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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대한 질문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837 추천 수 4 2010.07.11 21:4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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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20:25-37 

이웃에 대한 질문

(눅 10:25-37)

 

    사마리아 사람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을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도망갔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다가 이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에 제사장은 여러 생각을 했겠지요. 그 사람이 죽었는지 아니면 살았는지 궁금했겠지요. 당시에 그곳이 강도가 종종 출몰하던 지역이라는 걸 알았으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본 즉시 강도를 만났다는 걸 알았겠지요. 이 제사장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제사장 업무를 마치고 휴가를 즐기러 여리고로 가는 중이었을 겁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뒤치다꺼리를 하다보면 휴가를 즐길 수가 없었겠지요. 제사장은 시체를 직접 만져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사지에 처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입니다. 제사장은 빨리 여리고로 가서 관리에게 알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누가복음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쓰러진 사람을 피해서 지나갔다고만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사람은 레위인입니다. 레위인은 제사장보다는 하위급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사회적으로 높은 계급인 종교 업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그도 역시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상황을 피하여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이제 세 번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양반이라고 한다면 사마리아 사람은 상민보다 더 아래 사람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다쳐 쓰러진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상처를 싸맸습니다. 응급치료를 한 것입니다. 그 뒤에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자면서 더 꼼꼼하게 상처를 치료해주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환자가 완전히 회복하도록 거기에 계속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주막 주인에게 돈을 넉넉하게 주고 환자를 부탁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러서 모자라는 비용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는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대본으로 주일학교나 학생회 아이들이 연극을 하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합니다. 종교적인 업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실제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외면한 반면에 당시에 무시당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행했다는 것은 예상외의 결과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를 대표하고, 사마리아 사람은 휴머니즘을 대표합니다. 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휴머니즘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형식에 머물거나 왜곡되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휴머니즘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그 사실을 지적하면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설명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지금 우리가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실제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는 불편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옳기는 하지만 그대로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기의 일상을 희생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일단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귀찮습니다. 여행 일정도 흐트러지고, 돈도 들어가고, 나중에 강도들에게 앙갚음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성서시대와 달리 요즘은 사회 안정망이 이런 일을 대신합니다. 극빈자와 장애인을 위한 사회 복지 급여 제도가 있습니다. 경찰, 소방서, 각종 정부 기관이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역할을 대신합니다. 그래서 일반 시민들은 크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살아갑니다. 사회 제도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사실이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는 것에 대한 면책이 되는 걸까요? 일반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방식으로 이 비극적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요?

 

   율법교사의 질문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동기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이 뜬금없이 이런 말씀을 불쑥 하신 게 아닙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의 질문은 중요합니다. 이 질문에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입장에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것에, 율법은 행함에 초점이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의 대립입니다. 율법교사는 평소에 믿음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따지고 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가 잘 알아들게 하기 위해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율법교사는 신 6:5절과 레 19:18절을 인용해서, 최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범적인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함을 요구한 율법교사에게 행함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웃이 누군지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웃이 누군지는 다 알고 있으니까요. 율법교사는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근본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분명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싶었겠지요. 신학자들은 말로 교묘하게 자기를 가리도 하고 나타내기도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비유가 끝난 뒤에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율법교사는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초등학생이라도 알 수 있는 질문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학자의 체면상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뻔한 대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사람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찜찜합니다. 말을 비틀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너도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이웃이 누구냐에 대해서 따지지 말고,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듣고 좀 해괴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율법교사를 비롯해서 유대인들에게는 동족과 이웃이 누군가가 중요했습니다. 토라를 지키고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이웃이었습니다.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입장이 이해가 가긴 합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여러 이방 민족들과 조상 대대로 싸웠습니다. 원수를 박멸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과는 모든 거래를 끊어야만 했습니다. 돈 거래도 하지 말아야 하고, 사돈도 맺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그걸 명시했습니다. 율법에 따라 살아야 할 그들은 내 이웃이 누구이며, 내 원수가 누구인지를 늘 예민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웃, 내 친구, 내 편을 찾지 말고 오히려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라는 것입니다. 관점의 전환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메타노이아, 즉 회심입니다. 이런 말씀은 자주 나옵니다.

