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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성령강림절 조회 수 18709 추천 수 3 2010.06.07 12: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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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7:1-10 

한 말씀만 하소서

(눅 7:1-10)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대의 이스라엘은 세 지역으로 나뉩니다. 북쪽은 갈릴리, 남쪽은 유대, 중간은 사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활동을 시작하시고 사마리아를 거쳐 유대로 내려오신 뒤에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체포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오래 활동하신 지역은 갈릴리입니다. 그곳에 갈릴리 호수가 있고, 호수를 낀 마을이 여럿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 북쪽 연안에 위치한 마을이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다메섹에서 지중해로 빠지는 교통 요지여서 번성했던 마을입니다. 세관도 있었고, 회당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버나움에 오래 체류하셨는데, 거기서 다섯 명의 제자도 선택하셨고,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오늘 우리가 읽은 눅 7:1-10절에 나오는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은 100명 정도의 부하를 거느린 사람을 가리키는 계급입니다. 오늘의 중대장 쯤 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체 군대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로마 장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후 44년 이전에는 가버나움에 로마 군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백부장은 당시 그 지역의 왕이었던 헤롯 안티바스 휘하에서 지역의 치안을 책임 진 사람으로 봐야 합니다. 그의 종이 생사의 기로에 놓일 정도의 큰 병에 걸렸습니다. 백부장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요. 종을 고치기 위해서 용하다는 의사는 다 불러왔을 겁니다. 아무런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종의 치료를 부탁하기 위해서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에게 보냈습니다. 유대인 장로들은 예수님에게 와서 백부장이 처한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백부장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도 곁들였습니다. 이 백부장은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장로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예수님은 백부장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백부장은 친구들을 다시 예수님에게 보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 7:6,7) 백부장의 태도가 조금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이왕 집 가까이 오셨다면 집에 들어오는 게 순리입니다. 자신이 존경하는 유랑 랍비를 집에 모실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고, 기쁜 일이며, 또 자랑거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백부장을 놀랍게 여기시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 7:9) 이런 칭찬은 드문 일입니다. 요즘의 상황으로 바꾸면 이 칭찬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어떤 사람의 믿음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칭찬하셨을까요?

 

     하나님 경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믿음의 기준에서 본다면 백부장의 행동과 말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유대인들을 도와주고, 회당을 건축했다는 사실이 믿음의 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전도, 기도, 헌금 등에서 뛰어난 사람도 아닙니다. 그에게서 특별한 일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실 수 없으며, 자기가 예수님 앞에 직접 나설 수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은 일단 그가 아주 겸손한 사람이라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겸손이 바로 믿음의 기준이라는 말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겸손은 매우 중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겸손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겸손한 것처럼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실제로 겸손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자기보다 힘이 강한 사람 앞에서는 겸손하지만, 약한 사람 앞에서는 교만해집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실제로 겸손할 수는 없습니다. 겸손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만 경험이 여러분에게도 있을 겁니다. 교양의 차원에서라도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필요하지만, 거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겸손이 믿음의 최고 경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백부장이 겸손했다는 사실 자체를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성서기자가 전하려는 핵심은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한없이 낮출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 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신성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절대능력으로 경험했습니다. 그에게서 예수님은 절대적인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수 없으며, 자기가 예수님 앞에 감히 나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절대적으로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성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태도가 바로 절대적인 자기 낮춤입니다. 신구약성서는 이 사실을 일관되게 전합니다.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모세는 신발을 벗어야만 했습니다.(출 3:5) 거룩한 힘을 경험한 사람은 그동안 자기가 알고 있던 존재 기반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사야는 자기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사 6:5) 누가복음 5장은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를 부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병 고치는 것을 본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신성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토대가 부정되고 언어도 무의미해지는 하나님의 임재 경험입니다.

