벌레 소리 가득하고 이젠 창문을 잘 닫고 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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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박승수

September 01, 2009
*.238.212.49

제가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성경을 보는 관점이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전에는 기사를 그냥 받아들인 후 그 다음 것을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기사가 있게 된 원인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한 예입니다.

목사님의 메시지는 신선하고 독창적이고 파격적이어서 좋습니다.

어떤 때는 그 정도가 보통사람인 저에게는 불편을 느낄 만큼일 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불편을 해결해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저의 몫이겠지요.

이번 설교에도 그런 불편이 느껴져 몇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천번제와 꿈이야기는 연관성이 없는 기사라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성소부화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대근동에서 특정인이 제사를 드린 후 꿈을 통해 신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기 위해 제단 앞에서 잠을 자는 것은 흔한 관행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창28장의 야곱 기사나, 삼상3장의 사무엘 기사 등등, 성경에도 그 예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해서 저는 분명히 연관된 기사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연관이 없다 하는 이유는, 일천번제에 대한 정확한 주석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를 생각합니다.

물론 그릇된 주석으로 연관 짓는 경우가 허다하긴 합니다.

일천번제를 잘 드려서 솔로몬과 같이 복 받자 등등 말이지요. 

제가 일천번제에 대한 고민을 해보고 있는데요.

한 가지가 풀리지 않아 히브리어 학자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풀리면 목사님께 검토를 받아 보겠습니다.

 

또 하나는, 위에서 어떤 분이 언급한 것과도 연관이 되는데요.

목사님께서 '솔로몬이 본받을 사람인가 경계해야 할 사람인가'의 질문을 스스로 풀어가시는 대목입니다.

목사님은 솔로몬을 왕상3:1과 왕상11:1로 앞 뒤에 가두고 본받을 것이 없다고 결론 내리셨습니다.

더 나아가 11절에서 솔로몬이 분별지를 구하는 것을 놓고 창3장의 선악과와 연관지으시며 한 번더 매듭을 지으셨습니다.

이것은 좀 지나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도 당연히 아시는 것이겠지만, 

포로지에서 귀환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너진 조국 재건에 동참할 것을 독려하는 목적을 가진 역대기서와는 다르게, 열왕기서는 현재 포로 된 신세에 대해 절망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 이스라엘이 포로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기에 왕조의 온 갖 더러운 것들을 다 들추어 내고 있는 것이고, 이는 곧 언약관계의 깨어짐의 원인을 밝히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정의에 있어서 내려지는 전적인 타락과 연관짓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백성을 재판하기 위한 바른 지혜를 구한 것이고 그의 진정성이 10절에 나타난 것으로 말입니다.

설교 본문과 동일한 기사가 대상1장에 나오는데요,

선악 분별지가 지혜와 지식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혜 인 '호크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수단이고,

지식 인 '마다'는 사물에 대한 통찰력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솔로몬의 기도를 저의 기도의 원리로 삼기도 합니다.

생각하면서, 대화하면서, 일하면서,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지혜서라고 말하는 잠언, 전도서 등등을 솔로몬의 저작으로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이 지혜도 본받을 것이 없다 라는 결론이 내려지는 건가요?

메시지에서 결론으로 내리신 십자가도 지금은 성경기사 속에 등장하는 것이니 부정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가 정답이지만 십자가 절대주의는 경직된 성경해석으로 비춰져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신구약을 망라하고 진정한 지혜는 분명 예수와 맞다아 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이상은 저의 다른 생각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메시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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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1, 2009
*.120.170.243

박승수 님은 성서해석에서 일정한 해석학적 관점을 확보한 전문가시군요.

내가 배워야 내용도 많이 눈에 뜨이는군요.

크게 세 가지 다른 생각을 말씀하셨는데,

각각 많은 이야기거리를 담고 있어서 대답하기가 쉽지 않겠는데요?

그래도 간단하게나마 정리하지요.

 

1. 일천번제와 꿈이야기

그 두 사이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니랍니다.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일천번제를 드린 행위와

꿈에 여호와를 만난 사건이 구분되는데,

이는 곧 성서기자가 솔로몬의 산당 제사 사건을 그냥 사실로 진술하고 있는 뿐이라는 것이죠.

두 사실을 너무 자동적인 인과관계로 보지 않는 게 좋다는 거에요.

산당 제사가 3절에도 나오고 4절에도 나오고 하는군요.

이렇게 반복하는 데에는 성서기자의 특별한 생각이 담겨 있을지도 몰라요.

