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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때

성탄절 조회 수 11998 추천 수 0 2010.01.04 1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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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예레미야 31:1-6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때

(렘 31:1-6)


2010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21세기의 첫 10년이 지나고 이제 두 번째 1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금년은 한민족의 현대사와 깊은 연관이 되는 해입니다. 100년 전인 1910년은 한일합방이 일어난 해입니다. 경술국치의 해라고 말합니다. 60년 전인 1950년은 6.25 남북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입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전쟁이 내전이나 국제전이냐 하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 올해는 1960년에 일어난 4.19 50주년 되는 해이고, 광주 민주화운동 30주년 되는 해이며,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10주년 되는 해입니다. 위에서 열거된 다섯 가지 현대사 중에서 두 가지는 대한민국 내부의 문제이고, 다른 세 가지는 한민족 전체의 문제입니다. 양쪽 모두 중요한 사건이지만, 한민족 전체에 연루된 문제가 더 중요하겠지요.

지금 한민족은 세계 200개 가까운 나라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입니다. 타의에 의해서 분단되었다는 사실에서 이 분단은 특별합니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국제 정치적 목적에 따라서 38선 이남은 미국이, 이북은 소련이 점령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한민족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은 분단의 비극이 여기서 시작되었고, 그런 분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분단으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가 어느 정도인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국방비만 해도 엄청난 부담이자 모순입니다. 남북은 분단체제로 인해서 과도하게 국방비를 사용합니다. 그걸 사회복지로 돌릴 수 있다면 삶의 질이 몇 단계 올라갈 겁니다.

2010년은 남북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게 될까요? 남북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방향일까요, 아니면 분단고착화의 방향일까요? 어떤 분들은 지금 먹고 살기도 힘들어 그런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거나, 기독교 신앙은 영혼 구원에만 신경 쓰는 거지 민족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순수하고 소박한 신앙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런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와 분리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구약 예언자들의 구원 신탁을 오해하거나 외면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분열 역사

오늘 설교의 본문인 예레미야의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렘 31:1) 여기서 ‘모든 종족’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남북 왕조를 가리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분열왕조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한 유대 민족은 사울, 다윗, 솔로몬의 통일 왕조를 거쳐 기원전 10세기 초에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솔로몬과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책임이 결정적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어받자 북쪽 지역의 지파들이 솔로몬의 전제적이고 강압적인 통치를 거둬들이라고 요구했습니다. 르호보암은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선왕 솔로몬보다 더 강압적인 정치를 펼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결국 북쪽 지파들은 남쪽과 선을 긋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것이 남북 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수백 년간 계속되었고, 결국 북왕조가 앗시리아에 의해서 기원전 722/1년에 멸망당했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아주 작은 나라로 명맥을 유지하던 남유다도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기원전 587년에 멸망당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0년경부터 시작해서 580년경까지, 대략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그의 활동 시기는 바로 위에서 설명한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이 있었던 때입니다. 북왕조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100년 전에 이미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남유다도 풍전등화 같은 신세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의 미래를 어느 정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희망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거의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외쳤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주변에서 악담을 많이 들었습니다. 공연히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거였습니다. 가족들도 예레미야를 비난할 정도였습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많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심정이 어땠을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은 점쟁이들처럼 남의 운명을 점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역사를 뚫어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예언자 전통에 선 예레미야는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왜 구차한 신세로 전락했는지에 대한 대답을 역사에서 찾았습니다. 그 출발이 남북분열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라는 말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북분열과 그런 상태가 지속된 데에는 나름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분열의 시작이 솔로몬의 강압정치와 아들 르호보암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일단 남북이 분열된 다음에는 각각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이념들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남유대는 다윗 왕조의 정통성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그들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칠만 했습니다. 반면에 북이스라엘은 대중성이 있었습니다. 열두 지파 중에서 남유다를 따르는 지파는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밖에 되지 않는 반면에 나머지 열 지파는 모두 북이스라엘을 따랐습니다. 땅도 북이스라엘이 훨씬 넓었습니다. 그들의 시작이 솔로몬의 철권통치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민중의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각각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각각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가 볼 때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고 서로 대적하던 분열의 역사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유다에 속한 지파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지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선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지역 갈등이라는 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말씀을 선포하던 때는 이미 남북 분열의 역사가 백년이 훨씬 넘었을 때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이미 멸망했지만 지파들 사이의 갈등은 전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가 끝난 뒤에서 그런 상처는 씻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처가 예수님 당시에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에 남쪽 유대 지역의 사람들은 사마리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동족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무시했습니다.

