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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현실성

부활절 조회 수 12026 추천 수 44 2008.03.30 15:4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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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20: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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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3.30. 요 20:19-29

지난 주일은 전 세계 기독교가 가장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부활절이었습니다. 성탄절도 중요한 절기이기는 하지만 역사성이라는 점에서는 부활절이 훨씬 명백하고 본질적인 절기입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출발과 더불어 시작한 절기인 반면에 성탄절은 훗날 천천히 등장한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봐도 이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해서는 거의 별로 말이 없는 반면에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서는 빼놓을 때가 거의 없습니다. 복음서도 비슷한 입장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는 마태와 누가복음만 전하는 반면에 부활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전합니다.
요한복음도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정확하게 보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도마 이야기는 요한복음만의 고유한 전승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오늘 본문이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앞부분인 19-23절은 도마가 빠진 나머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이고, 뒷부분인 24-29절은 직접 예수님을 뵙지 못해서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가 구분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입니다.

보고 믿음
본문에 따르면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웠기 때문에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안식일 다음날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며, 며칠 후에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시체 건도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전해들은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은 놀랍게도 사도들이 아니라 죄 많은 여인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 내용이 11-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의 경험을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사실을 믿었다면 19절에 보도하고 있듯이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숨어 있는 방으로 주님이 들어오셨습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신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빌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마 귀신이 나타났나 하고 놀랬겠지요.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받은 상처였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고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들에게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알리셨습니다. 그것은 곧 주님이 살아계실 때 이 세상에서 행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고 다시 방에서 나가셨는지 아니면 제자들과 조금 더 시간을 가지셨는지에 관해서 요한복음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요한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그는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도합니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전형적인 실증주의자입니다.
여드레 후에 예수님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는 도마도 함께 했습니다. 물론 문은 모두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난번과 똑같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를 가리키면 손가락으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말문이 막혔겠지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외쳤습니다. 퀴리오스와 테오스가 병렬로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로마 황제에게도 붙여지곤 했던 것인데, 이제 도마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붙여졌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 황제를 더 이상 주와 신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주이며, 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은 도마를 책망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도마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부활의 주님을 보지 않았을 때는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직접 보아야겠다는 도마의 주장은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에 대한 본문의 설명을 자세하게 보십시오. 못 자국이 난 손과 창 자국이 난 옆구리가 핵심입니다. 20절, 25절, 27절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성서기자는 지금 부활체가 되신 예수님이 바로 얼마 전에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몸이 없는 혼령이 아니라 구체적인 몸을 가지신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말입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분을 직접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2천 년 전 고대인들은, 특히 유대인들은 이런 증인들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부활이 확실한 증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본 예수님은 상처 난 몸을 가지신 바로 그분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상처를 손으로 직접 만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마 만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도마는 만지지 않고 본 것으로 모든 걸 알아차렸습니다.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굳이 만질 필요는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그 장면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당신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는 상태였을 겁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생명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부활의 주님을 제자들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것은 확실하게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그리고 믿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도들이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고 믿었다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뿌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이 부활했는지 아닌지를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놓고 서로 따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사도들의 경험이 중요합니다. 그들의 부활경험이 지난 2천 년 역사를 통해서 성장한 기독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 세밀하고 민감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또는 그렇게 받아들일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주론적으로 유일회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과학적 검증을 통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하게 증명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했을 뿐이지 그걸 놓고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논쟁한다는 것은 이미 교회 공동체를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독교 신앙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의 그 신앙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건 어딘가 불확실하고, 그래서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처럼 과학적인 증거만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 시대에 객관적인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 세상의 과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엉뚱한 것을 말해도 좋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기독교 교리는 진리의 보편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보편성은 단지 자연과학의 방식으로만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문학적인 진리, 예술적인 진리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듯이 기독교 신앙의 진리도 그것만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믿은 사도들이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도들의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의 부활 경험이 바로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하는 주님의 말씀은 사도들의 신앙을 정확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도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창조사건과 똑같이 모든 생명의 원초적 사건이라 할 예수님의 부활은 헛소문이 아니라 사도들이 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바로 그것을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음
예수님은 도마에게 더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을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보고 믿는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믿은 사도들의 신앙은 지난 2천년 기독교 신앙의 뿌리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들의 신앙은 결코 상대화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양쪽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초기 기독교가 처한 신앙적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말씀입니다. 기원후 100년 어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이후 두 세대(60년)가 지난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사도들이 이미 모두 죽었습니다. 속(續)사도들도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때입니다. 이런 상황은 일종의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이 살아 있을 때와 모두 죽은 뒤가 어떻게 다른지 말입니다. 요한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더 나아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을 전제합니다. 오늘 성경일과의 서신서인 베드로전서 1:8절 말씀도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반면에 그런 신앙을 견지하기 힘든 분들도 없지 않을 겁니다. 이런 분들을 무조건 신앙이 없다고 매도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2천 년 전의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는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이런 믿음에는 자칫 광신의 위험성이 없지 않습니다. 광신은 아무 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 일단 마음이 편합니다. 사이비 이단에게 몰입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고 교주를 추종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광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광신으로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참된 믿음과 광신은 어떻게 다를까요? 오늘 본문의 행간이 그걸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의 긴장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확실한 생명 사건이라는 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지금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의 제목인 “보이지 않는 현실성”(invisible reality)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보이는 것만 현실성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고정되어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도, 예수님의 부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현실성, 확실성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깊이로 들어가는 게 바로 기독교 영성이기도 합니다. 성령도 바로 보이지 않는 현실성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막연하게 보이지 않는 것만을 따라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는 예수님의 부활보다 더 확실한 것, 더 현실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만이 잠정적이고 유한한, 그래서 허무한 생명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참된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실질로 느끼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보이지 않는 현실성을 이해하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것을 억지로 배울 수는 없습니다. 구구단을 외우는 거라면 억지로 노력하면 되지만 보이지 않는 부활의 생명은 그런 방식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공부방법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창조의 영이신 성령만이 우리에게 그것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말씀드린다면 우리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현실성을 경험한 신앙의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선배들의 길을 우리는 성서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아직 그게 확연하게 다가오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을 아무리 들어도 소리와 자기가 따로 놀다가 어느 날 소리가 자기에게 말을 거는 놀라운 경험을 하듯이 여러분도 부활의 현실성을 우주와 같은 무게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한복음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부활의 주님이야말로, 또한 주님을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확실하게 믿으니까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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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살군

