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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

성령강림절 조회 수 12606 추천 수 30 2008.10.05 15: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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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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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5. (눅 12:13-21)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간섭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한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몫을 따로 받아서 독립하고 싶었을 겁니다. 이런 문제로 서로 입장이 나뉘는 경우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라비에게 송사를 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랍비 칭호를 얻기도 했으니까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한 건 이상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런 재산 분할 사건을 탐욕의 문제로 평가했습니다.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못한다.”
이어서 예수님은 탐욕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예상외의 큰 소출을 얻었습니다. 그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대박이 터진 겁니다. 이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기존의 곡식 창고를 허물고 크게 지어서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흡족한 기분으로 제 영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19절) 노후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셈입니다. 이제는 식도락과 여행과 취미 생활로 여생을 보낼 생각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달콤하고 환상적인 미래를 꿈꾸고 있는 그 부자의 영혼을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이 거둬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가 전혀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셨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나님에게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런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본문에는 두 이야기가 겹쳐 있습니다. 하나는 유산 분할 건으로 인해서 형제 사이에 소송이 벌어진 실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오직 먹고 즐기는 것으로 설계한 부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유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내린 결론은 똑같습니다. 재산(소유)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사람은 결국 생명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는 일에 치중하느라 하나님에게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런 대답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씀을 대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할지 모릅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이 말씀이 원칙적으로 옳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따르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둘째, 혹시 내가 바로 오늘 당장 죽을지도 모를 이 어리석은 부자가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이런 불편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기가 오늘 말씀에 나온 인물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고 나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들은 물질적인 사람들이지만 나는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재물을 밝히는 사람들이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소극적으로만 그렇게 살아갈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선입관 없이 오늘 말씀을 꼼꼼히 읽어보세요. 그들과 우리에게 과연 다른 게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자기 몫의 유산을 챙겨야겠다는 동생의 요구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하겠다는 그의 형이 정말 나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한 게 아니라 자기의 권리를 주장한 것뿐입니다. 그건 율법으로도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요구하지 못하면 오히려 바보 소리를 듣겠지요.
많은 소출을 얻은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도둑질을 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농사를 지은 것입니다. 지금 갖고 있는 창고로는 채울 길이 없어서 큰 창고를 지을 계획을 짰습니다. 사업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벌은 사람이 주식이나 펀드에 기금을 맡긴 것과 비슷합니다. 성공한 CEO라고 해서 매스컴에서 조용히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신앙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런 부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두 인물에게는 별 잘못이 없습니다. 오늘 세상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그들은 오히려 인정받아야 할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이들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나쁜 짓 하지 않고 최소한 양심적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셨습니다. 탐욕 운운하시면서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거나, 오늘 밤 영혼을 불러갈지 모른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경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주님은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말씀에 직면해서 경험하게 되는 심리적인 불안, 또는 주님이 너무 심한 걸 요구한다는 불평이기도 합니다.
이런 심리적인 불안이 반복되면 실제 신앙생활에서 두 가지 극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신앙의 타성에 젖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 본문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너무 물질에 치우쳐서 세속적으로 살지 말라는 가르침이겠지 하고, 일종의 종교적 교양 정도로 간주합니다. 다른 하나는 극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하나님의 징벌만을 생각합니다. 자신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오늘밤에 죽지나 않을는지, 사업이 망하지나 않을는지 하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많이 드려서 그런 불행을 면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힘에 넘칠 정도로 헌금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을 그런 방식으로 선포하는 설교자들도 꽤나 많습니다. 이 양쪽의 신앙은 모두 오늘 본문에 대한 오해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이런 오해를 피하려면 우선 말씀을 오늘 우리의 삶에 근거해서 읽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물질적 요소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이 묘사하고 있듯이 자기 몫의 유산을 물려받겠다는 생각이나 재산을 저장하기 위해서 창고를 늘리겠다는 욕구는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삶의 토대들입니다. 오늘 비정규직이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받겠다고 투쟁하는 것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내국인과 동일한 노동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요구들을 모두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몰아붙인다면 우리는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어리석은 부자를 예로 들면서 주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가르침일까요? 