6.25 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정신적 외상인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60년 동안 남북 모두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남북분단 상황이 앞으로 100년, 200년을 간다고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물론 통일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닙니다. 세상살이에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오히려 분단 상황을 이용해서 이익을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은 문제가 많은 집단입니다. 통일이 되어봐야 골치 아픈 일만 많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남북분단 문제를 정치나 이념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세상을 해명하고 방향을 제시한 예언자들의 영성에서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이런 분단 상황의 지속으로 우리의 영성이 훼손된다는 점이 가장 우려스럽습니다.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즉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은 남쪽 사람들만이 아니라 북쪽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한민족 전체의 하나님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영성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나름으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굳어진 세계관은 혁명적인 충격이 없으면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진화론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과학적으로 설명해줘도, 진화론 문제는 신앙과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지동설이 아니라 천동설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한국의 보수적인 신자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현대신학을 모두 자유주의로 매도합니다. 타종교를 무조건 매도합니다. 예레미야도 자기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민중들이 예언자들의 말을 받아들인 시대는 흔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의 말을 기억할 뿐입니다. 아무리 예언자들의 말을 거부하는 시대라 하더라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남북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지파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가 설명하는 관점으로 우리의 영적 시야를 넓힐 수 있다면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광야의 은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근원적인 사건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는 겁니다.(렘 31:2) 이 문장이 가리키는 역사적 사건이 구약성서 전체의 가장 중요한 배경인 출애굽과 광야 사건입니다. 출애굽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민족 해방 사건입니다. 그걸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지역갈등이 없었습니다. 남북분열의 이념들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사람들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들은 출애굽이라는 큰 사건 안에 녹아들 수 있었습니다. 광야는 생존이 급선무인 시절입니다. 거기에서도 성격 차이로 갈등이 적지 않았겠지요. 마실 물과 먹을거리가 없을 때 서로 다퉜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생존을 허락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생존을 보장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과 만나 사건은 이스라엘의 생존과 연결된 것입니다. 생존 문제는 이스라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생존을 보장했습니다. 그들에게 정치적 해방과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 사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기억은 희미해졌습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한 열정이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오래 전에 망했습니다.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아무도 하나님이 행하신 출애굽과 광야의 만나를 통한 은혜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달랐습니다. 그는 과거의 구원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신다는 사실을 외롭게 전하고 있습니다. 한편의 시처럼 노래합니다.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렘 31:4)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때마다 이스라엘 여자들은 소고를 들고 춤을 추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두 지명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사마리아입니다. 사마리아 산에 포도나무를 심게 될 것이고, 그 열매를 따먹게 된다고 했습니다. 평화로운 일상이 시작된다는 약속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에브라임입니다.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하나님 여호와께 나가자고 외치게 된다는 겁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 지역이고, 에브라임은 남유다 지역입니다. 우리로 바꾸면 사마리아는 평양이고, 에브라임은 서울입니다.

