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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에 참여하는 길

성탄절 조회 수 14520 추천 수 46 2007.12.25 15: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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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이사야 62:6-12 
mms://wm-001.cafe24.com/dbia/071225.mp3성탄에 참여하는 길
2007.12.25. 사 62:6-12

낭만적 성탄 넘어서기
오늘 우리는 2007년 성탄절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오늘 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온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오늘 성탄절 예배를 드리면서 큰 기쁨을 경험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성탄 절기에는 연말연시가 겹치기도 해서 흥겨운 기분에 젖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교우들이 살고 있는 이런 지방에서는 성탄절의 분위기를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제가 젊었을 때 경험했던 서울의 명동이나 요즘의 강남 번화가에는 성탄절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을 겁니다.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 반짝이는 성탄추리, 흥겨운 캐럴, 선물 등등, 성탄절의 기분을 돋우는 것들은 많습니다. 영화, 연극이나 음악회를 가는 사람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겠군요. 모두가 이 세상의 즐거움을 확인해 줄 수 있는 한 순간들입니다. 가능하면 여러분들도 모두 이런 삶의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흥겨움은 곧 지나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 동안 받은 성탄선물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우리가 지난 성탄절 때마다 경험한 정겨운 추억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그것이 아무리 감미로운 추억이었다고 하더라도 세월과 더불어서 빛바랜 사진처럼 시들해지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로 여성분들에게 그런 경향이 흔히 보이지만, 점점 아득해지는 추억을 되살리고, 낭만적인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그것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를 억지로 맞으려는 데 불과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삶을 비관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의 실체를 정확하게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단지 성탄절의 기분에 들뜨지 말고 성탄절의 참된 의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일 설교의 한 대목을 기억하시나요? 성탄절과 연결된 이야기는 모두가 아름답고 평화롭습니다. 여러분의 머리에도 그런 기억으로 가득할 겁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 그 앞에 경배하는 동방방사들, 그 위에서 찬송하는 천사들은 우리가 명화에서 자주 본 모습입니다. 한 밤중에 천사들에게 아기 예수의 나심을 전해들은 목동들의 모습도 목가적입니다. 그야말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입니다. 이 모든 장면의 주인공은 바로 아기 예수이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그 예수는 가장 참혹한 방식으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가 죽을 때의 나이도 서른세 살에 불과합니다. 지금 아기 예수의 탄생을 즐거워하고 있을 때인가요? 만약 마리아가 예수님의 그런 운명을 예측했다면 얼마나 괴로워했을까요?
저는 성탄절에 맛보게 되는 흥취와 즐거움을 빼앗으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분이 아니라 어떤 궁극적인 사실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아주 초기 기독교는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아시는 분이 있겠지만 성탄절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차츰 교회력의 중요한 날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날짜가 12월25일이 된 것도 로마가 섬기는 태양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낮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가 지난 12월25일은 로마에서도 큰 축일이었는데,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면서 성탄절이 그날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탄생에 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당시에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을 당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셨다면,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습니다. 굳이 오늘과 비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장기복역하고 있는 사상범들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형편에 처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요즘 우리처럼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성탄 추리를 하고, 칸타타를 부를 여유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골몰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 하는 거지요. 지금이야 우리가 그가 누구인지 잘 알지만, 또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초기 기독교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배웠고 그렇게 믿습니다. 메시아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하신다면 이 세상이 뭔가 좀 달라져야하는 게 아닌가요? 예수님은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사셨습니다. 이 세상은 그 전과 후가 달라졌나요? 실제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이나 그 후나 사람들은 병에 걸리고, 장애인들도 여전하고, 악한 사람들이 잘되기도 하고, 죄가 없는 사람이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모두 이렇게 살다가 늙어서 죽습니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완성이 오기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2천년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과 전체 우주를 구원하실지 우리는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완전한 구원이 일어나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정체를, 그의 운명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완성할 그때를 지금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게 대림절이며 성탄절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타는 목마름으로’ 성탄절을 맞으시나요? 아니면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차원에서 낭만적인 기분에만 휩싸여 있으신가요?