설교 시간에 다루지는 않았지만

'산당'이 별로 바람직한 장소는 아니거든요.

산당제사에서 성전제사로 넘어가는 역사적 흐름도 공부하면 재미 있겠네요.

어쨌든지 두 사건을 느슨하게 연결시키는 건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2. 솔로몬의 선악분별지와 에덴동산에서의 분별지에 대해

이 문제는 설교에서 언급했듯이 본문의 범주를 뛰어넘는 위험성을 감수한 해석이었어요.

왕상 기자가 그냥 지혜라고 하지 않고 선악분별이라고 한 데에서 그런 해석의 단초를 얻은 거에요.

분별지에 대해서 한 마디 한다면

불교에서는 분별지를 없애라고 하는데, 나름으로 일리가 있는 것 같애요.

예수님과 대립했던 바리새인들이 바로 분별지의 대표자들이거든요.

어쨌든지 솔로몬의 운명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그가 실제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면 그의 말년이 그렇게 초라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라를 두토막내고 말아먹은 책임이 솔로몬에 있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지적했다는 점에서 볼 때

솔로몬은 우리의 신앙적 존경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거겠지요.

지혜는 가치 중립적인 거라서 악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선의 도구가 될 수도 있지요.

기독교인들이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기도하는 건 옳바른 거지요.

잠언, 전도, 아가서 등은 말 그대로 유대인들의 지혜문학이지요.

기독교인들에게는 참고사항 정도가 아닐까요?

 

3. 유대인의 지혜문학과 신약 복음서 및 서신의 관계에 대해

이런 문제는 참으로 어렵답니다.

유대인들의 지혜서들은 말 그대로 유대인들의 지혜일 뿐이에요.

지혜가 사람을 구원하는 거는 아니죠.

랍비들의 지혜 묶음집인 탈무드도 비슷한 거구요.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삶의 지혜가 아니라 구원의 능력이죠.

지혜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능력은 없으면 죽음이죠. ㅎㅎ

'십자가 절대주의는 경직된 성경해석'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말은 약간 고쳐 써야될 겁니다.

바울은 십자가만 전한다고 했걸랑요.

그가 이전에 추구했던 유대의 지혜와 율법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잖아요.

기독교의 성서해석은 십자가 절대주의에 서야 한답니다.

 

재미있지요?

조금 씩 차이가 나는 생각들을 서로 나누다 보면

진리가 조금씩 열리는 느낌도 하게 되는 것 같군요.

좋은 의견,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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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박승수

September 03, 2009
*.238.212.49

예, 감사합니다.

제가 십자가 절대주의를 언급한 것은 십자가에 무언가 부족이 있다는 등등의 뜻은 아닙니다.

주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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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September 01, 2009
*.136.37.11

미실 : 나에게서 빼앗아간 신권을 정녕 너는 포기하려는 것이냐

덕만 : 백성들을 위해서 당연히 포기하려는 것이오.

미실 : 신권을 포기하면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리려 하느냐.

        백성들은 왜 비가 내리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 언제 내리느냐만 관심이 있다.

        천지간에 일어나는 일을 쥐고 있어야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섬기고 따를 것이 아니냐

        신권을 포기하고 도대체 무엇으로 무지한 백성들을 휘어잡아 다스릴 수 있겠느냐

덕만 : 난 그런 것을 백성들 스스로 알게 해주려고 한다.

           절기를 알고 언제 파종해야 하는지 알고 백성들이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백성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어제 본 선덕여왕의 대사입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대강 편집했으니 맞는지 확인은 말아주세요,.^^

목사님 설교를 읽으며 이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해 연구하여 지식이 생겨서

마치 자신이 다 알고 있고 심지어 하늘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던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어느 곳에서나 있었던 흔한 일이겠지요.

무엇을 위한 지혜이며 지식이냐.

미실은 자신의 권력, 백성들을 다스리는 무기로서의 지혜였고

선덕은 백성을 위한 지혜였다는 차이가

미련한 제가 보기에도 둘의 모습은 선과 악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솔로몬은 미실이었을까요. 선덕여왕이었을까요?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백성을 위한다고 했지만 과연 백성을 위했는지 자신의 명예와 부를 위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는 짓을 보면 미실에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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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1, 2009
*.120.170.243

눈사람 님,

내가 설교에서 전하려고 했던 그 내용을

사극에서 인용하여 정확하게 정리해주다니,

재미있고 놀랍습니다.

요즘도 큰 죄는 지혜(지식)가 많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같지요?

저도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고 무척 애를 많이 쓴 사람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야겠습니다.

