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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냐, 자녀냐

성탄절 조회 수 12275 추천 수 10 2008.12.29 09:28:19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dawp_081228.mp3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4:1-7 
종이냐, 자녀냐
(롬 16:25-27)

갈라디아서를 쓴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특이하고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열 두 사도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자칭, 타칭 사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이면서, 단지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주장을 근거로 사도로 자칭한다는 게 다른 사도들에게 좋아보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업적으로 본다면 그는 그 어떤 사도보다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신약성서로 묶인 27권의 문서들 중에서 바울의 편지가 10편 내외에 이르고, 오늘 역사적 기독교의 모태가 바로 바울을 태두로 하는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거나, 또는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뛰어난 신학 사상과 신앙적 열정에 놓여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혁명은 사상에서 나오는 것처럼 바울을 중심으로 한 초기 기독교도 그런 길을 걸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최고의 석학이라 할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생으로 뛰어난 유대 학문의 업적을 쌓았고,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 로마 헬라 사상에도 일가를 이룬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신학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은 물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유대교, 헬라 로마 철학, 부활의 주님 경험이 바울이라는 한 인격체 안에서 융합해서 아주 고유하고 독특한 영적 세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 흔적들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토라와 할례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지역의 신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종과 자녀를 대비하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우리 개역개정역으로는 자녀가 아니라 아들로 나옵니다만, 두 단어는 똑같은 의미입니다. 바울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면 이 단락의 결론이라 할 7절 말씀을 읽는 게 좋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여기서 ‘유업을 받을 자’는 헬라어 ‘클레로노모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약속한 것을 받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유업을 받을 자녀들은 집에서 무슨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자녀들에게서 그런 특징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집에 들어와서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그게 지나쳐서 나태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자녀들의 마음은 늘 편안합니다. 그들의 특성은 평안과 자유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자녀라는 사실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요?
바울은 클레로노모스라는 단어를 갈 3:29, 4:1절에서도 사용했습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유업을 받을 자녀로 살지 못하고 오히려 종으로 살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토라와 할례에 연루된 문제였습니다. 원래 갈라디아 신자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복음은 토라와 할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을 떠난 뒤에 갈라디아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서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달리 토라와 할례까지 포함하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저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바울이 이렇게 악담을 쏟아낼 정도로 복음을 변질시킨 이들은 완전히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울과 똑같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따르면 세 종류가 이에 속합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이며, 둘째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파송한 사람들이며, 셋째는 게바, 즉 베드로 및 바나바 파입니다. 이들 중에서 실제로 바울과 가장 격렬하게 대척점에 섰던 사람들인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만 그 핵심이 토라와 할례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초기 기독교의 가장 첨예한 신학적 문제 중의 하나는 토라와 할례였습니다. 이것은 물론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되는 문제였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원래 토라와 할례를 지켰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그런 문제와 아무런 충돌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토라와 할례를 지키지 않던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지키던지 않은지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로부터 그런 압박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의 보도에 따르면 유대로부터 온 기독교인들이 안디옥 기독교인들에게 모세의 법과 할례를 강요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학적 내분에 싸인 안디옥 교회는 바울 및 바나바 일행을 예루살렘에 보내서 사도들의 입장을 듣기로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씌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문제가 이런 공식적인 종교회의로 일단락된 게 아닙니다. 그 뒤로도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 사이에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급기야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이단 논쟁에 버금갈 정도의 신학적 논쟁과 투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토라와 할례 없는 복음이 또 다시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다시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토라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솔깃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바울의 전한 복음만으로는 공동체를 유지해나가기 힘들게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와 구원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체험했고, 자유의 영혼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잘난 척하는 사람도 생기고, 파렴치한 일을 행하는 사람도 생기고, 공동체를 꾸리는 일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로워진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만으로 이런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이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토라와 할례를 전했고, 그것이 그들에게 매우 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토라와 할례는 신자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이끌어주는 규칙들로서 모세의 법, 즉 율법을 말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기준들입니다. 이런 종교적 규칙과 기준들은 개인과 공동체를 일정한 틀 안에 머물게 합니다. 일종의 울타리이며, 안전망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무언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할례도 그렇습니다. 몸에 난 상처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토라와 할례가 있어야만 교회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는 갈라디아 신자들의 생각은 크게 틀린 게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이런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이었습니다.(갈 3:3) 그것은 초등학문에 머무는 것이며, 종노릇하는 것이었습니다.(갈 4:3) 율법에 매달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갈 2:21)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따라야 할 삶의 자세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바울입니까, 아니면 바울과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성수주일과 십일조
누가 옳은지를 오늘 우리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옳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가 기록되던 그 당시에는 상황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보다는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더 큰 힘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이너리티이며 비주류에 속했습니다. 그는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주류 세력으로부터 왕따 비슷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소아시아에서 그를 복음 설교자로 받아주는 공동체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결국 완전히 문이 닫혔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왜 토라와 할례를 거부하는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폭넓게 받아들여졌을까요? 그들의 주장이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되 토라와 할례를 더불어서 준수하자고 했습니다. 그게 구약성서의 약속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고 공동체를 끌어가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속된 말로 누이 놓고 매부 좋은 방법입니다. 바울은 극단적으로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복음에서 점점 멀어지고, 예루살렘에서 파송한 사람들이 전한 복음, 즉 토라와 할례를 겸해서 준수하는 신앙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신앙을 가름하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토라와 할례입니다. 그것이 신자들의 신앙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신앙적 목표가 이 두 가지로 집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안수 집사나 권사, 또는 장로 같은 항존직의 직분을 받으려면 이 항목에 대한 문서에 서약을 해야 합니다. 모든 설교를 끌어가는 내용도 이 두 가지에 집중됩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아서 당한 시련이나, 거꾸로 힘든 형편에서도 주일을 고집스럽게 지켜서 받은 행운이 당연한 것으로 선포됩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으로 매도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성수주일과 십일조 헌금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약간의 성서와 신학적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두 가지 항목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별로 깊은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물론 다르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이 문제 자체에서 대해서 왈가왈부하려는 게 아닙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즉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뿐입니다. 성수주일과 십일조 헌금을 신자의 의무조항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교회가 허물어진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다시 갈라디아 교회로 돌아가 봅시다. 그들의 상황도 똑같았습니다. 그들은 토라와 할례가 없어서 교회의 질서가 흔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허전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언가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에게 계속해서 선물이나 전화 등으로 관심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이제 토라와 할례에 묶여 있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을 자녀라고 외칩니다. 바울의 이런 외침이 공허한가요?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해서 뭔가 다른 것으로 보충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느끼시나요?