구원하실 이
예수님이 오시기 5백 년 전에 이미 이사야는 이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구원하실 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그 당시 유대의 예언자들과 예수님 당시의 예언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의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이사야의 기다림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이사야는 상당한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예언했습니다. 물론 상황이 편하면 예언자가 필요 없겠지요. 유대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봉헌하기는 했지만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이 이루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학개의 예언이 어땠는지 한 구절만 보겠습니다. “너희는 야훼의 성전 주추를 놓은 구월 이십사일, 바로 이 날부터 앞으로 어떻게 달라지는지 눈여겨보아라. 곳간에 둔 종자가 줄어드는지,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가 열리는지 안 열리는지 두고 보아라. 나는 이 날부터 복을 내리기로 하였다.”(학 2:18,19) 성전 봉헌식은 기원전 515년에 있었는데, 그 뒤로도 국내외 정치적 상황도 그렇고 삶의 형편도 나빴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실망했을는지 상상해보십시오. 바벨론 해방, 성전 재건, 하나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 발견으로 인해서 예루살렘이 다시 다윗과 솔로몬 시대처럼 번영을 구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이사야는 다시 예루살렘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 위에 보초를 세운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초를 세운다면 이제는 더 이상 다른 나라에게 침략당하는 일도 없겠지요. 그 보초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재건할 수 있도록 깨우는 역할도 있다고 했습니다.(6,7절) 이사야는 야훼 하나님의 맹세를 이렇게 전합니다. “너의 곡식을 다시는 내주지 아니 하리라. 너의 원수들에게 먹으라고 내주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외국인들에게 너의 포도주를 내주지 아니하리라. 네가 땀 흘려 얻은 포도주를 결코 내주지 아니하리라.”(8절) 곡식과 포도주를 빼앗기지 않는다는 말이 좀 야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군요. 가능한대로 남과 나누어 먹도록 가르치는 게 옳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말씀은 우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웃나라에게서 얼마나 무참하게 당했는지를 알아야만 이해가 됩니다. 모든 걸 억울하게 빼앗겨본 사람에게는 이런 한이 맺히기 마련입니다. 이사야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한을 풀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최소한 마음 놓고 먹고 마실 수 있으며,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게 바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에마저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는 하나님이 지켜준다고 예언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11절 말씀에서 클라이맥스에 달합니다. “너를 구원하실 이가 오신다.”고 했습니다. 구원하실 이는 자기가 찾은 백성을 데리고 시온, 즉 예루살렘으로 오십니다. 그들은 이제 거룩한 백성으로, 야훼께서 구해내신 자들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이제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도시, 버릴 수 없는 도시가 된다고 합니다. 패잔병 같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버려진 도시 같은 예루살렘이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예루살렘 주민들이 아니라 구원하실 이가 이루십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오신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을까요? 안타깝지만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이 이루어지 않아 절망하고 있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다시 이사야의 예언을 들었지만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언자들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걸 신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이사야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책임일까요? 그런 예언을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이 책임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이 사태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역사적 책임
우리는 지금 풀기 힘든 문제 앞에 섰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신탁이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그런데 역사에서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사야 뒤에도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했고, 기원 1세기에는 나라를 송두리째 잃었습니다. 이 문제를 풀려면 우리는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명령이며, 뜻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성취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받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에 집중했다면 그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었을 겁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였겠지요. 이러한 그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질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되지 못한 책임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기쁨으로 맞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사건은 구약 전체를 통괄하는 완전한 예언입니다. 인류를 구원할 예수가 오신 성탄이라는 예언을 우리가 들은 것입니다. 이 예언이 이 역사에서 실현되었나요?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예언의 성취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제가 설교 앞부분에서 말씀드렸듯이 메시야가 오셨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이 아직 실체적으로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실체를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탄은 여전히 예언입니다. 그 예언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종말의 때에 완전히 실현됩니다. 아직 우리는 종말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이 역사 중간에 성탄의 예언을 들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성탄의 역사적 책임을 우리가 감당하는 게 최선입니다.
그 책임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에 관해서는 제가 말씀드릴 게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과 생명과 역사를 어떻게 경험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제가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걸 가르쳐줄 분은 오직 한 분, 성령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영에게 마음을 열기만 하면 성탄의 역사적 책임을 지면서 사는 게 무엇인지 여러분이 처한 형편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가르쳐 줄 것입니다. 이런 말이 너무 막연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정말 막연하다고 생각된다면 여러분은 평소에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거나, 아니면 생각하더라도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하는 걸로 아시면 됩니다. 철이 난 자녀들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도와할 일이 무엇인지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되지만, 철이 나지 않은 자녀들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저도 신앙적으로 철이 나지 않은 사람에 속합니다.
저는 이 시간에 방향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역사적 사실에 영혼의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것은 단순히 성탄 찬송을 부르고, 카드를 주고받는 일로 인해서 좋은 기분이 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구원이 이 땅과 역사에 선취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곧 완전한 구원이 실현될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믿으십시오. 믿기 전에 그 사실의 의미를 이해하십시오. 이해하고 전적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역사에서 무슨 책임을 감당해야 할는지 성령이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건 단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의 마이너리티를 위해서, 또는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위해서, 교회의 교회다움을 위해서, 나와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각각 할 일이 있겠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만 아니라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 일에 매진하겠지요. 이런 삶이 바로 우리가 성탄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2007년 성탄절을 맞아, 성탄의 참된 의미가 여러분의 삶에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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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야생초편지

December 26, 2007
*.84.57.222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제 지난 일년을 돌아봅니다.
다비아를 만나 늘 행복했지요.
그 속에 이해할수 없는 거시기가 있었지만
그 것 떄문에 스스로 질문하며 이 자리까지 왔지요.

목사님이 얘기하셨지요.
신앙에는 긴장감이 필요하다고...

우리 다비아는
정답을 찾는게 아니라
그 길이 무언지 항상 고민하며
스스로 그 길을 찾아가며
그 길을 함께 걸어 가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 길에 정목사님이 계시고
함께 그 길을 가렵니다.

