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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힘과 열림

성령강림절 조회 수 10124 추천 수 0 2009.09.21 14: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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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가복음 7:31-37 
 

닫힘과 열림

(막 7:31-37)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거나 장애를 고친 일이 많습니다. 귀신을 내쫓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거나 들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입니다. 첫째, 성경을 순박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실증적인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복음서는 실제로 벌어진 일을 기록했을 거라고 믿는 겁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이니까 그런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그런 일들은 고대인들의 미숙한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거지요. 성경을 지성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셋째,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믿지 않을 수도 없고, 무조건 믿자니 지금의 현실 경험과 위배되니까, 어정쩡한 태도를 취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어느 쪽이 옳을까요? 세상살이에 바빠서, 또는 그런 문제는 신앙과 별로 상관이 없는 거로 보고 별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일단 이런 질문을 안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그 과정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에바다

예수님이 긴 여행 끝에 갈릴리 호수 근방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언어 장애를 앓고 있는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안수를 받아 고침을 받으려는 생각입니다. 이런 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에 흔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의료행위를 주술적인 차원에서 이해했으니까요. 요즘도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신유집회가 간혹 벌어지기도 하고, 예상 외로 큰 호응을 얻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물에 빠진 이의 심정으로 이런 집회에 따라다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그 장애인만을 데리고 다른 장소로 가셨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손에 뱉어 그의 혀에 대시면서 ‘에바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종의 퍼포먼스로 보이는 이런 행위도 고대 유대와 헬라 시대에는 흔했습니다. 에바다는 아람어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이 장애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이 분명해졌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셨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일은 크게 떠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요. 오늘로 바꿔 놓고 생각해보세요. 어느 교회에서 장애인이 기도를 받고 치유되었다고 합시다. 그걸 숨겨야 할까요? 그럴 교회는 아마 하나도 없을 겁니다. 신문과 티브이 기자들을 불러서 알리느라 정신이 없겠지요. 예수님은 왜 그 장애인 치유 사건을 소문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을까요? 

장애인 치유 사건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직접적인 단서가 아닙니다. 그런 능력은 고대 시대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런 호기심으로 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오해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뒤에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열광했습니다. 오천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충분히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승천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요 7:66)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배불리 먹은 것뿐이었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의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말씀을 전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눅 16:31) 이런 초능력, 초자연, 기적 같은 일들은 그저 호기심을 자극할 뿐이지 신앙의 근본에 눈을 뜨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 대목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신앙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적, 치유, 축귀에 대한 이야기가 왜 복음서에서 자주 거론되는가 하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 좀더 귀를 기울여봅시다.

오늘 본문의 키워드(keyword)는 ‘열림’입니다. 앞에서 잠시 설명한 대로 예수님은 언어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리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오랫동안 듣지 못하고, 따라서 말하지 못하던 사람입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면 결국 소리를 내는 방법도 까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예 말을 못하는 벙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을 가리키는 헬라어 ‘모기라로스’는 전혀 못하는 장애와 더듬는 장애의 두 가지 뜻을 다 갖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뒤의 뜻이 강합니다. 그냥 편하게 언어장애인이라고 합시다.  

우리는 이 사람의 인생 여정을 모두 따라갈 수 없습니다. 소설을 쓰는 글쟁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의 인생을 새롭게 구성해서 세상의 새로운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겠지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를 기억하면 될 것 같군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오랫동안 그곳에서 치료받고 있는 덩치 큰 환자는 듣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겉으로만 그런 거지요. 그는 무슨 인생의 상처 때문인지 아무 것도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 흉내를 냈습니다.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이 사람은 주인공과 말을 나누기 시작했고, 결국 정신병원을 탈출합니다. 본문의 이 장애인은 예수에게서 ‘에바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장애를 얻은 뒤로 생전 처음 인격적인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 순간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분명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35절)