자녀의 자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확인해 둬야 할 게 있습니다. 여기서 종은 무책임한 사람이고 자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고 보면 본문을 오해하는 겁니다. 종이 오히려 더 성실합니다. 그 종은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주인을 위해서 성실하게 일합니다.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의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늘 인정을 받습니다. 아마 사회에서도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겠지요.
종은 아무리 성실하다고 해도 종일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종으로 인정받을 뿐이지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녀는 못됩니다. 그 신자가 성실하냐 아니냐 하는 게 아니냐가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새로워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종에서 자녀로 변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처음부터 자녀였지만 아직 어린 상태이기 때문에 누가 돌봐주어야 할 종처럼 살았지만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종의 모습을 완전히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전 13:11절에서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다가 어른이 된 다음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으로 살아가는 삶의 특징은 자유입니다. 사람이 만든 규칙에만 묶이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성령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특징도 역시 자유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외칩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가 된 사람의 자유를,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된 사람의 자유를 말입니다. 그것은 곧 토라와 할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자유만 중요하고 의무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냐, 복음만 중요하고 율법은 무의미하냐고,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자유는 그에 마땅한 책임을 수반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겠지요. 이것은 책임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에 따라오는 것이지 다른 것을 끌어가는 힘이 아닙니다. 헌금을 복과 화로 윽박질러야 헌금을 한다면 그게 무슨 신앙적 행위가 되겠습니까? 성수주일을 의무적으로 강요해야 예배드리러 온다면 그게 무슨 영적인 행위이겠습니까?  
우리 신앙에서 중요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의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영적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할 것이며, 그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신의 책임을 즐겁게 담당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2009년에 바로 이 사실에 더 집중하십시오. 여러분은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2008.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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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dol

December 29, 2008
*.225.121.6

신앙 생활을 하는 데 가시적인 '무엇'이 필요한가?

결론은' 필요하지 않다'겠지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만 있다면 자유로운 영혼으로 책임감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삶으로 표출되기는 왜 그렇게 힘들까요.

복음이 선포되고 성령체험과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게 된 갈라디아 교회였지만
'잘난 척하는 사람도 생기고, 파렴치한 일을 행하는 사람도 생기고, 공동체를 꾸리는 일에 무관심한 사람들'의
실제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토라와 할례가 필요했다.