다비안 여러분!
새해에는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며
정목사님과 더불어 신앙의 정도를 걸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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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December 26, 2007
*.181.51.93

야생초 님,
강화의 정기를 듬뿍 받고 잘 계시지요?
이렇게 일년이 휙 하고 지나갔습니다.
저도 야생초 님을 알게 된 걸 기쁘게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이번 목요일에 뵈었으면 좋겠군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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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Himalaya

December 26, 2007
*.71.37.144

정 목사님,

아침에 일어나서 인터넷을 열었더니
목사님 성탄 설교가 올라와 있어서
조심스럽게 읽었습니다.
소리내서...

읽으며 제가 갖고 있는 큰 고민 중의 하나가
목사님 설교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지 2000년이 지났는데도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소망도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 요즘 저는 선교사로서의 동력을 잃고 있습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신앙의 엔진도 돌아가지 않고 있는 느낌입니다.
컴류터에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작동되지 않는게 이런 느낌일지요.
하드를 다시 포맷하고 새로운 operating system을 깔아야 할 것 같은 느낌...

동력을 잃은 가장 큰 원인을
제 나름대로, 제 의식 수준에서 분석해 보면
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사역(물론 일상생횔이지만)해도
제가 속한 네팔의 영역은 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개선을 바라고 애썼던 의과대학은 오히려 붕괴되어 가는 듯하고
마음을 쏟았던 지역교회는 담임목사의 타락으로 안에서 곪고 있고
아내가 혼신을 쏟았던 마을은 사막에 물 한 양동이 부은 정도이고...
더욱 힘들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과 공동체들도
예수의 이름만 부를 뿐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문해 보았습니다.
이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청한다는 것은 무슨의미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면 어떻게 된다고 말해야 할지
메시지를 잃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으 무엇을 말하는지..
교회 나오는 분들 중에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반이 안됩니다.
읽을 수 있는 분들도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구전문화권의 사회라 그런지 듣고 외우고 감동하고 끝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며 미래의 소망을 말하기에는
그들의 현실의 삶이 척박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된다고 손가락으로 가르쳐 줄 대상이 없습니다.
네팔의 교회가 그렇고
선교사를 파송한 한국교회도 그렇고
그들이 기독교 국가라고 믿고 있는 미국과 영국이
세계에서 저지르고 있는 부당한 처사가 그렇고...
그렇게 가다가 저 자신을 보니
저 자신도 예수 믿고 별로 바뀐바가 없군요.

이렇게 생각 속에서 헤매다 보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민은 이미 선배 선교사들과 목사님들이
벌써 하셨고 하시고 계실 것이 틀림이 없는데
어떻게 그 유산에 접근해서 해결해야 할지 막연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설교에서
우리가 역사에서 해야할 일을 발견해야 한다 하셨는데
그 발견된 일을 하려고 노력해도 세상과 자신이 변하지 않는 긴장과 갈등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요...
10년을 가까이 선교에 몸담고 있었는데
어느날 전해야 할 자신의 메시지를 잃어 버린 느낌...
참으로 부끄럽고 당황스러워 어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곳 캐나다에서 만나는 교회의 친구들에게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지난번 안식년 동안 이곳에서 열심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쳤는데
지금와서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갑자기 불분명해지는 느낌...

제가 아는 모임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산을 올랐는데 어느날 느낀 바가
'이 산이 아닌가봐....'

이런 생각의 혼란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생각을 정리할 때
먼저 던져야 할 질문들을 좀 가르쳐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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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December 26, 2007
*.150.14.168

히말라야 선교사 님,
제 가르침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직면한 그런 문제의식 자체가 이미 대답을 향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은 대개 그런 근본적인 고민이나 질문조차 하지 않거든요.
그런 상태에서는 답을 향한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제 가르침이 필요 없다는 말은
더 근본적으로 저에게 가르침을 드릴만한 내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기껏해야 저는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히말라야 님은 네팔에서
의료행위로, 성경공부로 실전을 많이 치루셨잖아요.
그든 영적, 인간적 에너지를 소진시켰잖아요.
그런 분에게 이렇게 책상물림 비슷한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러나 간혹 지나가다가 얼떨결에 줒어 들은 말도
우리에게 좋은 깨우침을 줄 때가 있듯이
그런 작은 소망으로
제 말은 지나가는 말에 불과하지만
몇 말씀만 드릴께요.