예레미야의 영성은 놀랍습니다. 일반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훨씬 근원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예언자만 홀로 남북왕조의 몰락이라는 상황에서 소고를 들고 노래하고 춤을 추게 된다는 사실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남북이 분열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로 나가는 그 미래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 미래가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때라는 겁니다. 60년 이상 분열의 역사를 살아오는 한민족 앞에서 한국교회는 이런 영적 시야를 확보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때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때가,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주시는 때가 온다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안타깝지만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 후로 이스라엘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결국 모든 것이 파멸로 끝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들의 좌절이며, 한계이며, 불안이며 고독입니다. 예언자들이라고 해서 늘 확신에 찬 게 아닙니다. 그들은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몰랐습니다. 다만 지난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앞으로 나가야 할 길을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걸 아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이루시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선포할 뿐입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이 선포되고 600년이 지난 뒤에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사건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든 실존적인 고통과 좌절과 분노와 불안과 고독과 한계를 그대로 살았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셨습니다. 종말에 우리가 참여하게 될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온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가 바로 예레미야가 외친 그때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그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 세상이 여전히 어둡고 교만하고 사치스럽다 해도, 또한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실 영적 생명의 세계를 외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노래합니다. 분열과 적개심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2010년 새해에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성탄절 후 둘째 주일, 2010년 1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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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January 04, 2010
*.109.153.6

아! 좋은 시절은 다 같습니다. 하필 성탄절 직전에 발령이 나서 오자마자 새로운 일에

시간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이곳 방문은 커녕 눈팅한번 제대로 못했네요

그래도 오늘은 최소한 목사님께 새해 인사는 드려야 겠기에 귀한 설교말씀도 제대로

못 읽고 일단 인사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해 방랑자의 생활을 그치게 해주신 목사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드뎌 본격적으로

순례자의 길을 떠나기 직전에 작은 풍랑을 만나긴 했지만 이제 또 적응하고 헤쳐나가야 겠죠

다비아와 목사님은 늘 그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니까요

모쪼록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주안에서 늘 평안하시길 빌겠습니다.

p.s 새로 옮긴 곳이 바쁘긴 하지만 위치는 을지로여서 서울샘터교회 가까이 있다는 기분에

심정적으로는 왠지 푸근합니다. 나중에 평일에 시간되면 어딘지라도 한번 알아 둘까 합니다.

곧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물론 시간나는대로 눈팅은 할거예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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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04, 2010
*.120.170.243

예, 방랑자 님,

새로운 발령지에 적응하시느라 바쁘셨군요.

그럴 때는 다비아를 잊어버려도 됩니다.

우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지요.

다비아는 시간 여유가 있을 때 마음 편안하게 찾아오시면 됩니다.

한해, 멋진 순례의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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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 예수만

January 04, 2010
*.255.142.53

저는 한국 교회사에 관해서 소상히는 알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1900년대 초를 전후하여

평양에서부터 한국 기독교가 발흥하기 시작했었다는 그정도 입니다.

못박힌 판자 위를 맨발로 걸어갔다는 신앙적 항쟁사건도 그쪽에서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북한 지역은  민족적 기쁨인 8.15광복과 동시에 곧바로 적그리스도 세력들에 접수당하게 됐고, 이후 아직까지도 

신앙적 측면에서 암흑 세계로 남겨져 억압돼 있습니다.

그쪽에 남겨진 많은 신도들은 더이상 예배드리지도 못하고 이미 죽어갔거나 혹은 머지않아 죽어갈 처지에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믿는다고 하는 것이 이처럼 어렵고도 두려운 일인가,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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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04, 2010
*.120.170.243

진예수만 님께서

위 대글에서 '적그리스도' 운운하셨는데,

누구를 가리키나요?

적그리스도가 누군지 알고 계신가요?

그냥 들은 풍월로 그런 표현을 하는 건

진예수만 님이 무척 경솔하다는 증거입니다.

위 대글 류의 주장을 우리나라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긴 합니다.

반공주의를 마치 기독교 신앙의 본류인 양 착각하는 분들에게서 말입니다.