사람들은 이 장애인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놀라워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에게 놀란 것입니다. 이 사람의 치유를 똑같이 전하고 있는 35절과 37절의 문장 구조가 서로 다릅니다. 35절은 장애인이 주어라고 한다면, 37절은 예수님이 주어입니다. 예수님이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적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메시아적 사건은 이사야가 이미 오래 전에 전한 메시지에 담겨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바로 그 말씀을 기억했겠지요.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장애 치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적인 구원 사건을 경험하고 놀라며 찬양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바로 그 예수님 앞에서 놀라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앞에서 치유, 치병, 축귀 같은 초자연적 기적 사건이 신앙에서 본질적인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호기심은 오히려 신앙을 방해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 말씀과 바로 위에서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귀가 열릴 것이라는 이사야 35:5,6절을 인용해서 설명한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지 않으시나요? 두 가지 관점은 분명히 다릅니다. 기적 사건 자체에 호기심을 보이고 열광하는 것과 예수님을 놀라워하고 찬양하는 것은 다릅니다. 마가복음이 본문에서 말하려는 것은 물론 후자입니다. 마가복음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지 장애 치료는 아니었습니다. 장애 치료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통로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설명이 좀 복잡하게 들리시나요? 그래도 여러분이 그걸 정확하게 알아야 하니까 보충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오히려 그는 그런 초능력인 일과는 정반대되는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무능력한 사건입니다. 놀랍게도 그 무능력한 사건이 메시아에게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큰 기적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되는 십자가도 역시, 아니 그것만이 구원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만 참된 메시아적 구원이 일어났으며, 앞으로 그를 통해서 완성될 것입니다.

보충설명으로 머리만 더 복잡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뻔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구구하게 설명한 건 아닌가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직접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는 대개 믿음을 가시적인 성과에서만 확인하려고 합니다. 병이 낫고, 돈을 잘 벌고, 출세하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으로만 하나님을 경험하려는 경향이 큽니다. 큰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입니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면 다음 일을 계획합니다. 죽을 때까지는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신앙의 강도를 확인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장애를 고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그 뒤로 어떻게 살았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직장을 얻었거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도 낳았을지 모릅니다. 이것으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까요? 장애 치유로 완전히 구원을 받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일시적입니다. 결혼도 그때뿐입니다. 멋진 집도 그때뿐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일들로 이전보다 더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할 때가 훨씬 좋았다는 마음이 들 순간도 불현듯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난날 장애를 고침 받았듯이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다시 예수님을 찾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말을 더듬는 상태와 비슷합니다.


메시아 경험

여기서 무엇이 문제일까요? 예수님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공연한 것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게 대답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예수를 메시아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예수님을 마술사, 심리치료사, 도덕선생, CEO나 리더로만 경험합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예수님을 실제로 메시아로 경험하고, 그래서 매순간 놀라워하면서 그분을 찬양하면서 살아가리라고 봅니다. 그런 분들은 주마가편의 의미로 이 설교를 들으시면 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메시아적 사건은 곧 구원이며 생명입니다. 오늘 본문의 키워드로 말씀드린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열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닫힘의 세계에서 열림의 세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열림은 생명의 특성입니다. 모든 생명은 주변 세계로 열려 있습니다. 그것이 단절되면 생명은 끝장입니다.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음식을 공급받고, 공기를 들이마십니다. 세상으로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듯이 하나님의 숨을 들이마시지 않으면 사람은 영적으로 죽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는 문입니다. 그 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영화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산제이 일라 반살리 감독의 <블랙>은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동시에 앓는 8살 소녀 미셸 맥날리가 데브라이 사하이 선생님을 만나서 빛을 발견한다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헬렌 켈러의 삶에서 예술적 동기를 얻었습니다. 헬렌 켈러가 어둠의 세계로부터 빛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과 미셸이 경험한 그 순간이 똑같습니다. 미셸은 손바닥 촉감으로 알파벳을 배웠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언어와 사물이 미셸의 인식과 사유에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사하이 선생님은 미셸을 분수대의 물에 빠뜨립니다. 거기서 허우적거리던 미셸은 그 순간 어떤 영감에 사로잡힙니다. 선생님은 그의 손바닥에 water이라는 알파벳을 써줍니다. 미셸은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무, 풀,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킨다는 사실 말입니다. 모든 게 어둠, 블랙이었던 그의 영적인 세계가 빛으로 나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뒤로 손에 닿은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선생님보다 먼저 눈이 내리는 것을 느낍니다. 세계가 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안으로 깊이 뛰어든 것입니다.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그 영화에서 유명한 경구가 나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블랙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눈으로 보면서도 여전히 어둠에서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세상을 보지 못하지만 빛을 보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장애와 가난은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빛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구 곳곳에, 인간 경험의 가장 세밀하고 어두운 곳에 편만하시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멀쩡한 눈과 귀와 사지를 갖고 있으면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서도 그것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살기 때문에 그것 너머의, 그것의 깊은 세계와 단절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그런 일들은 신자들에게도 흔하게 일어납니다.

