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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임재와 마술

주현절 조회 수 18123 추천 수 0 2010.01.11 15: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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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도행전 8:9-24 
 

성령 임재와 마술

(사도행전 8:9-24)


사도행전을 대표하는 구절은 1장8절입니다. 승천 장면에서 나온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서 성령, 권능, 땅끝, 증인이 키워드입니다. 각각의 단어가 기독교 신앙 전체를 감당할 정도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런 경험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권능’은 무엇일까요? 그런 권능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땅끝’과 ‘증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적 관심이땅끝, 즉 세계 전체에 이르고 있을까요? 증인으로 산다는 말이 우리에게 실감이 날까요? 초기 기독교의 신앙 정체성에 대한 사도행전의 이 진술은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거기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의 근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립과 시몬

오늘 설교 본문(행 8:9-24)도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를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을 넘어서 사마리아에 전파되는 역사적 분기점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루살렘이 포함된 유대지역은 유대인들의 정통성을 그대로 유지한 곳입니다. 이에 반해서 사마리아는 이방인들과 혼혈인들이 뒤섞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남쪽 유대 지역의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낮추어보았습니다. 바로 그 사마리아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건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선택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가 큰 박해를 받아서 사도들을 제외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일곱 집사의 한 사람인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했습니다. 빌립의 설교와 그가 행한 표적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가고,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사마리아에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큰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행하는 마술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합니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행 8:10)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몬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신으로 추앙받았다고 합니다. 150년경에는 거의 모든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몬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누가도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행 8:11)라고 말합니다. 이 시몬이 사마리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마치 무당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가 빌립을 따라다닌 이유는 빌립이 표적과 큰 능력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빌립과 마술사 시몬 사이의 경쟁에서 빌립이 승리했다는 사실만 드러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합니다. 예수를 믿으니까 병도 낫고 사업도 잘되고, 모든 일들이 잘 풀리더라, 하는 주장에 솔깃해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잘 되는 거 못 봤다는, 전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주장에도 맞장구를 칩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잘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표적이라는 겁니다. 이런 신앙은 기독교의 진수가 아니라 껍질입니다. 껍질을 진수인 것처럼 주장하고 따르는 것은 신앙의 왜곡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이런 일들은 당시에 흔했습니다. 바울의 편지인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베드로는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던 안디옥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에 와서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도록 안수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사마리아 기독교인들이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지 성령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이 질문과 연관해서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있었던 두 가지 사실을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하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미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에게 이미 표적과 큰 능력이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1) 초기 기독교에 세례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주로 세례 요한의 세례에 한정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은 사람들이 고린도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일이 있습니다.(행 19:1-6) 초기 기독교에서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 이름을 통한 세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 이름을 통한 세례로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성령 임재가 필요했습니다.

2) 두 번째 사실인 표적과 큰 능력은 더 복잡합니다. 표적과 큰 능력은 은사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주로 성령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바로 큰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설교 머리에서 인용한 행 1:8절도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빌립을 통해서 사마리아에 일어난 표적과 큰 능력은 분명히 성령으로 인한 사건들입니다. 그렇다면 누가의 진술은 모순입니다. 사마리아 기독교인들에게 은사를 통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는데도, 그것을 부정했으니까요. 누가는 왜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걸까요?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숨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빌립이 행한 표적과 큰 능력이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지만 사도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긴 합니다. 기독교 초창기에 사도적인 권위를 추락시키는 행위는 모두를 위해서 바람직한 게 아니었습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제각각으로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보면 복음의 근간이 허물어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빌립의 활동이 옳기는 하지만 사도적인 권위가 있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강조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설명만으로는 위에서 말씀드린 모순이 깨끗하게 해소되지는 않습니다. 누가의 이 진술에는 더 근본적인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빌립을 따라다니던 마술사 시몬은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동했습니다. 그는 돈을 내고 성령을 임하게 하는 권능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 일종의 저주입니다. 그 뒤로 베드로의 말이 길게 이어집니다. 시몬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악하므로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악을 회개하면 용서받을지 모른다고 권면했습니다. 시몬을 향한 베드로의 책망은 당시 초기 기독교가 봉착한 영적 위기가 무엇인지, 또한 어떻게 그런 위기를 극복했는가를 대변합니다.

