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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

사순절 조회 수 17312 추천 수 1 2010.03.29 16: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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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19:28-40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

(눅 19:28-40)

 

예수님은 서른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다른 성인들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짧게 사셨습니다. 부처나 공자 같은 분들은 모두 천수를 다 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공생애는 1년 여, 길게 잡으면 2년 여 정도에 불과합니다. 서른 살이셨을 때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시작했고, 서른세 살에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활동 영역도 좁습니다. 가나안의 북쪽 지역인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시작해서 사마리아를 거쳐 남쪽 유대 지역인 예루살렘까지의 전도 여행이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에는 몇 번의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준비

예루살렘으로 오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과 종종 충돌했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크게 대립각을 세웠던 이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서기관들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당시 유대교의 엘리트 집단에 속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가장 열정적으로 실천한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 전통이나 정결의식 같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결국 예수님은 유대교 최고 권력 집단에 의해서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유월절을 채 일주일도 앞두지 않은 절기였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온갖 종류의 참배객들과 그들이 보이는 종교적 열정으로 가장 뜨거운 시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길로 뛰어드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생각이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복음서에는 그들의 불안한 마음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고난 받고, 죽은 다음에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극구 말렸습니다.(마 16:21절 이하)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제자들과 전도 여행을 하면서 몇 번에 걸쳐 설명했습니다. 그때마다 제자들은 당혹스러워한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제자들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은폐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눅 18:34)

이런 와중에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시키십니다. 예루살렘 가까운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준비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마을로 나가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나귀 새끼를 끌고 오는 과정이 비밀 첩보원들의 활동처럼 보입니다. 줄에 묶인 나귀 새끼를 풀어오려고 할 때 왜 가져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나타나면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마치 암호와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모든 일이 그대로 이뤄졌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치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마치 장군이 전투에서 승전하고 돌아오면서 군중들에게 환호를 받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그렇게 떠들썩했을까요?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고, 또는 그렇게 기대하고 열렬히 환영했을까요?

다른 복음서에는 군중들이 겉옷만이 아니라 종려나무로 추정되는 나뭇가지를 꺾어 흔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제자들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런 묘사로만 본다면 그때 거기서 큰 소동이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큰 환호가 없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모든 복음서는 예루살렘 입성에서 큰 환호가 있었지만 곧 조용해졌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군중을 몰고 다니지 않고 제자들과만 함께 성전을 찾았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일반 순례 객들과 다를 게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주둔 로마 군이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때 군중의 열광적인 환호가 따랐다면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로마 군이 반드시 출동했을 겁니다. 로마 제국은 사회 소요를 가장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분문이 말하는 환호가 꾸며낸 이야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다시 그려보십시오.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에서부터 유월절을 위한 순례에 나섰습니다. 순례의 마지막 순간이 바로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제자들은 자못 감격스러웠겠지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바꿔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대략 200년 전쯤 대구에 있는 어떤 서원의 원장과 원생들이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적인 서원 잔치에 참가하기 위해서 대구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갔다고 합시다. 중간에 다른 일을 보면서 한 달 여에 걸친 여행 끝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남대문(숭례문)을 통과할 때 기분이 어떨지 상상이 갑니다. 그 날을 기념하는 조촐한 의식을 치렀겠지요. 지금 본문의 제자들은 바로 그런 의식을 여는 겁니다. 다른 이들이 볼 때는 별 것 아니었겠지만, 다른 순례 객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에 불과했겠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더 이상 감격스러운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감격스러운 경험을 간직하고 있던 그들은 훗날 교회 공동체에서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고백했습니다.(눅 19:37) 그 고백을 우리는 지금 복음서에서 읽었습니다.