자녀로서의 자유로운 영혼과 실제적 삶 사이에 어떤 괴리감이 있을까요.
신앙함이란 그런 괴리감을 줄여나가는 과정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역시나...
자녀로서의 정체성 확립일거 같군요.ㅡ_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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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캔디

December 29, 2008
*.129.46.136

목사님!
저는 어제오늘 사이
제 딸들에게
당(?)하고 있습니다.^^*

엄마! 우리가 집에서
조금! 아니 많이 나태하더라도
신경전 벌이지 말자고요!
우리는 종이 아니고 자녀예요 자녀!
낄낄낄.. 깔깔깔...

목사님. 포도 포도
낄낄낄.. 깔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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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시드니

December 29, 2008
*.101.112.210

우선, 목사님, 본문말씀이 갈라디아서 4장이지요? 로마서 16장이 아니구요.

이 설교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구절이 빌립보서 3장 12-14절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기서 바울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분명히 율법적인 어떤 행위는
아닐텐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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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9, 2008
*.139.165.15

예, 본문이 지난 주일 거로 잘못 기록되었군요.
갈 4:1-7절로 바로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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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December 29, 2008
*.238.225.78

저는 이 설교문을 통해 바울사도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않지만 개인적으로 '바울 콤플렉스'가 있었거든요.
바울의 서신서들을 보면 완벽하고, 집요하고, 전후사방을 돌아보고..
사실 숨막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의 신학과 신앙이 위대하지만 독자로서는 그랬어요.
실컷 몰아부치다가 나중에 괜히 겉 옷을 가지고 오라는 둥..하는 거 같구요.

그런데 목사님께서 바울, 그에 대하여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말씀하시니
다시 사도를 바라보며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붙잡은 복음을 치열하게 전하기위해서는
그런 서신들이 나올수 밖에 없었겠습니다.

제가 서신서 중 히브리서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도 이방교회를 향한 것이 아니어서 그 심오함이 또 다른 것에 있고,
바울 사도가 쓴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작용을 하였습니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제가 이러고 있습니다....ㅡㅡ;
그러나 오늘 설교문을 통하여 오히려 바울사도가 히브리서의
저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그래도 좋다라는 생각입니다.
당시 이방에게는 말해도 통하지않는 유대역사의 그 유구함에 연이은
예수그리스도를 또 다른 얼굴로 말할 수 있는 바울도 가능합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서들은 독자를 위해서지만
히브리서는 저자 자신을 위해서도 마음껏 썼다는 느낌이 있어서
바울의 다른 필체일 것이라는 상상도 해봅니다.

여하튼 목사님의 설교주제와는 좀 빗나갔지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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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9, 2008
*.120.170.245

유니스 님은
학교 다닐 때 분명히 공부를 잘했을 거에요.
설교 한방으로
바울의 신앙적 실존의 세계로 들어가니 말입니다.
바울, 괜찮은 사람입니다.
완벽한 사람하구는 거리가 멀구요.
냉정하면서도 열정이 강한 사람이었지요.
그의 신앙적 진술들은 허공을 때리는 게 아니라
생명의 중심을 흔들어대고 있답니다.
오늘 지산제일약국에서 대접받은 차 한 잔,
몸에 좋다는 그 차, 감사합니다.
송구영신예배에 오신다고 했지요.
그때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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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9, 2008
*.120.170.245

캔디 님,
어제 저는 두 따님 사이에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구김살이 전혀 없네요.
신앙도 좋고 얼굴 표정도 밝고,
잘 키우셨습니다.
모든 가족들에게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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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angelica

December 30, 2008
*.144.116.87


어릴때 부터 오랫동안 율법적 신앙에 매여 살았던 경험때문인지,
그 때를 벗었다고 자부해보지만,
주님을 향한 기쁨으로 한 행위도,
때로는 그것조차 다름 사람을 향할 때는
또다른 율법적 잣대가 됨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런 내 마음의 경험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게 되며,
그 분이 왜 십자가를 지셨어야만 하는 명확한 이유가
내 마음에 명확하게 새겨지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영적인 자유를 경험했다고는 하지만,
교회 생활을 할때는 여전히 긴장과 갈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경험한 영적자유를 공동체 가운데서 나의 삶으로 나누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의 방식으로 함께할때 그것이 수용되고, 받아들여짐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소모적인 봉사를 해야할 때도 있고,
다른 여러가지 교회행사에 동원되어야 하는 모습도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내에 있는 다양한 신앙형태를 인정하며,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미치지 못하는
속물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을 끌어안고 함께 갈 수 있는 방향을 나눌수 있다면,
내 삶의 기쁨으로 삼고,
하나님을 향한 영적순례를 지속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고민하는 그 자체가 내게는
이 생명을 생명되게하는 원천임을 어렴풋하게 느껴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늘 하나님을 향하게 되니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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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0, 2008
*.120.170.245

