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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기타 조회 수 8324 추천 수 23 2004.08.30 00:28:47
성경본문 : 누가복음 12:49-53 
2004. 8.29.                        
평화를 위한 분열
눅 12:49-53

예수의 불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머리에 그려지는 예수님에 대한 상(像)은 참을성 많고 인자한 목자에 가깝습니다. 급기야 십자가까지 순순히 받아내실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부정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그것과 정반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선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49)는 첫 말씀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이 말씀은 보통 두 가지로 해석되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성령의 능력을 받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지 모릅니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의 불을 보고 하나님 경험을 했던 것처럼 불은 이런 영적인 능력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장에도 불의 혀 같은 것들이 방안에 가득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었습니다. 만약 성령을 생명의 영이라고 한다면 불이 성령의 상징으로서 조금도 부족할 게 없습니다. 태양의 불이 지구의 모든 생명을 가능하게하며, 우리의 몸도 역시 평균 36.5도를 유지시키는 불이 있기 때문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하늘의 보물인 불을 훔쳐다 주었다는 이유로 제우스에게 저주를 받은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도 역시 불을 생명의 절대적 원천으로 보는 통찰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성령의 능력보다는 오히려 ‘심판’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우선 성령이 생명을 일으켜 세우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심판은 그것을 허무는 사건입니다.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져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전승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이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심판의 의미를 매우 절실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지옥에 대한 상을 불과 연관해서 생각합니다. 꺼지지 않는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불로 세상을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셨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이 세상의 악을 보시고 교훈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제로 이 세상이 멸망당하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무장한 사람들이 왔을 때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쳤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 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마 26:53).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의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는 방식으로 대처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약간 어색해보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불트만이라는 신학자는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식의 표현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초기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겠지요. 물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곧 예수님 자신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이 직접 하신 말씀이고 어떤 것이 공동체의 신앙고백인지 우리가 완벽하게 구분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기록이 현장 취재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진술과 사실 사이에 놓여 있는 틈을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토씨 하나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도들의 신앙 경험에도 새롭게 형성된 진술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충분히 신뢰할 만합니다.
어쨌든지 심판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의를 증명할 수 있는 준거라는 점에서 불의 심판을 기본적으로 옳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판이 없다는 말은 이 세상이 단지 자연원리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리는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비유도 늘 사랑에만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나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 비유 같은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초기 때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기독교 신앙에는 바로 이 두 사실,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 사이의 긴장이 있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두 사건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서 가능할까요? 이런 모순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요? 이런 주제가 곧 조직신학의 신정론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의 세례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풀기보다는 본문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풀어보겠습니다. 불로 심판하겠다는 예수님은 이어서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50)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과 세례는 서로 다른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생각으로 서로 다른 개념을 한 데 묶어서 말씀하시는 걸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이 세상이 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죄한 자의 고난과 불의한 자의 번성을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누구나 그런 심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제적인 힘과 군사적인 힘으로 이 세상을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거대한 세력과 그 안에서 무력하게 파괴되는 사람들의 삶 앞에서 정의로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분의 심판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실제로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지는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고난 받고 십자가를 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자신이 받아야 할 세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던 순간에 십자가의 죽음을 의식했는지 우리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운명을 의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당하게 될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 곧 그에게는 세례였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들 것인지 내다보신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50).
저도 가끔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정의롭지 못한지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좀더 강력한 힘이 나와서 그런 것을 싹쓸이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아마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그런 생각을 현실화한 역사적 사건이겠지요. 교회가 부패했다고 말들이 많습니다. 교회의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서 교회의 모든 악한 질서를 바로 잡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세계열강들은, 아마 우리처럼 지정학적으로 위태로운 지역에 있는 나라들은 군사력을 키워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겠다고 야무진 꿈을 꿀 것입니다. 당장 힘의 균형이 무너져서 일어나게 될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힘의 배양은 부분적으로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또한 그것이 정치적으로 바른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바른 길이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십자가를 자기가 감당해야 할 세례로 여긴 예수님의 방법은 서로 악을 척결하겠다는 명분으로 폭력을 일삼는 이 시대의 방법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거짓 평화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선택이 과연 지혜로운 것이며 지금 우리에게도 역시 유효할까요? 지금처럼 군사, 경제적 힘만이 정의의 칼처럼 행사되는 이 현실에서 스스로 고난과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건 아무리 좋게 보아도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이상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서가 가르치는 길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라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근본주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진리가 바로 그 말씀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가르침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그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선택해야할 소극적인 이유는 우선 힘으로 유지되는 이 세상의 평화는 참되지 않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이 세상이 제공하는 평화의 허점을 일일이 분석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조금이라도 개인의 삶과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에게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남북한이 50년 이상이나 휴전상태에 있지만 이게 평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체첸, 티베트, 대만, 이라크 등등, 모든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사이의 대결은 평화를 실현해내지 못합니다. 돈과 물질이 우리의 삶을 평화롭게 한다고 믿는 사람은 철부지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힘에 의지해서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으려니 막연하게 기대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을 힘으로 심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고난과 십자가를 감당하시는 예수님의 길을 우리가 따라야 할 적극적인 이유는 거기서 참된 평화가 가능하며, 더 나아가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을 심판하는 단초가 열린다는 데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곧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징벌만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사건입니다. 옳고 그른 것이 판명되는 것이 곧 구원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건 곧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종교적인 힘과 정치적 힘이 결탁하여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인간의 종교적, 정치적 힘이 이룰 수 없는 궁극적인 평화를 완성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야말로 인간에게 절대적인 평화이기 때문에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우리야말로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평화를 위한 분열
그런데 우리의 이런 평화는 단지 낭만적이고 심령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것입니다. 무조건 다른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잘 지내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평화와 어긋나는 것들과 과감하게 대결하는 평화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요령을 피우는 사이비 평화주의자들이 아니라 참된 평화를 위해서 거짓된 평화와의 연대를 깨뜨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52). 예수님은 거짓된 평화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형식적으로만 싸우지 않을 뿐이지 속으로는 지독하게 증오하는 그런 평화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한 가정에 다섯 식구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을 반대하여 갈라지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우리는 보통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형제 사이에 다툼 없이 살아가는 것을 평화스러운 가정의 본보기로 생각합니다만 예수님은 그런 기존의 상황을 깨뜨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콩가로 집안처럼 식구들끼리 서로 다투는 상태를 머리에 그려보십시오. 가능한대로 서로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두고 도와가면서 평화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타일러도 싸우기 마련인데, 예수님은 그런 분열을 조장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평소의 예수님답지 않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거짓 평화가 대충 유지되는 것보다는 깨지는 게 훨씬 낫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평화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해서 가정을 하나의 예를 들었습니다만 이 예는 실제적인 상황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권위주의로 유지되는 가정의 평화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보다는 파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혈연 이기주의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만족시키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의 세계관을 창조적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깨어버려야 할 거짓 평화는 무엇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우리 주변의 힘들은 무엇일까요? 그걸 분간하기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과의 평화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을 구분했다면, 그런 것들과의 관계를 끊어내는 용기를 갖고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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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zelkova