그런 교회 지도자들의 영향으로

한국의 많은 일반 신자들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아무 생각이 없이 글을 씁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가장 큰 걸림돌이고,

오히려 적그리스도 같은 행위를 하는 분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위 대글을 읽고

60-70년대 반공교육 시간으로 돌아간 것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 창조의 하나님, 부활의 그리스도, 생명의 영인 성령을 실제로 믿는다면

저런 주장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거꾸로 저런 주장을 노골적으로 펼친다는 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형식적으로만 믿는다는 증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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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 예수만

January 04, 2010
*.255.142.53

아마도 "적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게 아무리 신앙생활에 위해적인 요인이 될지라도)인간이 그러한 존재일 수는 없다는 그러한 신학적 견해가 내포된 지적의 말씀으로 파악 / 이해되기도 하는데(그러한 방향의 이해는, 우선은 공산당도 인간이고 공산주의도 신의 창조물인 인간들의 산물이라는데서부터 기인될 듯합니다),

어떻든 좀 폭넓게 이해하려고 해봐도 공산당(* '공산주의'가 아니라 현실 "공산당"입니다)에 관한 해량은 제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논란은 있을 일이지만, 일부의 견해는 공산세력을 적그리스도적인 개념의 것으로 그렇게 보고 있다 라고 기억하는데, 글쎄 신학적으로 그런 게 적그리스도 아니라면 과연 우리가 적그리스도적인 실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머리속에 그걸 떠올려야 할런지요. 아울러 적그리스도라는 것이 아직은 인류사에 현실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던 그런 향후적 개념의 것인지요?

위와 같은 제 일련의 의문들은 공산당이 인간의 삶에 선한 것이었느냐 그렇지가 못한 것이었느냐 하는 문제의 차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공산당이 실제로 신앙과 신을 부정하고 신앙인을 탄압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돼 옵니다.

그리고, 세상이 선한 사람을 가리켜 일반적으로 "천사"라고 칭하듯이(실은 천사는 메신저인데도 말입니다), 여기 앞에서 제가 지칭한 바 있는 "적그리스도"라는 개념도 그게 반드시 신학적인 차원까지를 철저히 고려해서 사용한 말은 아니고, 그냥 일반적 지칭어(즉 신앙에 매우 위해되는 세력을 뜻하는 개념어)일 수도 있겠습니다.(혹 사용상 착오가 있을 수도 있겠음을 우선 인정하고 들어가겠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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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 예수만

January 04, 2010
*.255.142.53

 
<아래는, "적그리스도"에 관한 개념 이해의 객관성(보편성) 확보를 위해 지금막 인터넷 백과사전을 검색,
중요부분을 적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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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가 누구이고 언제 도래하는가, 또한 이에 앞서 일어나는 '시대의 표징', 즉 자연의 대변혁, 전쟁, 전염병, 기근 및 다른 재앙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 지속되었다. 14, 15세기에 설교가들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적그리스도의 도래를 널리 경고했다. 종교개혁 기간에 종교개혁가들, 특히 마르틴 루터는 교황 개인을 공격하지 않고 교황제 자체를 적그리스도라고 공격했다. 악이 교회의 우두머리에게서 구현되고 성직자를 '적그리스도의 몸'으로 본 이러한 의식은 교황제를 불신하고 명예를 손상시킬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종교개혁 이후 적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몇몇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은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주권에 저항하거나 거절하는 것, 교회와 국가의 정치권력을 신격화하는 것 등으로 해석했다. 섭리신학과 전(前)천년 왕국 신학에는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강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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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January 04, 2010
*.99.193.27

오늘 말씀에서도 저는 제 개인 삶의 질적변화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지금 젊은세대를 포함하여 우리 민족이 이 분단문제에 대해 얼마나 현실성을 가지고 인식하고 있을까요(더구나 일반 기독교인들이....)

제가 알고있는 대부분 교회에서 이 남북문제는 선행목록에 포함시키듯 기도제목으로 뽑아 놓고 늘 중언부언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오늘 말씀에서 우리의 분단현상에 대해 바라보는 예언자적 시각이 놀랍고,

이 영성은 출애굽에서부터 지금 현 남북상황을 관통하는 현실성(reality)을 담보할 수 있는 깊이를 가진다는 생각에

조금은 그 중심을 따라잡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제 삶의 지향성이 이 영성을 닮아가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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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04, 2010
*.120.170.243

상수리 님,

눈이 많이 왔지요?