우선 시몬의 잘못이 무일까요? 본문의 묘사만으로 본다면, 그가 돈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려고 했다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그가 왜 돈으로 그런 거래를 시도했는지를 누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고대 헬라 시대에는 이런 일들이 관행적으로 일어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행태가 지금 우리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의 삶도 사실은 똑같습니다. 아니, 우리의 경우는 더 심합니다. 모든 걸 돈과 연관시킵니다. 젊은 남녀들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도 돈 버는 능력입니다. 외모도 역시 돈과 연관됩니다. 오늘 대학교 총장들께서 노골적으로 CEO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돈을 잘 버는 능력이 모든 것보다 우선합니다. 이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가 시몬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시몬 이야기에서 핵심은 돈이 아닙니다. 시몬이 그렇게 유치하거나 비열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사마리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빌립에게서 일어나는 표적과 큰 능력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분명하지만 나름으로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돈은 더 근본적인 것을 말하기 위한 매개입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성령 임재였습니다. 성령 임재는 초기 기독교로 하여금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세례입니다. 그것만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나 다른 사상이나 철학과 구별되는 근거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마술 넘어

성령의 임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앞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를 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만 말합니다. 이에 반해서 빌립이 행한 표적과 큰 능력은 비교적 소상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축귀와 치병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런 축귀와 치병은 특별하다기보다는 마술사 시몬도 행할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시몬이 돈을 내면서까지 얻으려고 한 성령 임재 능력은 축귀와 치병보다 훨씬 신비롭고 큰 능력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누가는 왜 이 중요한 장면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성령을 받았다고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이야기를 끝내는 걸까요?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이에 대한 간접적인 대답이 나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보도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성령의 권능을 경험한 사도들은 예루살렘 큰길에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방언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사도행전 곳곳에 나옵니다. 앞에서 인용한 요한의 세례에 대한 보도에서도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자 성령이 임했고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언급됩니다.(행 19:6) 고린도전서 14장도 방언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이런 일련의 보도를 종합하면 초기 기독교에서 방언이 성령 임재의 중요한 현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언은 별로 신기한 현상이 아닙니다. 축귀나 치병이 훨씬 특별한 현상입니다. 마술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던 시몬이 돈을 내면서까지 얻으려고 한 능력이라고 하기에는 방언은 별 의미가 없는 현상입니다.

본문은 성령의 임재가 어떤 현상인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묘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겁니다.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경험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경험과 불완전한 인식능력으로 성령을 재단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는 것처럼 성령 경험이 가능하지만 성령을 직접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음악가들에게 음악경험이 가능하지만 음악 자체를 실증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데서 많은 신자들이 혼란을 느낍니다. 그리고 성령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초기 기독교부터 계속되어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서기자들과 신학자들은 투쟁했습니다. 그 흔적이 바로 성서이며,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은 사람들이 놀란 만한 일들을, 말하자면 초능력과 마술을 많이 행했습니다. 그에게서 일어난 현상들은 빌립이 행한 표적 및 큰 능력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열광적인 상태에 이르면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심지어 최면술로도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도 이런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성령 임재는 겉으로는 이런 것들과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날 때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릅니다. 초능력과 마술은 신기한 현상에 호기심을 갖고, 더 나아가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몬을 신으로 숭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 임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게 합니다. 초능력처럼 보이는 현상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에게 영혼의 귀와 눈을 열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초능력과 마술이 아주 시시하게 보입니다. 그런 것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병을 안고 살면서도 그것이 치료되기를 두 번만 기도하고 말았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축귀와 치병과 방언을 비롯한 여러 은사를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오늘도 그런 경험이 필요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것은 성령 임재에 대한 주술적인 세계관에 묶여 있던 고대인들의 고유한 경험이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성령 임재입니다. 축귀와 치병은 이제 병원에서 해결하면 됩니다. 방언은 외국어를 잘 배우면 됩니다. 성령 임재에 대한 가장 크고 참된 증거는 예수 사건입니다. 그에게 일어난, 그를 통해서 약속된 종말론적 부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세계가 날이 갈수록 더 또렷해지고 있나요? 그렇다면 성령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아니면 초능력과 치병, 축귀 같은 신기한 현상에 마음이 끌리나요? 돈으로 성령 임재 능력을 얻으려한 시몬과 비슷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임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의 제자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2010년 한 해에도 늘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주현절 후 첫째 주일, 1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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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Dr. Jung

January 11, 2010
*.97.129.195

보이는 것

보여지지 않는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범부로 살아감에 대한 미혹이

믿음에 대한 어려움이지요

 

그리스도를 보는 바른 눈에 대한 생각을

깨우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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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1, 2010
*.120.170.243

닥터정 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반응에 따라서

마술과 성령 임재에 대한 생각과 판단력이 달라진다는

설명은 이해하겠으나,

두번 째 단의 범부 운운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군요. ㅎㅎ

할 수 있는데까지

성서의 놀라운 세계 안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십시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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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Dr. Jung

January 13, 2010
*.97.129.181

범부 운운은

아마도 이런 뜻인것 같습니다.

