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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기타 조회 수 9184 추천 수 60 2005.03.07 13:04:24
성경본문 : 사무엘상 16:1-13 
2005.3.6.          
삼상 16:1-13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사울과 사무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다른 나라와 비슷한 발전과정을 거쳤습니다.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로, 그 부족에서 왕정국가로 발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던 시대를 씨족이라고 한다면, 기드온, 입다, 삼손 같은 사사들이 활동하던 대는 부족사회입니다. 이 부족사회인 사사시대로부터 왕정국가로 넘어가는 길목에 사무엘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약간 무기력한 듯 보이는 엘리 제사장이나 부패한 그의 아들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제사장이며, 사사였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확고부동한 지도자로서 자리를 잡은 후로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무엘이 늙은 후 자신의 두 아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웠는데, 그들은 엘리의 두 아들과 마찬가지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그르치는 일을 자주 행했습니다. 아무리 신앙과 인격과 능력이 뛰어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식들이라고 해도 모두 정상적으로 자라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뛰어난 지도자들도 역시 가정에서 반드시 훌륭한 남편이며 좋은 아버지가 되는 건 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어쨌든지 이 두 가지 사태, 즉 사무엘이 늙었다는 것과 그를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던 두 아들이 지도자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인해서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새로운 요구를 했습니다. 다른 나라처럼 자신들에게도 왕을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을 요구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안전과 생존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확보하겠다는 발상입니다. 사무엘은 이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백성들의 요구가 확고했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백성들 중에서 한 사람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가 바로 사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명실상부한 왕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왕정제도는 왕권의 세습에 그 특징이 있는데 사울은 자기 아들인 요나단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하고 다윗에게 빼앗겼습니다. 물론 왕정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여기에는 사울과 사무엘 사이의 갈등과 알력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성서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이 결정적으로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전쟁을 앞두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사무엘이 드려야 할 제사를 자기가 직접 주관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말렉과의 전쟁이 끝난 뒤에 그 노획물을 폐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무엘의 말을 잘 받아들이고 그때마다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야박스럽게 그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울의 왕권을 거두어들이신다고 위협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의 이런 결정이 얼마나 옳은지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는 경구가 옳기는 하지만 사울이 곧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다는 점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의 배경에는 아마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이 나라를 다스리는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왕을 원했다는 사실 앞에서 사무엘이 느꼈던 섭섭한 마음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왕에 시작된 왕정체제라고 한다면 훗날 트집잡히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왕권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작용했겠지요. 어쨌든지 결과적으로 사무엘은 사울 왕을 포기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곧 오늘 본문입니다.

이새의 집에서
야훼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사울의 일로 상심하지 말고 새로운 왕을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본문은 야훼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구체적으로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집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시지만 이것은 곧 사무엘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사울의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무엘은 왕이 될만한 인물을 여러 곳에서 수소문했겠지요. 평생 이스라엘의 사사이며 제사장으로 살아온 사무엘이었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왕을 찾아 나설 수는 없었습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파문당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공인된 왕이었던 사울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한편으로 존경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눈에 가시처럼 생각했을 가능성은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울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강요 때문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이 저지른 작은 실수를 빌미로, 더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는데도 매몰차게 왕권을 거두어가겠다고 하니, “사람을 나무에 올려놓고 흔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이런 상황이니까 아무리 조심스럽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최고의 제사장이며 예언자인 사무엘의 움직임은 결국 사울 왕에게 포착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왕을 물색하고 있다는 이런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자기의 생명을 부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렇게 일러주셨습니다.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거라. 야훼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면서 이새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러면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주마.”(2,3절). 제사 드리는 일까지 사울이 의심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각본대로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을 제사에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구체적인 제사행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사무엘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 자리까지 온 목적은 사울을 대신할 왕을 찾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이렇게 진행됩니다. 제사에 초청받은 이새의 아들들이 장남부터 차례대로 사무엘 앞에 서게 됩니다. 큰 아들 엘리압이 사무엘 앞서 섰습니다. 마음이 쫓긴 탓인지 이 엘리압을 보자마자 사무엘은 그를 선택하고 싶어 졌습니다. “바로 여기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성별하실 자가 있구나.”(6절). 그러나 야훼께서는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용모나 신장을 보지 말라. 그는 이미 내 눈 밖에 났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7절).
