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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십자가 신앙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050 추천 수 2 2010.06.13 21:3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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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2:15-21 

율법과 십자가 신앙

(갈 2:15-21)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

     바울은 오늘 설교의 본문 앞 구절(갈 2:11-14)에서 지난날 안디옥에서 자신이 게바를 책망한 일을 간략하게 전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그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라고도 불리는 게바가 안디옥을 방문했습니다. 어느날 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이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대표자로 활동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사람들을 파송한 이유는 신앙생활을 지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게바는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이 두려워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도 자리를 피하고, 급기야 바나바도 자리를 피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행동을 위선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늘 우리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알려진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밥 한 끼 먹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이상합니다. 2천 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아직 기독교가 자리를 잡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가 기록될 때입니다. 유대교와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았을 때입니다. 당시 기독교를 끌고 가던 이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고, 제자들도 유대인이었고, 그 이외에 예수님을 추종하던 이들이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이방인들은 율법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소위 할례파로 불리는 이들은 율법과 상관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그대로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할례를 받으라고 압박했습니다. 그런 압박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까지 미쳤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의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 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이 다른 복음은 예루살렘 교회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원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갈 1:9)

     바울의 이런 표현만 보면 바울이 완전히 적과 싸우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유대교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지금 바울이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이들은 바울과 똑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똑같이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대다수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 중에서 소수에 속합니다. 바울의 귀중한 친구들입니다. 그들과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바울은 오늘 설교의 본문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갈 2:15) 이방인을 죄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방인들이 율법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상관없이 사는 이방인들을 죄인이라고 간주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아예 하나님의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의로워지려면 율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반적인 유대인들과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데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후)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율법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특히 바리새인처럼 전문적으로 율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교통 법규를 원칙적으로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둘째, 율법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알 수 있듯이 상대적인 자기 만족감만 제공할 뿐입니다. 경쟁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가 가장 율법적인 삶의 방식이 아닐는지요. 이런 방식의 삶으로는 영혼의 자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아니라면 무엇이 길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갈 2:16절에서 바울은 그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바울을 비롯한 모든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즉 바울이 저주가 내리길 원한다고 했던 할례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그 이후부터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달라집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이방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바울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이방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율법, 즉 할례를 받고 토라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통해서 의로워진다고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이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들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율법과 더불어서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모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다행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여전히 율법을 수행하면서 살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요구했다는 것은 크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십계명만 해도 그렇습니다. 첫 계명을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열 번째 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십계명에 나오는 각각의 명제를 충분하게 이해하기만 하면 개인과 공동체를 살릴만한 근거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할례도 고대사회에서는 위생건강을 위해서 도움이 됩니다. 그 이외에 크고 작은 율법들은 모두 사람을 살리는 규범들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바울 비판자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부정이라고 보았습니다.(갈 2:21)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입장을 우리의 일상으로 바꿔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적절하겠군요. 자녀들이 각각 독립해서 살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자녀들을 영원히 자신들의 아들과 딸로 두고 싶어 합니다. 자신들이 자녀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안전하게 자랐습니다. 그런 울타리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독립해서 산다고 해도 어려움이 생길 때 부모가 도와줄 수 있으니까요. 더 나가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효도를 강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것 자체로는 나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은혜를 모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당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었습니다. 저 친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단히 포기한 친구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면서 날카롭게 상대를 비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절)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는 율법 폐기론자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에는 분명히 율법 폐기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질서도 무시하고 무조건 열광적 종교 체험에만 몰두했습니다. 극단적인 구원 실증주의에 빠져 있는 현대의 구원파 같은 집단도 율법 폐기론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런 열광주의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칭의론을 핵심 주제로 말하면서도 윤리와 도덕을 말하는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비판하듯이 하나님의 은혜인 율법을 폐기처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왜 하나님의 은혜를 폐기했다는 오해를 받은 걸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대답입니다. 갈 2:21절에서 바울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것이라고 단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해체됩니다. 그 차이는 율법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율법이 무의미해진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율법을 준수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율법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들에게 율법 의무를 계속 요구하면 그들은 여전히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으로 남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된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바울의 이런 논리에는 기본적으로 십자가 신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당시에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이런 진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가장 고상한 원리와 가치들은 율법입니다. 종교적인 법을 율법이라고 하고, 세속적인 법을 실정법이라고 하는데, 통칭해서 율법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수치스럽고 무의미한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율법의 결과입니다. 복음서 기자들도 이런 사실을 이미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신성모독죄라는 선고를 받았고, 정치의 최고 법정인 빌라도 앞에서 사회소요죄라는 선고를 받고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골고다의 십자가 처형 장소는 바로 율법의 해체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 율법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다는 말이 바울 신학의 진수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인간이 노력해서 완성해 나가야 할 모든 업적을 가리키는 율법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우리가 오직 은총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바울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전)

