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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 섭리

성령강림절 조회 수 16136 추천 수 0 2009.06.22 21: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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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세기 45:1-15 
 

하나님의 구원 섭리

(창 45:1-15)


요셉 이야기

야곱에게는 네 명의 여자를 통해서 얻은 열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열 두 명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태두가 되었습니다. 열한 번째 아들이 요셉입니다. 요셉에 관해서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을 겁니다. 모두들 요셉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의 삶에 기독론적인 의미가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그는 언제나 성실하고 정직했으며, 주인집 여자의 유혹도 뿌리쳤습니다. 형제들에게 배신을 당했지만 그것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한 점의 흠도 없는 인물로 묘사된 이는 요셉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요셉의 운명이 드라마틱하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았습니다. 야곱이 특별하게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양을 치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데 요셉은 고급 옷을 입고 아버지 곁에서 놀고먹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형제들은 아버지 몰래 요셉을 광야 거상들에게 팔았습니다. 요셉은 결국 이집트의 장군 보디발 집의 청지기가 되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이집트의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인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벼락출세를 한 데에는 해몽의 능력이 있습니다. 함께 옥살이를 하던 이집트 고위 관리의 꿈을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해몽해주었습니다. 나중에 이집트의 파라오가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해몽하지 못했습니다. 옥살이에서 풀려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파라오에게 데리고 오게 했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정확하게 해몽해 주었습니다. 이집트에 칠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가 다시 칠년 동안 흉년이 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셉은 풍년과 흉년을 대처할 방법도 제시했습니다.

흉년은 이집트만이 아니라 요셉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살고 있는 팔레스틴 지역까지 덮쳤습니다. 먹을거리가 떨어진 야곱 가족들은 이집트에서 양식을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형제들이 돈을 들고 이집트까지 와서 총리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차여차 해서 양식을 사러 왔다고 말입니다. 요셉은 대번에 형제들을 알아보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요. 우선은 형제들이 너무 놀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겠지요. 자신들이 시기심으로 팔아버린 동생이 지금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당장 알게 된다면 기절초풍을 할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이 양식을 사러 이집트를 오가는 와중에 몇 번에 걸쳐서 시험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형제들이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아버지에 대한 효심도 깊었습니다. 특히 형들이 막내 동생 베냐민을 아낀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베냐민은 열두 형제 중의 막내로 여러 배다른 형제 중에서 요셉의 유일한 친 형제입니다. 요셉이 트집을 잡아 베냐민만 이집트에 남겨두고 다른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을 때 넷째 형인 유다가 나서서 자기가 대신 인질로 잡혀 있을 테니 베냐민을 보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유다의 이 이야기를 듣고 요셉이 얼마나 감격했을지는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문 창 45:1-15절은 요셉의 그 마음을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요셉은 관리들을 모두 내보고, 자기가 누구인지 형제들에게 털어놓은 뒤 북받치는 감정을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신가, 하고 요셉이 물었지만 형제들은 너무 놀라서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자신들이 옛날 요셉에게 행한 일이 기억났겠지요. 요셉이 자기 정체를 말하는 순간에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요셉은 형제들을 진정시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그렇게 된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뒤에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알렸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모든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해 와서 살라고 했습니다. 모든 말을 마친 뒤 요셉은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울었습니다. 형제들과도 안고 울었습니다. 그제야 형제들이 요셉과 정상적으로 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장면은 우리에게 별로 낯설지 않습니다. 마치 남북이산가족의 상봉과 비슷합니다. 