이 본문은 사람을 선택해야 할 사무엘에게 두 가지 기준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왕답다고 보일만한 외적인 모습입니다. 이건 단순히 키가 크거나 잘 생겼다는 뜻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능력까지 포함하는 기준입니다. 이런 기준은 당연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요즘도 학력과 학벌, 용모 같은 기준들이 출세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런 기준들이 맞습니다. 어떤 집단이나 그런 외적인 조건들이 뛰어난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인 기준이 늘 옳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속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곧 사무엘이 생각한 왕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속마음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정교육, 학교교육, 교회교육에서도 역시 명분으로만 속마음을 말하지 실제로는 겉으로 보이는 경쟁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중적인 이유는 사람의 속마음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마음이 착하다거나 속이 깊다는 것으로는 우리가 사람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속마음은 훨씬 심층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단지 마음이 착한 게 아니라 영적인 분별력을 갖추는 것 말입니다. 이런 영성은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영성은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택은 거의 일방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성서에는 그런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기도 하도 유기하기도 한다고 말입니다. 간혹 칼빈의 ‘이중예정’에 대한 옹호와 비난이 제기되는데, 우리는 이런 문제를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합니다. 칼빈의 예정론에 근거해서 우리가 구원 결정론에 빠지거나, 혹은 우리의 자유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예정론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훨씬 근원적인 사태를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왜곡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기준이 우리의 관점에서 일방적인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이 기준으로 삼는 그 속마음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뿐이지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를 훼손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선택
이새의 일곱 아들들이 사무엘 앞에서 면접시험을 모두 치렀습니다. 사무엘이 보기에 일곱 명 모두 야훼 하나님의 기준에 들지 못했습니다. “이 아들 가운데는 야훼께서 뽑으신 아들이 없다.”고 선언한 후 더 이상의 아들이 없는가 묻습니다. 실망하고 있던 이새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막내가 또 있긴 하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11절). 아들을 전부 데려오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이새가 막내아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미 일곱 명의 아들만으로도 이새에게는 자랑거리였을 겁니다. 더구나 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 중동지역에서도 역시 모든 건 장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여덟 번째인 막내는 있으나 없으나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막내인 다윗은 형들이 면접을 보고 있는 시간에 양을 돌보고 있었었습니다.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좀 다르게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별 볼일 없을 것 같던 막내를 데려오라는 사무엘의 명령을 듣고 이새는 사람을 시켜 다윗을 불러오게 했습니다. 키는 별로 크지 않지만 다윗은 “볼이 붉고 눈이 반짝이는 잘생긴 아이”였습니다. 사무엘의 마음에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메아리쳤습니다. “바로 이 아이다. 어서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12절). 사무엘은 기름 채운 뿔을 집어 들고 형들이 보는 앞에서 막내인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야훼의 선택 기준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다윗에게 무슨 가능성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인 이새도 그걸 미처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중요한 면접에서 제외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은 다윗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야훼의 선택은 무조건적인 게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것처럼 보이는 야훼의 기준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야훼의 기준
야훼의 선택에서 사무엘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야훼의 기준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새의 막내가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야훼의 말씀을 새겨들을 수 있는 능력이 사무엘에게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 아이다. 어서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에 이런 야훼의 음성을 들었다는 건 바로 그의 영적인 인식이 그런 정도로 예민하고 심층적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야훼가 우리 사람들에게 말씀을 건네는 통로는 바로 우리의 영적인 인식이라 할 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야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는 하룻밤 철야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작년 말 남아시아에 닥친 지진 해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각각의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주장들을 우리가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다가는 자칫 자신의 잠재의식이 요구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이비 이단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신의 종교적, 혹은 세속적 욕망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강변하는 일도 많습니다.
오늘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울 때 야훼의 음성을 새겨들었듯이 우리가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길은 영성의 심화에 놓여 있습니다. 이 영성은 우리의 심리나 감정의 작용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물리학과 사회학 같은 지성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성은 사물과 사태 이면에 작용하는 생명의 힘을 포착할 수 있는 우리의 영적인 통찰력과 인식능력입니다. 다윗의 속마음을 사무엘이 알아보았다는 것은 바로 그의 영적인 통찰력과 인식능력이 야훼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궁극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은 바로 이런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이 확보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야훼의 말씀을 듣는 일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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