여기 내가 사는 하양에도 모처럼 눈다운 눈이 왔어요.

그나마 오후 늦게 대충 녹아버렸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오늘 역사를 외면하면

우리는 성경을 읽을 수가 없답니다.

분단체제와 빈부격차의 심화라는 이런 역사를 외면하고,

우리가 어떻게 출애굽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사회혁명가들처럼 역사 투쟁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역사를 이해하고 통찰하고 해석할 수는 있어야겠지요.

오늘 복음과 설교가 개인의 기복과 욕망,

혹은 처세술과 도덕성에 떨어졌어요.

사람들은 그것을 달콤하게 생각하지요.

거기서는 결코 성서가 말하는,

성서가 제공하는 영적 안식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남북분단 문제 앞에서 무기력한 한국교회,

오히려 훼방꾼 역할을 톡톡히 하는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마음이 심란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스라엘의 영적 처녀들처럼

소고를 들고 춤을 춰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저만치서 승리하셨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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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오명례

January 05, 2010
*.218.171.14

처음으로 목사님 글에 댓글을 달아봅니다.

인터넷을 통해 목사님을 알게 되었고, 설교비평 책을 통해 목사님을 만나게 된 건

저로 하여금 성경을 바르게 알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다비아를 통해 성경을 새롭게 대하게 되었고,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가 처음 세상을 대하듯 저역시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성경 해석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놀라움으로, 가슴 설레며,  의아해 하며, 가슴 벅참으로

기쁨으로, 두려움으로 한 발 한 발 내딛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말씀을 읽으며 제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표현하기 어려운 환희가 살포시

그러나 강력하게 솟구쳐 오르고 있어 글쓰는 재주가 없어 주저하며 부끄러웠지만

 이렇게 댓글을 달수 밖에 없었습니다.

태국에서도 이러한 말씀을 선포하시는 목사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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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리옹~

January 05, 2010
*.201.17.104

첫 댓글이시군요. 환영하고 축하합니다. 날마다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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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05, 2010
*.120.170.243

오명례 님,

안녕하세요?

태국에서 사는 교포시군요.

다비아의 글들이 신앙 훈련에 도움이 된다니,

다비아 원장으로서 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글쓰는 재주가 없다고 하시는데,

보통 솜씨가 아니신데요.

글이 숨을 쉰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태국 소식도 종종 전해 주시면,

그게 다비아를 도와 주는 거랍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좋은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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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January 05, 2010
*.61.23.114

예레미야의 예언을 말기 이스라엘과 아주 비슷한 상황인 현 대한민국의 상황에 대조해 들으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뚜렷해졌습니다.

신자/비신자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사람은 세 지평에서 세 존재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

첫째는 '개인적 지평에서의 인생론적 존재방식', 둘째는 '사회적 지평에서의 세계론적 존재방식',

셋째는 '역사적 지평에서의 우주론적 존재방식'으로 말입니다.

특히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첫째 방식으로 자신의 삶 안에 폐쇄된 채 살아가는 마당에,

교회가 민중들에게 하나님 안에서의 새롭고 놀라운 존재론을 제시하지는 못할망정,

되려 요란한 신앙 행위들에 전존재를 내다팔아버리는 '당위방식'에 빠지도록 부추기고 있으니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아폴로적 예술', '노예근성'이 적절할까요, 맑스의 표현인 '민중의 아편'이 적절할까요.

아무튼 비극임엔 틀림 없겠지요. 바리새인들을 옭아맸던 종교성의 악령이

현대교회에 그대로 역사하면서, 하나님의 손때가 묻어있는 '존재'를 보는 눈을 가리우고 있으니까요.

한편, 제가 보기에 목사님은 '구속사적 지평에서의 구원론적 존재방식'을 택하고 계십니다.

아니, 이런 비극적인 환경 안에서 그런 존재방식으로 살아가며 설교하실 수 있는 것은,

목사님의 택함에서라기보단 성령의 택하심에서 나온 결과이겠지요?