먼저 보내시는 하나님

요셉 이야기가 아무리 감동적이라 하더라도 요셉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건 곤란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관심도 요셉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요셉 이야기에 꿈이 자주 나온다고 해서 요셉처럼 꿈을 꾸자, 비전을 갖자고 말하는 건 본문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것입니다. 요셉이 다른 구약의 인물들보다 여러모로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문제도 많습니다. 그는 매점매석을 통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자유농이었던 이집트 민중들을 농노로 만들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지금 요셉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요셉에게 초점을 맞추는 건 본문을 벗어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성서기자가 드라마틱한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요셉의 입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전달됩니다. 요셉은 자기를 이집트로 팔아버린 일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던 형제들에게 자신이 이집트에 오게 된 것은 형제들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5,7,8절에서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은 요셉 개인의 말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체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섭리하셨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이 섭리 신앙은 하나님이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는 의지를 갖고 이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입니다. 그 인격적인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요셉의 고백처럼 요셉을 미리 이집트로 보내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나라로 간섭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개인의 운명에도 개입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있으신지요. 여러분이 지낸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시나요? 나의 인생에 어떤 의지를 갖고 있는 분의 생각이 개입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우리가 하나님을 옳게 믿고 경험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거꾸로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런 섭리 신앙은 우리를 감사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기 어려운 일들도 많습니다. 불행과 악이 그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성실하게 살았는데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불치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부모를 잘못 만났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외국으로 입양되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무죄한 이들의 고난도 그치지 않습니다. 뻔뻔하고 악한 이들이 잘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도 과연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싶습니다. 대신 성서가 말하는 사실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분문에 따르면 불행과 악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요셉은 요셉을 이집트 거상들에게 팔아넘긴 원죄로 불안해하는 형제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일은 형제들이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형제들이 오래 전에 동생 요셉을 판 것은 분명히 악입니다. 이것은 카인의 아벨 살해보다는 약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죄악입니다. 성서는 그런 악 자체를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인간의 악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겁니다. 악마저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욥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보십시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삶과 믿음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탄은 욥의 환경이 나빠지면 하나님을 부정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를 시험하려고 마음먹고 하나님에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욥은 재산을 잃고, 자식도 모두 잃었습니다. 극한의 피부병에 걸려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욥을 향해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친구들도 모두 하나같이 욥을 비난했습니다. 욥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탄이 행한 불행이며 악입니다. 그러나 욥기서는 그 사탄의 행위를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탄의 능력이 대단한 건 분명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간교하고 강력합니다. 하나님과 쌍벽을 이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 사탄의 능력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탄은 비열하고 우스꽝스럽기조차 합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데 선수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시기심으로 온갖 머리를 짜내서 동생 요셉을 팔았지만, 오히려 요셉을 이집트로 미리 보낸 하나님의 일이 되고 말았다는 본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서는 악마저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만이 역사의 승리자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선포를 진리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걸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은 분명합니다. 비록 불행한 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은총이 개입되어있다는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겁니다.

하나님의 섭리 신앙을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결혼하고 싶어도 대상이 없고, 결혼은 했는데 마음에 안 들고, 자식들은 말을 안 듣고, 하루하루가 짜증스럽다고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일상에 푹 빠져서 다른 것을 못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도 인신매매 당하듯이 이집트로 팔려갈 때는 신세한탄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다음에 보니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절실하게 깨달으려면 우리의 삶을 미래의 지평에서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답답한 현실만 보이지만 미래의 시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 보일 겁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말입니다.

아직 미래가 오지 않았으니 미래의 시각으로 현재를 본다는 게 쉽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먼저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현재는 과거의 미래입니다. 오늘의 시각으로 과거를 바라보십시오. 그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보일 겁니다. 그게 보이지 않나요? 보이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면 현실이 아니라 허상을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여러분에게 현재의 삶이 최고입니다. 그걸 모른다면 아예 처음부터 신앙을 다시 배우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만 하면 모든 삶이 그에게 베스트라는 뜻입니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옥에 계시다면 그곳을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제 목회에서도 현재의 상황이 베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생명 지킴이

저는 앞에서 하나님의 섭리 신앙으로 들어가려면 우리의 삶을 미래의 지평에서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미래의 지평이 무엇일까요? 거기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곳에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온전히 계시하십니다. 본문에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먼저 이집트로 보낸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창 45:5,7)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바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미래에 우리에게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 기자들이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어떻게 인류 역사에서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명시적으로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기껏해야 기근을 면하는 것이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부활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우리 운명의 마지막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생명 구원을 향해서 우리가 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까지는 마치 요셉의 운명처럼 우여곡절이 많겠지요. 그 모든 것은 우리로 그 부활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입니다.