현상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왜곡이지요

 

비유하자면 크기가 같은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떨어드리면 대부분은 무거운 물체가 먼저 떨어진다는 생각입니다

현실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같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중력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중력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공기저항이나

마찰력같은 것을 더 직접 느끼기 때문이지요.

 

공간과 시간이 따로이 분리되어 느끼는 것

물질은 변하지 않을 것같은 것

이러한 현상들로 바로 범부들의 현상의 살아감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비유되면 될까요

현실에서는 왜곡되이 보인다는 것이지요

 

다르게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것들에서

조금 다른 것 조금 특이한 것

이러한 것들이 성령의 능력이라고 다르게 보는 것이

범부들의 생각과 같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옛날엔 천둥 번개가 신의 노여움의 표현이라 했지만

지금은 다들 자연의 현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목사님의 여러 글들에서 신화를 제거하는 모습에서

황당함을 느끼는 현상이 한국 교인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현실적인 왜곡에 대한 제거의 불안감의 표현같은 것(?)---제가 바르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같지요.

 

양자 현상을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시공간의 개념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 처럼

성경의 세계는 분명하지만 범부의 세계관으로는

오해를 낳기에 충분한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의 신비 속으로 인도해 주시는

목사님께 항상 감사한 마음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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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January 11, 2010
*.149.117.131

일반교회 신자들이 흔히 방언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을 '성령의 신비로운 언어'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숨쉬기를 동원해야 말할 수 있고, 그 숨쉬기는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고,

생명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부터 나오고, 무엇보다 성령은 언어논리의 심층을 구성하는 시원적 사유이시기에,

"살아있는 것은 다 거룩하다"라는 경구처럼, 모든 언어가 결국은 성령의 언어일텐데요.

목사님의 신학단상 중 방언에 관한 글에서, 신약성서의 방언 표상을 '보편적 언어'로 해명하신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말미의 예수의 예언에 언급되는 '새 방언'이나, '방언은 남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바울의 진술을 보면,

좀 더 기독교 교리의 전반을 염두에 두고 방언 표상의 신비성을 탐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엔, 하이데거가 '존재 해명을 위한 새롭고 독창적인 언어'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그 언어가 바로 신약성서에서 진술하는 방언 표상과 일치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편사적 해석학의 전략의 일환으로서, 기독교 인간론의 기초인 '영/혼/육' 패러다임을

인문학의 차원에서 '개인/사회/역사'로, 자연과학의 차원에서 '물질/공간/시간'으로 번역해본다면,

바울이 '영'적인 언어라고 말한 방언을 비롯해, 여러 기독교 신앙 언어들이 줄줄이 구체성을 얻게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임재는, '거룩한 역사의 도래' 혹은 '거룩한 시간의 돌입' 등으로 번역해 설명할 수 있지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고 나니 뭔가 길이 뚫린 것 같아 재미있었답니다. ㅎㅎ

아무튼, 동네교회에서 느닷없이 방언을 받은 후 아직도 가끔씩 사용하는(?)지라 방언 현상을 모질게 포기하진 못하지만,

제게 진정한 성령의 임재 경험은 목사님을 뵙고 성서와 신학의 세계로 발을 디뎠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고보면 방언이 아기의 옹알이와 같다는 몇몇 기도원장님들의 진술(?)도 맞는 것 같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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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1, 2010
*.120.170.243

용남이,

진도가 무척 많이 나갔네.

자칫 하다가는 소화불량이 걸릴지도 모르니

조금만 천천히 가보자.

하이데거의 언어 존재론과 성서의 방언 표상의 일치라는 주장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군요.

방언이 하나님 앞에서의 어린아이와 같은 옹알이라는 표현은

그럴듯하군.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그런 방언 현상,

심지어는 방언을 가르치고 배우려고 하는 그런 현상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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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January 11, 2010
*.206.68.40

제가 목사님을 통해 역사 비평학적 성서관을 접하고  신앙의 눈이 많이 넓어 진건 사실이지만

목사님의 성령관에 대해서는 아직도 동의할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목사님은 성령의 폭넓은 은사들을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것 같습니다 ㅠㅠ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12장-

 

그럼 바울은 판넨베르크나 정 목사님보다 성령을 잘못 이해한  제자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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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1, 2010
*.120.170.243

ㅇㅎㅎㅎ

별달 님이 저의 약점을 꼭 짚으셨군요.

성령의 폭넓은 은사를 직접 체험해보지 못한 것 같다구요.