     요한복음 9:1절 이하에 시각장애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사람을 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제자들은 습관적으로 물은 것입니다. 당시에 불행과 병을 모두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원인을 모르니까 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을 고쳤습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 하는 질문에 이웃으로 살아가라는 오늘 본문과 똑같은 대답입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을, 사람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불행과 죽음에 대한 관점을, 생태계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마틴 부버는 <나와 너>(Ich und Du)에서 인간에 대한 관점을 전환하라고 말합니다. 부버가 볼 때 세상은 사물의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나와 그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이용할 대상일 뿐입니다. 기업가는 노동자를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노동자는 기업가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학교 교장과 이사장은 학생들을 교육 사업의 도구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신자를 목회에 도움이 되는 ‘그것’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더 나가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대상의 관계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관계가 이렇게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부버는 ‘나와 너’의 관계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상대방은 도구화되지 않습니다. 나와 너라는 인격적인 관계로 변합니다. 인간관계의 새로운 관점을 가리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웃

     본문의 율법교사는 큰 깨우침을 받고 돌아갔을까요? 본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도 물리학이 말하는 관성의 지배를 받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속담도 이를 가리킵니다. 신앙의 틀도 잘 바뀌지 않습니다. 기복주의에 길들여진 신자들은 그것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믿던 사람들은 성경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개교회 이기주의에 머물던 사람도 그것을 바꾸지 못합니다.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여도 정서적으로는 그게 잘 안 됩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잘못된 신앙교육의 폐해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내 이웃이 누군지, 내 편이 누군지를 살피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방식의 삶이 도처에서 우리를 지배합니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의리를 진리보다 높게 평가합니다. 자비를 베풀 때도 그가 내 이웃인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이 ‘내 이웃’이라는 사실을 먼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도 살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게 이웃이 되어주는 삶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이런 연민의 영성을 배워야 합니다. 저는 툭하면 좌파 빨갱이라는 말을 설교 시간에 하는 목사들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의 입장을 조금 이해해보자고 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강단에서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매도하고 비하하는 설교자들도 많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내 이웃’만을 사랑하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강도 만난 사람으로 볼 수는 없을까요? 상황은 다르지만 지금 생존이 위태롭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내 이웃이 아니니까 깡패 같은 집단이니까 굶든지 죽든지 내버려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까요? 타종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이 내 이웃인지를 먼저 따지지 말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의 이웃이 되어준다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실제의 삶은 훨씬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 시간에 더 이상 부연해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설교자인 저는 여러분에게 성서가 전하는 원칙과 방향만 말씀드릴 뿐입니다. 나머지는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더 이상 내 이웃이 누구인지, 내 원수가 누구인지를 따지는 차원의 삶에 머물지 마십시오. 이웃이 잘 되고,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면 속이 후련하겠지만, 그것이 곧 영생에 이르는 길은 아닙니다. 이웃을 찾는 방식이 아니라 이웃이 되는 방식의 삶으로 나가십시오.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성령강림절 후 일곱째 주일, 7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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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July 11, 2010
*.34.181.8

오늘도 말씀 고맙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시골출신이라 그런지 연민의 정(측은지심)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좀 그렇죠..^^)

그런데 직장에서 이런 연민의 정은 배신으로 돌아오거나, 힘 있는 자의 사치품 정도로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배신이란 뭘 기대했다는 얘기고 그런 저의 마음이 부족했구나 라고 생각도 해 봅니다(이웃을 찾는 방식이겠죠..)

힘 있는자의 사치품이란 제가 힘 있는 라인에 있을 때 연민의 정도 통하는 얘기지, 그렇제 못한 처지에 있을 땐 다른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십상이더군요...

이웃이 되는 방식으로 측은지심을 갖을 수 있는 영성을 갖기란 참 외로울 수 있겠단 생각도 해 봅니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연민의 정 때문에 이웃을 위해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주님께서 제 마음에 평화를 약속해 주시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제만 편하자는 욕심일까요...

답을 원하는 질문은 아닙니다. 요즘 직장에 대한 저의 생각(직업관)이 많이 혼란스러워 목사님 말씀 가운데 제가 생각해야할 이웃이 우리 직장 동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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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July 13, 2010
*.120.170.243

상수리 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은 설교에서 반복해서 말했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쉽지 않는 일을 자꾸 하라고 하면

그건 또 율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연민을 통해서 이웃이 되어준다고 할 때

어느 지경까지인지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밤에 저에게 어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와서

하룻밤에 재워달라고 했을 때

쉽게 그러마 하고 대답하지는 못할 겁니다.

저의 일상이 모두 흐트러지니까요.

꼭 필요하면 여관 방을 하나 얻어도 재워주겠지요.

비슷한 예를 하나 더 들어도 되겠지요.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는 거니까요.