     지금 우리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지금 예배드리기 위해서 귀한 시간을 쪼개서 나왔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백부장의 믿음과 같은 차원의 것인지 아닌지는 한번 질문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하지 못한 채 얼마든지 교회생활은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교회에 나오는 동기는 신자 수만큼이나 많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성을 만나기 위해서 나오기도 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 장사를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단순히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기도 하겠지요. 문제는 세월이 흘러도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없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 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이는 마치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이 없으면서 의사 활동을 하거나 법조인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것은 영혼을 파는 일입니다. 하나님 임재 경험은 신앙생활에서 필수적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그것을 구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잘 구별이 안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세요. “나는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고, 그런 믿음을 갖고 있을까?”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자기 부정’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과 자기가 예수님에게 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위치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자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맛있는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한다면 모두에게 즐거운 일이 됩니다. 그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기분 나빠하실 까닭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그것 자체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절대적인 권위 앞에서 그는 자기를 완전히 부정했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겸손과 자기부정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입니다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릅니다. 겸손은 교양의 차원이라면 자기부정은 존재의 차원입니다.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마 16:24)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겸손한 포즈를 취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부정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중세기 사막의 교부들이 사막에서 평생 살아갈 수 있었던 힘도 바로 자기부정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모래 한 알보다 더 나을 게 없을 정도로 자기를 부정한 사람에게는 온갖 문명이 매력적으로 자리한 도시나 사막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순교의 피가 많았습니다. 순교가 가능한 이유도 절대적인 자기부정의 영성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 모든 고등종교의 중심에는 자기부정이 자리합니다. 문수라는 승려가 지난 5월 31일 오후 경북 군위군의 위천 둑에서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기는 분신을 했습니다. 4대강 사업 반대를 위해서 자기 몸을 던진 것인데, 불교용어로 그것을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고 합니다. 그분의 행위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릴 겁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그가 절대적인 자기부정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자기부정이 아니면 결코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자기부정이 살아있을 때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억지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이 바로 죽음이 아닐는지요. 죽음 앞에서 자기를 부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죽음에 이르기 전 살아있는 동안에 완전한 자기부정에 이르는 구도의 길이 바로 영성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부정이라는 말을 오해합니다. 그런 오해가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발생했으며, 지금 한국교회에도 팽배합니다. 자기부정을 생명부정으로 오해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가서 자학적이기도 합니다. 죄의식에 사로잡기도 합니다. 금욕, 자학, 죄의식은 심리적인 질병에 속하지 기독교 영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삶의 왜곡은 자기부정이라는 하나님 경험을 오해하는 데서 나온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자기’를 부정하라는 말이지 ‘생명’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라는 말이지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외면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백부장의 자기부정, 자기축소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원초적 경험의 기준이라고 한다면 이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정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까요? 원칙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우리의 할 일이 많지 않은 것과 비슷합니다. 숨을 쉬기 위해서 우리는 산소를 매번 만들 필요는 없고,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그냥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거의 모두 우리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들로 인해서 유지됩니다. 그것을 일일이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태양도 만들고, 물도 만들어야겠지요. 그건 아예 불가능합니다.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고 한 백부장의 고백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능력 안에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에는 백부장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종이 중병에 걸려서 걱정하던 백부장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한 말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훨씬 근원적인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 7:7b)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다른 것이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말씀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어느 정도의 차원에서 믿었는지를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충분했습니다. 전적인 신뢰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향한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신뢰와 순종이 있을까요? 오히려 불신과 불순종의 지배를 받는 건 아닐까요? 우리의 일상 문제를 모두 종교적으로 해결하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배우자를 놓고 기도합니다. 배우자의 직업, 나이, 생김새까지 기도의 조건에 포함됩니다. 이런 기도가 살아있는 기도라고 배웠기 때문이겠지요. 한국을 대표하는 어떤 목사님은 해외 선교사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선교용 승합차를 위해서 기도할 때 차종과 색깔까지 구체적인 내용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더군요. 사람들은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기도는 이방인들의 중언부언입니다.(마 6:7)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조급증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주님의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그분이 행동하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에 영적인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병과 죽음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그분만이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이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종이 병들었다는 이 어두운 현실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말씀만’으로 병을 낫게 하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오직 이 한 마디입니다. “주님, 듣겠사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6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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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amy

June 07, 2010
*.152.232.214

한 달쯤 전에 정목사님과 그분의 책에 대해 남편으로부터 들은 초심자입니다

설교내용이 새롭고 좋은 것 같아서 온라인으로라마 자주 들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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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7, 2010
*.120.170.243

amy 님,

안녕하세요?

오늘 가입하셨군요.

반갑습니다.

저의 설교를 좋게 받아들이신다니, 고맙습니다.

자주 들리세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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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June 08, 2010
*.147.42.6

지난 주 목사님 설교 참 좋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성의 빛 앞에서 경험하는 자기부정과 해방...

 

어찌보면 항상 똑같은 레파토리같으면서도 매 번 그 것을 묘사하는 목사님의 터치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마치 자신이 포착한 심상에 대한 예술가의 터치가 점점 더 세밀해지듯이 말이에요...

 

그만큼 목사님께서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가고 계신다는 증거가 되겠네요...

 

그리고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문수 스님이 불현듯 떠올랐는데,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도 묘하게 목사님께서 언급해 주신 것이 너무 인상 깊었습니다... 뭔가 통했다는 느낌 말이죠...

 

준원이네 가족도 목사님 설교가 참 좋았다고 해요... "독특한 경험" 이라고 하더라구요... 마치 자신의 잇속만을 은연 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의사만 보다가 환자의 관심사와 아픈 부분에 너무도 깊이 집중해주는 그런 의사를 만난 느낌이랄까요...