안젤리카 님,
"하나님을 향한 영적 순례"를 지속하고 싶다고 하셨군요.
그걸 알고 사는 삶과 모르고 사는 삶은 질적으로 다른 겁니다.
그 순례의 길에 주님의 자유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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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December 30, 2008
*.136.37.162

무엇이든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것이면
기쁨과 자유함과 평안이 느껴진다면
어떤 것을 해도 예수안에서 하는 것이고

무엇인가가 두려워서, 무엇인가를 바라고, 남의 눈치가 보여서 등등의 이유로 한다면
아무리 고귀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예수 밖에서 하는 일이라는 말씀으로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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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December 30, 2008
*.136.37.162

어린 자녀는 부모에게 받기만 하지만
성장한 자녀는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처럼
기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겠지요.
그것은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자와 갇힌자들을 돌보고
지상명령인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들이겠지요.
여전도회장하면서 집안일은 뒤로 미뤄놓고 장례식장이며 병문안이며 열심히 쫒아다니는 것은
해당되지 않겠지요? 아니면 이것도 복음전하는 것에 해당될까요?
이 또한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르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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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December 30, 2008
*.206.88.145

전 주일날 만큼은 꼭 교회에 가고저 합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때 에는 수요예배 라도 갑니다.
세상은 방탕하고,나태하고, 저를 죄와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것 같습니다.
세상은 마치 오물을 뒤집어 쓰고 있는것 처럼 사회나, 인간 개,개인의 삶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는것 같습니다.
각종도취,음란,알코올 중독, 도박, 사람이 먹어서는 안될 먹거리가 하루에도
수십종씩 눈을 속여서 만들어 지고 있고, 자신의 목적과,야망을 위해서 남을 밟고, 속이고,기만하고
사기치고, 티브이만 틀면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영화와, 음악이 지천에 널려있고
낮에 야외 식당에 가면 불륜 남녀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요..
먹고 ,마시고,취하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고,컴퓨터와,각종 미디어는 이미 사람을 기계라는
도구안에 사람을 포로로 잡아놓고,순간 마음만 잘못 먹으면 타락의 길로 가게 하구요,
여러 사람을 죽음 까지도 몰아 가고 있습니다.
컴퓨터 중독에 나의 영 과 자녀들의 장래가 구멍 나고 있는 이 세대를 보고 있습니다.
세상 자체가 하나님 나라 와는 워낙 거리가 멀게 느껴 지는군요..
그래서 저는 죄로 오염된 이 세상에서 일주일에 한번 이라도 교회라는 예배 공동체에 나가서
회개의 기도도 하고 목사님들의 말씀으로 마음도 세탁하고, 그릇된 길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질려고 합니다.
성가대의 찬양속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의 화답을 보는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집사님들을 만나서 식사도 같이하구, 차도 한잔 마시고
이렇게 하면서 일주일 동안의 지친 몸과 마음에 힘과,평화를 공급 받기도 합니다.
이것이 아니라도 교회 지체들 얼굴만 봐도 기쁘고 즐겁습니다.
교회는 우리에도 요구도 많이 하지만은 그래도 꼭 일주일 한번 이상은 가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나네요..
잃는것? 보다는 교회를 통해서 얻는것이 훨씬 많은것 같습니다.

목사님, 자유 참 좋은것인데 저는 자유를 너무 누릴려다가 탕자와 같이 될까봐 두렵습니다.
탕자는 뉘우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 가기라도 했는데 저는 그렇게도 못될까봐 두려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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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0, 2008
*.120.170.250

저별 님의 글은
정곡을 찌르는 바람에 나를 쩔쩔매게 할 때가 많군요.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을 자유에 대해서 설교한 게 아니랍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요.ㅎㅎ
그 비유에서 핵심은 뭘까요?
아버지의 사랑은 성실한 큰 아들이나
말썽 피우다가 고생 진탕 한 작은 아들이나 똑같이 임한다는 사실이랍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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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December 30, 2008
*.206.88.145

