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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기타 조회 수 9955 추천 수 28 2004.07.02 16:31:01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5:50-58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 4.25. 고전 15:50-58

 

영육이원론

인간이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은 서양철학의 인간론적 토대입니다. 대표적으로 헬라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순결하며 영원하다고 본 반면에 인간의 육체는 악하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하고 영원한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참된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테네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원로원으로부터 사약을 받은 소크라테스가 도망가라는 친구들의 조언을 한마디로 물리친 다음, 이웃에게 빌린 닭 한 마리 값을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담담히 사약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철학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세상의 명예와 행복을 포기하고 고목 둥치에서 거지처럼 살았던 디오게네스의 삶도 역시 육체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반해서 동양 사상가들은 영과 육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신적인 삶을 높이 산 것만은 분명합니다. 불교의 고승들이 10년씩 묵언이나 장좌불와를 통해 수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놀라곤 합니다만, 육체의 욕망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오직 정신적인 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양 스승들의 가르침도 역시 이런 영육 이원론적인 흔적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성서는 헬라 철학과는 좀 다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영과 육으로 창조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영과 육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에게 영적인 특징과 육적인 특징이 있을 따름이지 이것이 별개의 것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는 영혼 불멸 사상이 없습니다. 이에 비해 신약성서와 기독교 사상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영혼 불멸사상을 부분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육은 죽이지만 영은 죽이지 못하는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며, 바울도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 같은 교부들은 특히 절대적이고 순수한 영의 세계라 할 수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 신학의 이원론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비록 기독교 사상 안에 이런 영육 이원론적인 가르침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육을 무시하고 영만 귀하게 여긴다기보다는 인간의 참된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을 영적인 현상과 육적인 현상으로 나누어 볼뿐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그것으로 인해 주어지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는 오늘의 본문도 그런 미묘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50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 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이런 진술은 영육 이원론적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바울은 인간의 살과 피를 낮추어 볼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살과 피가 죽음으로 인해서 썩는다는 그 현실을 눈여겨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 무슨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살과 피를 영원하게 유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늘 여기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딸들의 몸도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기 어머니처럼 탄력을 잃을 것이며, 조금 더 지나면 지구 안의 한 요소로 분해될 것입니다. 이건 종교의 차원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이 그저 우리 앞의 현상을 직관할 수 있기만 해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절대적인 세계를 이렇게 시간에 의해서 아주 간단히 해체될 육체와 일치시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우리의 겉모양에만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사는 삶은 결코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 몸과 영을 구분하고 있을 뿐이지 인간에 대한 영육 이원론적인 판단을 아닙니다.

 

변화된 몸

바울의 인간론이 영육 이원론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선 51,5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런 문장은 전형적인 묵시문학적 표현입니다. 이런 묵시문학 문헌들은 우리가 따라잡기 힘든 이야기들로 짜여집니다. 어떻게 보면 해괴망측한 일들입니다. 이상하게 생긴 동물, 하늘이 종이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사건, 하늘의 일곱 별 등등, 흡사 SF 영화 같은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묵시문학적 상상력을 펼치게 된 이유는 현실의 모순과 불가사의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착한 사람이 잘 살아야 하고 못된 사람이 불행하게 되어야 하는데, 이 세상은 반드시 그렇게만 굴러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은행이자 수입만 10억 원 이상을 벌어들이는데, 어떤 사람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듭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나요? 막강한 군사력으로 약한 나라를 짓밟는 제국은 빨리 망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런 악한 힘들이 위세를 더 떨칩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현실이 곧 지나고 새로운 세계(에온)가 다가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꿈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희망했습니다. 그런 믿음과 희망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곧 묵시록(Apokalyptik)입니다.

바울도 여기서 묵시문학적 전통에 따라서 새로운 세계를 선포합니다. 그가 심오한 진리를 전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곧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말하는 것은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세계의 일이기 때문에 비밀이라는 말입니다. 묵시문학이 비밀이긴 하지만 허무맹랑하다거나 망상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흡사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던 지구의 중력을 뉴턴이 발견한 이후에 사람들이 그 중력을 알게 된 것처럼 묵시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것도 이런 영적 직관이 있던 사람들의 진술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차원을 열어줍니다. 어떤 사람은 뉴턴의 만유인력은 증명할 수 있는 과학이지만, 묵시문학은 증명할 수 없는 종교이기 때문에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둘 다 진리의 문제입니다. 다만 과학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증명될 수 있지만 종교는 미래의 역사를 통해서 증명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우리의 몸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릴 때 이미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은 변한다고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묵시사상은 곧 이 세상의 근본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기다리고 희망하는 삶의 태도라고 말씀드렸는데, 우리의 몸이 변화한다는 바울의 진술도 역시 이런 신앙고백과 맥을 같이 합니다. 무죄한 자의 고난으로 얼룩진 이 세상이 지나가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과 우리의 몸이 변화하는 것은 같은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런 변화된 몸이 곧 부활입니다.