March 30, 2008
*.211.143.109

좋아하는 단어중에 하나가
'사이'라는 용어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노라면
현실과 영적인 실재 사이에서의 외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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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angelica

March 30, 2008
*.22.65.182

“예수님의 부활이 지금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고, 그것이 내 삶을 어떤 모양으로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한 경험은 뚜렷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실제를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참으로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향해 떠나는 이 순례의 여행이
참으로 즐겁고 재미있고 흥미진지 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한걸을 한걸음 내 딛을 때 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가 마냥 신기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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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Himalaya

March 30, 2008
*.157.39.98

목사님,

본문과 설교 말씀과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지만 궁금한게 있어 여쭙니다.
말씀 중에 '성탄절은 달라도 부활절은 모든 종파가 같이 지킨다' 하시기도 했구요.
목사님께서 '교회력'에 대해 자주 강조하셔서
저도 관심을 갖고 교회력을 들여다 보며 성경을 읽어 나가고 있는데요...
제가 요즘 종교음악사를 공부하며
동방교회 특히 러시아정교의 예전음악을 주제로 research paper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지난 부활절 전야에 이곳 Hamilton에 있는 러시아 정교의 Vesper(철야) 예배를 참석할까 하고
러시아 정교회의 달력을 보다가 놀랐습니다.
그들의 달력에는 올해의 종려주일이 4월 20일이고 부활절이 4월 27일 이더군요.
혹시나 하고 유대인들의 달력을 보니
그들의 유월절 축제도 4월 20일에 시작하고 (First Day Passover)
Last Day Passover도 4월 27일로 되어 있어 동방교회의 달력과 비슷하더군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개신교는 부활절을 한 달 정도 빨리 지키게 되었을까요?
로마 캐토릭교회도 개신교와 같은 날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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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30, 2008
*.181.51.93