사람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고민이 많으시군요.
네팔에 뿌린 씨앗이 큰 결실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현실 앞에서
겪게되는 불안이겠지요.
그 심정을 저도 잘 압니다.
저도 현풍에서 10여년 목회했지만
교회를 성장시키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그 지역사회에 족적을 남기지도 못했습니다.
이 문제를 히말라야 님은
제 설교에서 짚었던 메시아 문제와 연결하셨군요.
그게 세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메시아적 구원통치가 담지한
신비한 능력을 엿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은폐성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이 변화하지 않는 것은 드러난 모습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미 악한 권세가 굴복했다는 것은
은폐된 현실입니다.
거울로 보는 것 같다는 바울이 진술이 바로 이 사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언젠가 온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을 우리는 기다리고 삽니다.
그 날을 향해서 용맹정진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네팔 사람들에게 변화가 없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무엇이 변화일까요?
저는 설교비평을 하면서
목사들이 신자들의 변화를 너무 강조하는 건
설교의 근본이 아니라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한 거지요.
그런 변화가 아니라면 도대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는가,
하고 반론을 제기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글에서 여러번 지적했으니까 여기서는 접겠습니다.
비록 변화되지 않는 것 같아도
우리는 씨를 뿌리기만 하면 거기에 은폐된 하나님의 메시아적 구원통치가
언젠가는 이 현실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믿음이 아닐까요?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강하게 말하는 걸 용서하기 바라며,
지금 히말라야 님이 네팔 사람들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는 건
네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히말라야 님 자신의 문제가 아닐는지요.
겉으로는 네팔을 걱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본인이 영적으로 빈곤한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제가 그렇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문제는 우리 자신이더군요.
내가 진리의 영과 소통하고 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히말라야 님에게는 네팔 사람의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에 천착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하나님 나라, 종말, 칭의, 복음, 구원, 창조 등등,
하나님의 세계와 관련된 공부도 필요하겠고,
영성이 깊은 선생들과의 교제도 필요하겠지요.

말이 많았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이 아주 실질적이고
그 태도가 진솔해서
저도 덩달아 진지한 모드로 바뀐 것 같군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나가는 말로 들으세요.
성령께서 좋은 길을 열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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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정수학

December 27, 2007
*.157.242.229

매년 말이면 각 부서의 교사들이 서로 견주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름의 열심이 아이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자책과 이유로 자신의 자리를 피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피해 간다는 말은 그렇고 자기의 자리라는 말도 그렇네요. 하지만 누군가 해야만 하는 자리나 봉사임에도 여러 이유로 고민하고 괴로워 합니다. 저도 물론 예외는 아니지요 ...선교사님! 힘내세요..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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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December 27, 2007
*.237.224.203

손건영 선생님... 혹시나 싶어서 회원 정보 보기를 하니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이셨네요... 선생님을 여기에서 뵙다니 너무 놀랍고 영광스럽습니다... 저를 모르시겠지만, 예전에 학생 시절에 대경 누가회 신입생 환영 모임에 가서 선생님 말씀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온화하고 겸손하시지만 강한 멧세지로 다가오는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도 인상깊게 남아있습니다...

경북대 의과 대학교 생화학 교실에서 인격과 실력을 겸비한 교수님으로 정평이 나있었죠... 강의 잘 하시기로 소문이 나서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으셨구요...경북대 의과대학을 나오지도 않은 제가 알고 있을 정도니깐요... 그냥 계셔도 앞 날이 보장된 분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네팔로 가신다고 하실 때... 학생인 저에게도 강한 임팩트로 다가왔었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을 보면, 저는 얼마나 걱정 없이 편하게만 살고 있는지 한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이런 저런 힘든 일이 있으시다니 제 맘도 따라 무겁습니다... 멀리서나마 기도하겠습니다... 한국에 나오시면 꼭 한 번 찾아가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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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정수학

December 27, 2007
*.157.242.229

손선교사님이 그런 분이신 줄 몰랐습니다. 감사하네요...
그런데 혹시나 해서 첫날처럼 님의 정보보기를 보니 닫혀있네요...
그냥 감사하고 존함은 알고 감사드리려구요...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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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Himalaya

December 27, 2007
*.157.28.246

첫날처럼 님,
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저와
정 목사님께서 답글에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네팔 사람들을 향하던 화살을
저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현재의 자신의 간격이 크답니다.
지난 10여년간 '인격'이 더 성숙한 것 같지도 않고
그나마 공부했던 '실력'은 완전 바닥이 나서 다시 공부해야 하는
영적으로 고갈된 상태랍니다.
정 목사님 지적대로
저 자신을 다시 추스려야 하는 상태랍니다.
엔트로피가 높아져 버렸습니다.
저 자신을 다시 바라보며
주님을 다시 새롭게 알아나가려는 몸부림을 치는 중입니다.
기도 가운데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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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Himalaya

December 27, 2007
*.157.28.246

정 목사님,
답글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께서는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 밖에는 모른다'고 하시며
별로 가르쳐 주실 내용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시는데,
답글에서 지적해 주셨듯이
'선교지'에서 발생하는 질문들의 핵심은
바로 그 '신학적 사유'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표면적인 문제는 '사역'인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선교사 자신의 됨됨이'이고
그것은 선교사가 어떤 신학적 사유를 하고 있는가에 달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교지에서는 '선교학적 사유'도 필요하지만
그 근본에는 치열한 '신학적 사유'가 있어야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선교지'가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선교지'라고 편의상 부르는 곳이 있지만
그곳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 생활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며
그곳에 사는 선교지 백성들 뿐만아니라 선교사 자신들도
결국은 목회적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고
선교의 핵심은 결국 목회적 활동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서 신학, 목회 하시는 분들과
소위 '선교지'에서 사역하시는 분들의 사역이 기본적으로 다를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어, 문화, 정치, 경제적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context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네팔에서 하던 일이 '실전'인 만큼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도 '실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한국에서의 실전 경험으로 네팔에서의 실전을 통찰하시는 가르침이
저에게는 참 소중합니다.

