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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성령강림절 조회 수 10328 추천 수 56 2008.08.10 16:4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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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로마서 11: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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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8.10. (롬 11:25-32)

오늘 우리는 2천 년 전 바울이 로마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쓴 편지의 한 토막을 읽었습니다. 이건 단순한 편지가 아닙니다. 편지는 주로 안부를 묻거나 몇 가지 의논해야 할 용건을 설명하지만 바울의 이 편지는 거의 신학적인 문제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체 로마서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대목은 웬만해서는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까다로운 내용입니다.
바울은 25절 처음부터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은 완고하지만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날에는 그 완고한 마음을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날이 언제일까요?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바울은 이어서 26b절에서 “온 이스라엘도 구원받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이방인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바울의 이런 주장은 옳습니까? 언젠가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모든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가 구원받게 될까요?
이런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절실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궁금증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우리의 부모님들도 구원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 말입니다. 더구나 일부러 믿지 않은 게 아니라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냐고 말입니다. 그런 사정이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가장 단적으로는 지금 북한 주민들이 그렇습니다. 또는 다른 종교를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그렇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여기서 살던 사람이나, 지금도 복음을 들을 수 없는 오지에 사는 사람들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모든 이방인과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날이 온다는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도 역시 모두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떤 게 옳습니까? 선택적인 구원인가요, 보편적인 구원인가요? 일부만 구원 받을까요, 모두가 구원받을까요?
또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겁니다. 지금 당장 돈을 벌고, 자식들을 키우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노후를 준비하는 게 급하지, 구원은 무슨 구원이냐고 말입니다. 더구나 선택적 구원이냐, 보편적 구원이냐 하는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지금 예수 믿고 축복 받아서 행복하게 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조금만 우리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러분들에게 바울이 제시하는 신학적 깊이로 들어오라고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영적인 관심은 강요가 아니라 영성이 그쪽으로 열려야만 가능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영적인 관심이 깊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는 이에 관한 바울의 생각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바울은 구원 문제에 관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구약성서를 기록한 그 민족을 가리키고, 이방인은 로마에 사는 기독교인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사람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이방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혈통으로는 유대인, 즉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로마의 직할 식민 도시였던 다소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자랐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신앙 훈련을 받았으면서도 동시에 로마 문명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유대인에 비해서 민족적 정통성이 조금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이나 독일에 사는 제2,3세대 교포들과 한국에 그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떤지를 살펴보면, 그 당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팔레스틴 유대인의 관계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약점을 가진 사람은 오히려 약한 부분을 감추기 위해서 그쪽으로 강하게 나가기 마련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철저하게 유대교 정신으로 무장했습니다. 그런 정신으로 유별나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열혈 유대교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외형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적인 것입니다. 전자는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경험입니다. 그는 그것을 갈라디아서 1:16절과 고린도전서 15:8절에서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후자는 바울이 구원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인 업적(자기)의(義)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稱義)로 돌아선 것입니다. 로마서는 바로 이 칭의에 대한 해명입니다. 신약성서에 들어온 바울의 모든 편지는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례로 롬 5:1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의 바울은 평생 유대교의 업적(자기)의에 매달렸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영적인 자유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누누이 밝히고 있듯이 인간이 결코 율법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율법을 성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방식으로 얻는 의였습니다. 이것은 구원과 의의 토대를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생각입니다. 사람의 불가능성으로부터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좀더 쉽게 이해하려면 소위 ‘탕자의 비유’를 기억해보십시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큰 아들은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고 모범적으로 아버지 곁에서 살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작은 아들보다 큰 아들에게 더 높은 점수를 줘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모두 똑같았습니다. 말썽을 피운 둘째 아들이나 모범적이었던 큰 아들이나 똑같은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금의환향이 아니라 폭삭 망한 꼴로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여러분, 이 비유가 둘째 아들처럼 망나니로 살아도 나중에 회개하기만 하면 괜찮다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아버지의 사랑, 그의 자비로우심입니다. 이 사랑과 자비야말로 바울이 자기의로부터 칭의로 돌아설 수 있는 신학적 근거였습니다.
이런 바울의 신학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바울이 살던 시대의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가 살던 시대의 유대교는 토라와 할례를 금과옥조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들도 그것을 지켰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율법의 핵심인 토라를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 만연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결별하면서까지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론인데, 혁명적인 주장입니다.
바울의 칭의론을 유대인들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들로 불림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수고한 게 정말 많았던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업적을 부정하는 바울의 칭의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격이나 성실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인격이 괜찮아도 자신의 업적이 상대화하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법입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복음적인 칭의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을 오늘 본문에서 ‘완고’하다고(롬 11:25),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다고(롬 11:28)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
바울 당시의 사람들은 바울에게 이렇게 질문했을 겁니다.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고 말입니다. 그들은 구원에서 제외될까요?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정신 차리고 들어야 합니다. 그는 칭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에 한정시키지 않고 인류의 보편 역사에까지 확장시킵니다.
바울은 본문 롬 11:30-32절에서 불순종을 반복해서 지적했습니다. 그 내용을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3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에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순종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의 불순종은 이방인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이 말하는 야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원래 불순종하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얻게 되었습니다.
3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를 받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하나님의 칭의를 거절하지만 이방인이 구원받는 걸 보고 결국 하나님에게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미 25b절에서 언급한 “이방인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날”이라는 진술과 똑같습니다.
32절은 이 대목의 결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처음에는 이방인들이 불순종했으며, 뒤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순종했습니다. 바울의 표현을 잘 보십시오. 그 불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는 겁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하나님은 이집트의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 말만 보면 불순종이 사람들의 책임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바울은 불순종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을 따지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불순종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서 불순종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로 변했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역사가 칭의를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칭의론의 역사적 차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인가요?
칭의의 역사적 차원이라는 말이 어렵게 들리지요? 실제로는 전혀 어려울 게 없습니다. 칭의의 개인적인 차원과 비교해보십시오. 의롭다고 인정받을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 칭의의 개인적인 차원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지속되는 역사도 역시 의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다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역사의 모습만 본다면 우리는 역사의 의로움을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이틀 전에 중국의 베이징에서 제29회 올림픽이 시작되었습니다. 자그마치 205 개국 1만 5천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이번 올림픽은 사상 최대라고 합니다. 세계 평화의 제전이라고 하는 올림픽이 열린 베이징 시내에는 경찰 11만 명과 군 병력 3만4천명 등 최대 150만 명이 투입되어 철통 보안태세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오늘 인류가 외치는 평화의 기초가 얼마나 부실한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올림픽이 시작되는 날 러시아는 그루지야를 향해서 선전포고를 하고, 탱크와 전투기 등, 최첨단 무기를 앞세워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같은 날 대한민국 KBS에서는 수천 명의 경찰병력이 건물 안팎을 장악한 가운데 이사회가 KBS 사장 해임안을 의결했습니다. 경찰과 군인과 전투기와 탱크가 아니면 유지되지 못하는 평화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게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역사에는 여전히 인간의 불순종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것만 본다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도 역시 그랬습니다. 종교적인 불순종을 대표하는 이스라엘도 그렇고, 정치적인 불순종을 대표하는 로마도 역시 그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 너머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을 오히려 구원의 기회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보았습니다. 그런 영적 통찰에서 그는 하나님이 결국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모두 구원한다는 사실을 과감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불순종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로 변한다는 것은 바울이 롬 25a절에서 말하듯이 숨어 있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11:33-36절에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심오하다고 노래합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33절) 이어서 만물의 근원과 종착지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36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구원 섭리의 중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카이로스, kairos)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과 생명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아직은 그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 불순종의 때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과 생명을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때가 되면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와 이 세상과 역사 전체를 의롭게 하실 것이며 구원하실 겁니다. 우리 모두 그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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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머리를 비우고