히말라야 님,
어찌 된 일인지, 나도 모르겠군요.
러시아 정교회의 금년 부활절이 4월27일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유대인들의 유월절도 그렇단 말이지요.
그것 참, 이상하군요.
히말라야 님이 조사해서 좀 알려주세요.
제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군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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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1]자유의꿈

March 31, 2008
*.123.2.115

인터넷에서 좀 찾아보니 부활절 날짜에 대해 설명해 놓은 곳이 있네요~

http://www.agapepc.com/zbxe/?document_srl=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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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March 31, 2008
*.250.11.122

저는 작년까지 부활절이 유대교의 유월절과 관계있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유대인들이 많은 이 곳에서는 웬만한 달력에는 유대교의 중요절기들이 다 적혀 있고
또 많은 학교들이 공휴일로 지키지요.
헌데 작년에도 유월절이 4월이었는데 부활절은 3월이었죠.

어디서 보니 양력으로 춘분이 지나고 음력으로 3월 보름날이 지난
첫번째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함께 정했다고 하던데..
러시아 정교회의 부활절이 유월절 다음 주일이라니 또 헷갈리는군요.

매일매일 부활하신 주님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5]이택환

March 31, 2008
*.61.167.35

히말라야님, 반갑습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춘분 이후에 오는 만월 이후 첫 주일”로 부활절 날짜를 결의했습니다.
그것은 부활절이 언제나 주일이어야 한다는 서방측의 입장과,
주일과 상관없이 유대인의 유월절 3일후라는 동방측의 입장이 절충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와 상관없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부활절 날짜가 서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1582년 이후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는 로마 카톨릭/개신교회와는 달리,
동방교회는 여전히 기원전 45년에 제정된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자 간에는 윤년계산 관계로 열흘간의 날짜 차이가 있습니다.
그 결과 동방교회는 그레고리력보다 열흘 뒤에 부활절을 기념하게 된 것입니다
(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100-1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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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유목민

March 31, 2008
*.247.83.42

확인하고도 믿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때에
보지 않고도 '믿는다'는 기독교 신자들은 참 도통한 사람들입니다. ㅎㅎㅎ
주님의 은총입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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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rch 31, 2008
*.181.51.93

제가 부활절 날자 계산을 너무 상식적으로만 생각했군요.
유대인의 교회력인 유월절이 시작하는 그 절기의
안식일 다음 주일이 바로 부활절로만 알고 있었는데요.
그 날은 복음서가 가리키고 있는 날이니까요.
이에 반해서 성탄절은 복음서가 아무런 단서를 주지 않으니까
각각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위에서 자유의꿈 님이 알려준 그 사이트나
이택환 님의 설명을 보니 부활절 날자 잡는 게 참으로 복잡하군요.
제 설교의 앞 부분을 조금 고쳐야겠습니다.
모든 분들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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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April 03, 2008
*.55.121.39

부활절 어떻게 정하나] 춘분 후 만월 지난 첫 주일
기사입력 2003-04-03 18:03 |최종수정2003-04-03 18:03




부활절은 매년 3월22일부터 4월25일 사이에 온다. 즉 춘분 후 만월(보통 음력 15일)이 지난 첫 주일이다.

초대교회 때부터 3세기동안 해마다 부활절 일자에 대해 첨예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부활절을 음력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서방교회(로마교구를 중심으로 한 서쪽에 위치한 교회들)에서는 부활절이 언제나 주일에 지켜져야 하며 십자가 처형은 언제나 금요일에 기념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결국 325년 동·서방의 교부들이 소집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달과 주중의 날을 둘 다 인정,부활절은 춘분 다음 첫 만월 후 첫 주일로 결정됐다.