 

오직 믿음으로

     위에서 설명한 십자가 신학, 또는 십자가 신앙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실제의 삶에서 살아가기는 모호해 보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율법은 아주 구체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율법 안에 들어가 있으면 뭔가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반대하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율법을 강조했습니다. 제 설교를 듣는 분들 중에서 내용은 좋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럴 겁니다. 십자가 신앙을 자칫 모호하게 받아들이면 구체적인 율법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도 그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정신만이 아니라 육체로 살아야 한다면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후) 여기서 육체는 ‘사르크스’라는 헬라어입니다. 우리의 생물학적인 차원의 실질적인 육체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여전히 육체로 살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구름 위에서 살지 못합니다. 육체의 한계와 유혹이 우리를 고달프게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했습니다. 이 믿음이 바울에게는 삶의 현실(reality)이었습니다. 참된 음악인들에게는 음악이 삶의 현실인 것처럼, 참된 시인에게는 시가 삶의 현실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무조건 교회에 자주 나와서 ‘주여, 삼창’이나 ‘믿습니다.’를 연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단순히 인간의 심리적인 자기 확신이나 감정적인 카타르시스에 불과합니다. 다른 종교나 사이비 이단들에게도 얼마든지 가능한 사람의 자기 열정이자 자기연민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충실해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 누군지를 알아야겠지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구원 통치에 대한 관심이 우리 영혼을 가득 채워야겠지요.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자기 성찰이 부족할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상대화되고, 그래서 축소되고 온갖 종류의 율법이 교회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헌금으로부터 시작해서 교회활동 전반이 마치 요즘 젊은이들의 ‘스펙 쌓기’처럼 종교적 업적을 쌓아가는 기회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로의 회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율법은 결국 자기 의(義)입니다.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기 의는 십자가 신앙을 헛된 것으로 만듭니다.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 6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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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히로

June 14, 2010
*.11.176.57

한국 교회의 현 주소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지향하셨던 복음의 정신 보다는

또다른 율법주의를 강요하는 듯 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만족감으로 보람을 느끼며 할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엔 무언가 공허함을 느끼게 되거나, 회의를 품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나라의 관한 관심으로

진리를 향해 갈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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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June 15, 2010
*.120.170.243

히로 님,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리하는 것이

신약성서를 읽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작업입니다.

율법은 의무라면 복음은 자유에요.

의무 없이 자유만 누릴 수 있을까요?

자유 없는 의무가 인간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말들까요.

자유로운 의무가 가장 바람직하지만,

즉 복음 안에서의 율법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답니다.

위 설교는 그것에 관한 총체적인 해명이 아니라

율법 신앙의 근본적인 한계를

십자가 신앙으로 지적하고 있을 뿐이에요.

일단 그런 시각이 정리된 후에

율법 문제는 또 다른 차원에서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겠지요.

복음의 빛이 우리의 전체 실존을,

즉 우리의 율법적인 실존까지 환하게 비추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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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이삭과리브가

June 15, 2010
*.177.78.117

율법 즉 법이 없든시대에 법이 생겨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는길이 열리고 인간사회에 윤리가 서고

사회제도에 질서가 잡히고 그야말로 율법은 사람들에게 기적과도 같은 은혜가 아니었을는지요

하지만 사람에게 주신법을 사람위에 올려놓은 종교지도자들의 주장때문에 언제부턴가 사람이 법 아래 놓이고 법의 종이된건 아닌지요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상실된 사람의 권리를 다시 법위에 올려놓고 법이 사람에게 필요한 지침이 되게 가르쳐 주신것은 아닌지요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이라는 제도 아래로 도저히 갈수 없는 길을 기어 하나님께 나아가게 했다면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일러 준것이 아닌지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닌지요 그냥 아는것 없이 저의 생각을 적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저의 잘못된 부분 가르쳐주시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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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June 16, 2010
*.120.170.243

예, 이삭과리브가 님의 설명은 정확합니다.

