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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영, 창조의 영

성령강림절 조회 수 16289 추천 수 2 2010.05.30 22: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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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잠언 8:22-31 

지혜의 영, 창조의 영

(잠 8:22-31)

 

 

     구약의 <잠언>은 고대 유대인들의 지혜 문학서에 속합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금언이나 격언 모음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혜서는 구약에만 나오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도 이런 지혜서에 속합니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헌에도 있습니다. 인도나 중국, 그리고 한민족에게도 지혜에 관한 문헌들은 적지 않습니다. 지혜 문학은 주로 문명권에 남아 있지만, 문명과 담을 쌓고 사는 원시 민족에게도 이런 지혜는 남아 있습니다. 문자가 없다 하더라도 구전으로나마 남아 있습니다. 족장이나 추장들, 그리고 원로들이 바로 지혜 담지자들입니다.

     지혜가 무엇일까요? 가장 일반적으로는 머리가 좋다는 것을 뜻합니다. 똑똑하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암기력이나 분석력을 지혜의 기준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것을 ‘지적인 몫’이라는 뜻의 IQ(intelligence quotient)로 표시합니다. 우리나라의 평균 아이큐는 100-110이라고 합니다. 머리를 좋게 하는 영양제도 있다고 합니다. 유전공학이 앞으로 획기적으로 발달하면 모든 아이들이 최고의 아이큐를 갖고 태어날지도 모릅니다. 머리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머리가 좋아야만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좋아야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고, 노벨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세상을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컴퓨터를 만든 사람은 분명히 머리가 좋을 겁니다. 심장수술을 하는 의사들도 머리가 좋겠지요. 피카소나 정명훈 같은 예술가들도 머리가 좋겠지요. 이런 점에서 머리가 좋은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머리가 좋은 것이, 즉 똑똑한 것이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머리가 좋다거나 똑똑한 것은 악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다시피 악한 사람도 머리는 좋습니다.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전쟁은 그 어떤 이유에서도 악입니다. 미국은 2003년 3월에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미국의 일방적인 선전포고였습니다. 아직도 그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인 이유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었습니다. 전쟁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에 미국이 밝힌 사실이기도 합니다. 대량살상무기가 이라크에 있다는 정보는 미국 정보국에서 나왔던 겁니다. 거기에 종사하는 분들은 머리가 좋습니다. 좋은 머리에서 나온 거짓된 정보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삶의 근거를 잃고, 불구가 되고,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런 좋은 머리를 지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착한 성품을 가리킬까요? 착한 사람이 상황을 늘 바르게 판단하는 건 아닙니다. 착한 사람들이 대중 선동에 놀아나기도 쉽습니다. 그렇다면 ‘감성지수’를 가리키는 EQ(emotional quotient)가 지혜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이큐의 강조는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착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히틀러도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네로도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지수인 MQ(moral quotient)가 더 중요한 건가요? 도덕적인 사람은 복음서에 묘사된 바리새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자기중심적일 가능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해서 훨씬 높습니다. 인간이 옳다고 판단하는 지성, 도덕성, 감성이 지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혜가 무엇인가요? 성서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지혜의 존재론적 능력

