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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영이시다

주현절 조회 수 10713 추천 수 3 2010.02.15 10: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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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린도후서 3:12-18 
 

주는 영이시다

(고후 3:12-18)


바울의 반대자들

우리는 오늘 신약성서 중에서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대목 중의 한 대목을 읽었습니다. 마지막 1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구절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처럼 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삶이 무엇인가요? 학생들은 점수를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어른들은 돈을 버는 일에 모든 힘을 쏟습니다. 자녀들을 키우는 문제도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인간관계도 힘이 듭니다. 심지어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늘 긴장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우리가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지금 대학, 취업, 결혼, 사업이 잘 돼서 기분이 좋거나 잘 안 돼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마당에 영광이라니요. 그게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지금 우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바울의 이 말을 지레짐작하지 마십시오. 그는 뜬구름을 잡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구체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그걸 알아야만 이 말씀이 우리의 삶과 직접 연관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의 반대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자들이라고 해서 조폭이거나 사이비이단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이 정통으로 인정을 받지만 당시는 상황이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반대자들이 정통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권위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열두 사도의 권위는 어디서나 최고의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전에 함께 생활하고 부활을 경험한 이들이었으니, 그런 권위는 당연합니다.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사도의 권위를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서 추천서를 받은 일단의 설교자들이 고린도교회에 와서 설교하고 신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에 반해서 바울은 사도의 추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약점이었습니다. 그 상황을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 각각의 교단에서 정식으로 신학공부를 하고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과 그런 것 없이 복음에 심취해서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비교하면 됩니다. 전자는 목사 자격증이 있고, 후자는 그것이 없습니다. 신자들이 누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일까요? 초기 기독교 제도권에서 바울은 별로 이렇다 할 자리를 잡기 힘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달리 예수님의 생전에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름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니 누가 그걸 인정하겠습니까?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을 노골적으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심으로 경계한 것은 그럴만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반대자들과 투쟁했습니다. 자신의 사도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반대자들이 사도들에게서 받은 기득권인 추천서를 별 거 아닌 거라고 주장합니다. 고후 3: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바울은 사람이 종이에 쓴 추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으로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마음에 쓴 추천서가 있다는 겁니다. 종이에 쓴 추천서는 돌 판에 쓴 것이고, 영으로 쓴 추천서는 마음 판에 쓴 것입니다.(고훈 3:3b)

바울의 이런 주장은 옳은가요? 혹시 사도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자기 열등감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닌가요? 이걸 판단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바울도 사람이기에 기분에 따라서 뭔가 다른 말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바울은 당시 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를 핀잔한 적도 있다는 사실에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의 추천서를 들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자랑하는 바울의 반대자들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닙니다. 핵심은 어느 쪽이 진리에 속했는가 하는 겁니다. 바울은 아주 분명한 진리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돌판과 마음판

바울은 추천서에 대해서 말하는 마지막 단락에서 돌판과 마음판을 거론했습니다. 그게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울의 적대자들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적입니다. 돌판은 십계명을 받은 모세 전승의 핵심입니다. 율법을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이 율법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게 좀 이상할 겁니다. 그들은 사도의 추천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그대로 가르쳤다면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충실한 대변자들입니다. 사도들도 여전히 율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하던 바울의 반대자들은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예수를 믿되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들과 바울이 여기서 대립됩니다. 당시에 그런 대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갈라디아서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한 것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거라고 독하게 말했습니다.(갈 1:10) 여기서 말하는 다른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추천서를 받은 사람들이 전한 내용입니다.

사도들이 왜 예수를 믿되 율법을 더불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율법은 사도들에게 아주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습니다. 요즘 모태신앙인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사도들은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가 있듯이 나사렛파로 자리했습니다. 지금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하는 바울의 반대자들은 이런 사도의 입장을 그래도 반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핵심적인 근거는 ‘영’입니다. 추천서를 언급하면서 자기의 추천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돌판에 새겨진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 3:6) 제가 설교 머리에서 인용한 고후 3:18절에서도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것이 모두 영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진리의 근거로 말하는 영은 무엇일까요? 영이 눈에 보일 정도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특별한 사람에게만 경험되는 어떤 비밀 가득한 것일까요?