여기서 변화라는 말을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못생긴 사람이 갑자기 이효리 양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거나 장애인이 갑자기 차두리 추구선수처럼 건강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여자들이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워지고,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면 오죽 좋겠습니다만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절대적인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똑같이 아름답고 건강하다면 아름다움과 건강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런 논리는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서 작용합니다. 모든 사람이 천사처럼 착하다고 한다면 착하다는 개념이 아예 없습니다. 지구에 모든 것이 물이라고 한다면 물이라는 개념도 없을 것이고, 모든 게 산이라고 한다면 산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선망하는 상태로 변하는 것으로 절대적인 생명을 얻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현재 우리의 몸이 아무리 완벽한 상태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참된 만족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상태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이런 상태로 영원히 살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이 변화된다는 말은 현재 상태보다 비교적, 또는 훨씬 좋아진다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형식의 삶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불멸의 몸’, 또는 불멸의 옷’, ‘불사의 옷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단지 죽지 않고 영원하게 산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그것말고는 표현할 단어가 없어서 불멸이라고 했을 뿐이지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생각하는 듯한 영원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의 몸이 변한다는 이 표현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하는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애벌레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질료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만 나비로 변한 다음에는 삶의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땅을 기어다니는 애벌레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이해하거나 인식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애벌레는 나비를 보고 위험하게 사는구나,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애벌레의 세계에는 나비라는 존재가 들어올 수 없을 것입니다.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는 근본적으로 소통이 막혀 있습니다. 흡사 물고기들에게 육지의 세계가 막혀 있듯이 말입니다.

 

미래의 궁극적 승리

이렇게 우리의 몸이 변하면 죽음이 극복된다고 바울은 이사야와 호세아를 인용해서 말합니다.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54,55).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적 상상력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해결하셨고, 부활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과정도 역시 죽음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불가사의 한 이 실체는 죄의 결과라는 것이 성서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죽음이 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죄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우리도 역시 그들과 생각을 같이 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가 해결되었다면 죽음도 극복되었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죽음을 극복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에는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결국 모두 실제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을 이기는 것, 부활신앙을 통한 이런 승리는 궁극적으로 아직 미래의 사건입니다. 앞에서도 바울이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라고 했는데, 그 때는 곧 종말이며, 완성되는 때이며, 그래서 미래입니다. 미래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별 것 아니구나, 하고 생각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즐겁게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지 먼 훗날 이야기는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역사와 인생을 좀 아는 어른이라면 이 미래를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매달리고 있는 현재는 엄밀하게 말해서 없습니다. 현재는 그것을 말하는 순간에 이미 과거가 되고 현재는 단지 미래의 현실화입니다. 이런 점에서 참되게 존재하는 것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한 평생 화려하게 살았지만 죽을 때 깊은 불안과 허무에 휩싸였다면 아무도 이 사람의 인생을 행복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불행하게 살았지만 죽을 때 참된 행복을 느꼈다면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취된 현실 안에서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미래에 일어나게 될 부활과 승리만 바라보고 현실을 간과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부활과 승리는 미래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의 현실 안에 선취된 사건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 미래의 부활은 현재의 삶을 생명으로 끌어가는 힘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선취된 사건입니다. 특히 진정한 마음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매일 매일 부활과 승리를 경험할 것입니다. 비록 징표의 차원이지만 그것은 아주 명확한 생명의 사건으로 자기 삶 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과 희망을 안고 있는 사람은 현실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비록 묵시문학적 지평을 안고 있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용맹 정진하게 만듭니다. 바울이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57,58).

왜 흔들리지 말라고 하나요? 그 당시 고린도 교회가 처한 삶의 자리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서 흔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것을 접어두고, 자신들의 생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생각 때문에 일상의 삶을 소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흡사 1992년 한국 사회 안에 큰 소동을 일으킨 다미 선교회 사람들처럼 모든 일상을 때려치우고 순전히 초월적인 구원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일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어떤 구체적인 교회의 일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론적 구원에 관한 일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이 생명을 지향하게 하는 일들 말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묵시와 현실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에 관한 묵시 없이 현실에 치우친 삶은 허무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의 현실 없이 묵시에 치우친 삶은 광신입니다. 사람들은 이 두 세계 사이의 긴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쳐서 살아갑니다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희망하는 우리는 묵시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어떤 신비의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지 영적 통찰력을 놓치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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