성령의 은사가 무언지 조금만 설명해볼까요?

(다른 분들을 위해서라도....)

제가 지금 목사로, 저술가로, 번역가로 살고 있지요?

그게 은사에요.

나는 성령님에게 더 이상의 은사를 구하고 싶지 않답니다.

그 이상은 욕심이죠.

내 은사가 다른 그 어떤 이의 은사보다 작다고 생각해 본적이 한번도 없어요.,

거꾸로 더 크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지요.

모든 은사는 성령으로부터 나오기에

위에서 별달 님이 인용한 바울의 편지에서도 말하듯이

크지도, 작지도,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답니다.

별달님이 생각하는 폭넓은 은사가 무얼까요?

치병, 축귀, 방언 류에요?

그런 것들이야말로 작은 은사랍니다.

이미 의사들이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들의 은사를 내가 빼앗고 싶지 않답니다.

은사는 배타성이 있어서

한 사람이 모든 걸 하면 안 되는 거에요.

궁극적인 차원에서 모든 삶의 순간과 과정이

몽땅 하나님의 은총이고 성령의 은사랍니다.

내 책상 위에 놓인 연필 한 자루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데,

내가 더 이상 방언을 필요로 할까요?

촛불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하신

"빛이여 있으라."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데,

무슨 신비한 언어가 더 필요할까요?

위에서 벌달 님이 인용한 바울의 말씀을

나도 소중하게 생각한답니다.

잘 읽어보세요.

그런 은사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의 질서, 균형, 관용 등을 말하는 거랍니다.

더 나아가 고전 13장에 나오는 사랑이 근본이라는 걸 말하는 거지요.

그 사랑은 바로 예수의 존재론적 바탕이에요.

하나님의 존재방식이에요.

14장에서 바울은 다시 방언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설교를 다섯 마디쯤 하는 게

방언을 일만 마디 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네요.(고전 14:19)

언제 기회가 있으면

별달 님이 경험한 성령에 대해서 한번 글을 써주세요.

정말 듣고 싶어서 그렇답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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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January 12, 2010
*.136.37.76

두분의 대화를 통해 훨씬 더 명확한 것을 알게됨을 감사합니다.

저에게도 은사가 있습니다.

눈을 치료하는 은사, 아이들을 잘 키워가는 은사, 말 잘하는 은사 등등...

이 은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일에만 사용되어지길 소망합니다.

성령의 은사 체험을 신비적인 것을 체험한 사람만으로 국한하게 하는 생각이 문제이겠지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쓴 이유가 있고,

서로 자기 은사가 크다고 싸우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는 말이 고린도 전후서이기에

주제는 아주 명확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시원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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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January 15, 2010
*.206.68.40

 목사님의 성령 체험은 마치 선 불교나, 도가, 또는 도인들의 깨우침 같기도 하는군요..

연필이 말을 걸어 온다고 하시니요 ㅎㅎ

한가지 하고 싶은 말은

목사님께 주어진 성령의 은사 제가 인정 하겠습니다.

허나 목사님이 경험 해보지 못한

또 다른 성령의 임재, 성령의 다양한 은사,

혹은 성도의 심령을 강하게 조명하는 성령의 내주하심도  인정해 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바울도 고전12장  뒷분분에서는 교회의 질서, 균형등도 이야기 하기도 하였지만 

또한 12장 상반절에는 분명 하게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설명 하였습니다.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 고전12장 11절 )   

 

참 그리구 촛불 하나를 보면은 하나님이 " 빛이여 있으라 " 하신 말씀을  알아 들을수 있다 하셨는데

저도 빛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고 경험도 해 보았습니다..

특히 저의 취미인 사진활동은 빛을 담는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허나 세상에 펼쳐지는 태양빛은 물리적인 빛이요, 물론 이 빛도 물리적인 생명의 원천 이랄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보내어 주신다던 성령... 

영에서 영으로 전해져... 우리의 심령을 환하게 비쳐주는  생명의 빛을 사모하며

좇는것이 더 중요 하다는 생각 입니다.

어느 장로님의 시 한수를 인용 하며 마치겠습니다..

 

[" 주님, 일천 개의 촛불을 켜놓아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붉은 태양 하나가 불쑥 솟으니

   온 누리가 환하여 집니다.

 주님, 나의 마음에도 의의 태양이신 주님의 밝은 빛으로 비추어 주십시요" ]

 

목사님께도  2010년 한해, 늘 주님의  은총으로 충만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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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January 11, 2010
*.206.68.40

그리구 마술사 시몬이 행한 능력이 빌립이 행한 능력과 별반 다를게 없다고 하셨는데

그럼 하나님의 능력이라 칭송 받던 시몬이 왜  세례까지 받아가며 빌립을 따라 다녔을까요?