미련한 게 좋다는 뜻은 아니구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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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이삭과리브가

September 01, 2009
*.19.22.69

목사님 오랫만에 인사 올립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 눈코뜰새 없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늘 저에게 생수를 공급해 주시는 말씀이 있어 행복합니다

오늘 설교의 말씀을 보면서 신학적인 문제는 아둔해서 잘 모르겠고

다만 은혜로 주신것을 겸손히 받들지 못하고 남용하거나 악용하면 망하고 심하면 사탄의

도구가 되는구나 하는것을 느낌니다

사슴이 뿔자랑할것이 아니라 약한다리를 생각하면서 주의하며 살아야지 하는 생각해봅니다

가을로 접어 들면서 회사일도 많이 바빠졌고 염소떼도 부쩍늘어 200여마리가 넘었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향한 계획 세우고 다짐하며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목사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잘 듣고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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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1, 2009
*.120.170.243

사업이나 가정생활이나 교회생활에서

순박하고 성실한 모범의 모습을 보이시는군요.

한국교회가 이렇게 지탱되는 이유는

장로님 같은 분이 있는 덕분이겠지요.

빈말이 아니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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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geunfeel

September 01, 2009
*.156.50.18

"설교는 어떤 정답을 꼭 짚어서 청중들에게 주는 게 아니라,

그 대답은 늘 오답의 위험성이 있기에,

말씀의 신비를 경험하게 하는 것."

 

목사님 말씀을 읽으면서 제가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가 걱정되어 돌아보곤 했습니다. 다시 돌아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말씀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약간은 불편한 점도 있지만 목사님 만이 해 주실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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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1, 2009
*.120.170.243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가...."하는 말씀에 넘어갈 뻔 했답니다.

동굴 밖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결코 동굴 안으로 돌아가지 않는답니다.

그럴 수가 없지요.

문제는 그 밖의 세계를 감당할 수 있느냐 하는 거에요.

사유의 틀을 완전히 바꿔야하니까요.

주님의 자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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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September 01, 2009
*.179.188.4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독자가 구태의연한 방식에서 벗어나, 성서를 새롭게 읽고 해석하는 태도를 유지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매번 듭니다. 그리고 정목사님의 설교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성서해석에서도 체제유지 또는 현상유지를 늘 타파하시려는 듯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얽매이지 않는 자유스런 태도가 제 눈에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이번 설교도 새로운 관점에서 풀어나가신 것 같은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 기분을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인류 요리사가 손질한 음식을 맛있게 먹기는 했는데 먹고 나서 목에 뭔가 걸린 느낌과 비슷합니다.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을 창세기 설화와 연결시켜서 <제2의 선악과>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대목입니다.

목사님께서도 설교내용에서도 성서기자의 생각과 판단이 중요하다는 말씀은 평소에도 여러 차례 언급하셨고, 위의 설교 내용 중에서도 되풀이 하셨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본문 초반부에 솔로몬이 이방여인들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이 정치적 평화를 얻기 위해서 야훼신앙을 후퇴시켰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예언전통에서 볼 때 이는 지적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토라를 위배한 것도 사실이구요.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는 성서기자는 분명히 솔로몬의 통치 초기에 여호와를 사랑하는 마음의 진정성까지 송두리째 부정할 의도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본문에서 솔로몬의 지혜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대목, 그리고 솔로몬의 지혜 다음에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명재판관으로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지혜"가 그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기록 때문입니다. 성서기자가 솔로몬의 신앙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비판할 의도로 초기활동을 진술했다면 그런 본문은 삭제되어야 마땅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받은 지혜를 <제2의 선악과>라는 지적은 과연 정목사님 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지혜를 심오한 철학이나 인문학적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더라도 단지 이스라엘의 지혜전통에서 해석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알기로는 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이스라엘의 통치자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직접 관련이 있는 재판을 염두에 둔다면 이스라엘의 치리자로서 백성들의 송사를 듣고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는게 이스라엘 예언자 전통에서 볼 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닌지요? 그리고 그런 태도는 비록 그가 말년에 나라를 말아먹었을지언정 초기 그의 태도에 진정성은 존중해 주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성서읽기에 근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그의 마지막 삶에  너무 집중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초기의 신앙의 진정성마저 애써 부정하려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깁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불신앙적인 삶을 존재문제와 관련시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인용하셨는데, 그런 잣대로 성서의 인물을 접근한다면 그 누가 비판의 칼날을 피할 수 있을런지요? 노아나 아브라함인들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모든 인간의 삶에는 명암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게 평민이든 왕이든 말입니다.  일반역사에서는 역사공부하는 목적을 교훈 찾기에 무게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의 역사도 역사라면 역사일텐데 다만 히스토리의 차원을 넘어 이스라엘 민족 집단적 신앙이 그 안에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구분이 되겠지요? 성서의 역사도 교훈찾기에 무게를 둔다면 솔로몬의 약점은 약점대로 강점은 강점대로 그대로 안고 가면 안되는 건가요? 이게 너무 나이브한 접근인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의 말년의 삶에서 비록 본받을 게 없다하더라도 그의 초기 신앙의 진정성마저 부정한다면 솔로몬으로서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솔로몬의 지혜를 선악을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연관지어 해석한 대목에 대해서는 너무 자구적인 해석에 매달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선악>이라는 표현이 표면적으로는 동일해 보이지만 창세기의 <선악>과 열왕기서의 <선악>을 등치시키는 게 과연 성서신학적으로 타당한지는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의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치리자요 재판관의 위임을 받은 통치자로서 그를 부르시고 임명한 야훼께 참과 거짓을 가릴수 있는 능력을 구하는 게 어떻게 신앙적으로 죄가 되는지 답을 듣고 싶습니다. 만일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지혜가 위의 본문과 무관하게 진행된 글이었다면 저는 참신하게 여기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서인 열왕기서의 솔로몬의 지혜를 원초적인 욕망과 관련해서 제2의 선악과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물음표입니다. 여전히 제 안에서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관통이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해석이 진리라는 걸 입증하려면 논쟁과 설득과 논리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한된 설교시간에 모든 사람을 다 납득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제 설교가 끝난 시점이니 이런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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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2, 2009
*.120.170.243