제가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빨려든 부분도, 목사님께서 여러 이유로 행하시는 비판 속에 숨어있는,

'당신들은 왜 예수께 관심이 없냔 말이오'라고 울부짖는 순교자의 심령이었습니다.

목사님을 통해, 그 어떤 역사의 대가(大家)들을 뛰어넘어, '예수'와 동일선상에 서게 되었고,

예수와 함께 호흡하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고민해가는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또 한편으론 '다시 땅엣것으로 내려가는 시험에 빠지면 어떡하지?'하고,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우면서,

'내가 갑작스레 죽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거지?'하는 두려움도 때때로 찾아오곤 합니다.

사도 요한이 종말론적 계시를 받기 위해 하늘로부터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들은 것처럼,

저는 목사님에게서 '이리로 올라오라'는 초청의 말씀을 듣고 종말론적 세계 경험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님의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가리켜 '하나님 나라의 아방가르드 신학'으로,

다비아/샘터교회를 가리켜 '예수 정권을 위한 지하결사대'로 표현할 수 있을런지요.

(마침 서울샘터교회가 지하에 있기도 하니까요. ㅎㅎ;)

"목사님은 다음 세대에 일어날 '예수주의자들(Jesusians)'에게 고전적인 인물로 기억되실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예수께로부터 지금까지 나름대로 얻은 예언자적 영성을 쏟아

목사님께 감히 올려드릴 수 있는 '예언'이오니,

목사님, 가시는 길 외로우시더라도 힘내시고,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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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05, 2010
*.120.170.243

아이구, 용남이의 눈에

정용섭 목사가 좀 안 돼 보였나보군.

비행기를 띄우고 있으니 말이야. ㅎㅎ

용남이에게는 크게 보일지 몰라도

나도 여전히 어린애야.

근데 대글 중에

<'예수'와 동일선상에 서게 되었고,>라는 말이 있는데,

해석이 필요하군.

우리는 예수의 뒤를 따를 수 있을지언정

동일선상에 설 수는 없데 말이야.

그는 우리의 영적 순례에서

스승이나 목표이지

함께 가는 도반은 아니지.

그래도 용남이가 말하려는 근본은 이미 알고 있어.

예수가 말하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또는 그 차원으로 우리가 돌아선다는 뜻이겠지.

용남이의 응원을 얻으니 힘이 나는군.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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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Dr. Jung

January 06, 2010
*.97.129.27

예레미아 뿐만 아니라 그 전후의 예언들은 이루어짐이 없어 보입니다.

결국 기독교(케톨릭,개신교)입장에서 보면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고

 

예레미아나 다른 예언자 즉,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지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예언하는 것 자체가

영성의 의미를 떠나서 일상의 사람들이 보기엔 거짓 예언인것이고

예언이라기 보다는 바램, 즉 민족적 바램이었겠지요.

 

2000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적인 모습만 보면

그들의 선택이 오히려 현명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예수 이후에 버리셨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려운 이야기는 머리 아프고

결국

그 분의 사랑입니다.

우리 안의 내부의 문제도 같은 방법으로 접근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역사는

역사는 역설로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성령의 이끄심이 더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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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06, 2010
*.120.170.243

Dr. Jung 님,

예언자들은 최선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예언이 비록 성취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부족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식이며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은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다른 방식의 성취에서

그들의 예언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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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 예수만

January 08, 2010
*.203.204.20

위 닥터 Jung님 말씀에 제 의견도 말씀드립니다.

