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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기뻐하라!

성탄절 조회 수 12413 추천 수 6 2009.01.05 15: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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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예레미야 31:7-14 
크게 기뻐하라!
(렘 31:7-14)

요즘 팔레스틴 지역이 전쟁의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틴의 과격파인 하마스가 이스라엘 지역에 로켓포를 쏘는 등, 정전 협정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팔레스틴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가지지구를 폭격했습니다. 가자지구는 폭 12-19km, 넓이 40km의 지역에 140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하마스 본부와 시설들을 공격한 것입니다. 아무리 정확하게 타격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민간인의 희생은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4백여 명이 죽었고,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부상당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지상군을 투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세계 주요 국가들이 이를 막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지상군의 투입은 대량 살상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막강한 군사력 탓에 주변 아랍 세계에 둘러 싸여 있어도 나름으로 큰 소리를 치지만 지난 역사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나라 없는 세월을 2천년 가까이 지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서 자그마치 6백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독가스로 희생당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으로부터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런 쓰라린 경험이 너무 강한 탓인지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향한 그 어떤 위협도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역사에서 생존의 길로 배운 방식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과 동일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문제 앞에서 당혹스럽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군사 행동이 하나님의 평화를 파괴한다는 게 분명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생존 투쟁을 무조건 몰아붙이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인 해결방식을 제시할 능력이 없습니다. 2008년의 마감과 2009년 새해의 시작이 이렇게 폭력의 악순환이라는 사실에 분노하고 절망하면서 주변의 제국들로부터 폭력을 당한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무엇을 말했는지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조상이 우리 인류에게 전해준 예언자들의 영적 메시지만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지금 이스라엘에게 군사 공격을 당하고 있는 팔레스틴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최첨단 폭격기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그들의 상황은 고대 이스라엘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예레미야가 설교하던 기원전 7세기 초는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한지 벌써 1백년 이상이 흘렀을 때입니다. 남유대는 아시리아의 뒤를 이은 바벨론의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남유대의 요시아 왕은 새로운 개혁 운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대의 예언자이지만 북이스라엘을 포함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9b절에 거론된 에브라임은 요셉의 첫 아들로서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언급은 8절에 나옵니다.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이 북쪽 땅은 이미 멸망당한 북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북이스라엘을 향한 예레미야의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8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여호와께서 그들을 불러 “모은다.”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모으고 그들은 고국,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8b절) 9절은 “그들이 울며 돌아온다.”고 하며, 10절은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은다.”고 했습니다. 마치 사업이 부도가 나거나 보증을 잘못 서서 파산된 집의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문제가 해결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일제의 억압으로 중국, 미국으로 망명했던 조선의 애국지사들이 해방 후에 조선 땅으로 돌아오는 장면과도 비슷합니다.
여호와께서 북이스라엘의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신다는 예레미야의 이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성취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나라의 사정은 더 나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하고 있는 남유대 마저 얼마 후에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됩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조는 대가 끊깁니다. 지도자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 모은다고 설교했는데, 실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합니다. 본문의 시작인 7절과 마지막인 14절은 예레미야의 그 예언이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으니 이 말씀은 무의미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는 짧은 시간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바벨론 포로가 끝난 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다시 복원하는 등, 그들의 여러 전통을 새롭게 세워나갔습니다. 그 뒤로 다시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 당시까지 나름의 민족적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남유대와 북이스라엘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한 나라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은다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짧게 보면 틀렸지만, 길게 보면 옳았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얼마 만에 이뤄졌는지 하는 게 본문에서 핵심은 아닙니다. 그의 영적 통찰이 중요합니다. 그의 하나님 경험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이 그에게 내리신 신탁이라고 합니다.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삶을 완전히 파괴당한 북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를 여호와께서 불러 모으신다는 그런 영적 통찰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남유대와 북이스라엘은 경쟁관계, 때로는 적대관계였습니다. 어쩌면 예레미야가 속해 있는 남유대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속으로 좋아 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지금도 남한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한이 망하기를 바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레미야는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그들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이미 1백여 년 전에 멸망당한 북이스라엘을 여호와께서 불러 모으신다고 말입니다. 그런 태도로 역사를 직시하고, 그 역사적 책임을 감수하며, 그 예언이 현실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기쁨의 근원