더 이상 내가 코멘트 할 것도 없겠네요.

문제는 오늘 우리가

'율법 위로' 하나님께 바르게 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교리라는 게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영성으로 드러나야 하거든요.

저주의 대상이었던 십자가에 달린 분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이 과연

오늘 우리의 삶에서 어떤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장마가 곧 시작한다니

하시는 사업이나 농장일에 만반의 준비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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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청신호

June 16, 2010
*.33.20.100

이 설교를 읽으며  참 묘한 생각이 드네요  두가지를 생각해 여쭤보고자 합니다.

 

파리가 성수에 빠지면  파리가 거룩해지냐?  성수가 오염되는거냐는 얘기도 있잖아요

율법과 할례를 강요하면서도 예수를 믿으면   예수 믿음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건지 

예수를 믿어도  의롭게 되는 방편으로서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면  믿음을 무효화 시켜 즉 다른 복음이 되서 그리스도인인이라고 할 수 없는건지...

 

바울이 원수대하듯 비판하고 천사라도 저주가 내리기를 바란다면서 아주 강한 톤으로 욕설을? 퍼부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다름아닌 - 예루살렘 교회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셨는데   -  사도행전 초반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의 아주 바람직한 모습을 다루고 있는데

과연 예루살렘 교회 교회의 지도층이 다른 복음을 지향하는 공동체 있었을까 하는 하는 겁니다.

 

 

두번째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리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이제까지 이성적으로 모순이 안 느껴지도록 시워나게 정리된 것을  아직은 못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긴장을 놓지 말고 살라는 뜻으로 그랬는지.... 

 

목사님께서는

율법은  다 지킬 수도 없고 지킨다고 해 봤자 상대적인 만족감을 줄 뿐이고  결국 율법은 자기의 이고 십자가 신앙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면서  율법을 십자가 신앙(복음)는 양립살\할 수 없는 것으로서 상대화 시켰습니다. 동의합니다.

 

바울이 율법을 상대화는 시켰지만  폐법(무법)주의는 아니었다고 하면서 그 증거로 칭의론을 말하면서도 윤리와 도덕을 언급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박옥수 목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구원파를 율법폐기론자들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그 교회에서 윤리와 도덕을 내팽겨진 징후를 보셨나요?(그 교회 교인 아님) 

 

그들이 율법폐기론자라고 오해를 받는 것은 바울이 폐기론자로 오해 받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또한 그들 중 누가 오늘의 목사님의 설교를 읽는다면 아마도  [나나 너나]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래  정도면 얼마든지 [율법 폐기론자]로 오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인용해 보지요

 

1)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해체됩니다. 그 차이는 율법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율법이 무의미해진 것입니다.

2)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 의무를 계속요구하면 죄인되고... 늘 죄인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율법의 의무 요구 할 필요 없음?)

3) 골로다의 십자가 처형 장소는 바로 율법의 해체를 가리킵니다.

4)십자가 신앙은.... 모든 업적을 가리키는 율법은 땅 바닥에 내려 놓고....

 

율법이 - 해체되고  율법의 의무를 요구할 필요가 없고   땅바닥에 내려졌으면  이것은 곧 폐기화나 다름 없다는 거지요.

