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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성령강림절 조회 수 10139 추천 수 16 2008.11.02 19: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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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24: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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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여호수아 24:16-28)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장을 읽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끌고 들어간 위대한 인물입니다. 이 두 사람은 고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중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보다 역사적으로 앞서는 족장들은 그야말로 씨족의 우두머리에 불과합니다. 이에 반해 모세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전체를 이끈 인물들입니다. 이들보다 역사적으로 뒤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할 때 일시적으로 지도력을 행사하는데 그쳤지만, 모세와 여호수아는 항시적으로 지도력을 행사했습니다. 왕정시대의 왕은 단지 정치적인 지도력만 확보했고 예언자들은 종교적인 지도력에 머물렀지만 이들은 이 두 가지 지도력을 모두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따라갈 인물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운명적으로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고 나와 홍해를 건넌 뒤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가나안을 목전에 둔 요단강 동편에서 죽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마치 모세가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넌 것처럼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넌 뒤 가나안을 정복해 나가는 중에 미처 그 과업을 마치지 못한 채 죽습니다. 모세는 죽기 직전에 백성들에게 연설을 합니다. 그게 신명기입니다. 여호수아도 죽기 직전에 연설을 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여호수아서 24장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기록했다면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율법을 기록했습니다.(수 24:25,26)

세겜의 약속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장로, 수령, 재판장, 관리들을 세겜에 불러 모아 놓고(수 24:1)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를 거쳐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다루는 내용입니다. 여호수아가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삶을 지켜주셨다는 겁니다.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수 24:13) 처음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부터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가나안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의 긴 역사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들이 모두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한 뒤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이방신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 이방신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입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제국의 신, 그리고 가나안 원주민의 신입니다. 만약 여호와를 섬기고 싶지 않다면 이방신들을 섬겨도 좋다고 했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선택하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수 24:16-18절에서 그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이유를 그들은 두 가지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입니다. 이 두 사건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과 연결됩니다. 이 두 세계와의 관계를 끊는 것만이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백성들의 대답을 들은 여호수아는 예상 밖의 말을 합니다. 19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앞에서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이방신을 선택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하더니 여호와를 따르겠다고 나선 백성들의 고백과 결단을 완전히 무시하는 말을 합니다. 당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도저히 섬길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에 대한 여호수아의 해명이 아주 특이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며 질투하신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 신앙의 정체이며 본질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굉장히 혼란스러울 겁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능히 섬길 수 없다면 여호수아는 왜 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설교하는 걸까요? 이율배반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한 거룩과 질투가 연결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호수아가 전하는 하나님은 용서에 아주 인색하신 분처럼 보입니다. 이 모든 질문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이미 여러분들이 조금 눈치 채고 있을 테니, 제가 여기서 그것에 관해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지금 여호수아의 설교를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형편에 처했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거기에 이 모든 질문의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그들에게 설교하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은 가나안에 정착해서 생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떡 버티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의 차원에서만 본다면,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으로 준 땅이니 비켜달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고 정당하지도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도 이미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출애굽 이후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비켜달라는 말은 가나안에서 씨도 먹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힘으로 빼앗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이 여호수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침략한 사건을 비롯해서 열 두 지파의 땅 분배가 모든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으로 가나안 부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이런 기록만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쉽게, 그게 아니라도 결국 모두 몰아낸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대 왕정시대에도 가나안에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여러 부족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솔로몬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라가 갈라진 것도 역시 여기에 살고 있던 여러 부족들의 힘들이 가세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가나안 부족들은 문화적으로 군사적으로도 이스라엘보다 강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힘으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말로도 안 되고, 힘으로 안 된다면, 또한 자기들이 살만한 다른 장소를 구할 수 없다면 결국 함께 어울려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가장 좋은 길인데 가나안의 현실 역사에서는 불가능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세겜이 이런 점에서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장소이기는 하지만, 야곱의 딸 디나가 성폭력을 당한 뒤 그의 오빠들이 그곳 부족 사람을 집단 살해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한 시도 평화롭게 살지 못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가나안 원주민과 주변의 제국을 몰아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들과 평화롭게 살지도 못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들의 역사는 왜 이리도 기구할까요?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들을 가리켜 신명기학파라고 합니다.
신명기사가, 또는 그 학파는 기원전 620년경부터 활동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여호수와서도 바로 이 신명기사가의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와의 실제 활동시기와 신명기사가의 활동시기 사이에는 대략 6백년의 차이가 납니다. 여호수아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은 형식적으로는 기원전 1천2백 년 전 세겜 계약이 이뤄지던 시대의 사람들이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6세기의 사람들입니다. 기원전 6세기는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바벨론 유배, 그리고 귀환이라는 엄청난 사건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난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근본 문제가 뭐냐 하고 질문을 하고, 이제 여호수아의 입을 통해서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질투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철석같이 다짐하고 약속했지만, 이것이 기록된 기원전 6세기의 관점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말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결혼할 때 오직 당신 한 사람만을 나의 아내, 나의 남편으로 사랑하겠다고 다짐하지만 30년 흐른 뒤에 보니 계속해서 한눈을 판 사람과 비슷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능력이 없다고 단언했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게 흔들리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구나, 하고 쉽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성전 제사를 지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는 신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지는 않지만, 가나안의 신을 겸해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간혹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가나안 신의 형상이 놓이곤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게 가능하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그게 가능합니다. 그것을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신명기사가 앞에 놓인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혼합주의였습니다.
신앙적 혼합주의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 이미 물량주의가 신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맘모니즘입니다. 기복주의는 성전의 지성소를 차지했으며, 주술이 신앙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교권이 생명의 영을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율법이 복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가 세속의 질서에 영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면, 오늘 한국교회와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고 있습니다.(마 6:24) 무슨 말인가요? 예수 축복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예수 믿으면 출세하고 돈 벌고 시집 장가 잘 간다고, 십일조 헌금 드리면 물질적인 축복을 반드시 받는다고,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손해를 본다고 외칩니다. <야베스의 기도>, <긍정의 힘>, <잘되는 나>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의 구체적인 예를 들 필요는 없겠지요. 이것은 모두 혼합주의입니다. 오직 하나님에만 마음을 두기에는 불안하여 바벨론, 이집트, 가나안 신을 겸하여 섬기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이라면 세상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오직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수도승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야,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삶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예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산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기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든지 우리 마음의 중심에 누가 자리하고 있냐 하는 겁니다. 우리의 생명을 누가 보장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신자들은 말로는 하나님이라고 하겠지만, 실제로 그럴까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와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름과 형상이 없는 하나님, 구체적인 복지를 제공하지 않는 하나님에게만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풍년과 다산을 보장하는 가나안의 신을 겸해서 섬겼습니다. 가나안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에서 삶의 기쁨을 찾아보려고 쉬지 않고 기웃거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고 신명기사가가 증언합니다. 그 증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질투는 한 남자가 한 눈을 팔 때 여자들이 느끼는 분노를 가리킵니다. 물론 남자들에게서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어디 인간처럼 질투하는 분이겠습니까? 인간은 사랑을 소유로 생각하기에 상대방이 한 눈을 팔 때 질투심에 불타지만 사랑의 근원인 하나님에게 이런 질투는 말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인간 구원의 배타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그 구원의 배타성을 질투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 처소를 옮기고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대구샘터교회가 지난 5년 5개월 동안 지내던 하양읍과 진량읍을 떠나 이제 대구라는 큰 도시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출애굽이나 바벨론 귀환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선택한 소돔일지도 모릅니다. 결과는 시간이 흘러야 알 수 있겠지요.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저는 이렇게 질문하려고 합니다. 혹시 어떻게 해야 교회가 부흥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를 위해서 걱정도 하고 계획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은 질투하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순전하지 못하면 교회를 향한 우리의 모든 열정은 생명을 자기 손으로 이루고야 말겠다는 인간적 욕망에 쉽게 떨어질 수 있습니다.
질투하는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누가 순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을 불안과 두려움에 빠뜨리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린 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질투는 거룩합니다. 그 거룩한 질투는 우리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이며 격정입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외아들 예수를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준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에 휩싸여 생명의 불꽃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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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November 03, 2008
*.109.68.61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대인들의 인식체계의 투사물인
정보와 풍요의 상징적인 신을
섬기던 자들이 아니었던 건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를 체험한
유일한 민족이 되었겠네요
그러나 또한, 고대라는 역사의 척박함과
팔레스타인 지역이라는 공간의 척박함이
그들로 하여금 '신명기 사관'이라는
'창'으로 하나님을 바라 보게 했나 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여전히 성전에 바알과 맘몬이 혼합되어도
'예수의 창'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길 허락하시는 건가요?