영(靈)은 헬라어 ‘프뉴마’의 번역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루아흐’입니다. 신구약성서를 막론하고 성서는 이 영을 생명과 연결해서 사용합니다. 영은 생명의 힘입니다. 살리는 힘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여기서 주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약간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예수님이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힘이며, 그가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생명의 영과 일치되셨고, 바로 거기에서만 우리의 자유가 보장됩니다.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아는 사람만이 자유로워지니까요.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하던 바울의 반대자들은 위의 사실을 분명하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여전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증거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문제를 비판하는 중입니다. 고후 3:15절에 따르면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습니다. 율법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바울은 수건에 관한 이야기를 출 34:29-35절에서 인용했습니다. 십계명을 새긴 돌 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광채였습니다. 모세는 말씀을 전한 다음에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광채를 보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합니다.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에 쓴 것은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입니다.(고후 3:13) 출애굽기 기자는 수건으로 가린 사건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반면에 바울은 소극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어떤 다른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수건 사건을 인용할 것뿐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하는 바울의 반대자들도 여전히 수건을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율법의 한계를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이제 수건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입니다.(고후 3:14) 언제들이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질 것입니다.(고후 3:16)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에게 돌아가면 율법의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수건을 가린 채 율법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당장 율법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롬 3:20) 그것은 ‘정죄의 직분’입니다.(고후 3:9) 율법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줍니다. 이런 점에서 율법도 나름으로 역할이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수건을 가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율법의 한계를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복음과 동시에 필요한 어떤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태양과 손전등

비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손전등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기도 없고 어두운 곳에서 나름으로 필요합니다. 아침이 되어 밝은 태양이 떴습니다. 어떤 사람이 밝은 대낮에 손전등을 키고 다니면서 그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고 있습니다. 모양이 얼마나 이상합니까? 그들은 수건으로 그림자를 만들어놓고 손전등을 거기에 비추면서 손전등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직 세상이 어둡다고 외칩니다. 손전등은 태양이 없을 때만 일시적으로 필요합니다. 이미 태양이 떴는데도 손전등을 계속 비추고 다닌다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의 그 반대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태양과 같은 빛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드러났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손전등에 불과한 율법을 더불어서 지켜야 한다고 더 이상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실을 알 게 하는 이가 바로 영이십니다. 그 영은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고후 4:6절에서 이것을 정확하게 전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 비추셨느니라.” 빛을 창조하신 분이 우리에게 참된 인식의 빛을 비추신다는 겁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바울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바로 영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것이 이해가 되시나요?

물론 우리는 영이 무엇인지 그림을 그리듯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듯이 영의 활동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의 추천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영의 추천서를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사도의 추천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영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믿습니다.” 하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겠고, 잘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겠지요. “믿습니다.” 하고 큰 소리를 쳐도 실제로는 이런 영적인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고, 잘 모르겠다고 말해도 실제로는 이미 그런 세계에 들어간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건 제 삼자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영만이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 사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한 말씀만 보충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궁극적인 생명 사건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서, 그의 운명에서 무상하지 않는 참된 생명이 실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에게서 죽음이 극복되었습니다. 그에게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시어 모든 이들에게 부활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주님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주님과 똑같은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와 동일한 부활의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증거를 대라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 증거는 성서입니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영입니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운행하며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열어가는 그 영을 피조물인 인간이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영이 우리 얼굴을 가린 수건을 벗겨주기를 기도할 뿐이겠지요. 그렇게 수건이 벗겨진 사람들은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신비한 생명의 세계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겠지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영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영으로 쓴 편지이듯이 말입니다. (주현절 후 다섯째 주일, 2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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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7]paul

February 16, 2010
*.176.166.225

목사님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평소 어려웠고 궁금해 하던 바를 목사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아직도 너무 어렵고 잘 모르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는데도 제가 좀 수준이 낮아서...


첫째 궁금한 것은 바울과 사도의 대립입니다. 진보적 (다비아를 포함해서) 서적을 읽어 보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데로 사도들과 바울의 불편한 관계와 문제점 또는 심지어 사도와 대립했던 당신의 이단이라는 표현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를 포함해서 다른 보수적 목사님들은 사도들이나 바울이나 다 하나를 말했고 사도의 말도 옳으니 지켜야 하고 바울의 말도 옳으니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바울과 사도는 대립한 적이 없으며 서로 존중하고 같이 초대 교회를 세우는데 역활을 했다고 합니다.

