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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열립니다!

부활절 조회 수 13242 추천 수 90 2008.04.20 17: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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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도행전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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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4.20. (행 7:54-60)

기독교가 예루살렘과 유대에 한정되지 않고 유럽으로 확산된 역사적 동기 중의 매우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스데파노)의 순교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8장의 설명에 따르면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예루살렘의 기독교는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고, 많은 신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등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흩어진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 여파로 복음은 차츰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일어난 이런 역사의 발전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의 역사가 오히려 복음 전파의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스데반의 순교 사건은 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초기 기독교 전체의,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설명에 따르면 스데반은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정된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히브리파와 헬라파로 구성되었는데, 스데반은 물론 헬라파의 대표자입니다. 스데반은 그 당시 사도들 못지않은 활동을 벌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그의 활동에 대해서 이렇게 전합니다. “스데파노는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을 가득히 받아 백성들 앞에서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들을 행하고 있었다.” 그는 적대자들에 의해서 그는 고소를 당했으며, 당시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의회에서 재판이 벌어졌습니다. 고소인들의 주장은 스데반이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허물고 율법을 뜯어고친다고 스데반이 말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반론이 행 7:1-53절에 나와 있습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 요셉, 모세의 역사를 자세하게 언급한 뒤에 솔로몬에 의해서 건축된 성전까지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서술한 것입니다. 설교의 결론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과거의 역사에서 예언자들을 박해했듯이 그 예언자들이 예언한 예수를 당신들이 죽였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에게서 하느님의 율법을 받고도 그 규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행 7:53)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결과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점을 지적한 셈입니다.
스데반의 변론을 들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은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겠지요. 스데반은 적당하게 눈치를 보고 그런 정도에서 타협을 했으면 좋은데, 더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직감했겠지요. “아,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56절) 스데반의 이런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귀를 막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꺼번에 달려들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쳤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으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59b)  그리고 무릎을 꿇고 다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 스데반은 이 말을 끝으로 숨을 거뒀습니다.

본다는 것
오늘 본문에 따르면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는 걸 보았으며, 그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실제로 지금 세상의 사물을 보는 것과 똑같은 현상일까요?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있었던 바울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행 9:1-19절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일행이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면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바울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하는 대답이 들렸습니다. 바울과 함께 길을 가던 일행들은 하늘로부터 울려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은 부활의 주님을 보았고, 바울은 부활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거나 그의 나타나심을 본 사람들은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이사야 등등, 그걸 제가 일일이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하나님을 본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성서의 보도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그건 스데반이 실제로 하늘이 열리는 걸 본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장면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연극 무대에서 커튼이 열리는 것처럼 하늘이 열린다는 말인지요. 하늘이 열린다는 게 말이 되려면 하늘이 닫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하늘은 닫혀 있지 않습니다. 우주의 하늘은 그대로 뻥 뚫려 있습니다. 이소연 씨가 우주여행을 다녀왔는데요. 그가 하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거나, 하늘의 커튼을 열고 간 게 아닙니다. 하늘은 그냥 늘 그렇게 열려 있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실제 문이나 커튼이 열리는 것 같은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열린다는 말은 비유, 은유(메타포)입니다. 어떤 궁극적인 것을 전하기 위해서 그림처럼 설명하는 문학적 기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도 역시 그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입이 없습니다. 우리처럼 소리로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할 때 한국어, 중국어, 영어 같은 소리로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야겠군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아래와 같은 시를 보십시오.  

한 번도 시를 쓴 일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 늘/ 세상의 말은 실없다/ 하여 다 놓아버리고 토씨 하나/ 마저 죽여, 마침내/ 말의 무덤 같이 허망한 적요/ 위의 파르르 떤 달/ 빛 같이 내려서/ 시인의 몸 안에 들어와서/ 젖어오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이/ 시가 내게 왔다.(오인태의 “시가 내게 왔다”)

오인태 시인은 자기가 한 번도 시를 쓴 일이 없다고 합니다. 시가 자기에게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시인의 이런 경험을 말장난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다른 예는 베토벤입니다. 영화 <카핑 베토벤>에 아래와 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귀가 먹은 베토벤이 합창 교향곡을 작곡하고 연습하면서 필사자인 안타 홀츠에게 한 말입니다.

모두들 내가 침묵 속에 사는 줄 알아. 그렇지 않아. 내 머릿속엔 소리로 가득 차있어. 절대 멈추지 않아. 나의 유일한 위안은 그걸 쓰는 거야. 신이 내 마음을 음악으로 감염시켰어. 그리곤 어떻게 했지? 귀머거리로 만들었어. 내게서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즐거움을 앗아갔어. 내 곡을 듣는 즐거움을. 그게 신의 사랑인가? 친구가 할 짓이냐고?