이처럼 부활절이 유동적이기 때문에 교회는 물론 부활절에 휴가를 갖는 학교와 대학들이 일정을 맞추기 위해 큰 관심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이른 부활절과 늦은 부활절 때문에 행사 의복이 해마다 달라진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부활절을 특정 주일로 고정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유영대기자 ydyoo@kmib.co.kr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etc&oid=005&aid=0000143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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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angelica

April 03, 2008
*.22.65.182

순둥이님의 글을 보고 몇자 적습니다.
저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이 믿는다는 것이 우엇을 의미한는 것일까요.
전 사실 그것을 모를때가 많거든요.
내가 믿는다는 것이 참말로 믿는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부활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해도 이해하기 힘든것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끊잉없이 주님을 향해 고민하고, 부활의 참된의미를 깨닫기 위해
한 걸음이 내뎌보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정목사님의 글은 주님을 향해 발을 내 딛게 하고,
내 삶의 실존으로 연결되게 하는 귀한 말씀입니다.

사실 교회안에서도, 눈에 보여지는 것들때문에 판단하고, 판단되어지는
많은 현실들을 볼때, 사람속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 인간사이고 보면,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신뢰성과 진심을 담고 잇는 것까요.
주님의 부활이 우리 삶가운데 생생하게 이루어지기 위해
이런 고민과 과정은 꼭 필요한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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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늘오늘

April 04, 2008
*.239.101.240

교리 A, B, C, D 등은, 참되다.
왜냐하면,
신 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러므로,
그것을 확실히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참된 기독교이다.

A, B, C, D, ...
자 이제 구구단을 다 외웠습니다. 됐나요? ㅋㅋ^^

아니,, 모,, 하나님이야 사랑이시니 무서워할 이유도 없고,
정 목사님도 한 소식 하신 분이니 설마 화를 내실 리는 없겠지만,
문제는, 늘오늘처럼 덜 떨어진 잉간들이,
배움터인 다비아가 욕먹었다고 ‘오해’라도 해서
성질을 부리기 시작하면 어찌 감당하실려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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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angelica

April 04, 2008
*.22.65.182

순둥이님의 글을 보고 또 몇자 적습니다.
정성스럽게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순둥이님의 생각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순둥이님의 생각에 정목사님이 기존의 기독교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부분이 마음에 걸리셨든것 같습니다.

정말 정목사님이 무엇을 말하는지 진지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듣는다면, 정목사님이야 말로 끊임없이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창조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나라에
있음을 아실텐데요.

제가 이래뵈도, 2005년 10월에 가입한 다비아 묵은둥이 입니다.
오랫동안 이곳을 드나들며, 읽고, 느끼고, 프린트해서 읽고,
최근들어 정목사님 설교 녹음해서 듣고, 그것을 다시 정리하면서
끊이없이 정목사님이 말씀하시는 포인트는 창조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나라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저도 이정도면, 이 곳을 어느정도는 안다고 자부해도 되지 않을런지…
저는 정목사님의 설교를 대하면서,
깊고 깊은 말씀의 깊이와 넒이를 경험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더욱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소극적인 설교를 강조하시며,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를 직접 소통하도록 열어가시는 말씀이
제 마음을 울립니다.

순둥이님의 표현중에 밑통이 빠져서 터져서 까지 깨달을려는 노력처럼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불가의 공안처럼 붙들고 있다고하셨는데…

순둥이님에게 정목사님이 그렇게 보이셨다니
참 참 할말을 잃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알지만,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삶과 맞닿아 있는지,
보다 심층적으로 그리스도의 앎으로 들어가는것이
어떤 것인지 사유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내가 사는 자리에서 부활을 경험한 자로
살기를 소원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의 약속에 저의 삶 전체를 맡기기를 소원합니다.
하지만 저의 소원과는 달리,
저의 삶가운데, 부활과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않고, 삶가운데 그것을 살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함을 압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와의 심층적인 앎을 통해서만 이 삶에 겨우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음을 압니다.