 

율법주의 피하려다 폐법주의로 가서도 안되고   그 반대도 안되겠지요

 

십자가 신앙이  율법을 해체 하지도 않으며  십자가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율법의 의무를 감소 시키는 것도 아니고 율버블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생각을 해 봅니다.   (내 팽개쳐지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스페쌓기 한 인간의 업적)

  

 십계명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준수하는 것 자체를  율법주의라고 할 수 없고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놓고 신음하고 종노릇하는 행태 그 율법 준수에 상대적적으로 만족(업적화)하고 절망하는 것이 율법주의인 반면에

 

폐법(무법)주의란 십계명을 경시하고  - 어차피 다 못지키니까  십계명을 일거에 무시하고 준수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요

 

 따라서 그리하여 목사님의  [십자가 앞에서 율법이 해체되었다거나 무의미해 진다]는 것은 폐법주의와 뭐가 다를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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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June 16, 2010
*.120.170.243

청신호 님이 두 가지 질문을 주신다고 했는데,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정리가 덜 되었군요.

대체적으로 세 가지인 것 같습니다.

 

1)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행전이 말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관계?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내용이 역사적 진실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에 대한 변증서라서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 기독교가 분명한데,

바울의 이방 기독교와 투쟁하다가 결국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역사에서 사라진 책임이

바울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2) 구원파 문제?

구원파의 구원 실증주의적 구원론에 따르면

결국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죄 문제는 추상화되고 만답니다.

죄의 추상화는 결국 윤리적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지요.

 

3) 정용목사의 십자가 신학도 역시 율법 폐기론?

청신도 님에게 그렇게 보였다면 내 신학 논리가 어설프기 때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복음과 율법의 긴장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오직 십자가에 기대서 살아가지만

율법을 폐기하지는 않는 거지요.

유대 기독교는 복음과 율법이 서로 이어진 두 개의 원이라고 한다면

제가 바울에게 배운 기독교 신앙은

복음이라는 큰 원 안에 율법이라는 작은 원이 들어와 있는 그림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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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청신호

June 18, 2010
*.33.20.100

목사님의 설명에  감사 드리며....

 

복음의 큰 원 안에 율법안에 작은 원 -  복음의 시각에서  율법을 보야 한다는 의미시겠네요 - 

 

이런 상위적 논리가 

하위적 적용이라할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 

적용할 때는 그 누구도 똑 떨어지게 구분하여 말 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 밖게  없겠군요 

예를 들어 주일에  국가 고시 (혹은 직장의 경우)가 있을 경우 -

  1)사적인 일을 금하여 성수하라는 명령에 깊이 받들어 희생을 감수하고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2)일번의 견해를  율법주의적으로  생각해서  아예 갈등도 앟고  응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3)이런 구분 자체를 의미 없는 것(혹은 미성숙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구요

 

 신사 참배 같은 경우도

 우상숭배라고 단호하게 거절할 사람이 있겠고

 국민의례지 문제삼을 일이 전혀 아니라고 참여할 수도 있고

 개인의 양심 소견대로  할 일이지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을 있구요

 

어떻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각각이  다른 견해를 표방하는 자들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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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June 18, 2010
*.244.165.186

"십자가의 죽음은 율법의 결과입니다. "

 

주님의 은총의 광대함과 자유의 자유함에 대해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목사님 잘 지내시죠?

저의 소식을 전하면 다음학기로 심사가 보류되었습니다.

겸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사태에 갇히지않고 지나가면서도 그것이 삶의 풍부로 연결되게 하는 정신의 기초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로 인한 감동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빛안에 거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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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June 18, 2010
*.120.170.243

초신자 님,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심사가 보류되었군요.

한 학기가 늦춰졌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빛 중심으로

천천히 그러나 긴장감을 갖고 들어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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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June 18, 2010
*.179.74.102

부모님께 야단 맞고 벌을 받는 것이 겁이 나서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세상에 나가서 착하게 사느냐

 

아니면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서 욕을 먹지 않게 하기 위해서

 

비록 굳이 지키지 않더라도 실정법으로 처벌 받지 않는 것들도 잘 지키면서

 

이웃 어른들에게 인사 잘하고 성실하고 착하게 사느냐의 차이 아닐까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징벌을 받거나 지키면 복을 받기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면 율법론자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로써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로써 지키며 살아간다면

 

이는 복음주의자가 아닐까요.