아닙니다. 성서는 비현실인 게 아니라 새로운 현실, 심층적 현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서는 표면적인 생명 현상에 머물지 않고 그 생명의 심층을 말합니다. 어떤 고유한 생명의 깊이를 말합니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거나 어리석은 부자의 영혼을 거둬간다는 주님의 말씀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본문이 전제하고 있는 그 생명의 깊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이를 직접 말하기 전에 먼저 세상이 추구하는 생명 아닌 것들이 무엇인지를 말해야겠습니다. 생명 아닌 것들을 확인하면 결국 생명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 수 있겠지요.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가 추구하는 것이 생명 아닌 것들이었습니다. 그 비유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보십시오. 부자, 많은 소출, 큰 창고, 곡식, 재산, 수년 동안 걱정 없음, 실컷 쉬고, 먹고 마시고 즐김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중심에 놓는 삶이 어떤지를 진지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우선 이런 것들로 우리가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50평짜리 호화주택을 마련하겠다는 평생소원이 이뤄졌다고 합시다. 만족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샘터교회 가족들이 일년 사이에 한 5백 명쯤으로 늘었다고 합시다. 기독교 신문에 나겠지요. 우리가 거기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뭔가 생명에 들어간 것처럼 느끼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런 것들은 아주 가벼운 일상으로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이런 것에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 못지않게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조건들이 별로 탄탄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돈은 두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젊음도 역시 뜨거운 여름철이 지나고 금세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듯이 쉽게 지나갑니다. 우리의 생명을 확인해줄 것으로 믿었던 것들의 토대가 탄탄하지 않다면 결국 그것들은 거짓 생명입니다. 세상은 그런 거짓 생명에 아름다운 무늬를 입히고 세련되게 포장해서 우리에게 소유하도록 유혹합니다.
위의 설교를 세상살이는 헛되고 헛되니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오해하는 겁니다. 비록 쏜살같이 흘러가는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의 삶은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허무주의로 빠져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고되다 하더라도 목숨을 끊는 일은 기독교 신앙에서 불가능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최진실 씨가 자살했습니다. 교회에 다닌 분이더군요. 새벽기도회도 아이들을 데리고 종종 나왔다고 합니다. 장례도 기독교식으로 치렀습니다. 아주 당찬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그분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자살사건을 제삼자가 이러쿵저러쿵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독교 신앙은 삶을 스스로 파괴하지 않는다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원칙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비록 헛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는 우리의 생명이지만 그것을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명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 사실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한 가지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말에 실감이 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내 생명은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내가 밥을 먹고 사니까 내가 주인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5분만 멈추면 죽을 수밖에 없는 숨을 생각해보세요. 지구의 공기를 여러분이 만들어서 숨을 쉬고 있나요? 지구에 탄소가 없으면 모든 생명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생명의 토대를 우리 내부에 갖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외부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생명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창조자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에게 부요한 자
저는 위에서 생명이 아닌 것들이 무엇인지,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문제는 생명 아닌 것들에 모든 관심을 기울인 반면에 생명의 주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삶은 결국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여러분이 저의 설교를 듣기 전에 본문을 읽으면서 이미 이해하고 있던 내용일 겁니다. 이 말씀을 이런 정도로 받아들인 채 살아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을 위해서 재물을 모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부요한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서 근본적으로 생명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를 다시 보십시오. 그는 노후 걱정 없을 정도로 모든 걸 갖췄으니 행복하게 사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양심적이기도 하고, 도덕적이기도 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생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자기 안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에게만 집중했습니다. 성서는 이것을 바로 죄라고 말합니다.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 말입니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과 단절시킵니다. 그것은 곧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에게 부요하다는 것은 자기 집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초월입니다. 일단 그렇게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가 피하려야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에게 몰입해버리면 마치 눈가리개로 두 눈을 가린 사람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거꾸로 자기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햇살처럼 내리비추는 걸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집중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저도 그게 잘 안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는 한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실존적 부조리입니다. 참된 생명을 얻으려면 죄, 즉 자기집중에서 자유로워야 하는데, 죽지 않으면 여기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됩니다. 우리가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이런 부조리를 알고 있으신가요? 그걸 실제로 전체 실존으로 받아들이고 있으신가요?
그걸 아는 분들은 그 대답까지 알고 있겠지요.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아직은 살아 있으니 실제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더불어 죽었습니다. 이렇게 죽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점점 자기집중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생명으로 완전히 휩싸여서 자신도 예상하지 못하는 생명의 현실을, 그 깊이를, 그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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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둘로스