화들짝 님,

긴 대글을 잘 읽었습니다.

긴 답글을 드리지 못해서 이해해주세요.

앞의 다른 답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너무 앞으로 많이 나가는 거 아닌가 하는 위험성을 감수하고

솔로몬의 지혜 문제를 다뤘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에 정황에 놓여 있습니다.

늘 솔로몬의 지혜를 입에 달고 다니거든요.

그 지혜로 수능도 잘 보고, 사업도 잘하고 .... 국가 운영도 잘하고. ...

이런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별로 상관 없는 것이에요.

그런 건 그야말로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의 철학이에요.

그런 건 세상살이의 요령이지요.

이런 설명은 화들짝 님이 원하는 게 아니니, 그만 두구요.

솔로몬의 지혜를 에덴의 선악과와 연결시킨 대목이 목에 걸린 가시와 같다고 하셨지요.

그걸 설득력 있게 말해보라는 거지요?

그 설명에 이르려면 길이 멀군요.

이렇게만 말씀드리는 걸 용서하세요.

저의 영성에서 저 두 사실이 일치되는 걸로 해석되었답니다.

여기서 '영성'은 단순히 인문학이나 심리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 대면하는 저의 영혼 전체를 가리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솔로몬의 지혜와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주제로 책을 하나 쓰면 좋겠네요.

그럴 시간이 주어지려나 모르겠지만요.

그럴만한 주제가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 존재와 행위, 믿음과 윤리의 문제,

인간 인식의 가능성과 한계 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마지막으로,

저는 인간에게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척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지요.

판사와 검사들도 똑같은 대답을 하겠지요.

그렇다면 율법과 법은 왜 필요할까요?

또 질문이 이어지는군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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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September 02, 2009
*.104.196.250

솔로몬에 관한 이 설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어내는 것에 물꼬가 트일 것 같습니다.

열왕기, 역대기 등을 대할 때마다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었어요.

여러 관점에서 일관성이 없다고 해야할런지..

지금 제가 설명하려고 해도 복잡다단합니다.

"분명 이것이 아닌데 이걸 이렇게 받아들여야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변해야하는건데...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이것일까?"

이번 솔로몬의 상황도 그 중 하나입니다.

사실 선한 것보다 선하지 않는 것이 그 삶의 두터운 배경입니다.

성경의 인물로 보지않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를 본다면

이집트의 파라오들과 중국의 황제에 비견할 만합니다.

왕위 쟁탈전의 승리자로서

이스라엘의 황금기를 구가한 것이나

대역사를 일으켜 백성을 착취한 것이나

혼인을 정략화 시킨 것이나, 음란의 극을 치닫는 생활이나...

그러나 모든 면죄부가 되는 것은

그의 일천번제와 꿈 이야기, 예루살렘 성전 건축입니다.