 

복음이라는 큰 원 안에 율법이라는 작은 원이 들어와 있는 것이 이 모습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 아시는 얘기일텐데 한 번 끼어들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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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June 18, 2010
*.104.196.138

눈사람님, 느무느무 오랜만이십니다..^

잘 지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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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June 21, 2010
*.179.74.102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두달 전에 어머님께서 소천하시고

제가 좀 활동이 뜸했습니다.

 

어머님께서 천국에 가셨다는 증거들을 많이 보고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되었지만

지금도 집에 계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유니스님!

기억해주시고 안부 물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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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une 21, 2010
*.51.151.222

눈사람님,

저도 다비아에 뜸하셔서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그 동안 큰 일을 치루셨군요.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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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June 22, 2010
*.179.74.102

라라님!

감사합니다.

다비아는 저에게는 하나님께로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곳이기에

항상 다녀갑니다.

옮긴 교회의 목사님께서도 하나님에 대한 것 외에는 그 어떠한 말씀도

설교시간에 하지 않으시기에

영적으로 날로 건강해져 갈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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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June 21, 2010
*.235.166.155

눈사람님, 그간 큰 일이 있었군요.

눈사람님 평생의 지지자이자 후원자이신 어머님이셨을텐데요...

지금도 여전하실 겁니다.

눈사람님의 삶에 주님의 더하시는 은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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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June 18, 2010
*.120.170.243

눈사람 님은

저의 딱딱한 논리를

일상적인 상황과 용어로 쉽게 풀어주셨네요.

복음의 자유가 눈사람 님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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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June 21, 2010
*.221.161.133

왜? 율법폐지론을 두려워하시나요?

율럽이 폐지되었다고 해서 십계명을 안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두려운가요?

 

저는 다르게도 생각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면서 성경을 읽을때 유대인의 입장에서 종종 읽지요..

그러다 보니 구약을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것처럼 생각할때가 있어요...

 

사실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율법자체를 받은적이 없지요... 에베소서에도 나왔잖아요?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하나님도 없었고 약속에 대해서 외인이라고요..

 

우리가 구약성경을 하나님께 받았을지 모르지만 구약을 받은적은 없지요... 결국 십계명도 받은적이 없는데

우리가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받지도 않은 율법을 지켜야하는가요? 폐기를 주장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상을 숭배해도 된다는 이야기로 들립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구약의 율법에 의한 십계명을 지킬 필요는 없지만

복음안의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우상을 숭배하지 않을뿐이지요...

 

그러므로 받지도 않은 율법에 대해서 지켜야할 아무런 부담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양심에 따른

행동만 있을뿐이지요...

 

아! 한가지만 더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맡기신것은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주신것이 아니지요.... 물론 선한 율법이 죄를 깨닳게

하는 좋은 도구인것은 확실하지만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우리는 잊고 있는것은 아닌지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예수님에게 지키라고 주신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다 이루신다고 했고요.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이행하신것입니다.  율법을 폐기하지 않으신다는 예수님의 의미는 자신이 다 지켜서 이루어 내시리라는 의지이십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할 또다른 이유를 발견할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다 지켜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신적양심이지요.. 그 신적양심을 충족시킬자를 메시아라 부릅니다. 율법은 지켜보다가 못지킨다는것을 아는 우리를

메시아가 필요한 피메시아로 알게해주지요... 바로 율법의 용도입니다.

 

율법은 지키는 누군가를 메시아로 알수 있도록 해주고 지킬수 없는 나머지를 구원받아야할자들로 구별해주지요..

근데 이방은 율법자체를 받지 못해서 약속자체도 받지 못했지요...

 

율법은 이방과 이스라엘을 갈라놓는 담역활을 했는데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폐하셨기에  이방과 이스라엘과의 담이 없어진것입니다.  아직 율법이 존재한다면 이방과 이스라엘도 구별되겠고 이방과 이스라엘이 구별된다면 이방은 결고 약속과 하나님이 없겠지요..

 

888  중국에 와 있는데 컴에 깔린 한글이 별로 안좋아서 내가 쓴 글의 오자도 구별 못하겠네요...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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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청신호

June 22, 2010
*.33.20.100

과감한 복음 선언입니다.

못 지키기에 결국 내가 피메시야임을 알게 한다는 말은 정곡을 찌름니다.