<블랙>에서 중요한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미셸은 빛을 보았지만 여전히 장애를 갖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게 불편합니다. 모든 게 여전히 어둡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빛을 본 우리도 여전히 이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궁핍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예수님을 통해서 경험한 구원의 기쁨을 때때로 망각할 정도입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 있기만 한다면, 주님의 말씀과 성찬을 간직한 교회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기만 하다면 그 생명의 빛이 결국은 우리의 존재 전체를 휩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는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여전히 닫혀 있나요? 열림의 경험은 억지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분들은 그분의 은총에 감사하십시오. 없는 분들은 은총을 구하십시오. (2009.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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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September 21, 2009
*.106.156.126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큰(?) 의문하나가 풀렸습니다. 

물론 제가 너무 성경을 몰라서이기도 합니다만...  좀 부끄럽군요.

예수님이 장애인을 고치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 후

그들에게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셨다는 것이 늘 이해가 되지 않았었거든요.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 약간의 오해도 하구요.

이제 확실히 알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통해 미셀처럼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손을 내밀어보렵니다.

주님!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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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September 21, 2009
*.120.170.243

비기너 님,

의문이 풀리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런 과정은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탄탄한 토대를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성서의 정보를 전문적으로 알아간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어떤 방향을 향해서 영적인 눈을 두게 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자기연민으로부터 성서텍스트의 세계로 뛰어드는 동기가 주어지게 되는 거지요.

우리가 아는 기독교에 대한 지식과

영적인 현실성이 일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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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September 21, 2009
*.117.246.250

언제부턴지 다비아에서 매주 설교말씀을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네요.

설령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이 낫거나 물질의 복을 아무리 받고 기적을 체험하더라도,

그 분이 가르치신 사랑의 하나님, 아바 아버지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정말 불행한 삶일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고 많은 기적을 행했잖습니까?"

라고 반문하지만 정작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없어 다 내쫓긴다고 하셨는데...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그런 초능력자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위해 버려지고 소외된 삶을 택하신 '외로운 예수님'께 촛점을 맞추기로 다짐해봅니다.

이번 말씀을 읽으며 특히 눈에 들어온 문장이 이것이었습니다.

"35절은 장애인이 주어라고 한다면, 37절은 예수님이 주어입니다."

요즘에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관해 묵상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주어(主語)인 삶'의 중요성을 크게 느낍니다.

결국 사람들이 갈망하는 치유와 문제 해결도 궁극적으론 그 곳에 있는 것 같고요.

항상 깊은 생각과 깨달음의 기쁨에 잠기게 해주시는 말씀... 매우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을 더 알아가기 때문에 그만큼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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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September 21, 2009
*.120.170.243

나도 김용남 군의 대글을 애타게 기다리게 되네요.

