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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과 등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799 추천 수 1 2009.09.28 14: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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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애굽기 33:12-23 
 

하나님의 얼굴과 등

(출 33:12-23)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불세출의 영웅입니다. 그에 관한 일화는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중의 몇 가지는 여러분도 잘 알 겁니다. 그 모든 이야기는 출애굽 사건과 연결됩니다. 그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사고를 치고 미디안 광야로 망명을 나왔다가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양을 키우면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가시떨기 나무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출애굽의 소명을 받습니다. 그 장소가 호렙 산입니다.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가서 파라오와 한바탕 기 싸움을 벌인 끝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다시 미디안 광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 소명을 받은 그 산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는 이 산의 이름을 시내라고 했습니다. 산 이름이 달라서 모세가 소명을 받은 산과 십계명을 받은 산이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같은 산입니다. 편의상 우리는 그 산을 각각 호렙과 시내로 다르게 부르겠습니다.

호렙 산과 시내 산에서 일어난 일은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똑같습니다. 세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호렙 산이나 시내 산 모두 모세가 하나님을 경험한 산입니다. 둘째, 모세는 두 곳에서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호렙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라는 명령이고, 시내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가나안까지 가라는 명령입니다. 셋째, 모세는 각각 두 곳에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이게 중요한 대목입니다. 호렙 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내 산에서도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나갈 테니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서가 따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고, 대신 등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출 33:23) 뭔가 이상하게 들리지요? 하나님의 얼굴은 뭐고, 등은 무엇이란 말인지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

먼저 모세가 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는지를 봅시다. 지금 모세는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나오기는 했지만 광야를 횡단할 길이 막막해 보입니다. 길이 험하다는 것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들은 불평과 투정이 많았습니다. 급기야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아론을 부추겨서 금송아지를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이 일로 모세는 삼천 명 가량을 즉결처분으로 죽였습니다.(출 32:28) 그때 모세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그 백성들을 온전한 정신으로는 죽일 수 없습니다. 일벌백계의 심정으로 그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런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까지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겠지요. 차라리 광야에 터 잡고 각자 알아서 살아가라고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닦달하십니다.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출 33:1) 이 명령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내라는 명령과 똑같습니다. 호렙 산에서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시내 산에서의 명령도 비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를 설득하는 일이나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광야를 횡단하는 일이나 모두 불가능해보였습니다.