중국이시라구요?

 

그렇다면 이 생각을 좀 해 볼까요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양심에 따른  행동만 있을뿐이지요...  ]라고하셨는데  이 신양양심이라는게 사람마다 환경마다 둘쭉날쭉이니 이헌령 비헌령이 될 소지가 다분하고   물론 일치게 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겠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양심이라는게 결국 상황윤리로 떨어 질 수는 없지않나 하면서 그래도 뭐 기준이 있지 않을까요?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이것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 로마 그리스도인들에  바울이  한 말인데 여기서 굳게 세운다는 율법이 십계명이 아닌 무엇일까요?

 

(약 2: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이 자유의 율법의 본질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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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June 22, 2010
*.221.221.48

ㅠㅠ 혹시 이곳이 토론장으로 발전할까 염려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배우는 자세로 임하오니 혹 완곡하지못한 표혀이 있더라도 이해부탁드립니다.

 

율법에  있어서 제사율법과 도덕율법에 대한 구분을 하시는분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제사율법은 폐해졌고 도덕율법은 그렇지 않다고요... 그게 정말 그렇게 구분될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물론 히브리서를 근거로 제사율법의 폐지를 주장할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도덕법에도 사실상 죽은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접신자등이나 범죄자를 죽이라는 법등은요...

 

그렇다면 율법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또 굳게 세워야한다면 어디까지 세워야 하는것일까요?

 

제 생각에 바울이 세워야 한다는 율법은 지켜야하는 율법을 이야기하는것이 아니고 바로 메시아를 발견할수 있는 율법을 세워야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그 율법(약속)이 있어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 가운데서 구분해 낼수 있으니까요..

 

율법은 엑스칼리버의 칼과 같습니다.  칼이 바위에 꽃혀 있었지요... 그 칼의 임자가 그 칼을 뽑게 되는 신탁이 있었지요.

아서왕이 그 칼을 뽑고 왕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칼을 빼려고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칼을 아서왕이 뽑을\때 뽑혔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그 율럽을 폐하십니다.  즉, 지키지 않고 폐해버리신것이 아니고 지키심으로서 그 약속이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하신거지요...

 

바울이 세우고자 했던 율법은 지키자고 했던 율법이 아니고 그 율법을 통해 오신 그리스도의 일을 명확하게 알리고자 함입니다.   율법이 세워져 있어야 인간이 그걸 지킬수 없다는걸 깨닳게 되는거고 그래야지만 믿음으로 의로워짐이 더욱 빚을 발하겠지요... 

 

앞의 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율법은 유대인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 율법을 받은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켜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그 율법을 신적양심으로 받아들인 저는 완전히 그걸 지킬수 없다는걸 더욱 알아갑니다.

 

신앙양심에 대한 기준....

기준이 있어야 합니까?  기준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기준이 없으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모호해질까요?

 

한달전쯤 기독진보신문사의 옛편집장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공정무역커피로 커피전문점을 운영하더군요...

 

다른 커피보다 양심적임을 그리고 착한소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서울시내에  커피전문점이 많이 늘었더군요... 전 커피전문점의 공격적 마케팅에 방어할수 없는 소비자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자신이  공정무역을 강조한다면 맘약한 착한 사람들이 그 커피를 사먹고 신용불량자가 될수도 있지 않을까요?  또 그 커피를 사먹도록 유도하고 있을때 지구촌에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굶어 죽어가는 나사로를 문앞에 둔 부자는 도대체 얼마나 그와 나사로의 거리가 떨어져 있어야 아브라함품으로 갈수 있었을까요? 

 

신앙도 발굴해 나가야하는것처럼 존재도 관계를 발견해 나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내 던져진 내가 세상을 맡은것처럼 더 많은 관계를 통해서 기준도 늘려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말도 길어졌네요... 애들이 새우먹으러 가자고 하네요.....  전 7월4일에 샘터교회에 갈 예정입니다.

가족들이 중국에 다 있어서 잠깐 다니러 왔어요....

 

애들과 말 나누고 이것 저것 신경쓰느라고 글이 왔다갔다 합니다. 지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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