끝으로, 요셉은 형제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창 45:5)라고 했습니다. 섭리 신앙을 아는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한탄하지도 않습니다. 신세한탄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섭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 섭리에 영혼의 귀를 활짝 열어놓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으려고 선하게 투쟁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일어난 고난과 시련으로 근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항상 기뻐합니다. 그 너머에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요셉 형제들처럼 모두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겁니다. 그 놀라운 생명의 환희를 오늘 앞당겨서 살아가십시오. (2009.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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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가난한 심령

June 22, 2009
*.192.251.251

저도 저와 제 주위 환경을 저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멀리 우주 밖에서 보는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도록 만들어주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를 현재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미래의 관점에서 보라는 취지의 목사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교회 성도들 중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성경의 말씀도 눈에 안들어 오고, 기도도 되지 않는다면서 호소를 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 분들에게 어떤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말씀으로 위로를 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나도 왜 성도님이 그런 고통을 겪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겪는 경제적 고통보다 더욱 힘든 인간관계, 질병, 자녀문제 등의 고통을 겪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힘들 때는 앞 날을 걱정하기 보다 더욱 여유를 깆고 차라리 부인과 둘이 여행을 떠나세요.'라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합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 속에서 '재림의 소망'에 기대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차라리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에 살았더라면 참 믿음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인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의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고통 속에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성도들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갖고 보살피고 있는지...단지 교회 밖 세상에 자선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아니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는 사람이 기뻐하기 위한 것이 아닌지...곰씹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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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2, 2009
*.139.165.36

가난한 심령 님,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이군요.

교회 목사가 교우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입니다.

성서와 기독교 역사가  말하는 영적인 시각입니다.

그게 당장 배고프고 병든 이들에게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문제는 그런 영적인 시각이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성속이원론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신자들과 더불어 삶과 죽음과 부활과 생명의 영적 세계를

진지한 태도로 받아들이고 고민하고 대답을 찾아나가기만 한다면

목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임에 틀림 없을 겁니다.

주여, 저희에게 영적인 연민을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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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June 23, 2009
*.104.197.43

이번 주일학교의 본문도 목사님을 따라서 이 부분으로 했더랬습니다.

요셉을 가볍게 리뷰하면서 채색옷을 혼자서 입었다는 대목에서 아이들,

"요셉, 재수없어요~~ "

부모와 형제들이 꿈에서 자기에게 절했다는 이야기에서는,

"요셉, 왕따시켜야해요~~"   컥...

 

불행과 악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이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그 분을 다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현실에 매몰되어있다는 생각이 진하게 드는 한주였었는데

저의 영적 시각이 다시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 말씀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 : 28)

부르심의 주체시요, 모든 것의 소유자시요, 합력하시는 능력자시요,

善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시라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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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3, 2009
*.139.165.36

좋은 아침이군요.

주일학교 아이들의 저 날카로운 멘트를 우리가 배워야겠군요.

한 달에 한번 주일학교 아이들을 지도하느라 수고가 많으신데,

어쩌면 그 아이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울지 모르니,

그런대로 괜찮지요?

선 자체이신 하나님이라,

성서가 그걸 말하고,

신학자들과 영성가들이 그걸 말한답니다.

그 인식은 결코 나이브한 게 아니죠.

악의 현실을 꿰뚫고 나갈 때만이

하나님은 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선한 주님이 오늘 하루도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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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June 23, 2009
*.104.197.43

목사님께서 惡을 꿰뚫는 善, 그 역동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니

삶을 위축시키는 여러 가지들을 또 바라보게 되는군요.

선악과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다시 그 실체를 느낍니다.

선하신 주님,

주님의 선하심이 우리의 삶에 깊이, 섬세하게, 강하게 임하시기를..

구별치 못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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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눈꽃

June 23, 2009
*.187.19.193

유니스님!