안타깝게도, 저의 일천한 '선교지'경험에 비추어 보면,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이런 내용이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선교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관례대로 이 용어를 사용하겠습니다.)
선교에 올인하고 있는 교회에서 조차도
이런 고민은 대화의 장에 올릴 수가 없는 분위기더군요.
그러니 신학적 대화가 활발한 곳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제가 귀담아 들을 이야기가 있는지 귀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제가 걱정하는 네팔 사람들 보다
저 자신을 더 걱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지금 저는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문제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종말, 칭의, 복음, 구원, 창조 등등,
하나님의 세계와 관련된 공부도 필요하겠고,
영성이 깊은 선생들과의 교제"

저의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들추어 내는 것이지요.
제가 위의 질문에서 말씀드렸듯이
'컴퓨터 하드를 다시 포맷하고 operating system을 다시 깔아야 하는' 작업입니다.

제가 이런 여정에 들어서게 된데는
목사님의 책임(?)도 없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2006년 9월 하순에
'복음과 상황에서 ' 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한 편 읽고는
이곳 다비아에 와서 모두 찾아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그동안 주로 총신, 합신 쪽의 신학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제가
어떤 도전과 충격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에게 아주 신선한 새로운 샘물이었습니다.
아직도 다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
새로운 사유의 길로 들어서면서
기존의 세계관을 수정해야 하는 힘든 과정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며 다루시는지...
우리가 그 분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된다 함은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지...
나에게는 어떤 변화가 생기고
이 세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몇 페이지를 더 적어야 할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새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질문의 영역이 광범위하고 혼란의 바다가 넓어서
제 혼자 여행하기가 두렵고 벅찬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명색이 '선교사'라는 딱지를 붙인 사람이
이런 신앙의 근본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당혹감과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저 자신이 먼저 바로되기를 소원합니다.

좀더 사적인 공간에서 목사님으로 부터 배우고 싶었는데
이 공간으로 나오라 하셔서 나왔습니다.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있던 아담이
그 잎파리 마저 던져버린 느낌입니다.
네팔에서 나름대로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고 애썼던 제가
이렇게 '영적인 빈곤'함에 빠진 원인 중의 하나가
저를 객관적으로 보고 멘토링해 줄 공동체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냉혹해 보이는 이 공간으로 기어 나왔습니다.
선교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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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0]웃겨

December 27, 2007
*.152.194.187

안녕하세요, 히말라야님,
저는 영국에 나와있는 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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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0]웃겨

December 27, 2007
*.152.194.187

님의글이 참 울림이 크네요.
선교사역도 모르고, 실존적으로 그런 신앙적 고민을 진지하게 해보지도 못했지만
같은 길을 가는 기독교인으로서 깊이 공감이 됩니다.
저의 안일한 자세를 돌아보게도 되구요..
혼란스러우시다고 하셨지만 그런 귀한 생각들을 나누어 주셔서
저에게도 자극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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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산가람

December 28, 2007
*.146.132.92

히말라야 님의 글을 읽으면 님의 고민과 사유가 가슴에 와 닿는듯
실제적입니다. 삶의 자리가 다른 관계로 어떤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지만
말씀하신대로 어떤 자리에 있던 님의 고민과 동일한 고민이 우리 모두에게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공감하게 됩니다.
어렵고 힘든일 (제가 하지 못한 일과 제가 가지 못한 길을 가셨다는 것만으로도)을 하시면서
그 일에 속해 있으면서 느끼게 되는 자기열패감(?틀린 표현이라면 용서를 부탁드려요)은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이 곳이 히말라야님에게 힘이 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면식도 없고 하시는 사역이 어떤 일인지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님 개인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가 되기로 저도 약속드립니다. 힘내세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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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둘로스

December 28, 2007
*.232.236.146

히말라야 선교사님의 글과 댓글들을 보면서 실존적인 부딪침에 대해서 개인적인 경험이 떠오릅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삶의 의미, 죽음의 문제, 기원의 문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막연한 환원주의 세계관을 믿고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적인 태도가 자연스럽게 인격화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 다닌지 약 15년후의 일이었지요.
어쩌다가(?) 사역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약 10년후 히말라야 선교사님과 비슷한 고민을 했습니다.
사역의 열매는 없고 나는 도태되는 것 같고 내가 아는 것은 부분이며 그토록 확신에 찬 것이 무너지기도 하고..
(때로는 사역의 성공이 자신이 영혼을 제대로 살피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는데 그렇게 안된 것이 감사할뿐입니다.)

짧지않은 경험을 통해서 현재 제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과 그 분은
말씀하신대로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시 126:5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1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8-9

중심이 바르고 선하며 양심으로 섬겼다면 주님께서 책임지시지 않을까요?
주님 앞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큰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충성되었느냐로 평가되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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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December 28, 2007
*.54.78.169

손건영 선생님... 참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도 누가회의 주변인으로 남아있습니다... 헌신하지 못하는 자의 핑계겠지만... 신학적 관점의 획일성과 폐쇄성, 결단과 사역 지상주의 등등에 숨통이 막히더라구요...