 

모처럼 주일 같은 주일을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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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8, 2010
*.120.170.243

첫날처럼 님은 묘사력이 뛰어나네요.

내 설교보다 첫날처럼 님의 코멘트가 빛납니다. ㅎㅎ

오랜 만에 대구샘터교회 예배에 오셨는데도

별로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음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교우들이 좀 늘어서 주일에 모두를 챙기지 못합니다.

준원이게 가족과도 이야기를 나눠야 했는데,

책도 선물로 주고 했어야 했는데,

아무 것도 챙기지 못했군요.

조용할 때 한번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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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히로

June 08, 2010
*.11.176.107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

 

겸손, 자기부정, 순종은 자주 듣던 말임에도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더욱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같은 사물을 바라보더라도 그 사물에 담긴 의미를 알고 바라볼때에 그 사물이 새롭게 보이듯

평소에 익숙한 단어들도 단어의 의미를 보다 깊이있게 생각하고 접하게 되면

그 전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나오는 여러 단어들은 교회나 신학교에서 자주 접하지만

설교를 듣고난 후에 저에게 보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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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8, 2010
*.120.170.243

히로 님,

안녕하세요?

오늘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셨네요.

언어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야말로

인문학 공부의 진수랍니다.

신학은 물론 인문학에 포함되는 거구요.

저도 위 성경본문에서

"말씀만으로 ..."를 통해서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설교 준비와 그 행위를 통해서

영성이 깊어지는가 봅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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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June 09, 2010
*.179.188.183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새로운 통찰력을 얻고 갑니다.

근데, 백부장이 예수님을 직접 대면한 적이 있었을까요?

본문에는 대면형식이 아닌 제삼자를 통해서 등장합니다만

마태복음서에는 백부장이 직접 간구하는 형식으로 기록돼 있더군요.

혹시나 해서 질문을 드려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으로 신성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궁금해지네요?

그리고 백부장의 행동을 통해서 자기부정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신성을 경험한 사람마다 자기부정의 방법이 다 다르게 나타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했던 여러 인물이나, 베드로처럼 신성을 발산하는 대상 앞에서 감당할 수 없다는 표현도 나오지만

마리아처럼 값진 예물을 아낌없이 드리는 경우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좋은 경우라고 말할 수도 없고 판단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리고 문수스님의 경우도 자기부정의 길을 간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게 과연 기독교 영성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행동이 과연 바람직한 건지는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의 행동에 대한 진정성은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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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9, 2010
*.120.170.243

화들짝 님,

좋은 질문을 주셨군요.

1) 소문만 듣고 신성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건 제가 모르지요.

성서기자도 거기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에요.

결과를 중요하게 보는 거지요.

그렇지만 소문만 듣고도 신성 경험이 불가능한 건 아니랍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생전에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부활의 주님을 경험했다지 않습니까.

저를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도 다비아에서 글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2) 하나님 경험이 자기부정만이 아니라 여럿으로 나타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든 태도에는 자기부정이 깔려 있어요.

값진 예물을 드렸다는 것도 자기부정이 전제되는 거지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無가 된답니다.

3) 문수 승려의 소신공양이 기독교 시각에서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예, 저도 그의 행동에 대한 모든 걸 판단한 게 아니라

자기부정이라는 관점만 말한 겁니다.

앞으로도 좋은 질문 많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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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流水不爭先

June 10, 2010
*.173.40.129

이 시대를 향한 목사님의 외치심과

세례요한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목사님 말씀을 통하여서 위로받음이 참으로 큼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절대겸손도 참으로 어려운데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부정까지 말씀하시니

주님의 긍휼하심만 바랍니다.

 

더운 일기에 강건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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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0, 2010
*.120.170.243

thinkbible 님,

안녕하세요?

제 설교가 도움이 되신다니 다행입니다.

세례요한과는 비교하지 마세요.

숨을 곳이 없답니다.

제가 자기부정의 영성을 말하긴 했지만

말만 앞섰지 삶이 따라가지 못한답니다.

그래도 나 자신에게 크게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붙잡지는 못했어도

내가 달려가야 할 방향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으니까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길을 향해

더불어 가는 도반(道伴)이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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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une 11, 2010
*.122.208.32

목사님, 저는 지난 주 주보에서 미리 설교제목을 보고서는 박완서 선생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떠올렸습니다.

남편과 아들을 거의 동시에 잃고 처절한 고통속에서 주님께 매달렸던 외침으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제게는 이 "한 말씀만 하소서."는 사면이 둘러쌓인 막다른 골목에서 드리는 기도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설교말씀을 듣는 중에,

이 사면과 막다른 골목이 무너지고 새길이 열리는 그림이 연상 되었어요.