시인과 작곡가는 모두 언어와 소리의 존재론적 힘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보고, 듣고 있습니다. 시인과 작곡가의 그런 경험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왜 없을까요? 우리가 불평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런 언어와 소리의 세계에 들어갔지만 우리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바로 하나님의 소리를 시인이나 작곡자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들었습니다. 왜 그들에게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우리에게는 말씀하지 않느냐고 불평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건 불평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역할이 있고, 우리의 역할이 있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하는 역할이, 우리는 그것을 전해 듣고 그 말씀에 따라서 사는 역할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다
하늘이 열린다는 스데반의 경험에 대한 누가의 묘사를 보십시오. “이때 스데파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55절) “아, 하늘이 열려 있고...”(56a)가 스데반의 직접 진술이라면 55절은 누가의 간접 진술입니다. 두 구절에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간접 진술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분을 예수님이라고 한 반면에, 직접 진술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이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올 ‘사람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아들’은 묵시문학적인, 즉 종말론적인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그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오른편에 ‘앉아’ 계셨다고 합니다. 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능력을 획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스데반은 마치 하늘이 열리는 그림처럼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은 초기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메시아이며, 하나님이라는 신앙이 그것입니다.
이런 초기 기독교 신앙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늘은 우주 공간의 실제 하늘을 가리키는 건 아닙니다. 고대인들이 하늘에는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가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성서가 말하는 ‘하늘’은 그런 생각에 묶여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늘은 물리적 하늘 공간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아직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궁극적 생명이 자리한 곳을 가리킵니다. 하늘은 은폐된 생명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곳입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스데반의 경험은 바로 이런 세계가 그의 영적의 시야에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그걸 현실적으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보통 때는 숨어 있는 소리가 위대한 작곡가들의 영혼을 통해서 경험되고 드러나듯이 보통 때는 숨어 있는 궁극적인 생명이 순교하는 스데반의 영혼을 통해서 경험되고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실제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군요. 제가 그걸 억지로 이해시킬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모른다고 해서 성서의 증언을 무시하지는 마십시오. 초등학생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한다면 자기의 어리석음만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초등학생이 상대성이론과 같은 수학의 깊이로 들어가려면 어른이 되기를 기다려야 하듯이 우리도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무작정 손을 놓을 수는 없겠지요. 공부하지 않는 학생이라면 어른이 되어도 고급의 수학이론을 이해할 수 없듯이 신앙적인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결국 성서가 말하는 영적인 깊이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이 놀라운 스데반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서 조금씩이라도 신앙적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순례라 할 수 있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모두 그런 훈련과정입니다.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하늘’이라는 성서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생명의 신비에 눈을 떠야 합니다. 신비롭다는 말은 우리의 합리적인 인식으로 모두 해명해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비는 곧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명의 신비라는 것은 곧 생명이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창조라는 뜻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신비로운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보십시오. 4월은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 세계가 완전히 새로운 색깔로 갈아입는 때입니다.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느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세계 자체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한 생명의 탄생도 신비롭습니다. 어머니 배 속에서 사람의 형태로 자라는 모습을 보십시오.
아무리 생명이 신비롭다 하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과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생명의 깊이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과학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생명 현상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미래의 생명 현상에 대해서는 말할 게 별로 없습니다. 1억년 후의 지구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과학자는 없습니다. 과학으로 생명의 실체가 모두 해명된다면 그때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은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여기까지는 자연주의자와 기독교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자연주의자들도 자연에 긷든 생명의 신비를 말하고, 기독교인도 하나님의 창조를 그렇게 봅니다. 그러나 그 뒤가 중요합니다. 기독교인은 자연과 생명의 신비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생명의 궁극적인 깊이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서 성취되었다고 믿는다는 게 기독교 신앙의 특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은 은폐된 생명의 깊이라 할 수 있는 하늘이 열리는 걸 보았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궁극적인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 생명의 완성이 곧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볼 때 발견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완성된 궁극적 생명은 성령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성령이야말로 진리의 영이며, 창조의 영이고, 종말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스데반과 같은 경험을 하기 원한다면 성령의 도움을 간구해야 합니다. 베토벤이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소리의 영감이 그를 도왔기 때문이듯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늘이 열리는 걸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도와두어야 합니다.
아직 그런 경험이 분명하게 주어지지 않을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데반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스데반의 영적 경험을 실질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동의하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이미 스데반과 더불어서 하늘이 열리는 걸 본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이 생명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 앞에 하늘이 열릴 것입니다. 아니, 이미 하늘이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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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김민욱

April 20, 2008
*.49.26.61

예수님에 성취된 궁극적인 생명. 그 깊이로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영적 순례와 같은 제 삶에 주의 은총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 설교 중에 촛불을 잠시 언급하셨는데요, 설교보기에서도 보았지만..
설교 중에 촛불을 켜 놓으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건가요? 아니면...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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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한나

April 22, 2008
*.252.162.8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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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1]자유의꿈

April 23, 2008
*.126.179.228

요즘 읽고 있는 "하나님의 구두"라는 고흐에 관한 책에서
미술작품을 통해서도 동일한 존재론적 체험을 하게됨을 봅니다.
그리고 미술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도 깨닫게 해주네요.