제가 아는 다비아야 말로
인생을 걸고 예수를 믿고,
삶으로서 그리스도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곳으로
골수 예수쟁이들이의 본산지인데…
정목사님은 이들 골수예수쟁이들의 우두머리쯤되시는데…

순둥이님 다시 한번 마음의 문을 열고,
정목사님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profile

[레벨:96]정용섭

April 04, 2008
*.181.51.93

순동이 님,
잘 계시지요?
단도직입적으로
순동이 님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뭐냐 하면요,
자신이 기독교 교리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기독교의 교리(도그마)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전혀 모른 체,
단지 교회에서 들은 정보로만 확신하고 있는 거지요.
그런 신앙생활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건 아니랍니다.
그런 방식으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도 됩니다.
예컨대 바둑을 두면서도
모두가 프로 기사처럼 둬야 하는 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냥 동네 바둑을 두면서 즐겁게 바둑놀이를 하면 된답니다.
그러나 바둑이 늘 동네바둑으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니에요.
프로 기사들은 더 완전한 수를 찾기 위해서 애를 쓴답니다.
그래서 수를 거꾸로도 생각해보지요.
발상의 전환이라는 거 말이지요.
지금 순둥이 님은
바둑 정석 중에서 몇 가지만 남에게 전해 듣고서
그것만을 절대적인 거라고,
또는 그것과 약간 다른 수를 잘못된 것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반복해서 기독교 '정통'을 거론하시는데요,
기독교 정통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다비아는 꾸준히 외치고 있답니다.
그걸 아직도 눈치 채지 못했어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지난 2천년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자고,
때로는 심하다 할 정도로 강하게 주장했는데 말이지요.
순둥이 님이 그렇게 열심히 다비아의 글을 읽었다고 하시면서
다비아가 정통에서 벗어난 거 같다고 말하는 걸 보면,
문자라는 게 근본적으로 소통의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되네요.
한 가지 예만 들께요.
위에서 동정녀 마리아를 거론하셨군요.
그걸 문자적으로 믿는 게 정통일까요,
아니면 그것이 원래 말하려는 실질을 믿는 게 정통일까요?
그 실질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의 몸으로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교리랍니다.
가현설과의 투쟁에서 나온 교리이지요.
다비아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통해서
기독교의 근본을 공부하자는 거에요.
또 다른 예로,
십일조도 교회의 가르침이지요?
그걸 무조건 문자적으로 믿는 게 정통일까요,
아니면 그것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의 실질을 아는 게 정통일까요?
변명 비슷한 말을 마지막으로 해도 되지요?
내가 판넨베르크를 전공했답니다.
그분은 현대 신학자 중에서 가장 정통적인 분이랍니다.
그분의 신학은 교부신학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저의 신학은 8할이 판넨베르크에게서 배운 거에요.
순둥이 님,
무엇이 기독교 정통인지, 근본인지,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사유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보세요.
profile

[레벨:17]까마귀

April 05, 2008
*.151.202.223

복음주의가뭔지에대해서는,맥그라스(McGrath)의책들을참고하시구요.맥그라스는칼바르트를복음주의자로보구요.칼바르트의부활관이나그의신학함에대해서는김명용의개론서를참고하세요.우리한국에서복음주의라고한계짓는것자체가무의미(넌센스)합니다.저개혁주의신학을귀에딱지가생기도록말하는신학교출신이거든요.반틸도엄청봤구요.성령충만이뭔지도말하려면좀알고말하세요.서철원의글도좀읽고말하세요.정목사님의입장을받아들일수없다면,신앙생활그날부터피곤하고힘들어질텐데요.한말씀만더드리죠.한국에서자칭개혁주의신학이란것은"순복음이되고픈데아직되지못한(조용기를따라가고픈데대놓고말할수는없는)불쌍한근본주의"라는것이정확할것같습니다.근본주의하려면생각을갖고제대로하면좋겠지만, "기회주의적"이며 무반성적이기에 "불쌍한"것입니다.기독사랑실천당 보십시오.안녕히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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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늘오늘

April 05, 2008
*.239.101.240

이제 순둥이님이 드릴 기도는 이거야.