어떤 사람이 한달 후에 갚은 테니

3백만원만 빌려달라고 하면

제가 어떻게 해야할까요?

실제로 목사들에게 돈을 빌리려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목사가 남의 어려움을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불쑥 돈을 건넬 수도 없고,

그런 여유도 없지만,

곤란할 때가 많거든요.

말이 길었네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소중한 거니까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웃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무거운 도덕적 의무에 묶이게 하는 것은 아니에요.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삶으로부터

하나가 되는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규범이 아니라

생명 지향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 그쪽으로 나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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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거북도사

July 13, 2010
*.35.210.40

내편 네편 나누는 삶으로 부터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이번에 울산 ktx 역명 울산역(통도사)라는 명칭을 두고 기독교에서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구지 양산에 있는 문화재를 울산에 포함시키려는 것이 타종교에 대한 입김인지는 모르겠지만 교회내에서 내편 네편으로 나누게 되네요 . 이웃이 되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종교간의 갈등이 생깁니다. 생명 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데 청년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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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July 13, 2010
*.120.170.243

거북도사 님,

안녕하세요.

기독교인들이 세상 문제에

너무 영악하게 대처하는 것 같군요.

대구 지역에서도

팔공산 어디를 대구시에서 특별히

불교 문화권으로 지정한다는데,

이를 반대하는 서명 운동이

대구 기독교계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나 봅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내면의 세계가 공허하다는 증거겠지요.

기독교 신앙에서 부족한 부분이

유기적인 세계 이해가 아닐는지요.

유기적인 생명 윤리 말입니다.

자,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고유한 능력으로 이루실 터이니

그분을 온전히 믿고 앞으로 나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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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Azure

July 14, 2010
*.220.139.34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제 석사과정 논문주젠데..^^;;

지금 열심히 써가고 있는중입니당ㅋㅋ

완전 반갑네용^^

설교잘읽었습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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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July 14, 2010
*.120.170.243

Azure 님,

성서신학이 전공이시죠?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논문 잘 쓰시고

통과되고 프린트 되면

한권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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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July 14, 2010
*.155.235.162

오늘은 집에 좀 일찍 들어왔습니다.

지난번 중국방문이후 거의 잠깐 눈팅만 하다가 오늘은 글좀 써봅니다.

 

저는 일명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읽을때마다 이해 안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법상 그런것인지 누가의 수사학적 표현때문인지....  원어와 차이가 있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성경에 나온 예수님이 비유로 하시 말씀들중 이해하고 있는것은 거의 없습니다.  자꾸 궁금한것만 늘어나네요...

그래서 먹고 싶은것도 많습니다.

 

율법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해석은 사마리아인의 이웃이 강도 만난자가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교사는 자기가 도와줘할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강도만나자의 이웃이 사마리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안의 이웃이 강도만난자라고 하신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물론 이웃이라는것이 양방향성을 갖고 있겠지만, 이 비유는 좀 구체적으로 볼때 항상 어딘가 어색해 보인답니다.

 

율법학자가 찾은 이웃을 예수님은 강도만난자의 사마리아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학자는 사마리아인과 평행을 이룰수 없고, 강도만난자와 평행을 이루어야합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이는 너도 강도만나면 사마리아인에게로 부터 도움을 받을수 있는자라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복잡합니까?

율법학자가 주체가 되어 객체인 이웃이 누구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만난자가 주체이고 사마리안이 이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강도 만나서 사마리안에게 도움 받아라 하는 말씀과 같은것입니다.

 

물론 전체적인 내용을 훓어 보면 당연히 율법학자에게 너도 사마리안처럼 선한행동을 해라..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대입하여 따지면 절대로 그뜻이 아닙니다.

이는 원래 당시의 사람들의 어법이 그러한것인지.. 아니면 누가가 글을 쓰다 실수한것인지.. 아니면 약간 자기도 헷갈린것인지 아니면 다른뜻이 있는것인지 모르겠네요...

 

정확히 하자면 율법학자는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었고, 예수께서는 강도만난자의 이웃은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니고 사마리안이었다.. 그러므로 네가 찾는 네 이웃은 사마리안이다 라고 말씀하신것입니다.

 

만약 다른뜻이 있다면 이것은 어떠한지요...

레위인이나 제사장이나 마찬가지로 사마리아인들도 사마리아오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우물가의 여인처럼)  사마리아오경은 모세오경과 유사하며,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진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결국 레위인이나 제사장이나 사마리아인이나 자신들의 율법을 어기게 될 가능성이 커서 강도만난자를 만지는것에 대한 부담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레위인과 제사장과는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옆길로 살짝 빠져본다면...