September 04, 2004
*.233.24.136

평화
평화를 이룬다는 것 정말 어렵습니다.
平(평평할 평) 和(화목할 화) 평온하고 화목하다. 란 뜻인데 문자로나 말로는 쉽네요.
거짓 평화를 가지고 있다면 참된 평화는 더더욱 가지지 못하겠지요...
나의 거짓평화는 무엇인가? 좀 우울해 지네요...
참된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길 소망하며...

질문) 성서를 두고 '유한이 무한을 담았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조금 생각을 해 보고 있지만 아직 정리가...목사님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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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4, 2004
*.177.233.126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음과 같은 뜻이 아니겠나?
성서는 역사적인 산물이네.
이스라엘의 역사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 안에서
고유한 경험과 해석이 작용해서 이런 거룩한 문서가 완성된 거네.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들어와 았다는 거네.
그렇다면 성서는 유한한 성격을 갖고 있는 셈이지.
그런데 그 유한한 성격의 성서 안에는 그런 역사에 의존하지 않고
초월하는 하나님이 계시되어 있네.
즉 성서가 하나님의 쓰여진 계시라고 한다면
결국 성서라는 유한의 시간과 공간 안에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가
들어 있다는 말이지.
대충 설명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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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주

September 05, 2004
*.208.102.182

위장된 평화에 내재된 인간의 불의와 오만,
무엇보다도 본성을 죽이고있으며,
본질로부터 멀어져있는 그 거리만큼 하나님과 떨어져있음을 잊어버리고있는 그 영적 무딤이 곧 만악으로 통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 같읍니다.
독재도 가능하게되는 것이죠.
항상 저의 고민과 선택은
위장된 평화를 현실 속에서 인지하고난 뒤의 예민한 아픔입니다.
어디까지, 어느정도까지 참아야하며 행동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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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zelkova

September 05, 2004
*.233.24.143

성서의 역사성과 계시성...
제겐 더 많은 고민이 필요 할것 같아요...
답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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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옹기종기

October 21, 2009
*.163.133.11

내가 마실 잔과 내가 받아야 할 세례란...! 인류를 사랑하신 주님의 애틋한 십자가의 희생 속에서 발아되어야 할 생명의 분출을 의미하는 것 같이 평화를 위한 장열한 자기 희생이라 여겨지네요...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하나님만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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