"그분의 사랑",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껏 50년간을 믿는다고 하면서(그 믿음이 보잘것 없더라도 말입니다) 마치 스무고개 하듯이 찾고

찾아왔던바, 기독교신앙 모토에 관한 지금의 결론은 바로 "실천"인데, 곧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실천"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한마디 첨언하면, 저는 책임 질 전문가가 아니고 그냥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에 불

과하므로, 대화 공간인 여기서 혹 이러한 결론이 틀렸다 하더라도 하등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왜 교과서에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한마디로 개념해놨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정말 예수님이

주장하신 건 바로 "사랑" 그것입니다. 굳이 거기에 인간적인 잔머리를 굴려 논리를 붙여 생각해 본다면, 

인류에 있어 인간 상호간의 모든 갈등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사랑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민족주의, 국가주의도 아니고, 징벌주의나 복수주의도 아니며, 국방도 아니고 교육도 아니고, 생산증대나

혹은 혁명주의나 민주주의 혹은 공산주의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 건 모두 주님 말씀하신 바 있는 '사람의

교훈' 일 뿐이고, 주님의 교훈은 바로 "사랑의 실천" 그것 뿐입니다.

 

저와 같은 이러한 견해를 신학자들은 뭐라고 정의하든, 그런 건 그저 신학하는 그 이들이 (무슨 무슨 "설"

이니, 혹은 무슨 무슨 "주의"니 하면서) 늘상 하는 일일뿐이고, 우리의 신앙 실존과는 관련이 없을 것입니다. 

신학은 자기 내면의 '관념'이고, 신앙이란 언제나 자신의 내면과 세상이 상호 연관되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일면은 처절하고도) 분명한 하나의 '실재(實在)'일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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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Dr. Jung

January 09, 2010
*.97.129.112

신앙이란 언제나 자신의 내면과 세상이 상호 연관되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일면은 처절하고도) 분명한 하나의 '실재(實在)'일 것이니까요.

 

좋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실제하지 않을 수도있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느껴집니다.--상호연관은 연기한다는 것이고 연기하는 모든 것은 諸行無常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것, 자기 사상, 자기의 신앙의 신념 의지

기독교적으로 확고히 표현하자면

믿음 뿐,,,,,

 

그것이 어떻게 보면 부딪히기에 세상의 이런저런 고통과 분쟁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안에서도 보면 예수의 사랑보다 앞서는 것이

종교적,신념 더,나아가 보수와 진보의 신념이 더 앞서는 것이 지금

이 땅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종교적 믿음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종교적 믿음도 그렇게 할 수있고

그런 현상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웃의 생각도 내 생각과 같이하라는 말씀으로

달리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상호관계라는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문안드리고 답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해야 된다 어떻게 하지말아야 된다에 대해선 저는 잘 알지 못하기에

이렇게 두리뭉실하게 표현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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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 예수만

January 09, 2010
*.203.204.107

물론 "신앙"이 實在하는 것이라고 개념 정의를 하더라도,  더욱 더 분석적으로 가보면

實際가 이닐 수도 있겠습니다.

 

정말 예수께서는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들 - 더구나 그들은 어찌보면 이웃이고

동족이었습니다 - 에 의해서 죽임 당하셨습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배경이 인류사에 있어

가장 큰 아이러니요, 인간사회 문제의 대표적 단면일 것 같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된 메시아 죽임 사건의 진상을 우리가 종교적인 측면으로만 연관지어 조명한

다면, 종교는 같은 상태로 일정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변질되고 부패하기까기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거리고 봅니다. 거슬러 고찰하면,  예수가 떠나신 후 약 300년 경부터 로마에서

교회가 공식화되어 그 때부터 기독교가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 후 16세기말

루터가  썩은 곳에서 뛰쳐 나와 별도의 구루터기로 새롭게  성장하기 시작했으나, 묘하게도

그로부터 약 300년이 지난 20세기에 들어와서 개신교는 또 다시 로마 교회와 같은 양상의

타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짚은 내용이 맞다면, 기독교는 항상 오래된 것은 일정기간이 되면 썩게 돼있고 거기서

다시 씨앗이 옮겨가 새롭게 자리 잡고 커나가야만 하는 것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

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는  '실천 없는 믿음은 "허상"이다' 라고 나름대로 확신을 세웠습니다.(만인 만색인

것이 인지상정이고 만약 그러한 확신이 틀렸더라도 관계없습니다) 실천이라는 열매를 보고

서만 그 나무가 무화과(믿음있는 상태)인지 엉겅퀴인지(믿음의 부존재 상태)를 판별할 수가

있겠다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 그게 마치 불교에서 하는 행태인 명상이나 참선 비슷한 것은 아닐런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 대해 고작 그런 정도를 요구하며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좋으신 견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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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Peace..