마술사 시몬은 빌립을 통하여 

魔術 이 아닌 진짜 聖靈 의 크신 능력을  눈으로 보고 목도 하지는 않았을까요?

빌립을 통하여는  성령의 행하여짐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는  성령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이 되는 것을 본것은 아닐까요?

그러니까 시몬은 '나에게도 이런 능력을 주어 내가 손을 얹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을 받게 해 달라고

졸라댄것 아닐까요?   예전에 마술을 하던 버릇을 못고치고 좋지 않은 목적과 의도로요.. 

그리곤 곧 바로 베드로에게 심하게 책망도 받는군요..

"시몬 당신은 마음에 악독이 가득하고 불의에 매인바 되었다"고 베드로에게 호되게 꾸지람까지 듣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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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 예수만

January 11, 2010
*.203.204.119

"저별과 달"님의 질의 말씀에 제가 참으로 주재넘게 (용서를 구하며) 한발 앞서서 끼어 들어갑니다.

 

저는 우선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라는 사람, 저는 모르는 인물이지만, 추측컨데 물론 훌륭한 학자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주로 음악을 통하여 서양 인문분야를 접근했다고 봐야 할 것인데요, 제가 전에도

한 번 언급한 바 있지만 서양사람들 정말로 명석합니다.(제가 관심있는 음악논리와 서양인들의

기계논리를 보고서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논리력 차원에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사람들이 지구상의 현대문영을 집대성시켜 완성시켰지요. 물론 그 기본 소재는 언제나

중동이나 중국 등의 동양적인 학식과 경험과 발상과 문물을 기초로 해서, 서양인들이 그것들을

실용적인 차원으로 완성시켰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들의 창안은 대부분 동양인들이 한 것이었지요.

중동지역의 문자, 법학, 수학이나 화학 의술 중국의 문물 등 대부분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거기서

현대적인 모습으로 완성된 것이지요.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종교 분야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음악하는 사람들은 아는 일이지만, 심지어는 우리를 압도하는 파이프오르간 조차도 원 개발 및 사용

지가 중동지역이라는 것이지요. 그곳에서 오래전 사용해오던 악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양인들이 제아무리 명석하다 하더라도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한계를 갖고 태어난 인간이라는 것이지요.  특히나 서양인들이 종교를 창시한 것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결론은, 그들의 이론을 참고는 하되 그것에 너무 민감해지다보면 벽에 부딪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소위 도그마일 수도 있겠고, 심하면 자가당착에 빠질 수마저도 있는 것이겠지요. 경제학 분야가

그렇지 않습니까? 대부분 영국인들이 주창한 경제학설은 틀려도 틀린 그대로 다 통용이 돼왔지요.

그 학설들이 꼭 맞아서 통용되고 이용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찌보면 그게 서양인들의 방식이에요.

그래서 서양에서 학설도 발달하고, 공산주의도 생겨나고 그와 크게 대치되는 민주주의도 생겨났지요.

 

언제나 "학"은 "학"이고, "설"은 그냥 "설" 그것인 것입니다. 음악을 듣다가 어떤 악곡이 제아무리

좋더라도, 음악이 현실일 수는 없듯이 말입니다. 음악에서 지휘기법을 배운다고 잘 할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믿음은 "논리"차원이 아니고, 신앙심 역시 배움으로써 최고로 고취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평생 무려 2만 번의 실제적인 기도응답을 받으면서 주의 일을 했다는 죠지 뮬러나 무디같은

사람은 학자도 아니고 학설에 심취된 사람도 아니었지요(물론 어느정도의 학식이야 기본적으로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누구의 논리가 옳고 그르다는 그 차원과는 전혀 무관한, 그저 편안한 한 편의

 "사랑방 담화"입니다. 감사합니다.

 

-----------------------------------------------------------------------

 

   * 참으로 이러한 경우를 기화로 얼마전에 제가 게재했던 바 있는 워치만 니의 이러한 견해가 회자됩니다.

 

   "성경적 교훈이나 교리나 설명만 전하는 결과 계시를 보게 하는데 실패해

                                                            교회는 00해지게 된다."

 

   (實戰과 작전이론과는 언제나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갭이 존재하는 그런 것일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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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kich

January 12, 2010
*.238.236.77

시몬이 돈 주고 살려고 했던 능력?

 

19절 ‘내가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거참~! 시몬의 고백 솔직하네요.