탕자가 만일 돌이키지 않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목사님, 올해도 이제 몇시간 밖에 남지 않았네요..
제가 우둔하여 질문도 많이 하지만요..
목사님을 통해서 이곳에서 많이 배웁니다.
사역하시는 교회위에 늘 주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원 합니다.
목사님,새해에도 항상 건강 하시고,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가르침도 바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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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Dr. Jung

December 31, 2008
*.220.202.62

일반 교회에서 그런 영적인 아들의 자유를 누리기엔 현실이 쉽게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장 한 주만 일요예배를 빠져도 담날 담당 목사님으로부터 전화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십일조도 마찬가지지요.
목사님 설교에서도 말씀하셨지만 직책을 맏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어떻게 아는지 교역자들 모두가 믿음 없는 사람이라는 눈빛으로 처다 봅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신념과 자유의지를 가진 분들은 교회에서 antigen으로 느끼는지 ,antibody가 생겨서인지
점점 멀리 하게되지요.
그러더 저러다 이 곳을 찾게된 분들이 많이 있다고 봅니다.

토라와 할례가 유대 기독교의 신념인 것 처럼
우리네 교회 안에서도 어쩌면 2000년 전 보더 덜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갈등과 고민이 많아서
교회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집어 낼려치면
감당하기 힘든 압력들이 들어오는 것도 현실이지요.

십수년 동안 해오던 교사 성가대 각부의 회장 교육부 부장 등등의 모든 직책을
자의 타의에 내려놓고 아들의 자유를 이제서 누립니다.
목사님의 설교에서 아픈 상처, 갈등들 그리고 그기에 대한 대답들이 명확해지고
더 깊은 영적세계를 찾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교회와 가정에도 주의 사랑과 평화가 함꼐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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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1, 2008
*.120.170.250

닥터 정 님,
자의반타의반으로 자유인이 되셨군요.
주님의 은혜입니다. ㅎㅎ
이렇게 한 해가 또 저물었습니다.
우리의 전체 삶도 순식간에 저물겠지요.
평화로운 저무는 삶을 준비해야겠지요.
새해에 주님의 더 큰 자유를 얻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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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December 31, 2008
*.99.193.27

나름 꾸준히 목사님 말씀을 보고 있는 독자(?)입니다.
교회 출석을 무척 게을리하고 있구요...
늘 그런것은 아니지만 신앙(올바른 신앙)에 대한 목마름을 느끼면서 이곳에서 정말 힘도 되고..내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떤 사유의 깊이에 내가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런 곳이 없었다면....난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믿고 살았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설이 기네요....저별과 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에서 새로운 힘을 받고 사시는 것이 뭐 나쁠게 있겠습니까..다만 저처럼 오히려 교회에서 자꾸 힘이 빠지는 느낌만 받는 이도 있다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교회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아이들처럼...
그래서인지 여전히 게으르지만 이곳에 와서 생긴 많은 생각들이 오히려 날 자유롭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사소한(또는 중요한) 것들에 내가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해에도 목사님과 또 우리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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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1, 2008
*.120.170.250

상수리 님,
2008년 한 해가 다 가는군요.
'그들만의 리그'는 정곡을 찌른 표현입니다.
통역이 없이는 방언을 하지 말라는 바울의 충고처럼
교회의 언어, 그 행위가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방언으로 떨어지지 말아야겠지요.
내가 보기에 상수리 님이 교회에서 전달받는 느낌은
상수리 님이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2009년에 우리 모두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더 깊이 연루되었으면 합니다.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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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January 01, 2009
*.159.18.18

설교를 듣고 좀 생뚱맞게도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 내용이 떠올랐어요
직접 읽어보진 못했고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란 책에서 읽은적이 있는데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빚을 갚기 위해서 일하던 주인공이
어느날 갑자기 바퀴벌레쯤 되는 곤충으로 변하는데 처음엔 가족들이 슬퍼하고 절망하다가
나중엔 귀찮아지고 죽여버리려고 합니다.
이유는 주인공의 동생이 매력적으로 장성하여 가족의 생계를 떠 맡을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입니다.
자녀조차도 그냥 '있음'만이 중요한게 아니라 어떠한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소외되는
이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구요, 자녀로 그냥 존재하기 보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잘 나가는 척해야했고,
부모님도 그걸 바란다고 은연 중에 느낄때마다 괴롭기도했어요.
부모님 앞에서조차 나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 못하며 지내온 것 같아요
그래도 이제 다시 시작이네요
하나님 앞에서 자녀로 살기.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온갖 금기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맛보며 살고싶어집니다.
2009년 새해의 바람이에요
직접 뵙진 못했지만 목사님 항상 감사하구요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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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2, 2009
*.120.170.250