모세는 이거 말이 안 되는 말씀이라고, 내가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냐고 버텼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 호렙 산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파라오와 다툴 수 없다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2) 무슨 말인가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는 일,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이끌어내는 일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면 모세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호렙  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 문장은 “나는 나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의 번역을 따르면 “나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바로 그다.”이기도 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을 사람의 인식 범주로 규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은 옳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면서 또한 진노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는 분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아무런 응답을 주지 않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호렙 산 전승과 동일한 의미의 오늘 본문인 시내 산 전승에서 이 사실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요구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그 험한 여정에 하나님이 함께 가리라는 사실을 믿으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카봇’의 번역인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모세의 요구는 하나님을 보고 싶다는 뜻으로,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싶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위에 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석 위에 계속 서 있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 모세는 반석 틈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모세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마치 태풍이 불 때 암탉이 병아리는 감싸 안는 형국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지난 뒤에야 모세는 반석 틈에서 나와 그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영광을 정면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이미 지나갔습니다. 지나간 흔적만 볼 뿐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반석 틈에 감추고 손으로 덮은 이유를 출애굽기는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바로 이 사실이 모세가 처한 딜레마이고,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고 싶습니다. 뭔가 확신을 얻고 싶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숙명적으로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 여기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마지막 때가 되어야 얼굴로 얼굴을 보듯이 실체를 직접 볼 수 있고 한 바울의 주장(고전 13:12)도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대목에서 언짢게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놀리는 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믿으라는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더 극단적으로는, 그런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로 논리 실증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그렇습니다. 실증으로 드러난 것 말고는 말하지도 않겠고, 말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믿을 수도 없다는 겁니다. 속된 표현으로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는 식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주먹은 실제로 보이는 거니까요. 주먹은 아주 직접적이고 효과적이니까요. 믿음생활도 그렇게 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당장 확인하고 증명하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등만 보여준다는 말씀은 말이 안 되는 억지인가요? 아닙니다. 그것을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분은 창조와 종말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을 직접 본다는 것은 생명의 궁극적인 실체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타임머신을 타고 종말의 시간으로 간다는 의미와 비슷합니다. 이미 완성된 세계 안에 들어간 사람은 지금 잠정적인 이 세상을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이라고 한다면 지금 살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바꿔서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미래를 완전히 다 알게 되었다고 합시다. 여러분의 운명이 어떻게 될는지를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설명하는 걸 용서하세요. 내년에 여러분이 산 복권이 5억 원짜리 1등에 당첨될 거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다고 합시다. 또는 자동차 사고로 불구가 될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합시다. 더 나가볼까요? 여러분이 죽어서 무덤에 썩고 있는 장면을, 또는 화장터에서 재로 변하는 그 장면을 실제로 확인했다고 합시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살아갈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이미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면 현재 삶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경험은 미래 경험입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의 비밀입니다. 그걸 직접적으로, 얼굴을 보듯이 아는 날에는 이미 우리는 죽는 거나 다를 게 없습니다. 죽은 사람만이 그 미래를 실체로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은총이라면 지금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는 뜻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원칙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말은 거의 없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 앞으로 존재하게 될 바로 그분에 대해서 인간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그분의 등만 보는 우리가, 그분이 지나간 흔적만 보는 우리가 절대타자인 그분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질그릇인 우리가 토기장이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닙니다. 그는 안개처럼 우리의 영적 시각을 흐리게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행동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 가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내가 친히 가리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모세보다 먼저 이집트에 가셨습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보다 먼저 광야를 횡단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시며, 우리의 기대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을 제공하십니다. 이런 좋고 귀하고 확실한 것을 우리는 왜 경험하지 못하는 걸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시는 늘 새롭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운 프로그램대로 세상을 다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비전대로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성서기자들은 바로 그 다른 현실성을 본 사람들입니다. 마 25:31절 이하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말하려는 것도 역시 구원은 우리의 설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결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상과 다른 결과가 벌어져서 실망하고 놀랐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보십시오. 모세가 주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주신 말씀도 그것을 말합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세상에 알리신다는 것을 성서가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길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의 대상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걸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은 하나님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말이 교리적이어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아주 실제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서울역 광장에는 노숙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멋진 사무실과 따뜻한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까운 사람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보셨나요?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자유에 가깝다면 그분들은 저보다 하나님 나라에 실제로 더 가까운 겁니다. 저는 그분들의 자유를 따라가지 못하니까요. 이것을 말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세상의 상식적인 판단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열린 태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인류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 중에서 가장 큰 것, 가장 절대적인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도, 유대의 모든 선생들도, 로마 총독 빌라도도, 심지어 제자들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 통치 사건입니다. 그것을 알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세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만 보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예배 중에 공동으로 읽은 사죄기도의 마지막 단락을 기억하시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밝게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가리키듯이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요 14:9)

그러나 우리의 인식이 제한적이기에 그 경험도 결국 종말에 가서야 완성될 것입니다. 종말에 우리는 하나님을 단순히 빛과 영광이라는 메타포가 아니라 실체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생명이 완전하게 발현되는 순간입니다. 얼마나 놀라울까요? 얼마나 설레는 일일까요? 그런 순간을 향한 기다림과 희망이 없다면 우리가 이 지루한 삶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때의 환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로 당겨 누리며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영적인 시야에 하나님의 얼굴이, 그의 광채가 들어올 것입니다. 아멘!(2009.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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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geunfeel

September 29, 2009
*.47.249.215

말씀을 읽으며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보지 못 하는 것이 은총이라는 말씀,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서 그 영광의 실체를 인식한다는 것...