아버지, 제게 이런 굳센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지 않거나 못하면서도 기독교인인 체하는 자들과는 다른
바른 전통을,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이어받을 수 있음도 감사하구요.
그들의 유산인 새벽기도와 십일조, 주일성수 등을 통해
하나님과 교류하는 행복을 누리게 하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이렇게 멋진 교리를 바로 믿으라고,
이웃을 권면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모쪼록 제게 힘과 지혜를 주셔서, 이 일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지금은, 다비아에 바른 믿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교묘한 말로 바른 믿음을 흐리는 어리석은 자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아직 순둥이님이 모르는 것이 있어.
나침반의 바늘이 고정되어 있다면, 방향을 가리킬 수 없다는 거.
흔들리고 떨리기에, 어떤 상황에서든 길을 잃지 않는 거야.
고정된 답을 부정한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야.
새벽기도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기도가 멈춘 것이 아니야.
다비아가 추구하는 것은, 구구단 외우기가 아니야.
요동하는 현실세계 앞에서는, 거듭 반성하고 질문하는 과정이 중요한 거야.
암튼, 아닌 걸 아니라고 대드는 기백은 좋았어.
하지만, 늘오늘이 보기엔 어처구니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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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김재남

April 06, 2008
*.185.234.141

순둥이님, 제가 쓸데없는 말을 적어논 것 같아서 삭제합니다.

주일이네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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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1]자유의꿈

April 06, 2008
*.123.2.115

순둥이님,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기 위해선 성경에 앞뒤가 안 맞는 곳이 많기 때문에
그야말로 "무조건" 믿어야 겠죠.

그리고 예전의 저를 포함해서 성경을 문자그대로 믿으려는 분들은
주로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더욱 강조해서 믿습니다.
좋은 뜻으로 보면 하나님(예수님)이 전지전능한 신이시라는 것을 믿는데 집중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정녀탄생이나 출애굽, 예수님의 기적, 이런게 다 이런 범주에 드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이 전지전능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모든 사람들이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더 화끈한 것으로 보여주시지 왜이렇게 찔끔찔끔 하실까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를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성경에 나온 기적 이상의 어떤 것이라도 믿지 못할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동정녀탄생이 아니라 알에서 나왔다고 하시든, 하늘에서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났다고 하시든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그 어떤 걸 못하실까요.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분이시라는 것만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깊이 이해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신이 있다면 전지전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종교심은 그 전지전능한 신이 자기를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는 그 전지전능한 신이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으니
그분의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복을 받았으면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겠죠.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만 집중하면 이러한 관계의 신 인식에만 머무르기가 쉽고
더 나아가 전능한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반드시 동정녀 출생이어야 하고
오병이어가 기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하며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이었죠.
이러한 생각도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에 대한 진정한 믿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전지전능한 신보다 훨씬 더 깊은 분입니다.
전지전능한 위치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인간이 되신 분이죠.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죠.
인간이 되실 때 전지전능한 능력은 그대로 간직한 채 겉모습만 인간이 되셨다고
구유에 오시긴 하셨는데 그래도 동정녀의 몸으로 나셨다고... 하나님께서 정말 그걸 원하셨을까요?
능력을 보여서 구원하길 원하셨다면 뭐하러 인간의 몸으로 오셨을까요?
오히려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분이기에 정말 하나님 아닐까요?
즉, 동정녀 탄생의 핵심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정목사님은 계속 그것에 집중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가 아니라(하나님이 뭘 못하실까요)
오히려 우리가 능력에 집중하느라 잘 보지 못했던(않았던) 하나님의 중요한 본질을 설명하시는 겁니다.

정목사님 설교 중에 예수님의 세가지 시험에 대한 설교가 참 은혜스러웠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한 능력에 집중하라는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고 이겨내신 분이라는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 그분이 아닌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 집중하고자하는 유혹 가운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유혹에 넘어질 때 하나님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 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profile

[레벨:38]새하늘

April 12, 2008
*.126.124.241

오늘 조금 우울했는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세계에 기쁨을 맛봅니다.

한편으로는
설교는 단순히 교양강좌, 심리치료학, 윤리선포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방적인 선포임을 알면서도
이런식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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