과연 사도와 바울의 관계는 어떤것인가요? 서로가 인정하고 같이 주님안에서 사이 좋게 지낸 관계인가요? 아님 대립까지는 아니어도 껄끄러운 관계였나요? 그럼 혹시 대립되는 성경문구가 있을때 바울의 해석이 맞나요 사도의 해석이 맞나요? 아님 제가 잘못 읽어서 그렇지 절때 사도와 바울은 대립했던 적이 없나요? 아님 서로 상대방을 인정 하지 않은 사이였나요? 이럴때 기독교는 누구를 계승한건가요? 바울인가요 사도인가요?


둘째 바울의 글을 읽어 보면 영과 믿음을 강조한 반면 사도의 글은 성령과 믿음도 강조하면서 또한 행위도 많이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둘 (믿음과 행위) 다 필요하겠지만 바울은 믿음을 사도 -- 주로 야고보서에서 -- 는 행위를 많이 강조한것 같습니다.

둘다 같은 말인것 같아도 바울은 믿음이 없는 행위는 죽은 것이라고. 즉, 먼저 성령님에 의해서 행위를 해야지 아무리 착해지려 노력해도 착해질 수도 없고 또한 믿지 않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 제가 혹시 잘못 이해했나요?

반면 야고보서는 특히 행위를 "꼭" 해야 한다고. 십자가 없는 믿음은 헛된것이니 행위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저희 교회 (장로교)는 후자를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봉사와 구제를 많이 강조하죠. 그러면서 주로 인용하는 문구가 야고보서이지요. 물론 교회가 구제와 봉사를 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일만의 반대도 없으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과연 마음이 없는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입니다.

물론 제 속의 욕심, 게으름과 같은 죄 때문이기 때문이겠지만 어떤때는 기쁜 마음이 들더라도 어떤때는 하기 싫을 때도 있읍니다. 저희 목사님 말씀은 이때 더우기 무조건 충성하고 봉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 속에 기쁨이 없다는 것은 영이 없다는 것인데 그래도 행위가 필요할까요? 그렇다고 좋은 때만 한다면 평생가야 봉사하기 싫을 것도 같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영이 제게 임한건 알 수 있나요? 또한 위에서 처럼 일하기 싫을때는 어떻게 해야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기쁜 마음이 들까요? 열심히 기도하고 꾸준히 성령이 힘할때까지 봉사해야 하나요? 아님 짐짓 그런척 하고 저 자신을 속여야 하나요? 한국의 인기 있는 무슨 무슨 훈련처럼 성령이 제게 임하시고 영을 강하게 할 무슨 트래이닝 프로그램이라도 있나요?


어떻게 보면 벌써 다비아에서 목사님께서 많이 설명 해 주셨기 때문에 중복되는 질문도 있을 수 있겠지만 도무지 다비아의 글들을 다 읽어 보아도 성령님에 대해서는 너무 어렵고 잘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부디 목사님의 좋은 인도와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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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February 16, 2010
*.120.170.243

paul 님,

길게 질문을 주셨군요.

대충 감을 잡고 계신 것 같고,

아무도 정확한 답을 알지 못하기에

제 설명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군요.

짧막하게 말씀드리죠.

1. 바울과 사도들의 대립은 우리의 예상보다 크고

우리의 염려보다는 작습니다.

어느쪽이 옳은가, 하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겠지요.

세례요한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리스도는 아닌 것처럼

사도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완전히 복음적이지는 못했겠지요.

그래도 사도들이 없었다면 복음의 씨앗이 전수되지 못했을 겁니다.

2. 일단 행위보다는 일단 믿음에 집중하는 게 좋습니다.

믿음 없는 행위는 우리에게 짐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구요.

행위로는 우리가 의로움을 받지 못하구요.

행위 없는 믿음이 가능하다거나 좋다는 말은 아니랍니다.

3. 초기 기독교는 주로 방언을 성령 임재의 중요한 현상으로 보는데요.

물론 그것 하나의 전통만 있던 것은 아니지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도 성령에 의한 것이거든요.

영을 받았는지에 대한 증거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어요.

시대마다 현상들을 다르게 경험했으니까요.

이렇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깊이, 또는 생명의 신비로 영혼이 열리는 경험이라고 말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37]paul

February 17, 2010
*.89.89.22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우문현답이라고 장황하고 두서없는 제 질문에 정확히 제가 궁금했던 포인트를 답해 주셨군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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