성서의 맥락을 파악하기 보다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적용에만 적용하는 큐티... 하나님께 일방통행 식으로 부르짖기만 하는 기도... 뭔가 내면이 제대로 채워지고 속에 알이 꽉 찬다는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잘만 적응하고 헌신하고 사역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잘못된 거겠거니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다비아를 만났습니다... 저는 솔직히 충격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냥 너무 너무 기뻤죠... 마치 성적 소수자가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만난 느낌이랄까요? 비유가 쫌 그런가요?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이 신앙의 내용으로 정리가 되는 느낌... 성서의 맥락을 통해서 금맥에서 금을 캐내는 듯한 느낌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저는 한 때 종교 상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상대주의는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이 없다는 이야기와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비아를 통해서 하나님, 예수는 내 전 존재를 걸어도 될 분이라는 확신을 얻얻고 상대주의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경험이 제 신앙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는 느낌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저는 현재 기독교의 진리 인식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 보편성과 절대성의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구요... 선교가 타 종교 문화권의 사람들과의 "진실한 대화와 이해"가 아닌 "독단적 주입과 설득"의 성격을 띠는 것도 교수님께서 느끼시는 슬럼프와 고민의 한 가지 원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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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January 02, 2008
*.244.165.223

성탄절 설교의 현실감이 느껴집니다.
현실과의 거리를 이렇게 좁혀주신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것이 목사님의 고민의 내용인 듯하여, 그 결과를 편안히 향유하는 듯 하여 그야말로 저는
특권을 누리는 듯 합니다.

Himalaya 님께 조언을 받고싶은 것이 있읍니다.
네팔인에게 기독교에 대해 얘기할 때 기억해야할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분들의 아이디어도 환영합니다.

저는 샘터 교회 창립멤버인데, 최근에 얼떨결에
통역이 필요하다고 하는 교회로 잠정적으로 나가고있습니다.
제가 지금 통역을 하고있는 분이
네팔에서 온 영남대학교에서 약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있는 여자분이신데,
저는 초신자로서
(전투적) 선교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으로 여겨오던 터라(기독교와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역사적 연관관계 등등)
또 삶의 자리가 선교지라 여기고있던 터라 전혀 어떤 관점이 정립되어있지않은 상태인지라,
통역은 다소 수동적인 위치라고 생각했기때문에 별 문제의식없이 시작하게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수동성의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기시작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선교에 대해, 그리고 네팔인의 특성에 대해서 좀더 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시작했습니다.
이러던차에, 히말라야님의 글을 읽고 눈이 번쩍 뜨이면서
이렇게 조언을 구하게되었읍니다.

2주후 일요일 오후에 housewarming party 를 네팔유학생 방에서 갖기로 했는데(자신의 전통음식으로 저녁식사를 준비하겠다고하더라구요) 일반상식 이상의 어떤 선이해를 가지면 좀더 효과적인지 등등,

너무나 무지한 저자신에 대해 놀랄지경입니다.

영남대학교내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며(목사님이 이 학교 경영학과 교수이자 대학원장),
이 학교에 유학온 유학생들(주로 석,박사과정으로 네팔, 몽골, 파키스탄, 중국 등등)에게 기독교를 접하는
기회를 주고자하는 교회인데,
이런식으로 저는 선교 현장에 들어와버려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선교에 대한 감각과 관점을 형성해나가야할 듯 합니다.

다소 막연한 듯합니다만,
선교지에서 느낀 결정체의 일부를 짧게라도 알려주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번거롭게 한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profile

[레벨:8]Himalaya

January 02, 2008
*.157.25.212

초신자의 특권 님,

네팔 사람들에게, 아니 여러나라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는군요.
제가 적절한 답을 드릴 수 있을지 조심스럽습니다.
이유는, 부끄럽게도, 제가 네팔에서 '전도'에 그리 열심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해본 경험이 아주 적습니다.
핑계를 대자면 우선은 네팔사람들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에게 그냥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을 더 이해하자'하고 준비하다 십년이 지났군요.
저는 주로 교회에 나오는 네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그러면서 네팔의 역사 문화 종교 등에 대해 공부해 오고 있었습니다.

네팔을 이해하는데는 힌두교와 불교를 모두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더군요.
저도 네팔로 갈 때 이 두 종교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책 보고, 사람 만나고, 사원을 방문하며 혼자서 공부했습니다.
현재 저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생각들을 몇 가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선, 많은 네팔 사람들은 힌두교가 모든 진리를 포함하고 있고
그 우산 아래 다른 모든 종교가 있다고 은연중에 믿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말로는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등이 모두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는데
속으로는
힌두교라는 근본적인 진리 안에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종교에 대해 아주 관대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종교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나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길로 올라가든지 한 곳에 도달한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네팔에는 힌두교가 거의 80% (티벳) 불교가 15% 정도 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분리하기가 힘들더군요. 거의 혼합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 분이 까트만두 가까운 곳에서 오신 분이면 그럴 것입니다.
남쪽 인도 국경쪽에는 거의 힌두교,
북쪽 히말라야 가까운 쪽은 티벳 불교가 주류.
힌두교의 중심 사상은 불교의 그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우리나라가 불교문화가 왕성해서 이해가 잘 되실 것입니다.