 

설교 결론의 지적대로 시몬의 관심은 온통 사람의 맘을 쏠리게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었겠지요. 그런 그에게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

정말 갖고 싶은 능력이었을 겁니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되네요.^^;;

시몬이 그간 봐왔던 빌립이 행한 능력과는 차원이 달랐을테니깐요.

빌립으로 통해 나타났던 성령의 능력들은 어차피 자신보다 뛰어나고 훌륭했다 치더라도, 자신도 비슷하게나마 흉내 내거나 따라할 수 있는 능력이잖아요.

근데. 이건. 차원이 다르네요.

단순히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행함으로 보여주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자신이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갖고 싶겠어요. 돈을 얼마를 주고라도 말이지요.

미국 드라마 중에 히어로즈라고 아시는지요? 제 기억엔 목사님께서 매트릭스를 모르셨던 분이시니.^^;;

지금 시즌4 방영중인데 초능력자들에 대한 드라마입니다. 악역에 사일러라는 능력자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른 능력자들의 능력의 원리를 이해해서 자신의 능력으로 만드는 인물입니다. 능력을 획득하는 방법이 조금 잔인합니다. 다른 능력자의 머리를 열어 능력을 원리를 이해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지요.

설교문을 읽다가 사일러의 능력에 대한 욕망이 시몬과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일러가 악역임에도 많은 인기를 얻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일러와 비슷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능력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자라면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이 최고로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능력의 원천처럼 보였으니 말입니다.

 

자신이 손을 얹으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성령이 임하니. 병고치고 귀신 쫓는 것은 애들 장난처럼 보였겠지요. 자신이 성령 그 자체. 혹은 능력의 원천이 될 수 있으니.

설교문에서 시몬이 신처럼 추앙받았다는 학자의 의견이 있다고 소개하셨는데, 신이 되고픈 자나 스스로 능력의 원천이 되고픈 자나 똑같지 않습니까? 마법사나 능력자를 넘어서 말입니다.

설교문 읽다가

시몬이 돈을 내고 얻으려고 했던 그 능력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잠시 딴 생각을 해 봤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결국 성령의 참된 능력과 증거는 예수그리스도 사건으로 집중된다는 말씀을 하신 듯한데…. 중간에 딴 생각하다가 설교내용 잘 따라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로운 설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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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2, 2010
*.120.170.243

키치 님,

정말 이야기 솜씨가 좋습니다.

저의 건조한 설교를

감칠맛 나게 풀어내셨네요.

더 핵심적으로,

더 현대적 감각으로,

더 드라마틱하게요.

오늘 한국의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께서,

우리같은 모든 소시민들도 덩달아서

시몬 마술사처럼 특별한 능력에 목 매 달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ㅎㅎ

없는 걸 찾는 거지요.

잠간 우리 마음을 혹 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는 신세인 거지요.

우리의 삶을 다이나믹하게 만드는 원천이 무엇인지

정신 차리고 붙잡고 살아야할 때인 것 같습니다.

은혜로운 보충 발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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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눈꽃

January 12, 2010
*.187.19.193

집중해서 설교를 듣고 있던중 "마술사 시몬은 사람들이 놀란 만한 일들을, 말하자면 초능력과 마술을 많이 행했습니다. 그에게서 일어난 현상들은 빌립이 행한 표적 및 큰 능력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열광적인 상태에 이르면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에게서 일어난 현상들은 빌립이 행한 표적 및 큰 능력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아~ 저도 위 성서 본문의 말씀을 과거에 읽으면서 무척 궁금했거든요
그럼 시몬이 돈을 주고 사고 싶어 한 그 성령의 임재란 과연 무엇을 말함일까?
바짝 긴장하고 들었지요!
"성령 임재에 대한 가장 크고 참된 증거는 예수 사건입니다. 그에게 일어난, 그를 통해서 약속된 종말론적 부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세계가 날이 갈수록 더 또렷해지고 있나요? 그렇다면 성령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아!오늘 설교의 키 포인트~~였습니다. 제게는......

목사님 ! 풍성한 생명의 양식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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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2, 2010
*.120.170.243

눈꽃 님이

성서의 세계에 눈을 뜨는 중이군요.

거기에도 여러 단계가 있겠지요.

일단 성서에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요.

그게 기초이면서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꾸미고 있는 여러 장식과 장치들을 헤치고 들어가서

그 핵심을 붙드는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그 핵심은 삼위일체론적 구도에서 해석되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통치이겠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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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오영숙

January 13, 2010
*.199.240.15

성서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를 잘 해 주시는 스쿠버 지도자님...^^

저도 함께 들어가 보았습니다. 풍덩~~~~~~

물 속에서 눈을 뜨고 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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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4, 2010
*.120.170.243

오영숙 님,

이미지 트레이닝으로는 안 됩니다요.