October 05, 2008
*.38.185.156

아멘...자기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며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입니다. 성령이여 도우소서!
고00 변호사의 성공기를 읽고 주눅이 들었습니다. 1년에 하나씩 3대고시(사법,행정,외무고시)를 수석,차석으로 합격하고 그 해 S대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입지전적의 이야기..롤모델을 삼고자 그의 홈피에는 4만명 가까운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고 지금도 방송인, 대학교수, 변호사활동 등. 남들은 한가지도 행하기 버거운 것을 해내는 초능력의 사람. 물론, 인간이 노력하면 어디까지 성취할 수 있나 보여주는 사례로서 또는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살아간다는 점에서 본받을만하나 웬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질투심인지, 열등의식인지 모르겠으나 참된 생명의 흐름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애착으로부터 벗어나서 겸손과 낮아짐을 통해 참 생명의 길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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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October 05, 2008
*.109.58.138

'하나님을 피하는 유일한 자리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니요!
자기 집중이 죄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오늘 말씀으로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되고
내게 달라붙은 집중의 오물들이
또다시 선명해 집니다.
이런 현상이
자기 집중에서 점점 벗어 나는 일이라
희망해야 하나요
아님,다람쥐 쳇바퀴다
절망해야 하나요
오늘,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는
지리한 상념이 내게서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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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October 05, 2008
*.164.230.58

다비아의 글들을 읽으면서
자기집중, 자기연민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집중이 죄라고 하는데
이 자기집중에서 벗어난다는 게 과연 가능한 건지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집중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더 자기에게로 빠져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다른 길이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 길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싫어했는지도 모르구요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생명이 과연 무엇인지
무엇으로 다가와 예상하지 못한 생명의 현실? 깊이?, 신비?를 경험하게 될지를요
아직 모르는게 많으니까 목사님이 강조하시는 기본적인 인문학 공부에 매진해야겠어요
목사님 설교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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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5, 2008
*.181.51.93

둘로스 님,
평화로운 주일 밤입니다.
겸손과 낮아짐을 통한 생명이라고 하셨군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만 그것 자체도 신경을 덜 쓰는 쪽으로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지요?
고 ㅇㅇ 변호사 이야기는 제가 잘 모르는 이야기군요
좋은 한 주간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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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5, 2008
*.181.51.93

시와그림 님,
이것 참 허탈하네요.
나는 40년 동안의 신앙생활과 35년 동안의 신학공부를 통해서
겨우 깨닫게된 "하나님을 피하는 유일한 자리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영적 깊이를
이렇게 한방에 날려버리다니요. ㅎㅎ
지금 시와그림 님에게 필요한 글읽기는
신비주의 영성가들과 신학자들의 책이군요.
배움의 희열을 분명히 느낄 겁니다.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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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5, 2008
*.181.51.93

이선영 청년,
내 큰 딸보다 어린 청년이
이렇게 근본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다니,
참으로 기특하고 예뻐 보이네요.
십자가, 부활, 세례, 성례전, 생명, 그 깊이와 신비 등등,
이런 단어들이 낯설어요?
그 이유는 두 가지 중의 하나에요.
아예 이런 단어를 처음 들었거나,
아니면 이전에 쓰긴 했지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나요.
만약 지금의 그 나이에 이런 개념들이 선명하게 잡힌다면
위대한 사상가가 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인문학적) 사유가 뭔지를 잘 모르는 거지요.
이런 것에 대해서 이선영 청년이 이렇게 일찌감치 눈을 뜨기 시작했다면
그렇게 멀지 않아서 손에 잡히는 게 있을 거에요.
어느날 갑자기 언어가 자기에게 말을 거는 경험을 하는 시인처럼이요.
중간에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그 길을 가 보세요.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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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October 06, 2008
*.234.121.208

어제는 체육대회를 갔다가, 몸이 계속 좋지 않은데 거기 있으면 짬밥도 안되고 해서 계속 뛰어야 할 것 같아서 맡은 일 다른 분한테 부탁드리고 먼저 집에 오려고 하다가, 마침 시간이 샘터교회 예배시간에 딱 맞을 것 같아서 고민없이 그 쪽으로 향했습니다.