 

돌들의 외침

바로 그 순간에 바리새인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눅 19:39)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추종하던 이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볼 때 제자들의 행동은 예수님의 안전을 헤칠 수도 있는 경솔한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칫하면 로마 군이 출동해서 예수님을 체포할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의 또 다른 염려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열광적 환호에 감정적으로 휩쓸릴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변의 열광적 지지 앞에서 흥분하고 자제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마 21:12-1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린이들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환호하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대적했다는 뜻만이 아니라 로마 군의 출동을 염려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염려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 19:40)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해석이 분분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해서 침묵하면 돌들이 제자들을 대신해서 말할 것이라는 뜻일까요? 또는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해서 침묵하는 사람들을 돌들이 책망한다는 뜻일까요? 어떤 해석이었든지 여기서 핵심은 예수님이 행하신 메시아적 선포의 진정성을 예수님 자신이 인정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예루살렘 입성을 시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메시아적 행위, 즉 구원론적 행위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구원 선포와 행위가 바로 예수님 자신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아였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인 눅 19:37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제자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말입니다. 그들이 본 ‘모든 능한 일’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메시아적 선포와 행위였습니다. 그 선포와 행위는 복음서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 비유, 팔복, 안식일과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비롯해서 병든 자를 고치거나 귀신들린 자를 고친 일들이 그것입니다. 그 모든 가르침과 행위의 중심에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 나라가 자리했습니다. 해방과 자유입니다. 악한 힘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 악한 힘은 돈을 숭배하는 맘모니즘과 종교법을 절대화하는 율법주의 같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그 모든 악한 것들은 힘을 잃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능한 일’을 행하신 분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셨을까요? 그래서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율법을 절대화하는 유대교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사람들을 여전히 율법으로 묶어두었습니다. 율법은 매력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안으로 숨어들기도 합니다. 로마 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악한 힘과 질서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여전히 횡포를 부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모든 병자들이 치료를 받거나 귀신 들린 사람이 깨끗해진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실제로 경제적으로 윤택해진다거나 육체적으로 건강해지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어도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불치병에 걸릴 수도 있고, 억울한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무능해보입니다. 해방과 자유가 별로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처한 영적인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좀더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가 모든 사람을 구원한, 그리고 구원할 메시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말입니다. 이 능력은 이 세상의 것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생명의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십니다. 그 새로운 차원은 곧 우리에게 임박했다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요, 하나님의 통치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바로 ‘메타노이아’, 즉 회심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과 더불어서 오늘 우리는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생명의 새로운 차원을 맛보았습니다. 참된 해방과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신 주님이야말로 ‘모든 능한 일’을 행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관념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경험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는 궁금증이겠지요.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라는 요구이겠지요. 이런 질문이나 요구는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전문 산악인에게 “왜 산을 오르는가?” 하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답은 서로 다를 겁니다. 핵심은 산에 오르는 과정과 정상에 서는 경험을 통해서 극도의 해방과 자유를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그것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옆에서 설명해줘도 알지 못합니다.

저는 누가복음 기자가 말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찬양을 이렇게 전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8) 하늘에 평화, 가장 높은 곳에 영광이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늘과 가장 높은 곳은 똑같은 뜻입니다. 그곳은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된 곳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궁극적인 생명과 하나님은 똑같은 뜻입니다. 하늘에 평화, 가장 높은 곳에 영광이라는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궁극적인 생명이, 즉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가장 궁극적인 ‘은폐된 생명’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비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물리학자들은 만물의 토대가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고대 서양에서는 만물의 본질을 물이나 흙으로 보았습니다. 원자라고 본 학자들도 있습니다. 20세기 초에는 양자역학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장(場)이론이나 초끈 이론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물질의 가장 궁극적인 토대가 무엇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이 밝혀질 때는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할 종말이겠지요. 우리의 생명 경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먹고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종말에 확실하게 드러날 궁극적인 생명이 오늘 우리 삶의 근원이자 중심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지금 우리의 삶을 끌어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가 말하는 하늘, 가장 높은 곳이 바로 이 생명의 자리입니다. 그 생명의 능력이 바로 평화와 영광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경험한 제자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지난 2천년 동안 모든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맞춘 사순절 여섯째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늘의 평화 자체이시며, 가장 높은 곳의 영광 자체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임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더 이상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저주와 불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궁극적인 평화이며 영광입니다. 그 사실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2천 년 전 제자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찬양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입니다. 아멘! (사순절 여섯째 주일, 3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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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용남군

March 2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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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듣다가 ‘예수를 통해 얻는 생명의 실질이 무엇일까’하고 생각하다가

너무 머리가 아파서 설교 후반부를 다 게워냈습니다.