어쩌면 저렇게 기특하게 생각하고 글을 쓸가 하고요.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성서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고

생각의 폭도 넓군요.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는 것만은 사랑하게 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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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September 21, 2009
*.217.40.89

육신의 눈으로 

닫힘과 열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곳의 닫힘을 알아보시고

또한 열어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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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September 22, 2009
*.120.170.243

인간의 깊은 곳은 곧 영혼의 자리에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생명 조건에 속박당하지 않는 생명의 차원이기에

좀 멀게 느껴지는 탓이지요.

그 영혼의 울림을 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을 거에요.

그 안에 들어갈 때 우리는 중심에서 찬양을 드릴 마음이 솟구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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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희락당

September 22, 2009
*.21.59.136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미래가 현재로 침입한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고통의 문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보입니다. 에바다 사건의 초점은 병고침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을 담보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보면서 매일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그분을 찬양하기에는, 현재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의 문제가 너무도 커 보입니다. 비록, 영화 <블렉>의 주인공 미셸이 시각장애인으로서 어둠 너머에 있는 빛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당하는 시각장애인으로서의 고통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는 것같습니다. 몰트만은 신정론의 문제를 그의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변증법적으로 잘 풀어내고 있긴 한데, 결국 신정론의 문제를 완전히 풀수는 없고 종말론적인 문제로 열어놓고 있는 것을 볼 때(신정론의 완전한 해결을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때로 미루는 것), 현재 이 땅에서 당하는 고통에 대한 신학적 변명(?)은 왠지... 궁색해 보입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왜 하나님은 침묵하실까요? 그냥 그 고통을 지금 여기에서 즉시, 없애주시면 안 되는 걸까요? 죄송합니다. 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구요. 설득력 있는 신학적인 답을 제 자신도 알고 있으나, 생각해 보면 볼수록 미궁으로 빠지는 것 같아... 그냥 몇 자 적어봤습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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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September 22, 2009
*.120.170.243

희락당 님,

신정론 문제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기준과 인식 범주로 모든 것을 재단하면 곤란합니다.

장애가 불편하고 불행하고 견디기 힘든 삶의 조건이지만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비장애인보다 더 크고 본질적인 은총이 임하는 계기인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위로와 격려와 덕담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 삶에 대한 실질적인 차원에서 주신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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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September 23, 2009
*.136.37.11

새벽예배, 금요철야예배 열심히 다니시는 집사님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얼마전 아내가 그 집사님과 같이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 집사님은 " 예배를 열심히 다니니까 사업이 잘된다. 그래서 더 열심히 다닌다" 라는 말을 했답니다.

가슴이 답답해옴을 느꼈습니다.

 

비단 그 집사님만이 아니라 목회하고 계시는 많은 목사님들이 은연중에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그 목사님들께 설교를 들은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세뇌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하고 설득하고 성경의 의미를 다 해석해서 말해도

말로는 이해한다고 안다고 해도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해 있는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쉽지 않으신 일이었기에

저도 그저 기도라도 열심히 하자 라고 생각하고 덮어두기에는

제 성격이 그러하질 못하고...

그래도 무언가를 해야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 같고(솔직히 칭찬은 받고 싶거든요.)

안하면 하나님께 큰 잘못을 하는 것 같고..

 

그러던 차에 오늘 설교 말씀을 읽었습니다.

인터넷 잘 안들어오는 기복 신앙에 푹 빠져 있는 집사님들에게

이 설교 말씀을 프린트해서 편지로 보내려고 합니다.

저작권료는 못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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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September 23, 2009
*.120.170.243

예, 눈사람 님, 새로운 교회 공동체에서 기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지요?

위의 설교가 도움이 되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저작권료에 대해서는 입 벙긋하지 않을 테니,

퍼다 날라주세요.

그것도 좋은 선교 방법 중의 하나이겠지요.

좋은 추석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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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퀄리아

September 23, 2009
*.111.172.208

이번 설교 말씀에서는 숙연해짐과 감동을 느꼈습니다.