역시나 목사님 설교 말씀 듣고 돌아오는 길과 오늘 일하러 나오는 순간까지 많은 되새김이 되었습니다. 물질이란 것이 없이는, 또한 자기 자신, 자아란 것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나의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그 물질에 매몰되어서는, 또한 자기 자신에게 자아에게 빠져버려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다는 엄연한 진리 앞에서 결단해야 함을 깊이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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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삶에서..

October 06, 2008
*.140.184.51

기존의 교회에서 들었던 죄라는 것과 다비아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들었던 죄에 대한 차이에 대해
요새 생각하고 있던 차에 설교로 조금 이런 것들을 풀어주셨네요..
다비아에서 놀다보면(??) 자기집중, 자기연민이라는 단어로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죄를 이해하게 되는데
또, 한편으로는 죄와 죄의 결과를 구분해서 설명하는 일종의 목사님의 조직신학 죄론(??)에 대한 용어가
아직 제게 확~ 와닿지 않아서 그런데요. 기회가되면 죄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풀어서 설명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이미 올리신 글이 있으시다면 갈쳐주시면 감사하구요~
요새 죄와 죄의 결과, 조직신학 책들을 통해서 보는 죄론을 봐도 정리가 잘 안되고 어렵기만 합니다.
아마도 교회에서 말하는 죄가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이 말하는 죄와 너무 동떨어져있기 때문일거라
생각하며 위안을 얻고 있긴 하지만요..
암튼 오늘 설교는 생명인데 왜 생명앞에 저는 죄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네요..
설교가 참 좋은데요.. 목사님 댓글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해보신적은 없죠??ㅋㅋ
전 목사님 댓글이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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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김바울

October 06, 2008
*.95.255.66

반갑습니다.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의 어제 설교말씀은 로마서 8장1절 ~ 17절까지 였습니다.
장 제목이 <영에 의한 생명>이었지요.
인간이 육을 쫓아가면 죽음에 이르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있는 영을 쫓아가면 생명을 얻는다, 는 사도 바울의 훈육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마지막 1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느낀다면, 함께 그 영광을 받는다", 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감히 나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당당히(?) 외치던 나는 정말로 무지했던 게 아닌가?, 라고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인간을 향한 그 연민의 고통을, 감히 내가 <함께>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짐작키 어려운 그리스도의 고통을 훈육하려고 애쓴 사도 바울의 신음을, 내가 감히 <함께>했다?
신앙적으로는 그 누구도보다도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기도로 신음하였든데, 내가 감히 루터의 고통과 <함께>했다?
애당초, <함께>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생각됩니다.
허나, "믿음으로 義롭게 되리라"는 사도 바울의 외침에 응답한 신앙의 선배인 마르틴 루터의 덕택으로 내가 감히 프로테스탄트 되었으니,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에 신음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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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선비다움

October 07, 2008
*.24.143.253

목사님의 설교를 보고 있노라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 장면이 오버랩되는군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막8:34-35)

자기부인-죽음-삶

결국 하나님에게 연결된 삶만이 생명의 길을 갈수 있겠군요.
생명이 하나님임을 꾸준히 배우며 천착하고 싶습니다.
좋은 설교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의 설교엔 항상 절제의 덕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림의 여백처럼 말입니다.
말씀의 울림이 제 영혼에 진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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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October 07, 2008
*.136.37.162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저도 함께 죽어야만이
예수님의 부활이 저에게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에 반하는 자신의 주관적인 행위이므로
절대 용납되어질 수 없는 생명 파괴 행위이겠지요.