교회학교 선상님 이시군요

"요셉 왕따 시켜야 해요~" 아~ 어른이된 나도 그런생각을 하고 있었다는........ㅋ ㅋ ㅋ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게된 원인 제공자는 야곱이야 에이 이런 몹쓸 !끄ㄹㄹㄹㄹ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는 무모 자격도 없어 하며......이런 말 할 자격도 없는 주제 가(딸랑 아들 하나만 낳고 말은 주제)

근데 야곱은 자기의 자식 편애에 대해 회개 했을까?

성서엔 그런 기록이 없으니.........그냥 자식들 원망만.....

유니스님 교회학교 교사 어렵지요?

요즘 매일 묵상에 "고귀한 낭비"시리즈 묵상하며 " 고귀한"이단어가 머리 속에 계속 맴돌면서....

과연 나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고귀한 이란 단어를 붙일만한 일을 했던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생각나는게 없으니 후..........

교회학교 교사 , 고귀한 일임니다 ^ ^*

어려운 일 잘 감당 하시도록 마음으로 기도할께요

수련회때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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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June 23, 2009
*.104.197.43

흠..눈꽃님 저는 주일학교 선생이긴한데 마이 부실합니다.

대구샘터는 교사가 4명입니다. 많지요?

첫 주는 성찬을 나누며 학생들이 어른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주들은 정목사님의 설교 시작 전에 자리를 옮겨서 교사 1인씩 돌아가며 가르칩니다.

그니깐 1년에 12번 정도 하겠군요. 완전 한가한 교사입니다..ㅋㅋ

교사를 하기로 하면서 좀 걸렸던 것은 제가 다비아에서 깨달아진 부분이 아니라

꼬마 때부터 습득된 시각으로 가르칠 것 같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샘터에서 지원하는 월간교재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래서 꼼수(?)를 부리는 것이 공과 공부의 본문을

교회력을 따른 3가지 본문 중에서 선택하고 목사님의 설교요약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같은 흐름을 따를 수 있을 것 같고, 목사님의 설교 전개를 예측하는 맛도 있어요.

여하튼 케리그마에 집중하라시는 건 기억하니깐

엎어치든 매치든 그렇게 해봐야지요머...

말씀드렸다시피 완전 한가모드의 교사입니다. 수고하고는 거리가 촘....

한가한 교사지만 눈꽃님의 기도는 멈추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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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smileyun

June 24, 2009
*.156.12.58

세 아이의 아버지인데요,

세 아이가 다 귀하고 좋고 아름답지만, 제 마음에 좀더 기대가 되고, 뭔가 일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더욱 드는 아이가 있거든요.

편애 아닌 편애가 약간은 있는것 같아요.

편애라는 단어가 약간 부정적인 느낌이 있어서 그렇지 사실 편애를 받는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좋은 것이 거든요. 저희 아내가 저를 매우 사랑하는데, 제가 저희 아내에게 '나만 편애 하지 말고 다른 남자도 좀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거든요. 편애는 받을 수록 좋거든요. 

이런 관점에서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 것을 해석하면 좀 억지일까요? 좀더 기대가 되고, 사랑스럽고, 뭔가 모를 마음이 가는 아이가 요셉이 이었는데...ㅋㅋ 물론 형제들 입장에선 기분 좋지 않겠지만, 요셉의 입장에선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전 하나님이 나를 좀 심하게 편애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세상이 표시나게 편애하시는 하나님! 물론 지금도 저를 무지하게 편애 하시죠. 하나님이 여러분들도 편애 하시죠?

늘 지나가다 그냥 주절 주절 처음으로 남겨 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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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눈꽃

June 23, 2009
*.187.19.193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만 하면 모든 삶이 그에게 베스트라는 뜻입니다." 이말씀은 평소에 제가 늘 해오던 말이라 공감이 가지만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옥에 계시다면 그곳을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 이말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안계신 곳이 과연 천국일 수 있나?

목사님!

이번 주일 설교 말씀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아~멘이 가슴저 밑바닥에서 솟구치는데 참았습니다(그냥 속으로만 했지요)


가뜩이나 엄숙하고 조용한 예배 분위기 흐리는거 아닌가 해서요   ㅎ ㅎㅎ

어떤 교우님은 집사님 집사님 이런 설교 들어봤어!?