짧은 인생이지만, 타락의 순간도 은혜의 순간도 모두 주님의 은혜였다는 눈이 열린건

불과 몇 년전이었습니다. 이미 주님에게 메인 몸, 타락도 절망도 없다는 소중한 눈이 열린 것에

다시 한번 감격이 솟구칩니다.

더불어, 신앙의 시작부터 주님은 세상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살아 온 인생이 헛되지 않다는

생각을 설교말씀을 통해서,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약간 시각을 바꿔서, 예수님의 병고침과 기적들은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믿어야 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설교말씀을 통해서만은 해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사건 보다, 메시아로서의 주님을 봐야 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도올 샘도 부활사건이 사실인지 여부가 중요한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이런 궁금증이 살며시 곁가지로 나오기에 질문 올려봅니다. 그 성서의 기록을 사실로 해석을 해야하는가 ???

물론, 창조주 하나님'께서 못하실 일이 없다는 데에는 의심을 두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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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September 23, 2009
*.120.170.243

퀄리아 님,

복음서가 보도하는 일반적인 표적과 이적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비교될 수 없는 것들이에요.

도올 선생이 부활에 대해서 말하는 건 아마추어적인 시각이랍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사건은 사실의 차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지만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면 기독교 자체가 허물어진답니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은 바로 예수의 부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종교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극한의 휴머니스트가 되는 것도 아니고,

사회 리더가 되자는 것도 아니에요.

한 가지 사실에 묶여 있어요.

예수를 믿는 우리도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사실말입니다.

도올 선생이 쓰신 기독교에 대한 책은 별로 권장할만하지 않습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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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퀄리아

September 23, 2009
*.111.172.208

네 !! 잘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께서 주시는 단잠으로 좋은 잠자리 되십시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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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September 25, 2009
*.83.93.130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이 세상의 창조주로서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엎을 수도 있었지만

철저하게 순종한 것이 바로 기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닫힌 세계를 뚫고

하나님을 향해 온전히 열어둔 사건이 아니런지요?

예수님을 통한 메시아적 사건으로  종말에 이루실 완전한 구원의 기쁨과

생명을 향해 오늘도 참된 기적이 무엇인지?

종말로 향해 열려진 세계에 내 삶의 중심을 다시 가다듬어며

종말로 부터 오는 은총의 빛에 찬양을 드리고 싶은 밤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가을밤입니다.

일상 가운데 늘 기적과 열림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길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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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September 25, 2009
*.120.170.243

달팽이 님,

지리산의 정기가 여기까지 전해오는 듯하군요.

자연 영성과 기독론적 영성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야겠지요.

놀라운 생명의 신비가 우리의 영혼을 휩싸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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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September 25, 2009
*.109.153.7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는 경험??? 그것이 어떤 것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며, 그 은총을 구하라고 하시는데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나름 목사님의 말씀들을 주제별로 정리하고 조금씩이라도 날마다 읽고 곰곰히 생각해보곤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우리가 구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으나

하나님의 은총을 구한다는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필요로 하는 건가요?

날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드림을 통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도가 아니라도

내안에 마음 깊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을 원하기만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 건지...

그리고 그 경험의 상태는 어떤 모습(진리를 깨달음? 성령의 감동?)으로 나타나는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여전히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의심하고 삶이 하나님과 일치되지도 않고 좋은 열매를 맺지도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그나마 제가 아직 닫혀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깨달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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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September 25, 2009
*.120.170.243

방랑자 님,

솔직하면서 신앙의 무게가 묵직한 질문이군요.

기독교 신앙이 들은 풍월이나, 그러려니 하는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경험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지금 방랑자 님의 궁금증은 소중한 겁니다.

이에 비해 내 대답이 궁색할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오는 주일 27일의 설교가 이런 질문과 연결되는군요.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고 했으나

하나님은 등만 볼 수 있다고 하셨답니다.

하나님은 어떤 실체가 아니에요.

그래서 그분은 영광으로만 존재하시는 거에요.