예수의 창으로 바라보는
농익는 가을은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뭐하나 뒤쳐지지 않는 생명의 성결함이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를 암시합니다
언제는 물기 먹은 연두 더니
지금은 성숙한 붉은 잎들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격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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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November 03, 2008
*.136.37.162

본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시와 그림님의 글을 읽다보면 어렵기도 하고
시와 그림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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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김바울

November 03, 2008
*.95.255.51

"이 분은 성스러운 하나님이시며 , 열정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만이 베푸실 수 있는 구원의 배타성>
말씀 감사했습니다.

오직 성서만으로, 믿음만으로, 은총만으로.

방문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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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권요안

November 03, 2008
*.62.46.52

이번 달 기독교 사상에 실린 [그날이 오면] 서평을 읽은 다음부터 내내 '비(탈) 신화화'와 '청중의 실종'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 서평을 처음 읽었을 때 그 비판에 공감하면서 과연 그런가 [그날이 오면]을 다시 읽고 난 후 서평을 두번, 세번 읽으면서 처음에 공감했던 비판의 논지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설교를 읽으면서도 '비(탈) 신화화'와 '청중의 실종'이라는 관점만 염두에 두고 읽었는데, 오늘 설교는 이성의 틀을 통한 '비(탈) 신화화'를 통해 여호수아서를 기록한 신명기사가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고, 그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현재 청중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실존적 죄'를 드러냄으로써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도록(회개)' 촉구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서평자의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제 자신은 지적 허영심에서 비롯된 질투에 휩싸여 엉뚱한 곳에서 "삶의 기쁨을 찾아보려고 쉬지 않고 기웃거린" 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 참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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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November 03, 2008
*.181.51.93

위 대글자 님들, 고맙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질투의 광염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랐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 아닌 것들을 제거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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