동해복수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 이야기는 최초의 법전인 하무라비법전에도 나오지만.. 그 이전 우르남무의 법전에도 나옵니다.

복수에 대한 상한선을 정해 놓아 더 이상 복수 할수 없게 만들었다고 이야기들 하지요....  그래서 눈에는 눈........... 이라는 법은 그대로 갚아 주어라는 뜻이 아니고,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당한것보다 훨씬 잔인하게 복수할것에 대한 방어책이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권력자가 천민을 공격했을때, 이 천민 입장에서는 당한 만큼은 갚아줄수 있는것입니다.  즉 권력자가 가해자가 된 경우와 피해자가 된 경우에 따라서 달리 평가될수 있다는것입니다.  권력자가 피해자가 되어서 갚아줄때는 복수상한제를 적용한것으로 볼수 있지만 권력자가 가해자가 되어서 복수를 받을때에는 그 천민의 입장에서는 복수상한제가 아니고 복수가능제로 바뀌는것입니다. 즉, 누가 주체가 되느냐에 따라서 해석을 달리할수 있다는 뜻이지요...

 

우리는 성경을 읽을때 항상 돕는자에 입장에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도울것에 대한 생각을 먼저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돕는자가 있으면 도움을 받는자가 있다는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누가복음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율법학자는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달라고 했고

예수께서는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사마리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학자는 강도만난자와 평행을 이루고 율법학자의 이웃은 사마리안과 평행을 이룹니다.

율법학자는 사마리안과 평행을 이루지 못합니다.  율법학자는 곧 강도 만난자입니다.

 

율법학자가 처음에 예수를 시험하여 뭐라고 물었습니까?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지만 예수께서는 율법에 뭐라 기록되어 있느냐고  되물으십니다. 율법학자는 율법대로 사는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래 맞다 그렇게 살아봐라라고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맞습니다. 율법대로 살면 죄인의 영역에 들지 않겠지요... 그래서 옳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누가 율법대로 살아서 영생을 얻을수 있단 말입니까?  결국 영생을 얻을수 없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그렇게 한번 살아봐라.. 살아지나... 하고 말씀하신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분은 단 한분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을 대표하는자들입니다.

강도만난자는 율법학자지요...  율법학자가 세상을 살면서 영생을 얻고자하나( 거반죽은것같은자가 살고자하나)  율법(레위인과 제사장)이 살려주지 못하고 피해가버립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율법이 없는 율법을 초월한자(사마리안)가 나타나서 강도만난자(율법학자)를  살려줍니다.  그 강도만난자의 이웃은 그를 구원해준자입니다.

 

결국 강도만난자는 율법이 구원해 주지 못하였고 그를 구원해준자는 다른 사람이며,자신들이 경멸했던자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한자를 돕는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나를 구원해주는 그가 율법이 아니더라도 그를 이웃 삼으라는 뜻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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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아델포스

July 15, 2010
*.201.77.210

익명의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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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July 14, 2010
*.120.170.243

웃음 님,

성서신학을 전공하면 일가를 이루었을 것 같습니다.

성서텍스트를 파고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의심이 나는 것, 당연합니다.

따지고 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의심투성이지요, 뭐.

죽을줄 알면서도 사는 것 자체가 모순이니까요.

예수님의 비유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당시의 수많은 지혜 담론들과

초기 공동체의 예수님 경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이야기니까요.

비유를 여러 각도로 비쳐보는 것은 좋지만

일부러 비틀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율법학자로 보는 것이 비틀기에요. 

그런 방식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수많은 알레고리가 가능합니다.

결국 비유는 저 하늘 어딘가를 날아다니게 되겠지요.

결론을 뭐라고 했지요?

불쌍한 자를 돕는 이웃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아니더라도 구원하는 그를 이웃으로 삼으라는 뜻이라고 했나요?

틀렸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선듯 옳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네요. ㅎㅎ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합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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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청신호

July 15, 2010
*.33.20.100

이웃을 따지고 찾으려는 자세와 노력을 이웃이 되는데 쏟으라 - 

제게 와 닿은 필입니다.~

 

목사님..

근데 저 위쪽 나라 북한 백성들은 틀림없이  강도만나자들 맞는데  

북한의 주체사상은 강도 아닌가요?  