August 10, 2008
*.117.199.100

평소에 예를 잘 들지 않으시던 목사님도 올림픽을 예로 드셨네요...
1만 5천명을 위해 150만명이 동원되다니.... 놀랍네요...
중국도 이번 올림픽에 사활을 걸고 진행하고 있는데... 이유는 뻔 하지 않습니까?
업적과 승리주의 확산과 그를 통한 부(富)의 축적이겠지요...
그루지야는 푸틴이 베이징에 간 것을 기회로 전쟁을 시작했다는군요...
올림픽이 월드컵과 더불어 지구촌 최대의 돈잔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죠...

이런 시대에 과연 바울처럼 업적(자기)의(義)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稱義)로 돌아서는 것이 가능할까요?
과연 물질과 자기 의가 만연한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생각과 입을 떠나 손과 발까지 얼마나 걸려야 당도하게 될지...
생각해 보면 아득해 보이기만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율법의 핵심인 토라를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 만연했다는 사실을 보면서
그것은 초기 기독교 교회의 일이라고 말 하기엔
그 때나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니 참 슬픕니다.
아니요 오히려 평화와 번영이라는 우상에 매몰되고 교묘하게 포장되어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예외는 아니지요...

바울과 같은 생각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몰입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줄까요?
그것에 과연 자유롭게 천착해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지만...

판넨베르크가 설교했던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그 흑암과 두려움의 때 하나님 경험이...
현실에선 너무 길고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그래도!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31절의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를 받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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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August 11, 2008
*.181.51.93

머리를 님,
요즘 바쁘십니다.
여기 저기 대글을 다시느라구요.
제 설교와 다른 글들이 별 것 아니지만
머리를 님의 대글을 보면서
스폰치처럼 많은 생각을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참으로 신기합니다.
원래 어디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신 분인지 모르겠으나
사전에 어떤 생각이 준비되지 못했으면
제 글이 낮설 것 같은데,
오랜동안 신앙적 대화를 나눈 분처럼 보이니
신기하다는 겁니다.
요즘 판넨베르크의 설교집을 읽고 있군요.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흑암과 두려움이라!
언젠가 그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될 날이 올 겁니다.
거룩한 두려움이지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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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August 13, 2008
*.136.37.162

보편적인 구원.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이것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 같지만
현재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그리고 많은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나중에 예수님께서 모르겠다고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거룩한 두려움으로 자리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누리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것으로 자랑하지 않아야 겠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는 믿으니 구원받고 넌 못받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해봅니다.
당연히 믿어야 의롭고 구원을 받는 것이지만
내가 믿는 믿음이 그냥 내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아들일 믿음이어야 하기에 믿음의 경주를 하여야 하고,
지금 믿지 않는다고 스스로 말하고 누가 봐도 믿지 않는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받아들일 믿음이 그 안에 있을 수도 있고,
종국에는 믿을 수 있기에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는 개개인에게는 단정적으로, 흑백 논리로 말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오늘 설교 말씀을 통해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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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8]정용섭

August 15, 2008
*.181.51.93

눈사람 님,
그렇지요?
구원이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라는 사실을 아는 데서
바로 복음의 깊이와 능력이 드러난답니다.
율법주의는 바로 그 사실을 축소시키고
인간의 자기의를 확대하는 거지요.
이건 기독교 복음의 기초인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현실에서 외면받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명을 완성하실는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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