     오늘 설교 본문인 잠언 8:22-31절은 지혜를 의인화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바로 지혜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참으로 놀라운 진술입니다. 태초 이전에 이미 지혜가 존재했다고 합니다. 지혜의 선재성을, 지혜의 존재론적 능력을 가립니다. 22-26절에서 이것이 반복됩니다. 땅, 바다, 산, 언덕, 들, 진토의 근원이 만들어지기 전에 지혜는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시작인 태초는 우주물리학에서 120억 년 전입니다. 그때부터 우주에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어떻게 무엇인가가 나오느냐는 겁니다. 이 세상의 원리에서 본다면 결과는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방식의 이 세상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지혜가 존재했다면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어떤 능력입니다. 그런 능력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태초 이전에 존재하는 분은 하나님이고, 지혜가 태초 이전에 존재한 능력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좀더 자세하게 보십시오. 22절은 여호와께서 태초에 일하기 전에 ‘나를 가지셨’다고 했으며, 23절은 ‘내가 세움을 받았’다고 했고, 24절은 ‘내가 이미 났’고, 25절도 역시 ‘내가 이미 났’다고 했습니다. 이런 구절을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지혜와 하나님이 구별됩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태초 이전의 차원에서는 주객개념에서 나온 ‘만든다’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만든다는 말, 또는 피조되었다는 말은 이 세계가 시작된 이후에만 통합니다. 지혜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초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어떤 능력입니다. 그렇게 존재하는 지혜는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이런 설명이 좀 복잡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친근한 요한복음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겁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복음서 쓰기를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언어, 이성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로고스가 태초에 존재했다면 로고스는 잠언이 말하는 지혜와 똑같습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는 로고스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 로고스, 지혜는 일치합니다. 지혜가 바로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에서 본다면 로고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치한 분입니다. 이게 과연 말이 될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태초 이후에, 그것도 역사가 한참 흐른 후에 이 세상에서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던 역사적 인물입니다. 역사의 한계 안에서 살았던 그가 태초 이전부터 존재한 로고스라는 말은 예수가 역사를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런 걸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면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겠지요. 이해가 되어야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성서와 기독교의 가르침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풀어줄 키워드는 ‘성령’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 영을 ‘진리의 영’(프뉴마 테스 알레테이아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요 16:13) 진리의 영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진리는 말 그대로 참된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숨어 있던 진리를 밖으로 끌어내는 힘입니다. 예컨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우주의 역학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진리의 힘에 의한 것입니다. 원소 주기율표가 있는데, 그런 원소의 속성이 밝혀지는 것도 역시 진리의 힘 때문입니다. 그 진리의 힘이 곧 성령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진리의 성령이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말했습니다.(요 16:14) 여기서 예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가리킵니다. 무슨 말인가요? 부활은 성령의 활동입니다. 부활을 인식하는 것도 역시 성령의 일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초 이전에 존재한 로고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경험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사실이 바로 궁극적인 진리였습니다. 궁극적인 진리를 알게 하는 성령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성령의 임재와 성령 경험을 강조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부활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대한 구약의 다른 용어가 바로 오늘 설교의 주제인 지혜입니다.

 

창조의 영

     어떤 기독교인들은 성령은 무조건 열광적인 은사의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 방언, 신유, 입신 등등의 현상 말입니다. 그런 현상들은 성령 임재의 특수한 결과들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기능적인 차원에서도 설명했습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의 일도 은사입니다.(고전 12:28) 이런 은사들은 각자가 섬기는 차원에서 감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문제는 이런 것만을 성령 임재의 모든 것처럼 주장하는 겁니다. 부분적인 현상을 전체적인 것처럼 오도하는 잘못입니다. 성령은 전체적인 차원에서 지혜의 영입니다. 지혜의 능력입니다. 태초 이전부터 하나님과 하나였던 힘입니다. 지혜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잠언은 그 사실을 오늘 본문 후반부(27-31)에서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만드실 때 지혜가 거기 있었다고 합니다.(27)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고 바다의 샘을 힘 있게 하고(28) 바다의 한계를 정하고 땅의 기초를 정할 때에(29) 하나님 곁에 있었습니다. ‘창조자’가 되어 그 창조 행위를 즐거워했고,(30)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고, 인자들을 기뻐했다고 합니다.(31)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한 창세기 1장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잠언이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혜는 곧 창조자라는 것입니다.

     지혜가 창조자라는 말은 참으로 놀라운 진술이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신앙으로는 받아들이기가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롭다거나 하나님에게는 참된 지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가 곧 창조자 하나님이라니요.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권능이, 또는 하나님의 인격성이 훼손될 것 같아서 불편합니다. 불편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불편한 생각은 우리의 선입관 때문에 벌어집니다. 하나님을 구름 타고 다니는 도인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옥황상제처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으로 천국에 가서도 더 좋은 상급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것이 곧 우상숭배라는 겁니다.