도와 주면 강도 만난자들에게 안 가고 강도들에게 가니까 문제아닌가요

이것도 속 좁은 생각인가요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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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July 15, 2010
*.120.170.243

청신호 님,

북한정권은 정말 골치덩어리입니다.

공산주의 정권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말은 아니에요.

쿠바처럼 녹색 혁명이나 이루든지

아니면 베트남 처럼 화끈하게 개방으로 나가든지 해야 하는데,

주민은 굶느지 마느니 하는 상태에서도

자존심 하나는 빡쎄서

큰소리 뻥뻥 치는 친구들이에요.

그래도 어쩝니까.

우리의 형제이니까요.

주체사상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음, 주체사상이라....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요.

주체적으로 살자는 거 아닌가요?

북한은 6.26 이후 60년 가까이

외국 군대 없이 살았지만

남한은 미군이 주둔했잖아요.

만약 군사적으로도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그건 옳은 이야기지요.

문제는 그들이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요.

청신호 님이 말하는 주체사상도 한 몫을 했겠지만,

그 이외에 많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중의 하나를 든다면 미국입니다.

오랜 동안 북한의 해외 결재를 북가능하게

경제 제재를 가했거든요.

말이 길어졌군요.

북한 정권이 강도라는 거 맞습니다. 맞고요.

그렇지만 북한 정권과 북한 주님을 나눠 생각할 수 없다는 것과

일단 그들이 총체적으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남한은 쌀이 남아 돌아 처치 곤란이라는 사실, 등등을 

복합적으로 생각해 봐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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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청신호

July 16, 2010
*.33.20.100

답변 감사드리구요 -

늦은 밤 시간 답변이라 손가락까지? 피곤하셨는지  오타가 있는데 제가 다 알아 먹었습니다..... ㅋㅋ 

[북한 정권과 북한 주민]이라 쓸 것을 오타로 -

[북한 정권과 북한 주님]이라 쓰신것같은데...... 그것도 말 되네요?

 

북한의 정권과 북한의 주님을  나눠 생각할 수 없다?!

 

제가 말한 주체사상이란  주체라는 말 자체의 본래 뜻 보다는 -

그들의 행태로 이제는 왜곡되어 버린  북한 정권 실세들의 사상과 의도입니다.

 

상식이 안통하고

너무나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강도 같은 집단 

자기 생명만 귀한 줄 알지  남의 생명은 무참하게게 찔러버리고

주관적인 이익 판단에 따라 약자의 목숨을 단칼에 베어 버리는 그들은 정말 강도입니다.

 

그런 그들은

남남 갈등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북북 갈등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요 ~  아   정말  가슴이 메지지요.

감사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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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July 16, 2010
*.104.196.126

어려서부터 자주 반복하고 고정되어버린 성서의 본문을

타성을 깨고 다시 바라보기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비슷한 설교를 하신 듯 하나

언어의 그 미묘함의 차이로부터 시작해서

결과는 점점 커질 것 같은 말씀이십니다.

 

"이웃을 찾는 방식이 아니라 이웃이 되는 방식의 삶으로 나가십시오.."

 

묵은 것을 파내고 새 것을 넣으려면 많이 반복을 해야할 것 같아요.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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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9]정용섭

July 16, 2010
*.120.170.243

유니스 님,

잘못된 교육은 받지 않느니만도 못하다는 게

나의 지론인데요.

일반 교육에서는 학생들이

조금 철이 들면 금방 사태를 파악하는데,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네요.

성서와 신앙에 대한 기초가

부실하거나 왜곡되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모든 신자가 스스로

성서 텍스트의 심층과 만나는 그 날이 와야겠지요.

그런 날이 오면

설교자는 이제 따로 설교 준비하지 않고

그냥 슬슬 변죽만 울리고 가도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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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Azure

July 16, 2010
*.220.139.34

네^^;;

노력하겠습니당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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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청년예수

July 17, 2010
*.5.234.133

모든 일과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지요. 그러나 그일과 사물을 바라봄에 있어서 근본적이로 제기되는 관점이 상실된체

논리가 비약되면 그본질에 대한 문제보다는 지엽적인 것에 메달려 길을 잃어 버리게 되지요.

현상과 본질에 대한 문제입니다.

물론 세상에 어디 하나님외에 고정된게 있겠습니까만은 계속 웃음님의 글을 잃어 보면서 느끼는 점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

그사물에 대한 인식에서 장애로 작용되며 길을 잃어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는가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제기한 문제와 비틀기가 현상과 본질의 문제라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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