하나님의 구두 1장에서 몇 구절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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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은 우리가 속한 공간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창문은 벽 저 너머를 볼 수 있게 하는 기적이다.
높은 벽을 따라 걷다가 만나는 창문은 푸른 산과 들판으로 우리의 시야를 열어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창문은 이중의 기적이다.
창문은 바깥을 내다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내부 공간을 밝혀줄 빛을 들여오기도 한다.
창문은, 외부 세계 뿐만 아니라 내부 세계도 볼 수 있게 한다.

그림은 창문과 같다. 그림을 통해 우리는 가로막힌 벽 대신 산과 들을 바라보고
우리 영혼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빛을 들여온다.

...

예술의 상징적 힘은 '다른 식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어떤 실재의 차원과 요소들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실재의 차원과 상응하는 우리 영혼의 차원과 요소들을 열어놓는다.
그렇다면 그림은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이자 영혼을 들여다 보는 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창문이 없다면 우리는 외적이든 내적이든 어떤 차원은 보지 못한채 지나치고 말 것이다.

...

고흐 자신도 창문과 그림을 연결지었다. 그림에는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을 깊은 감동으로
물들여 화가와 관람자의 영혼을 활짝 열어젖히는 힘이 있음을 고흐는 알고 있었다.

...

고흐에게 있어 창조적인 예술작품이 지닌 깊이는 세상을 '깊은 감동'으로 물들이고
우리를 인간의 한계 너머로 이끌어 올리는 원천을 표현한다.

...

1300년대의 도미니코회 사제였던 독일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남긴 말은
수세기 동안 수없이 인용되었지만 독자들에게는 난해하기만 하다.

"내가 하느님을 보는 바로 그 눈이 하느님께서 나를 보는 눈이다"

어느 한순간, 어떤 장면을 보고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숨죽여 서 있는 화가를 상상해보라.
그의 모습은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려고 서 있는 모세와 같다. 화가는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가 그 장면을 화폭에 옮겨 담을 수 있다는 것은 저 멀리서 오는 은총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림은 화가가 하느님의 삶을 들여다보는 눈이며, 또한 하느님이 화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눈이다.
고흐는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가끔 놀랄만큼 정신이 맑아짐을 느끼는데, 요즈음에는 자연이 너무나 아름다울 때 그러하다.
그럴 때 나는 더이상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하게 되고, 그림은 꿈처럼 나에게 다가온다."

화가의 눈은 계시, 곧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거룩함을 받아들인다.
화가의 눈은 피조물을 볼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주의 활동도 본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 안에 자신의 영혼을 열어놓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그림을 통해 그의 내적 삶에 빛을 비추어주신다.

그림을 볼 때 우리는 화가가 보았던 계시의 순간에 함께하도록 초대받는다.
그림은 화가가 보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눈을 열어준다.
그림을 주의 깊게 명상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열도록 초대받는다.
그림은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깊은 곳을 바라보시는 눈이 되며, 그 영혼의 깊이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알 듯 모를 듯한 말은 그림을 창문으로 생각한다면 의외로 쉽게 이해된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의 작품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열어준 세상과 영혼을 향한 창문들 덕분에
그는 우리의 영적 안내자가 될 수 있다.
고흐가 바라본 모습들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
놀라울 정도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고흐의 눈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상과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 보는 법을 가르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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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23, 2008
*.181.51.93

자유의꿈 님,
좋은 인용문이네요.
저도 고흐와 같은 예술가의 눈을 부러워합니다.
예술가들은 세상의 신비로 들어설 수 있는
창문을 창조하는 사람들이군요.
지금 제 서재 창문 밖으로 '세상'이 보입니다.
짙은 안개와 같은 봄비가 내리는 세상이 말이지요.
하나님이 만드신 그 세상 안에 내가 들어 있는 거겠지요.
제가 조직신학 강의를 하면서
조직신학은 하나님과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그 문이 하나가 아니지요.
창조의 문, 칭의 문, 성만찬의 문, 종말의 문, 하나님 나라의 문, 부활의 문....
그런 문을 통해서 어딘가로 들어가야 하는 거겠지요.
그 어딘가는 바로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예술가들의 세계 경험과
신학자들의 하나님 경험은 이런 점에서 동일합니다.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신학자로 살아야겠지요.

김민욱 님,
촛불은 예수의 빛, 창조의 빛을 가리킵니다.
일종의 메타포지요.
더 나아가서 성령의 빛이기도 합니다.
예배는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와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우리에게 빛 같은 인식의 눈을 열게 하는 성령에게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가장 경건한 행위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초불을 켜 두는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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