사실 소양이 짧아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엉뚱한 소리 늘어 놀 까봐 멘트를 다는 것이 두렵지만 감사하는 마음에, 그리고 혹 다른 분들도 용기내서 댓글 다시라고 짧게 적습니다.

목사님은 월요일의 큰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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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September 29, 2009
*.120.170.243

[레벨:6]geunfeel 님,
[레벨:6]설교를 기쁨으로 느끼셨다니
[레벨:6]저의 생각과 비슷한 데가 많으신 거군요.
[레벨:6]"엉뚱한 소리 늘어 놀까봐...." 하셨는데,
[레벨:6]그런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답니다.
[레벨:6]자신의 생각을 조금씩이라도 표현해보는 것은
[레벨:6]신앙 성장에서 중요한 요소랍니다.
[레벨:6]용기를 내 봅시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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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좋은나무

September 29, 2009
*.237.1.73

목사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미래를 온전히 알 수 없기에 현재의 삶이 의미가 있다. 하나님 경험은 미래 경험입이며, 그 하나님은 세상의 비밀이다."

"생명이 완성되는 종말을 향한 기다림과 희망이 없다면 이 지루한 삶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그 때의 환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로 당겨 누리며 살아가라"

가슴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미래를 알 수 없음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미래의 하나님체험을 오늘로 당겨서 살아갈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씀. 우리의 프로그램과 비전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 또한 깊이 와닿습니다.

제 경험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제 계획대로 삶을 진행 시켜오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큰 확신에 가득차 비전을 받았다 하시고 그 비전이 꼭 이루어질거라 하십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소위 위대한 '비전'을 바라보며 꿈꾸라 하시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믿음과 열심이 뭔가 부족한듯 느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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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September 29, 2009
*.120.170.243

좋은나무 님이 설교 중에서 핵심 되는 구절을 쏙 뽑아주셨군요.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데서 부터 신앙이 시작한답니다.

이와 달리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에,

더 정확하게는 자기의 욕망을 하나님에게 투사시키고 하지요.

좋은나무님은 한창 젊은 나이인데,

삶이 지루하다는 말을 이해해요?

지루하다는 표현은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어요.

매일의 삶은 늘 새로워야겠지요.

그런데 지루하다는 말은 매너리즘에 빠진 삶을 가리킨답니다.

그래서 외부의 자극만을 요구하는 삶이 되는 거지요.

매 순간을 주님 안에서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삶은 신나는 것이기도 하답니다.

그래도 역시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지루함을 완전히 면하지는 못하지요.

매일 똑같이 먹고, 마시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 해에도....

그리고 죽지요. 음흠.

너무 심각하게 듣지는 마세요.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등을,

예수에게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경험하는 게 기독교 신앙이겠지요?

어떻게 보면 등과 얼굴은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결국은 같을 수도 있답니다.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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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September 29, 2009
*.244.165.186

하나님의 빛, 거룩한 두려움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 면전에서의 삶, 이란 상황이 엄청난 감격으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특이할 정도의 엄청난 감격이 동반되는 오늘의 설교,

특히 하나님의 면전이라는 이 사실에 눈물이 나올정도의 엄청난 감격이 동반되는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봐야할 듯 합니다.

왜 제게 이렇게 엄청난 감격과 깨달음으로 다가올까요?

제가 놏치지않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샘터교회를 다닐 때의 저의 상황과 별반 달라진것은 없는데,

다만 저의 생각을 내려놓고,

성령의 최우선성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있는 중이었습니다.

 

목사님,

이런 감격은 저의 성장단계에서 주어지는 과정일까요

아니면 어떤 메세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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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September 29, 2009
*.120.170.243

초신자 님의 경험에 대해서

제가 뭐라 말할 입장은 못 됩니다.

그런 경험은 아주 개인적이고 특수한 것이니까요.