고1 때 평범한 어느날, ‘제도권을 벗어나야 예수의 제자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학교를 무작정 결석하고 (당시 다니던) 교회로 도망가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와 집과 학교에서는 가출했다고 난리가 났었는데, 그때의 심정을 누가 이해해줄 수 있었을지.

죽을 때까지 세상 앞에서 생존을 구걸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수많은 국민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해방을 선포해주긴커녕 딴짓만 하면서 ‘열심히 잘 살아남으라’고 가르치는 교회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한동안 ‘다들 예수와 상관없이 가는구나’라는 우울함에 빠져 지내다가

올해부터 거룩한 영의 도움으로 생명의 맛을 조금씩 본 후에는, 왕이 된듯한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때가 곧 세상의 종말이 이루어진 때일텐데,

그의 이름이 제대로 선포되기만 한다면 종말의 생명의 권능이 이 자리에서 역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예수의 이름 안에 머물고 있는 이것이 생명이라고 생각되는데,

아직도 뭔가 실질적인 게 손에 잡히지 않는 게, 한치 앞도 모르는 어둠 속에서 발을 내딛고 있는 기분이네요.

예배 후 하도 어지러워서 기독교 강의 시간 땡땡이치고 조퇴하는데 집에 가면서 얼마나 후회됐는지….

(목사님 몰래 슬쩍 나가려고 했는데… 집사님들께서 크게 인사해주셔서 들켰네요 ㅎㅎ)

요즘엔 신학단상집을 다시 읽고 있는데, 한 편마다 버거울 정도로 많은 게 열려서 약 먹듯이 아껴 읽으려고 합니다.

부활절 첫 주일에 뵙겠습니다. 평안한 사순절 마지막 주간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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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March 2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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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남이는 솔직하군.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명제의 실질이

인식의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지?

바울도 자기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지.

다만 잡힌 바 된 그것을 좇아간다고 했네.

잡힌 바 된 것은 확실하다는 사실과

우리가 잡은 것은 없다는 사실 사이에

기독교 신앙의 오솔길이 있는 게 아닐는지.

한편으로는 믿음의 확실성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인식의 불완전성이 자리하고 있는 거지.

어느 한쪽으로 쉽게 쏠리지 말고

탄탄한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화살이 활줄에서 튕겨나가는 것과 같은 죽음이

우리를 잡아챌 때까지, 꾸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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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용남군

March 30, 2010
*.11.251.130

감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오솔길’이라기보다는 ‘회오리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죽기 전에는 죄로부터 자유할 수 없고, 그래서 생명을 볼 수 없는 인간이지만

그 죄를 위하여 ‘대신 죽은’ 예수 안에서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인 양 순전한 생명을 경험하는,

그래서 철학자들이 자기 스스로 숲길을 헤쳐나가는 운명에 처해 있는 반면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영의 폭풍에 그저 휘말려버리기 때문에

그 안에서 육체적인 불완전성이 모두 해소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생각 때문인지 저는 요즘 바울이 너무 싫어집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져버린 종말 사태를 가져다가, 왜 그리스 철학 관념을 동원해서

크로노스적인 ‘저 멀리서 다가오는 종말’로 바꿔치기를 했는가 하고요.

그러한 종말론 관념이 등장한 이후로 교회가 세상에 안주하며 긴 잠에 빠지게 된 건 아닌지.

이제는 바울적 전통으로서의 ‘수행의 기독교’가 지양되고 ‘선포와 권능의 기독교’가 회복될 때는 아닐까요?