그것을 불꽃이나 빛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전적인 자유, 초월, 근원인 어떤 이를 가리키는 거에요.

판넨베르크는 그 하나님을 가리며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라고 했어요.

그 분을 우리가 경험한다는 것은

<블랙>의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하답니다.

내 설명이 더 복잡해졌나요?

하나님 경험은 내 존재 전체를 사로잡고 이끌어가는

절대적인 힘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알려면 성서가 묘사하는 하나님 경험을 공부해야겠지요.

이 문제는 한 두 마디로 끝나는 게 아니니 여기서 접구요.

은총을 구한다는 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지요?

그것을 어떤 하나의 방법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예배와 기도와 찬양 등, 종교 행위는 그것을 위한 형식이구요.

근본적으로는 영혼의 활짝 열어놓은 일이겠지요.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알고 있던 기존의 생각에 매달려서는 곤란합니다.

다른  글에서 설명한 것을 반복해야겠군요.

하나님 경험은 곧 시인들의 시 경험과 비슷하답니다.

시가 자기에게 오는 경험인 거에요.

우리는 성서와 신학을 꾸준히 학습하고,

경건 훈련에 집중하며,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 안개 낀 숲속에서 아침 햇살을 만나듯이

빛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을까요?

그게 열림의 순간이겠지요.

좋은 질문,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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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좋은나무

September 25, 2009
*.237.1.73

목사님의 댓글이 더 명확해질 때가 있어요.

"하나님 경험은 내 존재 전체를 사로잡고 이끌어가는

절대적인 힘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말씀 자체도 당사자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겠죠?

그래서 신비인가요?

아직 잡히진 않지만 의식하지 못한 순간 빛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때.

그 때를 기다리며 답답함 가운데 살아가야 하겠네요!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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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September 26, 2009
*.120.170.243

좋은나무 님은 지금 한창 젊은 시절을 살고 있으니,

앞으로 기독교 영성의 깊이로 더 들어갈 가능성이 많답니다.

아마 본인이 어렴풋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세계가 있을 거에요.

수학에도 구구단만 있는 게 아니라

미분과 적분이 있듯이 말이에요.

언젠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풀 때가 오겠지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끌어가는 궁극적인 reality가

놓은나무 님의 영적 시야에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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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좋은나무

September 26, 2009
*.248.155.44

목사님.

제가 어렴풋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세계가 있음을 생각해보면서 잊지않고 살아간다면

참 겸손해질 수 밖에 없겠네요!

그 reality가 영적시야안에 들어오기를 저도 소망합니다.

해야 할 노력을 최대한 하되 결국 계시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구해야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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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September 27, 2009
*.235.166.133

목사님의 설교로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이 생각이 나서 사도행전 9장을 펼쳤습니다.

 

v3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느니라.

v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v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닫힘과 열림'의 이 사건이 바울에게도 같은 원리로 일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갑작스러운 육신의 장님이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그 눈이 다시 회복되었다는 이야기..

멀쩡한 눈이 시력을 잃게 되고, 기적적으로 다시 회복되는

그런 극적인 일을 격어서 바울이 회심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의 빛에 의해서 먼저 시력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진리의 수호자로 자신만만하게 어둠을 걷고 있던 사울이

하늘로서 오는 진리의 빛을 통하여 먼저 자신이 장님인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닫힘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그 때 철저히 알게 된 것이지요.

그 이후에 영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눈의 비늘이 벗어지는 열림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육신의 눈이 열리고 닫히는 기적으로 인해 그가 돌아선 것이 아니라

진리의 빛과  영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인간의 깊은 곳의 닫힘의 자각과 열림의 사건이

그 다메섹으로 가는 길위에 일어난 것 같습니다.

 

동일하게,

진리안에 거한다고 자고하여 닫힘에 있지않기위하여

진리의 영께서 늘 통찰해주시기를,

또한 미숙한 영혼이 무한하고 완성된 진리를 향해 가는 길을

계속 열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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