백부장의 "말씀만 하옵소서."의 의미는 책 제목의 의미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한 말씀만 하소서>는 우리중심에서 나온 탄원이라면,

백부장의 관심은 "말씀"이신 주님의 존재자체가 아니었나 하구요.

그래서 목사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 존재 앞에 설때 "나는 간 곳 없다"는 그런 고백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인간이 연약하기에, 그리고 너무나 궁금하기에 하나님께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절규하게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앞에서는 무엇이 궁금해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전에 시편 강해에서 목사님께서 독일어 성경을 인용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제가 너무 좋아해서 아예 외우고 있어요.^^

"내가 오직 당신을 소유한다면, 그러면 나는 하늘과 땅에 대해서 질문할게 하나도 없다.

Wenn ich nur dich habe so frage ich nichts nach Himmel und Erde"시편73:25

 

박완서선생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와 목사님의 설교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마땅한지 모르겠지만, 고민고민 하다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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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1, 2010
*.120.170.243

박은옥 집사님,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공부가 치열하시군요.

박완서 선생님의 경구와

설교 제목이 똑같은데,

그걸 염두에 두고 제목을 잡기는 했지만,

의미는 좀 다르지요?

하나는 인간의 비통한 실존에 자리하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신적 실존에 자리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나 양자 모두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전제하고 있으니

크게 다른 것은 또한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 욕망, 희망까지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에게만 영혼을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한 말씀 이외에 더 이상 무엇을 원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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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une 12, 2010
*.122.208.32

목사님,

그렇지않아도 저도 뭔가 고민은 했지만 목사님께서 더 정확하게 짚어 주셨습니다.

저도 걱정이 된 게 박완서 선생님의 탄원이 백부장의 믿음과  단순비교가 가능할까 였는데,

두 분 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전제로 한" 청원이었군요.

목사님께서는 이런 땅끝 경험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제가 그걸 놓쳤던 거 같습니다.

이런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백부장이 경험한 "말씀"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텐데요.

그때 "내가 하늘과 땅에 대해서 질문할 게 하나도 없다."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기도에 대해서도 새롭게 정리가 되네요.

 "우리의 인식, 욕망, 희망까지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에게만 영혼을 기울이는 것" 이라고요.

아, 제가 이 중요한 말씀을 놓치고 있었네요.

 

목사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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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June 12, 2010
*.56.59.35

목사님!

"백부장의 하나님 경험" 신선한 충격입니다.

그가 사도행전의 고넬료 같은 사람일까요?

겸손과 자기부정은 과연 노력함으로 가능한 것일까요?

 

예!  주님의 한 말씀에 더 많이 집중 하는 하루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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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2, 2010
*.120.170.243

모래알 님,

뉴욕 날씨 좋은가요?

금년에는 유명한 다비안 두 명이

뉴욕을 방문해서 좀 바쁘셨겠습니다.

겸손과 자기부정이 노력으로 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믿는 자의 모든 삶은 노력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은총의 차원으로 보는 게 옳겠지요.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는 구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은총과 우리의 응답이 변증법적으로 작용하는 게 아닐는지요.

저는 겸손가 자기부정을 구분해서 보았습니다.

겸손은 자기 노력이라고 한다면

자기부정은 은총의 빛에 사로잡히는 것이로요.

겸손은 은사라고 한다면

자기부정은 은총이라는 거지요.

이렇게 하루하루가 화살처럼 지나갑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네요.

온갖 성취라는 것이 그림자와 같아서

손에 남아있지 않네요.

오늘 월드컵 축구가 시작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2002년의 그 장면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 같네요.

지나간 필름을 다시 보는 느낌이요.

이렇게 우리의 삶이 지나가는 거구요.

늙구요,

그리고,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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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June 13, 2010
*.56.59.35

목사님!

요즘 뉴욕 날씨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유명 다비안들이 줄줄이 뉴욕 방문을 하셔서

저도 덕분에 맨하탄 나들이를 즐겼습니다.

 

은사와 은총! 잘 기억하겠습니다. 

마지막 그리고 다음엔..

만난다! 아닐까요? 거기서? ㅎㅎ

 

주일 새벽입니다.

목사님은 이미 저녁이시겠네요.

편안한 밤 되셔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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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June 14, 2010
*.146.55.109

성공회대학교 최영실 교수님이 사순절 특강때 마태복음서의 주기도를 주제로 강의하시면서 이거해주세요. 저거해주세요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목사님께서 하신 설교를 읽으면서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시기를 감당치 못하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나으리이다./성공회 미사때 영성체를 하기전에 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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