저는 근자의 자살 상황을 보면서
그들이 다녔다는 교회의 목회자나 친하게 지냈던 성도들이 순간 원망스러웠습니다.
물론 그들도 어찌 할 수 없었을지 모르나
성경말씀을 좀더 하나님 말씀답게 알려주므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 무엇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져야 하는 것인가를 알도록 해줬어야 하는데

세상적인 것들에 붙들려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리면 그 상황들이 해결될 것이라고만 말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속이 상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했던 바울과 그 바울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를 알려줬다면
좀 더 다른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전 다비아를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지 하나씩 깊게 배워가며
저의 영성이 어떠한 체험의 효과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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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8, 2008
*.181.51.93

위 대글의 답글로 어느 불교학자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키요자와 반시(1863-1909)는 40세에 타계한 진종불교에 속한 승려였는데,
그의 짧은 일곱편의 글을 편집한 하세다 노부오가 쓴 머릿말 중에서 일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진종불교의 깨우침이 위 설교의 중심과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키요자와의 글을 읽다보면 그도 타력적 신앙에 기울어져 있더군요.
일반적으로 불교는 자력 종교라고 하지만
모든 불교종파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자유가 키요자와 사상의 핵심이라면 고전 불교에서 그것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는 자신의 삶이 苦라는 사실을 알고
무엇인 고의 원인인지 탐색해보았다.
오랫동안 계속된 힘든 과정 끝에 그는 고의 원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또는 자아를 고정되고 영원한 실체로 여기려는 성향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인간을 괴롭히는 고의 바탕이 되는 원인이 고정된 자아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에 있음을 보았다.
또한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바뀌는 무상(anicca)의 진리가 이 세계의 유일한 절대 진리임을 깨달았다.
바깥의 사물과 사람들이 반드시 자기의 기대에 맞추어서 움직여주지는 않기 때문에
그것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그에게 고통과 부자유를 안겨주는 것이다.
마침내 석가모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 때문에,
그러니까 눈 먼 자기 집착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는 또한 사람이 그릇된 자기 집착에서 깨어날 때
거기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보았다.
사람이 자기를 고집하는 한, 자기 집착에 머물러 있게 되고,
그것을 불가피하게 고통과 부자유를 그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자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대답은 이것이다. 자기 부정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불교는 자기 부정이 실천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왜냐하면 자아가 부정에 항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아는 자아를 부정하지 못한다.
오직 법(Dharma)만이,
즉 무상의 진리만이 자아를 부정하고 우리를 해방실 수 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법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무엇의 형태를 취하여
우리의 자아에 도전하고 그것을 무너뜨린다.
법은 스승의 모습을 취하기도 하고, 가르침, 또는 경험의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그 모습이야 어떠하든 간에,
우리의 자아와 법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필요불가결하니,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참 본질을 통찰하게 되고
그리하여 고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요자와 만시의 불교에세이, 겨울부채, 하네다 노부오 편집, 이현주 역,
이 책은 박찬선 군으로부터 선물로 받았음.
고로 위의 내용으로 시험받는 분들에 대한 모든 책임은
그에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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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October 08, 2008
*.136.37.162

부처님은 사람이 살면서 타파해야할 네가지 상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타파하기 힘든 것이 "아상"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상이라고 말했지요.
아상이 무너질 때 그것을 해탈의 경지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아상을 무너뜨리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해탈을 하고 나니 자기 자신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없는 것이라는 "무의 경지"에 이르렀지요.
그래서 "내가 없으니 지금까지 내가 한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전 금강경을 읽고 이러한 불교의 진리(엄밀히 말하면 부처님이 가르치고자 한 진정한 진리)가
"제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했고

좀 더 나아가 (기독교 중심적이라 말할 분들이 계실지는 모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가 곧 기독교에서는 시작점이 된다고 생각이 되었었습니다.
절에 다니시는 분들도 정말 열심히 다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하면
그 분들께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단지 그 분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힘든 이유는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서 이끌어 오려 하지 않는 저희들이나
무조건 기독교라면 불교와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 분들이나 모두 가지고 있는 서로에 대한 배타성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전 바을울 좋아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들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은 그 중에 한 명이라도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다" 라고 말씀하신 바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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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October 08, 2008
*.234.121.208

아... 왠지 모를 내용적 공명이랄까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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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9, 2008
*.181.51.93