January 09, 2010
*.24.69.70

 

목사님 말씀 중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안타깝지만 성취되지 못했다>와, Dr. Jung님의 댓글 중 <예레미야뿐만 아니라 그 전후의 예언들은 이루어짐이 없어 보입니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약간의 이의를 제기해봅니다.

크리스천의 관점에서 진정한 예언의 성취는 예수그리스도이며, 궁극적으로는 종말에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유대민족의 죽음과 같았던 오랜 고난의 역사와, 이제는 세계의 주역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이들의 근 현대사를 고찰할 때,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지 못하였다고 단정 짓는 것은 너무 경솔하지 않을까요?

부연하면, 유대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구약의 말씀을 신봉하기에 예언자의 말씀은 그들에게 항상 살아서 역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온 세계로 흩어짐과 박해, 2차 대전 중의 히틀러에 의한 600만 명 학살 등의 숱한 역경 중에도 이들은 살아남았지요.

드디어 근세의 시오니즘 태동과 히브리어 복원, 독립전쟁, 6일전쟁, 엔테베 공항작전, 세계 각국으로부터 민족의 귀환 등은 이들의 회복에 관한 일말의 단서를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최근에는 우리나라 공영방송에서조차 영향력 있는 위대한 유대인 인물들에 관하여 방영한 바 있지요.

참조로 판넨베르크의 설교 <유일신 신앙>의 일부를 발췌하면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 증명이 가능한가에 대한 프리드리히 대제의 질문에 볼테르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유대민족의 존엄! 이 민족은 분명히 고난이 연속되는 역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들의 정체성은 날이 갈수록 명확해졌으며 전체 인류 앞에서 한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증거로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의 말씀이 본 예언 성취에 관한 설교말씀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느 정도 시사하는 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 현재의 이스라엘 상황이 예언이 성취된 결과의 일부라고 확고하게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도 너무 경솔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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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January 09, 2010
*.120.170.243

peace.. 님,

마침 제가 다비아에 접속하고 있어서

곧장 답글을 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군요. ㅎㅎ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저의 단정적인 주장이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구약을 예언과 성취, 또는 약속과 성취의 구조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에서 볼 때

좀 경솔하게 들릴 겁니다.

제 표현력의 부족이거나

아니면 언어 자체의 한계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가 아닐는지요.

그 대목의 방점은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예언자들의 영적 실존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가를 전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무도 동조해주지 않고

오직 신탁에 의해서만 국가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할

예언자들의 영적 실존 말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예언자들의 생각까지 넘어서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군요.

예언자들의 예언은 그들의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취된다고 말입니다.

그 다른 방식의 성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지요.

역사비평적인 차원에서 한 말씀드린다면,

예레미야, 이사야 등,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새로운 독립국가를 세운 현대의 이스라엘을 내다보았다기보다는

당대의 미래를 내다보았을 뿐입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 뒤에도

이스라엘은 이렇다 할 정도로 힘을 써보지 못하고

쇄락의 길을 걸었지요.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오늘 이스라엘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는 좀 애매합니다.

하나님을 함께 믿으면서도

메시아관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으니까요.

좋은 의구심을 표현해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평화로운 주현절 후 첫째주일 전날 밤이군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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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Peace..

January 11, 2010
*.252.105.169

목사님, 그렇게 늦은 밤에 긴 답글을 올려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저의 의구심 및 이의는 그야말로 가벼운 것으로서,

굳이 답을 주시지 않아도 되었고,

더구나 시급하지도 않았습니다.

 

목사님 답글을 통하여 설교말씀을 한번 더 생각하고,

본 취지를 더욱 확실히 알게되었기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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