이선영 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의 실체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군요.
"하나님 앞에서 자녀로 살기"
이게 순식간에 이뤄지지는 않을 거에요.
우리는 지난 삶의 두께만큼
온갖 종류의 우상숭배로 세뇌되어 있으니까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말하듯이요.
그러나 동굴 밖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희망의 끈을 결코 놓을 수 없겠지요.
그 길을 잘 가보세요.
주님이 도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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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둘로스

January 04, 2009
*.38.185.156

오랫만에 들어왔습니다.ㅋ
갈 5:6,13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진정한 자유자는 스스로 종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지요.
갈 6장 전반부는 믿는 성도가 집중해야할 삶의 양태에 대해서 바울은 다룹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의 본질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관점들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죄는 자기 중심성이라는 견해에 동의를 합니다.
십일조, 주일을 지키더라도 자기를 과시하고 종교적 의를 내세우기 위해서라면 가증한 것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드린다면 향기로운 제물이 될 것입니다.
(그 중심은 하나님만이 아시겠지요.)
이런 형식적인 조항들은 본질을 담아내기 위한 방편이고 수단이기에 잘못 강조되어진다면
크게 타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하여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이 꼭 깊이 사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할 행동이며 지식을 가진 신앙인의 양심적인 행동인가에 대해선 의구심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공부를 하면 안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닌 것처럼..
(물론, 정목사님의 설교 의도가 종교적 의무에 대해 안해도 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은 아니라고 이해합니다만.)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와 탐욕을 일삼는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이타적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던지기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일 것입니다.
(갈 6:6-10, 히 10:24,25, 11:24,25)

오늘날의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본질이 훼손된체 비본질적인 것을 강조하게 되고 형식주의와 외형주의로 전락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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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구~니

January 04, 2009
*.146.32.3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경직목사님을 통해서, 임영수목사님을 통해서, 지금은 이재철목사님을 통해서 공간속에선
정용섭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뜻을 생각하고 깨우칠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여러분은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라는 말씀이 깊이 다가오는 주일 오후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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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이삭과리브가

January 09, 2009
*.19.22.176

주일은 성수하는게 아니라 누리는 것이며 십일조는 감사하여 드리는 예물인데 오늘날 지나친 강요와 외식에 본질을 잃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무거운 죄의 멍에 아래 신음하고 있는 이 현실을 누가 자유하게 하겠습니까
목사님의 설교를 보면서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깨우침을 입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일은 참으로 즐겁고 행복하고 은혜로운 날이지요
한주간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육체도 지치고 정신도 피곤하지요
이럴때 주일이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요

가족들이 아침에 일어나 함께 손잡고 교회가면서 서로 마주보며 마음을 열고 대화할때 서로를 알게 되고 이해하고 화합하며 도우면서 기도하고 축복하며 산다는것 너무 행복한 은혜의 날이 아닌가요

난 주일이 좋아요
에배가 좋아요
하나님께 힘을 다해 찬양을 드리고 말씀을 듣고 내 삶에 방향을 다시 세우고 ......
영과 육이 강건해지는 주일 너무 좋찮아요

다음에 십일조에 대하여 저의 견해와 경험을 한번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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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July 17, 2009
*.127.115.206

저는 간증집회를 다니면서 록펠러 뺨치게 완벽한 십일조를 했다고 자랑하는 꿈을 꾸었더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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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April 20, 2017
*.105.196.251

오늘 아침 출근길에 남편이 달팽이집에서 안일하게 사는 달팽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말을 하더군요.
하나님을 종교언어로 규정하려고 하고..
종교언어나 교회, 교리라는 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사회구조속에서 사는것을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도 않고 그냥 당연히 살아왔다고..
이젠 자유하고 싶다구 해요..ㅎ
달팽이 집에서 더 넓은 세계로..
또 다른 세계(하나님을 알아가는..)를 향해 자신의 남은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하네요.
남편이 ''바르트의 믿음은.. 신뢰다, 앎이다, 고백이다. ''를 읽으면서 고정된 생각이 많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나 매일묵상등..같이 읽고 나누기도 하는데..얽매임에서 자유함으로 생각과 뜻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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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0, 2017
*.164.153.48

은나라 님과 남편이 신앙과 인생 문제에 대해서

서로 솔직담백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다비아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저도 기쁩니다.

그리스도 안의 진리를 상투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남은 삶을 거기로 온전히 투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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