제가 위에서 인용한 하네다 노부오의 머릿말 말입니다.
<오직 법(Dharma)만이,
즉 무상의 진리만이 자아를 부정하고 우리를 해방실 수 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에서
무상의 진리는 혹시 "무상하지 않은 진리"가 아닐는지요.
내가 자판을 잘못 두드렸나 해서 확인해보니
그대로군요.
그렇다면 이런 일이 벌어진 가능성은 세 가지 중의 하나에요.
1. 하네다 노부오가 뭔가를 잘못 썼다.
2. 역자인 이현주 목사가 오역했다.
3. 무상의 진리로 해석되는 다르마라는 단어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여러분은 어디에 내기를 걸겠어요?
불교 사상에 대해서 아는 분이 있으면 설명해주세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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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October 10, 2008
*.163.75.135

목사님. 불교는 잘 모르지만 저는 3번에 겁니다.
다르마라는 뜻을 생각하면 무상의 진리에서 무상은 無常(덧없음)이 아닌
더 이상의 진리가 없는, 비할 수 없는 최상의 진리의 뜻인 無上의 진리가 맞구요.

다르마가 힌두교에서는 우주존재의 법칙, 생명의 본질을 뜻하고
이것은 불교에 와서 법보로 발전했구요.
그리고 그 법보를 풀이한 석가세존의 설법도 다르마라고도 한다더군요.
힌두교의 아류인 자이나교, 시크교에서도 다르마는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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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October 10, 2008
*.234.121.208

"어디에 비할 바 없이 크고 바른 깨달음"인 "아눗다라삼먁삼보리"가 한자로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으로 이야기 하는데, 여기에서 "무상" 과도 같은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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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October 10, 2008
*.136.37.162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무상의 상과 제가 말씀드린 네가지 상의 상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무상정등정각에서의 무상은 satya님께서 말씀하신것처럼 최상이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네가지 상이 무상정등적각에 이르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아주 큰 장애물이라는 것이지요.
이 네가지 상을 버릴 수 있다면 즉 이 네가지 상을 다 버린 무의 경지에 이른다면
무상정등정각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은 이 네가지 상이 없으면 부처라고 했습니다.
이 네가지 상 중에 아상을 버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인데(그 이유는 자명하겠지요.)
아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우월의식과 교만을 자아냅니다.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지요.
도덕적으로도 흠잡을데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아상을 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자신을 다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자기부인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되는 이유입니다.
아상을 비롯한 네가지 상을 떨쳐버려야 실상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 非相 卽見如來)
무릇 있는바의 상은 모두다 허망하나니, 만약 모든 상을보되 상이 아니었음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게되리라"
상이 없어진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닌 진정한 상을 볼 수 있는 상태로 되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의지 하지 않고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저희와 사상적으로는 맥을 같이 하지요.
단지 저희는 하나님이라는 분이 계시고 불교에는 아무도 안계신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당연히 엄청난 차이를 내겠지요.
금강경이 불교의 정수라 하기에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요.
좋은 말 정말 많이 써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이 많이 써있고, 깨닫고, 별 짓 다한다해도 인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만이 답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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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October 10, 2008
*.136.37.162

써놓고 보니 다 아시고 계시는 것을 써놓은 것 같아 죄송하네요. 에궁..
삭제하기도 좀 뭐하고 그래서 그냥 놔두렵니다.
불교에 대해서 거의 모릅니다.
맛만 본거고 제가 본 맛이 아주 극히 일부일 것이기에 무어라 말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습니다.
제가 무리수를 두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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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October 10, 2008
*.136.37.162

수정 기능이 없어서 댓글로 다네요.
키요자와가 말한 자기 집착에서의 벗어남이 아상을 버리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키요자와는 "오직 법(Dharma)만이, 즉 무상의 진리만이 자아를 부정하고 우리를 해방실 수 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 라고 했는데
법은 자연계의 법칙, 인간계의 질서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후에 ‘인간의 행위’의 규정으로 사용되어, 법칙·질서의 의미 외에 정당(正當)·정의(正義)로 변하여, 권리(權利)의 관념 및 의무(義務)·규범(規範)과 같은 뜻이 첨가되었다고 합니다.
이 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고 합니다.
① 인(因:hetu):올바른 인과(因果) 관계로 합리성·진리를 가리킨다. 이것은 규칙·법칙 등의 의미와도 상통한다. ② 덕(德:gua):인간이 지켜야 할 정도, 즉 윤리성을 가리킨다
③ 가르침(敎:āsana):특히 불법(佛法) 즉 석가의 가르침을 말한다. 불법은 합리성·윤리성이 있어 이상(理想)·궤범(軌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제1·제2의 의미도 당연히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④ 사물(事物):일체법(一切法) ·제법무아(諸法無我)·법성(法性) 등이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다. 후에 아비달마(阿毘達磨) 철학에서는 ‘독자의 성질[自性]’ 또는 ‘존재의 본질[自相]’을 유지하기 때문에 법이라 한다고 정의하여, 법을 실체(實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사물을 실체로 보는 데 반대하여 법공(法空) 또는 법무아(法無我)를 주장한다.