마치 사랑에 푹 빠져서 매일 서로만 생각하는 젊은 두 남녀를

옆에서 바라보는 입장과 비슷하답니다.

그 사랑, 또는 빛의 경험이 고귀한 분으로부터 온 것인지,

또는 다른 피조물로부터 온 것인지도

다른 사람이 판단하기는 어려워요.

그 경험이 삶에 어떤 열매를 맺는지에 따라서

자기자신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열매는 자유, 기쁨, 평화, 관용, 용기 같은 것들이지요.

또 중요한 것은 빛의 경험이 계속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스쳐지나가듯 어떤 생명의 빛을 경험하지만

어느 순간에 생명의 껍데기에 휩싸이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그 빛의 경험은 정말 소중한 겁니다.

그것을 잊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어둠의 길로 떨어졌다가가 다시 그 빛으로 돌아오게 되니까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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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좋은나무

September 30, 2009
*.237.1.73

정목사님.

저 또한 '지루하다'라는 표현이 약간 의아했었는데, 결국 매너리즘 이란 의미였군요.

저는 목사님께서 종말과 대비하여 그 날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심정을 표현하시기 위해 지루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셨나 했습니다.

그래도 전 아직 젊어서 그런지 목사님이 표현하신 '지루함'의 의미를 다 깨닫진 못하겠습니다 ㅎㅎ

등과 얼굴이 같을 수도 있다는 말씀은 신앙과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끔 만드네요!

결국 표면적으로는 지루해보이는 일상에서 새로움과 생명을 조금씩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 이 땅에 발 디딛고 사는 사람의 실존인거겠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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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September 30, 2009
*.232.97.185

정 목사님!

설교 말씀 본문 마지막에 나오는 "내 손으로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에서

등과 얼굴이 아닌 손에 자꾸 마음이 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하나님 이해와 그들의 서술 방식이라는 설명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제 생각은 여전히 하나님의 손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자꾸 생각해 보는군요.

여전히 부족한 하나님 경험에 대한 제 모습입니다. ㅎㅎ

하지만 감사하게도 매일의 일상 가운데서 생명의 소리들을 듣습니다.

작은 것들에서.. 모래알 하나에서도.. 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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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September 30, 2009
*.120.170.243

모래알 님,

그렇군요.

하나님의 얼굴, 등보다는

손이 더 친근감이 가는군요.

릴케의 에세이 중에서 <하나님의 손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신학대학교 학부 때 읽은 거라

제목이 가물가물하군요.

어쩌면 하나님의 손은

모래알 님이 자주 가시는 뉴욕의 그 유명한 미술관일지 모릅니다.

매일의 일상에서 생명을 호흡하신다니

더 이상 바랄 건 없겠지요.

이국에서라도 좋은 추석을 맞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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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0]웃겨

October 05, 2009
*.173.134.102

엉뚱한 하느님....!

 하나님은 참 엉뚱하십니다.

 우리의 계산이나 예측과는 달리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요 며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다른 현실성"이란 말이 깊이 와 닿습니다.

세상의 상식과 하느님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 

공들인 만큼 얻는 게 있어야 하고, 준 반큼 받아야 하는 게

세상의 상식이고 공평인데, 그 것이

 하느님의 공정성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

그런데 막상 삶의 현장에서 그걸 넘어서기가 쉽지 않은 저로서는

그 분의 방법 앞에서 처절히 한계를 느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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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Dr. Jung

October 05, 2009
*.97.129.239

하나님의 나라는 보는 자의 잣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같군요

욕심을 가리운다해도 삶의 욕심이 우리를 지배하는 그 곳이

바로 광야의 삶이 아니련지요

                                                                                                      

애굽을 그리워하는 모습처럼

항상 나의 집착과 중독된 삶의 어느 구석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그 곳에 하나님은 광야의 길을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본향의 길

집으로 향하는 그 여정에

하나님이 먼저 가신다는 말씀

큰 위로가됩니다.

 

은혜를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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