역사적 책임이라는 말을 들으면 특별한 사명감에 사로잡힌 민족주의자나 혁명가들이 아닌 우리 같은 소시민들에게는 오히려 부담스럽습니다. 예레미야가 그 당시 민중들에게 이런 부담감을 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전한 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그는 부담감이 아니라 기쁨을 전합니다. 7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12절에서도 “크게 기뻐하리라.”고 말합니다. 13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즐거워한다.”는 단어도 기뻐한다는 단어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아직 북이스라엘이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조국이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것을 미리 내다보고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거시적인 영적 경험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예레미야의 이 예언은 너무나 먼 옛날이야기 아니냐, 또는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개인의 삶과 별로 상관이 없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보다는 지금 당장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지 아닌지에 민감합니다. 오늘의 교육이 아무리 비인간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자녀들만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면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빈익빈부익부의 현상을 가속화하는 오늘의 경제 질서보다는 지금 나에게 수입이 늘어날지 아닌지에 예민합니다. 한국교회가 모두 개교회 이기주의에 떨어져 있어도 우리 교회만 잘 되면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의 세계관과 신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레미야가 말하는 기쁨은 별로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레미야와 똑같은 영적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고 다그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게 하라고 닦달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본인들의 영적 눈에 그것이 보여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지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기뻐 외치라!”는 예레미야의 그 메시지만은 전해드려야겠습니다. 우리가 놓칠 수 없는 하나님 경험은 기쁨으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근원과 접촉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은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에서 예레미야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여호와께서 북쪽에 흩어진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호와의 불러 모우심을 예레미야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8절) 여기에 거명된 이들은 모두 삶이 위급한 사람들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삶의 안전한 곳으로 끌어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안전한 삶이 어떤 것인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12절) 여기에 묘사된 내용은 일상적 삶의 조건들입니다. 이런 삶의 조건을 얻은 사람들의 삶의 속성이 어떤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13절)
위에서 묘사된 내용들이 너무 시시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기껏 해봐야 장애인들과 임산부들이 안전한 거처를 얻는다거나 일용할 양식을 얻게 되고, 처녀들이 춤을 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기쁨을 얻게 된다니 하나님의 말씀 치고는 너무 시시합니다. 요즘은 이런 것들로 기뻐할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최소한 사법고시 최종 합격을 한다거나, 기업이 대박을 터뜨리거나, 복권 1등에 당첨되어야겠지요. 우리를 정말 황홀하고 짜릿하게 만드는 사건이어야겠지요. 이에 반해 본문은 소박한 일상적 삶의 조건만 열거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런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개인이나 공동체나 모두 어떤 방식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삶의 기본적인 조건마저 박탈당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당연히 두 가지 대답이 따라옵니다. 하나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어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기본적인 생존 조건을 허락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기쁨의 차원을 생명의 가장 밑바닥인 생존의 조건에서 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도권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정말 중요한 사실은 이런 생명의 일을 여호와께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북쪽에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불러 모으십니다.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불러들이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고 위로하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는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구원을 행하십니다. 그분만이 창조자이시며 창조의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하나님이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신다는 사실로 인해서 기뻐하라고 외치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행위가 바로 기쁨의 근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주체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즉 생명 사건은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역사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파노라마를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지요. 여기 타잔이 있습니다. 아내와 아들도 있습니다. 어느 날 타잔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아내와 아들이 난폭한 맹수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타잔이 밧줄을 타고 나타나서 아내와 아들을 대신해서 맹수와 싸워 격퇴시킵니다. 여기서 아내와 아들이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타잔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타잔이 이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싸움 구경이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타잔이 나타난 것만으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을, 악을 굴복시키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싸움의 결과는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서신서 엡 1:3-14절은 이 사실을 기독론적으로 설명합니다.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합니다. 찬송은 기쁨을 경험했거나 그것을 예상하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찬송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4,5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가 용서함을 받고, 그의 부활로 생명의 약속을 얻었습니다. 그게 모두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러니 기쁨으로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바울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빌 4:4) 가르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명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처럼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손상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크게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춤을 추십시오. 이런 기쁨이 이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와, 그뿐만 아니라 전쟁의 화염에 휩싸여 있는 팔레스틴 가자지구의 많은 민중들과, 맹인이나 다리 저는 사람들처럼 생존 조건이 허물어진 사람들에게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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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ldg

