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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기타 조회 수 9176 추천 수 24 2004.07.25 23:30:39
성경본문 : 골로새서 1:3-8 
2004. 7.25                    
믿음과 사랑의 뿌리
골 1:3-8

구약성서는 두말 할 것도 없지만 비교적 후대에 기록된 신약성서도 역시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핵심적으로는 해당 신약성서가 쓰여진 본래의 의도가 무엇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같은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처한 형편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를 경우에 서로의 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자그마치 2천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벌어져 있으니까 신약성서와 오늘 우리가 진정한 대화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기독교는 그 2천년이라는 역사를 단절시킨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연속시켜왔기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토대에 확실하게 서 있기만 한다면 성서와 우리 사이의 괴리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2천년이라는 전승의 역사인 신학에 대한 깊고 정확한 이해와 오늘 우리 삶에 대한 폭넓은 통찰이 필수적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학을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우리가 성서의 고유한 세계에 들어가는 그 과정에서 성령이 돕는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훨씬 궁극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골로새 교우들에게 보낸 이 편지도 그저 우리가 읽기만 하면 그대로 은혜가 되는 그런 간단한 내용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거의 빈틈없이 거슬러 올라가겠다는 그런 자세로 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진리의 영이여, 연약한 우리를 도우소서.

믿음과 사랑
바울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바프라'에게서 골로새 교우들에 관한 소식을 전해들은 것 같습니다. 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모든 성도에게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한번도 직접 방문한 적이 없지만 바울의 가르침을 에바프라가 대신 전달한 교회이기 때문에 상당히 마음을 쏟은 것 같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옥에 갇힌 자로서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바울은 골로새 교우들과 영적으로 하나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2:5, 4:3). 마가는 훗날 골로새 교우들을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골로새 교우들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4:10). 그 이외에도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우들과 서로 연락을 취하라고 하면서 이 편지를 라오디아교회에도 보내고 라오디게아에 보낸 편지를 골로새 교우들도 받아서 읽으라고 지시합니다(4:15,16). 이런 전반적인 상황을 놓고 본다면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여러 교회로부터 소식을 받는 대로 다시 편지를 통해서 복음이 원만하게 전파되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전하려는 복음에 대한 설명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내용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제가 보기에 복음의 구조를 전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우들이 "예수를 믿고 모든 성도에게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이 문장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단어가 등장합니다. 믿음과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여기서 설명을 보탤 필요는 없습니다. 성도에게 사랑을 보여준다는 말도 역시 이것 자체만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원래는 이 두 주제를 이렇게 두루뭉실하게 지나치지 말고 좀더 깊이 있게 생각해야겠지만 오늘 설교에서는 약간 빗겨나 있는 대목이니까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이 두 주제가 여기서 이렇게 병렬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거의 등가의 수준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믿음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뜻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도에게 '사랑'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럴까요, 또한 왜 그래야만 할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관계성 안에 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조가 말하기는 간단해도 인식하기는 좀 까다롭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용은 별로 없는 고담준론에 불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좀 차분한 시각으로 생각하지 않고 덤벼들다가는 아무런 내용을 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좀더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어떤 별나라에서 갑자기 지구의 역사 속으로 개입한 게 아니라 구체적인 유대의 역사와 더 좁게는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셨습니다. 훗날 예수님과 동일시된 그 하나님의 나라는 최후의 만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형제애에 바탕을 둔 참된 사귐의 공동체에서 활동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은 당연히 그 구원 사건이 일어나는 믿는 자의 일치와 사귐에 가까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신자들의 삶에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희망
바울은 이 믿음과 사랑을 독립적인 세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해서 하늘에 마련해두신 축복에 대한 희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뿌리는 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희망으로부터 믿음과 사랑이 시작됩니다.
신약성서에는 이런 관계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살전 1:3). 우리가 오늘 선택한 골로새서를 포함해서 이 세 구절이 약간씩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는 하지만 믿음, 사랑, 희망을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야 할 기본적인 삶의 태도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합니다. 아마 초기 기독교는 이 세 가지 요소를 그렇게 본질적인 것으로 확정했으며, 각각의 상황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만을 중심으로 본다면 믿음과 사랑의 뿌리는 희망입니다. 고린도 전서에서는 이 세 가지 중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언급된 반면에 오늘 본문에서는 오히려 희망이 훨씬 중요한 것으로 언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전서나 데살로니가 전서 중에서 하나가 잘못된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되고 있을 뿐이지 이 세 가지 요소의 중요성은 어느 하나라도 간과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 전서는 사랑의 존재론적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이 세 가지 관계를 설명한 것인데 반해서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형이상학적 틀 안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해봅시다. 믿음은 과거에 있었던 예수님과 연관된 것이고, 사랑은 현재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능력과 연관된 것이지만, 희망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과 연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역사를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태어나서 이렇게 살다가 죽는 그런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 말은 일단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와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런 점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관은 오히려 거꾸로 나갑니다. 종말에 발생하게 될 그 생명의 세계가 오늘 우리의 역사에 개입한다고 말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종말론적 역사관입니다. 우리 개인의 운명도 역시 그렇습니다. 아직 우리가 죽지는 않았지만 죽음으로 인해서 일어나게 될 어떤 사건이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기독교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희망으로부터 믿음과 사랑이 발생한다는 본문의 진술은 옳습니다.

하늘
이런 신학적 해석은 우리의 피부에 와 닿기 쉽지 않으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생각해봅시다. 바울은 이 희망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하늘에 마련해 두신 축복에 대한 희망"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성도에게 베푸는 사랑은 이 땅에 관계된 것이라면 희망은 하늘에 관계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을 반드시 우주 공간의 어느 한 곳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서 시대의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생명이 숨겨진 곳이었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런 생명 형식과 전혀 다른, 우리의 인식으로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세계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됩니까? 유치한 게 아니라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겉으로 볼 때는 고대인들보다 물리학에 대한 정보를 대단히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지만 궁극적인 생명에 대해서는 그들과 거의 똑같습니다. 다만 자신의 작은 정보를 과장하면서 잘난 척 할 뿐입니다. 이는 흡사 한 살짜리 아이나 두 살짜리 아이나 모두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매한가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늘의 축복에 대한 희망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대략적인 대답이 주어졌다고 보는데, 그것은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노출되지 않은 그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를 희망한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세계를 우리는 영생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부활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은 그런 단어만으로 그 세계를 완전하게 해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라는 게 진리를 담아내기에 역부족일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세계는 우리의 개념 규정에 담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단지 말장난 같은 거 아닌가, 하고 의아해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누미노제, 또는 노장이 말하는 도와 비슷한 그 하늘의 생명을 언어로 해명해야 한다는 이 엄청난 도전 앞에 직면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믿으라고만 하는 것도 역시 진리를 추구하는 기독교의 자세는 아닙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성령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나님께 간구 해주신다는 말씀(롬 8:26)에 위로를 받고 넘어가는 것도 좋긴 하지만, 그 하늘의 생명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노력하는 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노력이 이미 성서 기자들에게 있었고 교부들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지속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중간에 잠시 머물면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우리의 기독교가 진리라고 한다면 결국 하늘의 생명을 해명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최종적인 것이 드러나게 될 종말에 말입니다.
이런 절대적인 생명이 있는 하늘의 축복을 희망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건을 믿을 수 있고,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갑니다. 이런 점에서 절대적인 생명인 부활의 세계를 깊이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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