'업'과 '윤회' 사상이 중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아'는 '궁극적 실체'와 동일하다 (범아일여)는 생각입니다.
'자아'가 '업'을 해소하고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
'궁극적 실체'와 연합하는 것이 구원(산스크리트 말로 '목챠')이라고 믿습니다.
(불교는 약간 다르게 말하지요. '열반'이라고...)
그런데 힌두교의 구원의 개념은 다른데
영어로 쓰면 동일하게 'salvation'이라고 하기 때문에
잘 설명하지 않으면 동상이몽이 됩니다.
성경의 '죄' 같은 단어도 그렇지요.
많은 단어에 깊은 통역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서 이런 차이를 설명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평소에 힌두교나 불교에 아주 열심이 있어서
그 경전을 많이 읽고 공부했던 분이 아니면
힌두교나 불교의 고유한 가르침은 잘 모를 것이라 짐작합니다.
네팔에서 티벳불교권에서 사역하시는 분과 함께 공부한 적이 있는데
함께 내린 잠정적인 결론이,
'temple hinduism'과 'village hinduism'은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village hinduism (of daily life)는 거의 민속종교적이다는 것입니다.
현재 제가 갖고 있는 잠정적인 가설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의 바닥에는 민속종교적인 것이 깔려있다.
그 위에 고등종교가 색칠해져 있다.
모양은 고등종교의 것으로 나타나지만
삶의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상황에서는
민속종교적으로 답을 얻으려고 한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부탁치면
성경의 가르침 보다는 기복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지...
그리스도인이 장래의 일을 위해 예언기도 받으러 가는 것 같은...
그래서 저는 힌두교, 불교에 대한 공부와 더불어 민속종교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근본적인 질문을 하며 살고 있고
그 질문에 대해 이들의 민속종교와 힌두교 불교는 뭐라고 답을 하고 있으며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뭐라고 답을 하고 있는가?'

이것이 저를 사로잡고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아마 제가 다른 종교권의 사람을 만나도 비슷하게 던지게 될 것 같습니다.

문제는, 짐작하시겠지만, 질문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저의 사유의 능력이 부족해서 끙끙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 자신이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힌두교나 불교의 선생님들 보다 생각이 짧은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것도 고민하지 않고, 질문해 보지 않고
쉽게 기독교의 교리 속에 안주하고 있었구나...'

셋째, 저에게 필요한 skill이 있다면 'good listening skill'입니다.
제가 전해 줄 이야기에 집중하기 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상대방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위해
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깊은 관심을 갖고 들어주며
그 문제에 대해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reflection해 보는것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참으로 어려운 훈련입니다.
그래서 언론 같은데서 '인터뷰' 잘하는 사람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술의 훈련 보다는
관심가는 분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만큼 저의 생각도 넓어지고 마음도 깊어져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니...

넷째, '우리의 삶의 자리가 선교지이다'라는 생각에 대해서:
이것이 저의 선교에 대해서 갖고 있는 기본적인 주장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그리 선교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선교적으로 살기는 쉽지 않은것 같습니다.
한국은 좀 더 심하지요.
다른 문화를 접해 본 경험이 적어서 그렇겠지요.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그나마 노력을 하는 경우에도 한국의 문화와 비교하는데 그치지 않나 싶습니다.
한국문화에 적응을 스스로 잘 해 온 사람들과는 잘 지내고 아주 환영하지요.
그러나 특히 유학을 온 분들에게는 그럴 시간이 별로 없겠지요.
빨리 공부하고 학위를 받아서 다음 단계를 위해 미국을 가든지
본국으로 가서 취직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들이 우리 문화권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고
우리가 그들 문화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네팔에 온통 관심을 갖고 산지가 10년이 되었고
실제 그 나라에 몸 담고 있은지가 8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그 사람들의 inner most being 속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답니다.
(저 선교사 맞아요?)
제가 너무 욕심을 내는건지...
성령이 아니고서야 그 사람의 깊은 영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을지...
하고 위안을 합니다.

결론적으로,
네팔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하시면 어떨지요. 시간이 있으시면...
저는 네팔에서의 첫 이년간을, 학교에서 돌아오면
거의 역사와 힌두교 공부에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써둔 네팔의 역사에 관한 글이 몇 편 있습니다. 물론 편역이지요.
필요하시면 보내드릴테니 저에게 이메일 하세요. kysohn48@yahoo.co.kr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을 만나면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 좀 알고 시작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제가 네팔 사람들과 대화 하면서
네팔 역사에 있었던 사건을 들어 이야기를 하면
너무들 좋아하고 유심히 듣더군요.
(지금 캐나다에서 살면서 옆 집의 크로아티아 사람과 아주 친하게 지내는데
그들의 마음속에 90년대 중반에 있었던 내전의 상처가 깊더군요.
그래서 크로아티아의 역사에 대해 공부를 좀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힌두교와 불교에 대해 좀 공부하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세계종교사입문'이라는 책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종교사연구회라는 곳에서 편 책인데,
힌두교 편은 류경희 교수께서 쓰셨는데 너무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힌두교는 엄청 복잡한데
힌두교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이해하고 나니
왜 지금의 힌두교가 이런 모습인지 이해가 좀 되더군요.