노예근성적으로 바울의 권위를 수용해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절 보며 ‘싹수가 노랗다’고 생각하겠군요.

아무튼 모든 것이 결국은 그 열매로 확인될 것을 믿으며

이끌리는대로 순종하며 나아가고 싶습니다.

평안한 밤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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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참믿음

March 30, 2010
*.70.211.242

목사님 대충 겉할기 식으로 신학논쟁을 공부 해보니

아는 기쁨보다 오히려 더 혼란만 다가오고 더 고민만 늘어 가네요

전통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근본주의,

신학은 발전되어 가는거 같은데~

한국교회는 발전하는 건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으니.

 

목사님 21세기 신학은 아래로부터 입니까? 아님 위로 부터입니까? 아님 중간 타협(절충?)??

말씀중심? 초월성? 절대타자?계시종교?윤리종교? 합리적?경험적?이성적?직관적?

 

제 생각은 건전한 신학은 성서와 전통과 이성과 경험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게

아닐런지요?

어떤문제를 다룰때 성서는 어떻게 다루며? 전통은 어케 해석하는지? 이성은 어떻게 체계화 하고 있는지?

존재론적으로 인간의 경험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이번 부활주일이 그해답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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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March 30, 2010
*.120.170.243

참믿음 님,

혼란과 고민만 더 늘어간다고 하셨지요?

그게 없으면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더 깊은 영성의 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입니다.

철학 없이 대충 살아가도 큰 문제가 없기는 하지만

삶 자체에 대해서 질문하는 철학을 통해서,

비록 그것이 우리를 혼란하게 하고 고민에 빠지게 하더라도

결국은 참된 삶으로 인도하는 것과 비슷하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혼란과 고민 때문에

그 작업을 아예 포기하지요.

여러 특징적인 신학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종말에 완전히 드러나게될 진리를 인식해보려는

방법과 형식들입니다.

노래를 잘 부르려면

발성 연습을 꾸준히 해야하듯이

가능하다면 신학 훈련을 하는 게 좋습니다.

모두 위대한 신학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글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

고난주간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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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godfather

April 02, 2010
*.68.200.105

안녕하세요 목사님.

가련한 신학생, 간만에 왔사옵나이다.

 

참으로 목사님이 부럽습니다. ^^;;

요즘의 저는 슐라이어마허와 웨슬리의 틈새에서 배회하고 있어요.

이번 학기에 웨슬리를 듣게 되었는데, 의외의 수확이랄까요?

솔직히 기대안했는데 그는 대단히 정밀한 사고체계를 가진 것 같습니다.

 

목사님, 저는 요즘 굉장히 비겁한 구도를 하고 있는데요,

고민스러운 실존에 빠질 땐 잽싸게 웨슬리의 divine evidence로 도망가서 안심을 얻고,

제도권 영성이 염증 날 땐 슐라이어마허에게로 가서 무한자의 taste를 느끼고 싶어합니다.

 

때로는 알 수 없는 신비에 사로잡혀 생에 대한 통찰과 감각이 나도 모르게 불현듯 꽃필 때가 있으나,

그와 같은 경험이란 많은 이들이  찾지 않는 세계인 탓에,  밀려오는 처절한 쓸쓸함을 느낀 나머지,

다시 익숙한 군중 속으로 스며 들어가 내 영혼을 계량해 버리고 맙니다.

 

목사님을 보면 참으로 자유하신 것 같은데, 저는 언제쯤 그런 adiaphora를 가질 수 있을런지.

저의 싸움이 애처롭게도, 무익하게도 보입니다.

물론, 도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제가 깨달은 것은 치열한 사투가 없이는

본질의 맛을 향유하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어렵게 살려고 합니다만 요즘들어 스트레스가 심합니다. 하하...

 

언제쯤 어바웃을 벗기고 잇에게 가까이 갈 수 있을런지요.