 난 이본문 가지고 이런 설교  듣기는 처음이야


또 점잖고 품위가 넘치는 모 권사님, 난 오늘 설교말씀에 눈물이 나와서 참느냐고 혼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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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3, 2009
*.139.165.36

나이가 든다는 건 삶의 관심이 한 곳으로 집중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봅니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든 사람들끼리는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 통하는 게 있기 마련이죠.

위의 모 권사님이나 눈꽃 님이나 저나, 모두 나이가 충분히는 아니지만

들을 만큼 들었다는 증거인가 봅니다.

육체는 낡고 시들어가나 영혼은 젊어져 봅시다.

오늘도 복된 하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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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늘오늘

June 23, 2009
*.239.101.218

 

요셉은 반생명의 꼭두각시였을 뿐,

예수와는, 대척점에 선 인물로 보입니다.

이런 드라마를 미화할수록, 예수의 복음과는 멀어지죠.


더 나아가, 우리의 찬송은

내가 예수쟁이라는 데서가 아니라

살아있다는 것, 생명의 일부라는 것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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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3, 2009
*.139.165.36

늘오늘 님,

잘 지내지요?

이렇게 세월이 흘러흘러

늘오늘 님과 알고 지낸 세월이 좀 되네요.

맞습니다.

요셉은 문제가 많은 인물이죠.

위 유니스 님이 전한 주일학교 아이들의 멘트가 정곡을 찌른 거 맞습니다.

그렇더라도 꼭 나쁜놈 할 것도 없겠죠?

그런 류가 우리의 보편적 인간성을 형성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세상이 너무 단조롭겠지요? ㅎㅎ

우리가 예수쟁이라는 사실을 무슨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건

꼴불견이기도하고 여전히 삶의 미숙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렇게 자랑스러운 건 아니겠지요.

예수쟁이라는 정체성을 바르게 안다면

당연히 생명의 일부라는 사실이 더 생생하게 다가올 겁니다.

우리는 예수쟁이로서 보편적 생명이 무엇인지를 맛본 사람들이니까요.

아마 늘오늘도 그걸 말하는 거겠지요.

오늘 하루도 휘파람불며 안전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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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늘오늘

June 23, 2009
*.239.101.218

 

그리움 절반, 삐딱선 절반, 충동적으로 댓글을 달았는데,

목사님 답글을 보는 순간, 삐딱선이 죄송함으로 바뀝니다.

제가 생각해도 저는 너무 삐질이 기질에 양철냄비 같지만,, ㅋㅋ^^;

그래도 감사한 마음을 얼른 표현하고 싶어서요. ^^

감사합니다. 목사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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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June 23, 2009
*.208.130.72

하나님의 섭리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목하며, 일상에서 느끼며 살아가는 것도 신앙이고

그것이 영성이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목사님~

저는 그런 면에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참다운 영성을  맛본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욥이나, 요셉도  자신들의 고난이 하나님께로 부터 시작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

욥이나, 요셉을 비롯하여 구약의 많은 인물들...

 그들은 이미  고차원의 영성을 소유한 자들이란 생각은  어떨까요? 목사님^^   

요셉 이야기에서도 느낄수 있듯이  하나님은 결국에는 모든 일을  선하게 이끌어 나가리라 믿고 싶습니다.

 어그러진 창조 질서,  보이지 않는 악의 존재론적 힘,  불완전한 세상, 정의가 거짓에 가려진 세상,

이 모든 흐트러진 것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바로 잡고 세상을 참다운  정의와,  사랑으로

완성 시키시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 하리라는 믿음으로 살아 가고 싶습니다 ..

 미래의 지평에 하나님이 자기를 온전하게 계시하면서 기다린다는 말씀...

하나님이 섭리하는 역사에 영혼의 귀를 기울이며  

살리는 생명이 되시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 설교 말씀에 힘을 얻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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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3, 2009
*.139.165.36

별달 님이 위에서 질문한 것으로 그대로 옳소이다에요.