     여러분, 지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잠언은 지혜라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한 것입니다. 지혜는 바로 창조자라고 말입니다. 이를 거꾸로 하면 창조자가 지혜라는 뜻입니다. 이게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닙니다. 다시 잠언 8:22-31절의 설명을 보십시오. 크게 보면 두 가지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는 지혜의 선재성이고, 다른 하나는 지혜의 창조성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지혜가 창조 사건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기자가 전하는 단어를 나열하겠습니다. 태초, 땅, 바다, 큰 샘, 산, 언덕, 들, 진토, 하늘, 궁창, 구름 하늘, 바다의 샘, 바다의 한계, 땅의 기초가 그것입니다. 잠언 기자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세계가 얼마나 장엄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비 그 자체입니다. 우주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그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런 것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인식 능력을 뛰어넘는 그 세계의 창조 능력이 바로 ‘호크마’, 즉 지혜라는 겁니다.

     잠언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미숙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보고, 이런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과학적 지식은 우리에 비해서 훨씬 부족했지만 세계 전체 앞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의 지식과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도 역시 세계 앞에서 미숙하기는 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우주의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왜 거꾸로는 가지 않는지 모릅니다. 세월이 흐르면 젊어지고 어린애로 돌아가지 않고, 늙기만 하는 이유를 모릅니다. 왜 식물만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사람은 하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원리만 알지 근본 원인은 잘 모릅니다. 고대인들이나 우리가 세상 전체 앞에서 어린아이라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조물의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종말이 될 때까지 이런 속성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모든 인식론적 한계를 넘어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능력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요한복음이 말하는 로고스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낸 성령입니다.

     위의 설교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미 답이 주어졌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잠언이 말하는 창조의 신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창조자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은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거나 이용해서 편리하게 살아보자는 인간 중심의 욕구가 아닙니다. 창조의 신비에 대한 영적 통찰이며 인식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자연과학자와 시인과 예술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눈을 통해서 우리는 창조의 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창조의 지혜인 로고스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인식과 경험입니다. 그런 인식과 경험 없이 우리가 어떻게 창조의 하나님이 바로 부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첫째 주일입니다. 성령은 창조의 영입니다. 성령은 부활의 영입니다. 진리의 영이며, 생명의 영입니다. 그 영은 우리가 규정하거나 계량할 수 없는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그 영이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살리시어 영광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 성령은 하나님입니다. 이 성령이 여러분을 창조하셨고, 마지막 때 부활 생명을 주실 겁니다. 그를 찬양하십시오. (성령강림절 후 첫째 주일, 5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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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May 31, 2010
*.122.208.32

목사님,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들어 있으며,

또 "안"에 내포된 의미는 얼마나 많을까, 하고요.

우리는 그동안 지혜따로, 말씀따로, 구원따로, 성령따로, 예수님 따로..

그렇게 이해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들으면서 이 단어들은 (목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듯이)하나님의 존재방식의

은유적 표현이라는 생각을 다시 굳히게 됩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그 어떤 언어로 표현해 낼수가 있을까요!!

 

"안"에서 라는 전치사도 온 우주를 아우른 것처럼 들립니다.

"지혜 안에서" 이러니까 온 우주를 지혜가 감싸안은 것처럼 보이네요.

이 지혜가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비밀"같이 보이고요.

그래서, 우리가 왜 탄소동화작용을 못하는지 알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비밀의 세계안에서는 답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목사님, 우리가 알수 없는 그 세계를 운용하시는 진리, -원칙이라고 해도 될까요?-

가 바로 "지혜"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리고 이게 "생명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는 거지요?

참 놀랍습니다. 얼마나 정신이 번쩍 들던지요.

목사님,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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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1, 2010
*.120.170.243

박은옥 집사님,

저도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깊이에 놀랍니다.

원래 저는 잠언을 설교의 본문으로 택하는 걸 즐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론적인 기초가 좀 부실해 보이니까요.

그런데 저 본문을 읽다보니 전혀 다른 차원이 열리네요.

지혜가 바로 그리스도론적 차원으로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걸 다시 발견했어요.