부럽습니다, 목사님. 예전에는 차안에만 눈이 먼 나머지 목사님의 내공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간혹 댓글로 함부로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어쨌든 저는 목사님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

책이 잘 안 읽어져서 들어와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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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April 03, 2010
*.120.170.243

대부 님,

가련한 신학생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는데,

영혼이 가련하다는 거요,

아니면 먹고 살기가 가련하다는 거에요? ㅎㅎ

아마 영혼 쪽의 무게가 더 하게지요.

웨슬리는 그냥 스쳐 지나가면 될 것 같구요.

슐라이어마허는 더 진지하게 대하는 게 좋겠군요.

나도 웨슬리 전통에서 신학 공부를 한 탓에

슐라이어마허보다는 웨슬리의 책을 더 많이 읽긴 했는데,

그런 점에서 좀 손해를 본 거에요. ㅎㅎ

신학생일 때만이라도

교회 현실과 상관없는 신학 자체의 세계에 푹 빠졌으면 합니다.

신학교마저 세상의 대학처럼 실용성만 찾는 이 현실에서

개인 신학생들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겠지만요.

주말이군요.

고난주간 마지막 날입니다.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중간 시간이네요.

그 사이에 주님은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전승이

초기 기독교에 있었지요?

모든 이의 구원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 거기에 담겨 있어요.

우주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것들,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나타날 모든 것들마저 구원받을 세상을 노래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마땅한 도리가 아닐는지요.

좋은 부활절을 맞으세요.

힘 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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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윤만호

April 04, 2010
*.9.109.14

이 부활절 아침에 주님 주시는 평화와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현실의 자리는 왜 이렇게 불안하고 초라한지요.

 

내 믿음의 친구가 말하는 <감명과 은혜>는 초조한 가식으로 보이고

내 온 마음과 온 성품으로 순복하여 듣고 받아들여야 할 설교 말씀은

왜 잘 될거라 믿으면 잘 된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밖에

안드는지....

 

내가 대구성서 아카데미에서 나쁜 영향을 받아서일까요?

 

제 자신의 문제로 돌아와 보면, 

복음의 능력, 신앙의 힘에 의지해 참생명을 누리고 산다기 보다는

교회다니는 문제로 고민하고 산다고 밖에 할 수 없고

(예수님의 멍애는 쉽고 가볍다고 했는데)

일상의 고민과 무력감 위에 신앙의 고민만 하나 더 얹혀진 불쌍한 신앙인

....

 

찬찬히 설교본문을 다시 읽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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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 예수만

April 04, 2010
*.116.70.172

윤만호님! 의례적인 인삿말씀의 하나일 뿐이겠지만, 주님의 가호를 빕니다.

(우선 다른 것 다 빼고) 4복음서들만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읽어 나가심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주제넘은 조언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의 모습이 내 눈에 선명하게 클로즈업 되는 그 때까지 말입니다.

(읽는 양은 하루에 서너 페이지를 넘기지 마시고, 읽은 말씀을 일상 속에서

계속 묵상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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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April 05, 2010
*.80.64.16

윤만호 님,

우리가 살다보면

모든 게 뒤죽박죽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방향이 잡힐 겁니다.

그래도 나름으로 준비를 하는 게 좋겠지요.

좋은 신학책을 읽는 게 필요합니다.

성경만 읽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거는 아닙니다.

신학책은 성서를 바르게 읽을 수 있는 방향타 역할을 합니다.

신비주의 영성가들의 책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어쨌든지 지금 경험하는 혼란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런 혼란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이럴 때는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어야 하는데요. 음.

언제 시간이 되면 저에게 전화 한번 주세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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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윤만호

April 07, 2010
*.226.11.207

성경은 교과서, 신학책은 참고서 삼아 열심히 읽어야겠군요. 감사합니다.

정목사님 설교를 들으면 뭐랄까 성서의 계시에 접하는(다가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시간을 내서 이메일이든 전화든 목사님과 상담을 한번 할게요.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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