January 05, 2009
*.255.54.254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감사 찬양합니다.
가끔씩 밀려오는 저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도
온전하신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맡기고
저는 다만 크게 기뻐하고 춤 추는 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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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항해자

January 05, 2009
*.151.173.178

새해 첫 예배를 감사하게도 대구 샘터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요즈음 사역을 쉬고 있어서 교회 탐방하는 즐거움으로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여러 교회를 탐방 중입니다.
그래서 존경하는 교수님이 시무하시는 아름다운 장소로
옮기신 샘터교회를 찾아간 것입니다.
대구 지리도 알고, 다비아에서 약도를 본 대로
대충 머리에 지도를 새겨둔 터라 다시 확인 없이 출발했었지요.
경주에서 일찌감치 서둘러 출발 한 덕분에 30분 가량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근처까지는 갔는데 도무지 '공간 울림' 건물을 찾을 수 없어서
차를 세워 놓고 작은 슈퍼에 들러서 물었더니 글쎄 바로 앞 도로 옆이더군요. ㅋㅋ
아담한 건물 밖에 교수님 차가 있길래 바로 찾았다 싶어 들어갔더니
교수님이 반갑게 맞아 주시더군요.
교수님은 예배를 준비하시고 저는 그날 주보 접는 일을 도왔습니다.
조금 지나자 교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저도 예배 드리는
지하 공연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담한 홀은 정말 예배드리기 좋은 공간임에 틀림없어요.
잠시 기도를 드린 후 주보를 살펴보고
그날 본문 말씀을 찾아 신학생답게 본문을 미리 읽으면서
나름 설교를 구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레미야의 선포는 피상적으로 들려오더군요.
수 천 년 전의 예언자의 메시지가 저의 피부에 와 닿지 않았던거죠.
결국 본문만 쳐다보다가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배는 다양한 순서에 따라 경건하게 드려졌는데 성찬식이 기억에 남는군요.
제가 다니던 영남신학교에서 하던 방법과 똑같이
빵을 포도주에 찍어 먹는 성찬식이었어요.
근데 빵이 아주 영양가가 가득한 빵이었어요. ㅋㅋ
아무튼 말씀을 들으면서 교수님이 풀어주시는 본문을 통해
예언자들의 놀라운 통찰력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아주 먼 시간을 달려왔습니다.
그 가운데 절망할 수밖에 없는 여러 현실들을 맞이하면서
아마도 예레미야의 말씀이 서서히 잊혀져 갔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결국 기뻐할 수 밖에 없는 궁극적인 승리를
인식한 사람들만이 그 말씀을 기억하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했겠지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국 교회 현실을 바라보면
성도들은 너무 정확한 답을 가급적 빠른 시간에 확보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목회자 역시 그들이 시원스럽게 납득할 수 있는
답을 내리려고 애쓰는 것 같구요.
우리에게는 기다림의 영성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말씀 속에서 예레미야가 거창한 회복을 선포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생존의 기쁨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영원히 자기만족은 없겠죠.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존도 누리지 못하는 반면,
우리는 너무 풍족함 가운데 빈곤을 토로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오늘의 이 예레미야의 말씀이 지구상에 생존의 문제로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지면이나 컴퓨터 화면을 통한 인식과
입체적인 설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습니다.
교수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식사도 맛있게 잘 먹었고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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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5, 2009
*.120.170.231

ldg 님,
장래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한 겁니다.
두려울 때는 두려워해도 좋아요.
그러나 우리가 영을 향해 마음을 닫아두지만 않는다면
점점 두려움을 극복될 겁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올 한 해 기쁨을 노래하고
춤을 춰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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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5, 2009
*.120.170.231

김태훈 전도사,
나도 어제 반가웠소이다.
이제 신학에 입문한 상태이니
구도의 자세로 임하기를 바라네.
교회 봉사라는 부담이 없는 시간에
여러 교회를 많이 둘러보시게나.
그런 기회가 자주 오지 않으니 말이네.
좋은 한 해가 되기를 바라네.
일곱 달(?) 된 새생명에게 특별한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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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January 05, 2009
*.62.26.5