실제로 들어가야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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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요한

January 13, 2010
*.45.221.28

목사님의 말씀 잘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네요,

여기에 댓글을 많은 분들께서 달아놓은 것을 또한 함께 읽어보고,

신학을 전혀 해 보지 않은 저는 이 본문 구절을 가지고 아래와 같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본문가운데에는 시몬이 마술을 행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사람이었고,

시몬이 빌립이 성령을 통하여 행한 능력을 보고 그도 성령을 받아 능력을 행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주요 소재로 나옵니다. 하지만, 시몬이 행한 마술의 능력과 성령을 받았을 때의 현상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두 가지 경우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경우, 시몬이 마술을 행하였다는 말만 문자적으로만 생각할 경우,

 그냥 사람들을 눈 속임하는 마술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본문에는 이 마술이 치병이다 축사다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빌립과 사도들을 통해 나오는 성령의 능력을 보고서

자기자신은 사람들을 눈 속임해서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기적을 행하지만, 사도들이 행하는 능력은 기술적으로 전혀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시몬)자신이 알지 못할 신으로 부터 나오는 능력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울이 무당을 찾아가서 사무엘을 불러내라고 했던 장면(이 장면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도 분분함)이 나오는 데,  자신은 눈속임으로 마술을 행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능력을 보고서 나도 이제 알지못할 신으로 부터 나오는 기적을 나도 해보고 싶다 이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기적을 불러오는 주술을 한 번 습득해 보고 싶었던게 아닌가 하는 경우입니다.

아마 시몬의 마술이 병을 고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시몬의 마술이 뛰어났더라도 모세와 대결을 했던 마술가들 수준이상은 아닐거라는 추정입니다.

 

두 번째의 경우, 목사님 말씀과 같이 시몬이 정말 빌립과 같이 치병과 축귀를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인 경우입니다.

이러한 경우, 그가 놀라워 했던 것은 빌립의 치병, 축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을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었을 것입니다. 8장4절부터 10절까지 다시 읽어보면,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그가 한 말에 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왜냐하면 귀신들이 떠나가고, 많은 중풍병환자, 지체장애자들이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성에는 기쁨이 넘쳤다, 그런데,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니 다 그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아 빌립을 따라 다녔다. 

빌립은 예수님과 같이 가난한 자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중풍병자, 눈먼자, 앉은뱅이, 귀신들린자 이들은 가난한 자들로 대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병을 치유하며, 하나님 나라,  산상수훈의 복음을 전파하였을 것입니다. 높은 자들이 낮아지며, 힘없고 약한 자들이 위로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이에 반해 시몬 자신은 아마 돈을 받고 마술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밥벌이로 기적을 행하기는 했지만,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돈 받지 않고 불치병을 치유할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속이거나,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어서 부자들도 함께 끌고 다니며 돈과 명성을 함께 누리려 했던 사람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빌립이 행하는 놀라운 기적(자신보다는 높은 수준)과 함께 그가 전하는 복음, 그리고 가난한 군중들에게 넘치는 기쁨, 전혀 다른 차원의 삶 이러한 것을 보고

그가 더 놀라워 했던 것이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비록 그에게 여전이 세상적인 욕구가 더 강했고 그를 지배했다할 지라도, 빌립이 전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참된 것이고 놀라운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스스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11장 2절~6절 말씀이 어쩌면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물었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 맞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 눈 먼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어느 경우라고 하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시몬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된 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무엇이고 복음의 능력은 무엇이냐 이것에 대해 생각할 때, 진정한 성령의 능력, 복음의 능력이 치병과 축사와 같은 일차적 차원의 수준(이말도 좀 이상합니다만)에 그칠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데까지 나아가야 하며, 치병이나 축사나 방언등의 능력을 소유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빌립과 같은 은사가 있다면 가난한 자들에게 사례비를 받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치유를 해 주고, 예수의 이름을 전해 주어야 하며, 또한 세상을 향해 산상수훈의 복음을 가감없이 부자들에게나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도적 억압으로 인해)가난한 자들에게는 복된 소식을 제도적 불의 속에서 유익을 누리며 부자가 된 자들에게는 화를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날더 사이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 참조

 

저는 제가 최근 읽고 있는 책들, 얼마전에는 톨스토이의 우리시대의 노예제도, 희년의 경제학, 박철수 목사님의 하나님 나라를 지금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볼 때 희망이 없어 보였지만,이러한 책들과 같은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분들을 통하여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부흥에 대한 갈망이 제 자신한테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엘리야의 때와 같이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자,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칠천명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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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4, 2010
*.120.170.243

와, 요한 님을 통해서

설교의 피드백을 받는 거 같아서 좋습니다.