이런 형식은 조선창업의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왕위의 정당성과 공고함을 위하여

그 근거가 부족한 왕들에게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진 패턴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그가 꾼 꿈을 진정 당신이 알 수 있나?' ....

돌 던지지 마십시오.

 

솔로몬의 지혜에 대하여 제가 항상 갸웃거린 부분은 이 구절과 상치되기 때문이었죠.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면 인간적인 방법의 정략과

그를 통해 유입된 여호와 외의 잡신들을 섬기는 것이 가능했는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도저히 용납이 안됩니다.

차라리 다윗이 대낮에 목욕하던 밧세바를 범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솔로몬, 그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자인가..?

 

제 생각이 이렇게 흘러오게 되니 현실에서 짚고 가고싶은 것이 생기고야 마는군요.

100억대의 대형교회건물들 (사실 성전을 건축하겠다는데 성도가 할 말이 없어요.)

일천번제, 대역사로 착취된 이스라엘 백성, 헌금에 눌리는 성도들, 현실적인 지혜(?), 자칭 지혜자...

솔로몬, 그에 대한 환상을 직시하고 싶습니다.

역사서 읽기가 좀 좋아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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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2, 2009
*.120.170.243

동서양 역사의 허위와 그 중심을 꿰뚫고 나가는 힘이 어디서 왔는데요?

날카롭군요.

영웅들이 이룬 업적과 그들의 피폐한 내면 세계 앞에서

그들을 서술해야 할 역사가들도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구약성서도 그런 틀에서 읽어야겠지요.

유니스 님의 총평으로 이제 솔로몬의 허상이 벗겨지고

원래의 모습을 찾은 것 같군요. ㅎㅎ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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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September 02, 2009
*.223.90.153

솔로몬은 교회 경력(?)이 오래될 수로 헷갈리는 캐릭터인듯합니다..

주일학교에선 지혜의 왕으로 심심치 않게 배워오고 또한 중고등부 대학부정도 되면 잠언 읽기로 넘어와서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고 하구요 솔로몬의 아들대에 가서 국가가 분열되어버린 상황이나 이방여인들과의 혼인들로 부정적 뉘앙스를 조금은 받을 수 있었으나 중심은 항상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설교는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던듯 합니다.. 설교본문과 제목에서 첨에 약간 의아했었는데(요셉꿈이야기에서 부터 교회에서 꿈이야기는 거의 칭찬 일색이죠..) 반전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지요..


설교 댓글들을 보다가 제가 들은 목사님 설교중에선 잠언 본문의 설교가 거의 없었던거 같아서 목사님은 잠언, 아가서 ,전도서 같은 책들을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했는데 다른 댓글에 보니 나와있군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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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2, 2009
*.120.170.243

솔로몬에 대한 성서기자들의 진술은

그 행간까지 뜯어볼 때 가혹합니다.

그런 그를 단지 지혜로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신앙의 전범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성서읽기의 깊이가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겠어요?

내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보이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군요.

잠언, 전도서, 아가서는 주일설교의 본문으로는 함량미달이랍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지혜를 배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운명을 건 사람이거든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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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September 02, 2009
*.229.154.102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말씀은 지난해 서울 오프에서 언급하셔서 그런지,

그렇게 낯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설교시간에 잠깐  이 말씀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장 42절

 

솔로몬 보다 더 큰 이..

그러니까 예수님이 궁극적 생명의 실체이며, 참 지혜이심을

복음서 기자, 초기 기독교인들이  명확히 인식한거군요.

제게는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큰 떨림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아마도,  이 '궁극적 생명'에 대한  '빛내림'(제 식의 표현이에요^^)

을 경험한 것인지도요. ^^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2, 2009
*.120.170.243

앗, 내가 참조하지 못한 마태복음 구절까지 끌어들이는

라라 님의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빛나는군요.

율법과 토라와 지혜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로 집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체랍니다.

복음서 기자들과 서신서 기자들이 몽땅 거기에 매달렸거든요.

주님, 우리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의 신비에 더 깊이 들어가게 도우소서.

profile

[레벨:6]novemberhan

September 09, 2009
*.202.224.137

감사하게도 이전에 설교시 이 장을 짚은 적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의 요구 사건의 15절이 제겐 답이었는데요..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더라" 사람이 구하는 그것은 일장춘몽 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지혜로운 판결장"은 예전에 구미정 교수님께서 글의 요지를 짚으신 것 같습니다.

그때도 지혜는 왕의 판단이 아닌 생명을 구원코저 하는 어미의 모성이었던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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