만약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지 않았다면,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군이 가자지구내 하마스본부와 시설을 파괴했다는 이야기는 대일본제국 군대가 한국인 거주지역의 의열단본부와 시설을 공격하여 항일무장투쟁과 무관한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는 이야기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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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anuary 05, 2009
*.216.132.150

저도 항해자님처럼,
현장에서 듣는 설교의 놀라움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현장설교와 매체를 통한 설교하고는 너무나 다름을 실감하게 되더라구요.
(목사님께서는 스크린으로 드리는 예배조차 염려 하셨지요)
왜 목사님께서 예배에 집중하라고 누누히 강조하시는지,
요새 예전 예배를 드리면서 그 의미를 더 깊이 찾아 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어제 말씀의 끝부분을 들으면서, 저는 "기뻐하라!" 고 선포하시는 구약의 선지자,
또 신약의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 그리고 현재의 우리들이 함께 춤추며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기쁨이었습니다.
창조자 하나님, 구원자 예수님, 생명의 영인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감사와 기쁨의 찬양을 함께 부를 수 있다는 거..
그렇습니다.
저는 예배의 감격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얼마 만이던가요!
먼길 올라 오셔서,
이런 기쁨을 전해 주시는 목사님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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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January 05, 2009
*.238.225.78

먼저 본문 말씀을 찾아 읽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 머리에 이-팔의 분쟁을 언급하셨는데
오늘의 말씀이 바로 이 상황이 오기까지의 핵심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시오니즘의 근거가 되는 부분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그들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이미 1백여 년 전에 멸망당한 북이스라엘을 여호와께서 불러 모으신다고 말입니다.
그런 태도로 역사를 직시하고, 그 역사적 책임을 감수하며,
그 예언이 현실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예언이 현실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오늘 본문의 예언을 지독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단기적, 중장기적 나아가서는 종말까지도 바라보는 걸까요?

지금의 이-팔의 피비린내는
아브라함이 예언 성취를 위하여 이스마엘을 얻고,
리브가가 예언 성취를 위하여 야곱을 변장시키는
인간의 트릭의 연장선상인 것 같습니다.
조상의 트릭의 산물로 고전하는 이스라엘이
참으로 위의 설교처럼 예언이 현실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에
역사적인 직시와 책임을 감수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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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우디

January 06, 2009
*.49.175.139

그렇군요. 목사님 아이디의 의미가 그런 것이었군요. fre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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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6, 2009
*.120.170.231

이 파렴치한 세상에서도
우리가 어떻게 기쁨으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외칠 수 있을까요?
허무, 불안, 절말, 분노 가운데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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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삶에서..

January 06, 2009
*.57.162.139

대체 그당시의 현실이나 지금의 현실이나 조금도 바뀐 것이없는데
우리는 어떻게 구원의 가능성을 이야기 해야하는 걸까요??
정말 그분의 구원행위를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 걸까요..
손에 잡히지 않으니 조바심이 드는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조바심을 내는 이들을 위해 예레미야의 영적 통찰에는 관심을 갖지 못한 채
급급한 대답을 해야 될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늘 목사님은 한가지를 향해서 달려가주시네요..
늘 감사하지요.
목사님은 그저 늘 겸손하게 아무 것도 아닌채 하시지만
오늘은 목사님의 설교를 보면서
정용섭 목사님의 영성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해봤네요.
이미 목사님은 영성가시면서 영성가가 아닌채 하시는 분이시죠.
다비아에서 배우고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배운 모든 직,간접적인 제자들이
목사님과 흡사한 소리를 내고 있다는게 그에 대한 방증이 아닐까요??
후대의 역사가 평가할 거라고 또 겸손히 이야기하실 목사님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크허허;;
늘 그저 감사합니다.
전혀 잡을 수도 없던 말씀이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오니 말입니다.
여전히 그분이 구원자이시며 구원의 통치에 참여하도록 부르고 계시며 구원하실 거라는 강력한 희망만이
오늘을 살게 합니다.
Dum Spiro Spero!
숨을 쉬고 있는한 나는 희망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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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July 1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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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어렵지도 않은 시험(자격증시험)을 굳이 어렵게 만드는

저의 게으름, 방탕함, 나태함, 이기심, 무능력, 머리나쁨 들에게 늘 뒷통수를 가격당해도

즐거움사수와 행복탐사를 중지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이유는

 

여기서 그분을 언급하면 신성모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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