요즘 수요일에 시편을 공부하면서도 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우리의 인식론적 범주 안으로 가둬두는 일은 아주 위험한 겁니다.

선입관 없이 성서의 놀라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설교자에게나 일반 신자들에게나 중요한 일 같네요.

그게 사실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이게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뭘 알아야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과

뭘 안다는 것 자체를 버려야 성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사이의 딜레마에요.

이런 이야기가 되겠군요.

배우고 익히면서 곧 그것을 잊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학적 정보가 아니니까요.

지금 박은옥 집사님은 그런 길을 조금씩 눈채를 채고 있는 중인 것 같네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더 환한 빛으로 나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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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June 02, 2010
*.217.40.66

주일학교 공과 시간에 이 본문을 아이들과 읽었습니다.

한두절 읽다가 여기에서 '나'는 '지혜'를 사람인 것처럼 해서 쓴 거라고 했더니

우리 샘터의 영특한 학동 왈,

"샘, 그러면 '나' 대신에 '지혜'를 넣어서 읽어요, 우리...."

하는 겁니다. 역쉬 샘터 학동들은....^^

 

말씀을 통하여 지혜의 기원을 알 수 없고, 그것은 결국 창조주와 닿은

그분이 지혜이심을 찬찬히 따라갔습니다.

목사님께서 시인과 예술가를 통하여 창조의 지혜를 경험한다고 하셨지만,

그런 작업에서 제외된 저같은 사람은 억울해서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일상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건, 상황은 동일한 반복은 없기에 

그 앞에서 창조의 지혜를 구할 수 밖에 없고,

창조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경험을 저도 정신차리면

늘 할 수 있다고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일상에 무디어진 것에서 지혜의 영, 창조의 영에 휩싸이는 경험을 자주 하고 싶습니다.

목사님,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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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2, 2010
*.120.170.243

와, '나'를 '지혜'로 바꿔서 읽으셨다고요.

꼬마들이 모든 다 이해하지 못해서

단어 바꿔부르기를 통해서

그 아이들의 의식 깊은 곳에

어떤 힘이 작용했을 겁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그 힘이 나타나서 

그 아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도와주겠지요.

지혜의 힘입니다.

이 세상에 '동일한 반복'이 없다는 사실과

지혜가 창조적 능력이라는 사실을

구행자 집사님이 함께 엮어서 생각하셨군요.

지혜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힘이라는 말이 되겠네요.

그런 시각이 열린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무엇이 더 필요하리요.

그 이외의 것들은 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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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June 02, 2010
*.13.41.19

피조물의 한계,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

시편 공부를 하면서 어쩌면 우리의 영성은 고대인들보다 더 미숙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전에 알던

하나님=성령이 너무나 작았다는 것(적절한 표현일지 모르지만)을 느낍니다.

아직은 뺨이 간지러운 듯

잘 알 수 없지만

성령이여.

저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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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2, 2010
*.120.170.243

이일녀 집사님,

다른 공부도 그렇지만

신앙 공부도 '기본적으로는

집사님이 위에서 말한 '느낌'입니다.

그 느낌은 단순한 정보나 감정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 앞에서

자신이 무한하게 축소되는 경험이랍니다.

우리가 너무나 엄청난 어떤 것에,

어떤 힘에, 어떤 사건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겁니다.

모세의 호렙산, 이사야의 스랍, 엘리야의 세미한 음성 등등.

그런데 그걸 느끼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일상의 무게가

우리를 영적으로 호흡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집사님이 '성령이여 저를 도우소서'라는 기도를

영혼의 깊이에서 드린다는 것은

그런 느낌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증거랍니다.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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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주님의평화

July 30, 2011
*.239.149.84

너무나 좋은, 그리고 신학적인 설교라는 생각이 듭니다.

벌써 1년이 넘은 설교인데,  지금에서야 보고 댓글을 다네요.

한가지 아쉬운 점은...^_^;;;

후반부에 예수님과 성령님을 '로고스'와 '지혜'로 묶는 과정에서 자칫 받아들이는 분들이 '양태론'적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간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럼, 목사님, 건강하시구요. 또 가끔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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