설교를 중심으로 본인의 생각을 여러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셨네요.

또 한편의 설교를 구성하신 겁니다.

그런 생각과 시도가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성서가 실제로 삶과 일치가 될 수 있겠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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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January 15, 2010
*.151.252.103

(영)Simon the Magician/the Sorcerer.

 

시몬 (사마리아 마술사)  [Simon Magus]

 

 

 

 

AD 1세기에 활동한 마술사.

 

 

 

성서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한 마을 깃타 출신으로 보인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8장 9~24절에 따르면, 시몬은 그리스도교도가 된 후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성령을 전달하는 초능력을 사려고 했는데, 여기서 신성한 물건이나 교회의 직책을 사고판다는 뜻의 성직매매(simony)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후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몇몇 저서에서는 시몬이 그리스도교 탄생 이후의 영지주의를 창시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 교회의 전형적인 이단으로 언급되었는데, 이 영지주의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얻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이원론 종교의 한 분파이다.

팔레스타인 북부 사람들에게 대단한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인물로 숭앙받던 시몬 마구스는 그리스도교 복음전도의 권능에 대하여 찬사를 표시했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그는 필립보에게 세례를 요청했다. 성서에는 그가 사도 베드로에게 책망을 받은 후 회개하고 분명히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2세기의 신학자이며 순교자인 유스티누스는 시몬이 클라우디우스 황제(41~54 재위) 때 로마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그의 놀라운 기적에 매료된 추종자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시몬의 신격화를 확증한 것으로 여겨졌던 고고학적 발굴물들은 진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3세기의 다른 그리스도교 문서는 거짓 메시아 노릇을 하던 시몬 마구스가 로마에서 성 베드로와 또 한번 만났다고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네로 황제(54~68 재위) 앞에서 사도 베드로에게 도전하여 하늘을 날 수 있는 자신의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려고 로마 광장 꼭대기에서 날려고 하다가 떨어져 죽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그는 스토아 철학과 영지주의를 절충하여 융합했는데, 이는 '대선언'(The Great Pronouncement)으로 알려져 있다.

 

 

 

시몬의 유사 삼위일체론적인 영지주의 교설은 클레멘스 문서라고 알려져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교설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권능'이라는 직함을 가진 시몬은 유대인들에게 중재하고 고난받는 '성자'로서, 사마리아인들에게는 '성부'로서, 다른 이방세계에 대해서는 '성령'으로 등장한다. 이 문서들은 신화 양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서에 나오는 시몬 마구스와 후대의 외경 자료들에 나오는 시몬이 같은 인물인지 의심스럽다.

2세기에 시몬 마구스를 제1위의 하느님인 성부로 보는 시몬파가 생겼으며, 그는 그리스의 신 제우스의 화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시몬의 배우자 헬렌을 여신 아테나의 지상현신(地上現神)으로 보았다. 시몬파의 창조신화에 따르면 최초의 에노이아(관념)가 천사들을 창조하기 위해 성부의 마음에서 산출되었고, 그후 이 천사들이 보이는 우주를 창조했다. 그러나 이 천사들은 질투심 때문에 최초의 에노이아가 성부에게 되돌아갈 수 없도록 인간의 몸에 가두어놓았다. 그리하여 이 최초의 에노이아는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겨다니는 운명에 처했는데, 이 에노이아가 마지막으로 헬렌의 몸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최초의 에노이아를 구원하기 위하여 시몬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왔으며, 자신을 제1위의 하느님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을 구원해주었다. 시몬파의 구원교리는 영지주의 집단의 구원교리와 달랐다. 시몬파에서는 세속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약속한 데 반해, 영지주의 집단들은 지상의 감옥에서 벗어남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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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January 18, 2010
*.99.193.27

오늘도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성령의 임재, 종말론적 부활생명에 대한 믿음, 소망에 대한 리얼리티를 확보해 가지 못한다면 축귀, 병고침, 방언 등등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에 마음을 뺏아겨 갈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를 위해 오셨지만 정작 가난한 자는 이런곳에 마음이 빼앗겨 주님을 왜면하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이것은 오늘날의 기독교가 이런 속임수를 쓰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구요..

진정한 성령세례를 이끌어 줄 이 세계의 빌립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도..

이 생각까지 이르니 이유없이 왠지 쓸쓸하군요..

힘 빠지게 해서 죄송합니다. 최근 저에겐 목사님의 설교가 단비처럼 느껴집니다...수고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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