나가면서:
선교사로 살면서 한거는 별로 없이 늘 준비만 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어
초라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사실은 이런 준비를 해서 어떤 것을 이룰 수 있다기 보다는
이런 준비 과정을 통해 저 스스로 자라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 중에 이곳 다비아에 오게 되었구요...
제가 선교사가 됨으로써 가장 큰 도움을 받은 사람은
네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인 것 같습니다.

'결정체를 짧게 알려 달라'고 하셨는데
너무 길게, 횡설수설, 제 이야기만 하고
마치네요.
이제 저의 문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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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January 03, 2008
*.54.78.169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저는 거의 종교적 취미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타종교에 대한 경험이래봐야 책 좀 본 거... 타종교인들 좀 만나서 이야기해본 거... 그 정도 가지고 뭔가 자신은 참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었거니 생각하고 있었네요... 현장에서 직접 부닥치면서 치열하게 고민하신 선생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느낌이 듭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이 많이 공감이 됩니다...

*'temple hinduism'과 'village hinduism'은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선, 많은 네팔 사람들은 힌두교가 모든 진리를 포함하고 있고 그 우산 아래 다른 모든 종교가 있다고 은연중에 믿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힌두교에다가 "종교" 라는 말을 넣어서 일반론으로 이야기 해도 맞는 것 같습니다... 모든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종교를 다른 종교에 비해서 포용적 우위에 두거나 배타적 우위에 두고 생각합니다... 가장 변방의 소종파들마저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자신들만 자신들의 종교를 세상의 중심에 두고 생각을 하니깐요...

그리고 본질적인 종교와 그 종교를 믿는 종교인들의 대중신심 사이에는 간극이 매우 큰 것 같습니다... 한국 개신교도 예외는 아니구요... 한국 불교도 개신교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 같구요...

최근에 저는 살짝 고대 기독교회사 맛을 약간 보면서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5개의 교구 교회의 대주교가 모여서 만장일치를 통해서 신앙적 사안을 결정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힘이 있던 로마 교회가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요구하면서 나머지 교회와 마찰이 일어났고 서로 파문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서 결국 4개 교구의 동방 교회와 로마의 서방교회로 나뉘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떨어져 나간 로마교회 보다는 나머지 4 교구를 포함하는 동방교회가 기독교의 대표성과 원류성을 더 가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스스로를 정교회(Orthdox Church)라고 이야기 하는데서도 볼 수 있듯이... 물론 세르비아의 민족적 정교회가 민족간 갈등의 핵 역할을 한 것은 유감스럽습니다만... (교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을 확연히 벗어나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원조" 라는 느낌을 많이 갖게 하였습니다... 지금의 개신교회는 양태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하고픈 말은 이제부터인데요... 지금 한국 개신교의 주류인 장로교... 전세계적으로는 기독교 소종파에 해당하죠... 이 장로교는 엄밀히 말해서는 원판을 복사한 복사판의 또 복사판인데 한국에서는 기독교의 정통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딜레마를 느낍니다... 장로교의 하나님, 장로교의 예수... 장로교만이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는 태도... 선교도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비단 개신교만이 아니라, 이슬람교도, 또한 굉장히 넓게 사유하고 자유롭게 사유한다는 불교마저도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합니다... 이슬람교의 자가당착적인 배타성을 보고 저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 자신의 자가당착은 보지 못합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이야기처럼...

로마서에 나오듯이, 바울이 유대교의 전유물이었던 "야훼"가 사실은 "거룩한 본질적 실체" -잠정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명명 - 의 유대교적 투영이라는 사실을 "예수 체험" 을 통해서 깨달은 그런 혁명적인 깨달음이 지금의 개신교회 가운데도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작 자신도 유대교에 속해있으면서도 진리의 사유는 유대교적 지평을 넘어서 있던 바울...

현대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그 거룩한 실체인 예수, 하나님이 단순히 개신교적, 장로교적 투영으로만 존재하는 패러다임이 깨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현재 개신교의 배타성은 표면적인 배타성일 뿐 질적인 배타성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예수가 "궁극"의 다른 이름이 될 때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라고 하는 것도 "표면적인 개종" 보다는 "의미적 일치와 공명"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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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January 03, 2008
*.244.165.223

히말라야님,
고맙습니다.

진지한 크리스쳔들에게 놀라는 일이 많읍니다.
특히 삶과 미션을 살아내는 분들에게서
저는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곤 합니다.

최근에 저는
하나님과 함께 탁월함을 추구하라
라는 구절을 깊이 생각하고있읍니다.

탁월함이란 어떤 세속적 성공이라기보다는
자기를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고민하는 어떤 노력과 시도로 생각되어집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살아내는, 아니 살아가는 분들을 만나는 일은 멋진 일인듯 합니다.

필요한 네팔자료를 보내주십사는 멜을 드리도록 하겠읍니다.

거듭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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