이것에 의하면 키요자와의 말이 저에게는 율법이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말로 들려집니다..(제가 이해력이 부족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자아를 부정할 수 있다는.. 자아는 자아를 부정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제가 지금 뭔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설교하신 내용과 아무 관계도 없는 말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저리 주저리.. 젓비린내가 저에게서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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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0, 2008
*.181.51.93

많이 배웠습니다.
Dharma가 뭐냐 하는 게 핵심인데요.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오직 법(法, the Dharma)만이, 무상(無常)의 진리만이
'자아(the Self)를 부정하고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8쪽)
無上이냐 無常이냐, 이게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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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자유의꿈

October 11, 2008
*.23.169.182

댓글이 많이 달린 걸 보고서야 뒤늦개 설교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역시 댓글의 러쉬를 일으킬 만큼 귀한 말씀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만약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불교가 진리이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력이던 타력이던 결국 자아의 해방이라는 목적에서 출발해서는
자아를 부정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피하는 유일한 자리가 자기자신이라는 말씀은 자기집중의 본질을 보여주지만
말씀하신대로 자신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은총에서 피할 수 없게 되겠지요.
아니 하나님의 은총에 젖어듦으로써 자기자신에서 점점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진정한 생명의 세계로 눈을 열어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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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October 11, 2008
*.152.195.156

야심한 밤인데 자려고 하다가 댓글을 아니 달 수가 없어서 컴을 새로 켰어요.
"자기집중"이란 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을 해왔었는데, 그게 왜 죄인가...
오늘 꺠달아지는 게 있어서요.
그동안 뭔가를 이루어야 하고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에 저도 모르게 시달려왔었는데
일테면 하루를 살아도 시간을 쪼개서 뭔가 가치있다고 여기는 일을 해야 덜 불안하고..등등
언제부턴가 편안해져 가는 자신을 봤습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면 어떠랴..
해 아래서 하루하루를 산다는 신비를 느끼며 감사하면 되지. 싶어지더군요,
그 뿌리를 아무리 살펴봐도 어떤 게으름이 아니라서 편안했었는데
결국 자기집중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는 꺠달음! 그게 이 밤에 목사님 설교문을 읽으면서
선명히 다가와서 기쁩니다.
이걸로 너무 좋아하면 이것 또한 자기집중인가요? ㅎㅎ
암튼 제가 그동안 생명 아닌 것들에 집착했다는 사실.
이제 진정한 생명의 세계에 발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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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1, 2008
*.181.51.93

자유의꿈 님,
특별한 설교도 아니에요.
생각이 있는 신자들이라고 하면 대개 알고 있는 거를
조금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뿐이지요.
은총이 빛이 우리의 삶을 비추고 있지만
그걸 외면 하는 우리가 문제네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비밀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우리에게 많은 생각과 믿음을 요구하는 것 같네요.
멀리서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를....
profile

[레벨:100]정용섭

October 11, 2008
*.181.51.93

웃겨 님,
"선명하게 다가와서" 기쁘다고 하셨군요.
다행입니다.
그런 건 옆에서 아무리 설명해줘도 잘 안 되는 건데요.
깨달음은 홀연히 옵니다.
그러다가 또 홀연히 사라지지요.
가을의 숲속에 낀 안개를
단숨에 걷어낼 비책은 없으니
태양이 솟아오를 때까지 긴 호흡으로 기다리는 게 최선이겠지요.
그래도 안개가 눈에 익으면 그 안에서나마
사물이 또렷하게 들어오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런 게 아닐는지요.
이제 과제물을 하나 드릴께요.
자기집중이라는 말을 오래 생각했다고 하는데,
이제 잊어버리세요.
자기집중마저 그냥 받아들여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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