그분의 섭리가 우리의 삶 전체에 마치 아침안개처럼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사는 게 기독교 영성의 진수랍니다.

전체 대글에서 별달님의 완전히 새로운 영적 실존을 발견할 수 있네요.

이럴 수가 ....

별달님의 경우가 바로 다비아에서 이룬 가장 큰 업적이군요. ㅎㅎㅎ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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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수우

June 23, 2009
*.7.141.160

목사님, 안녕 하세요, 전주에 여행을 다녀 왔답니다.

제가 잘 아는 장로님을 만나 식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전주에서 명성이 좀 있으신 장로님이십니다.

신문에서 읽었다면  어떤 목사님인지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데

 " 정 영석 인것 같기도 하고 ~~~~~" 

한국에서 이름이 날리는 목사님들  설교를 그렇게 분석을 하여 잘 지적해 놓으신

어떤 첨 보는 목사님이 있으니 꼭 저에게  서점에 가서 그 책을 사서 읽어 보라는 것이였습니다.

당신은 신문에서 설교비평 을 읽고서 스크랩 하여 장로연합회때  장로들에게

나누어주었다면서 그렇게 당신의 생각 과  같은 생각을 써 놓았다고 감탄을 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설교 비평을 하신 목사님 이름을 까먹었는데 이름만 알면 그 목사님 책좀 사서

읽겠는데 스크랩 해 놓은 신문이 어디로 가 버리고 이름도 기억이 안나서

안타깝다는 것이였습니다.

히히. 제가 누굽니까.

목에 힘을 주고 목사님에 대해서 설명을 쫙 늘어 놓았지요.

그리고

"제가 그 목사님 을 잘 안답니다. "

라고 결론을 힘을 주어 말하면서  끝맺었다는 거 아닙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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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3, 2009
*.139.165.36

그것 참,

오래 살다보니 이상한 일도 많군요.

내 이름이 많이 알려진 게 아니라

수우 님의 발이 넓으신 거랍니다.

어쨌든지 재미 있네요.

예수뜰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사진 좀 올려주세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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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수우

June 24, 2009
*.7.141.160

목사님, 사진이 너무 커서 올라가지 않습니다,. 줄일줄 몰라서 사진을 못 올리겠어요.

옛날에는 자동으로 줄여져서 올라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샘터교회 새성전으로 옮기면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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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4, 2009
*.139.165.36

수우 님,

사진 건은 알았어요.

다른 방식으로 줄일 수 있으니 한번 해보세요.

시간이 널널할 때요.

서울샘터교회 예배 처소는 언제 옮길지 모르니

그 전에 왕림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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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June 24, 2009
*.49.90.41

목사님

여러 번 읽으면서 말씀이 달고 꿀 같다는 말 실감합니다.

옛날에는 교회를 벗어나면 잊어버리던 그 말씀을 요즈음은 1주일 내내 묵상하게 됩니다.

돌아보면 무지하고 죄많은 인생이었는데도 하나님은 늘  제 인생의 여정에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지난 주는 다른 교회에 남편과 갔는데 오 마이 갓!

졸고 난 남편 왈!

이 교회 설교는 대기 싱겁네?

정목사님 설교 듣고 나니 더 못 들어서 잤다아이가. 라네요.

목사님,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 참 !

아무튼 연속 3주나 나간 일은 처음 입니다. 목사님께 감사 드려요.

늘 신선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다음 주일에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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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4, 2009
*.139.165.36

이일녀 교우,

지난 주일 못 뵈었는데 다른 교회 예배에 가셨군요.

잘 했습니다.

가끔 그렇게 바람 쏘이는 것도 좋지요.

남편의 말씀이 재미 있군요.

다음 주일에 두분 선생님 함께 기쁨으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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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June 24, 2009
*.49.90.41

서울에 일이 생겨서 같이 다녀왔지요.

대구라면 당연히 나의 사랑 샘터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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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김철우

June 24, 2009
*.112.10.41

목사님, 감사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과 눈물, 심지어 어리석은 실책과 또 악행들마저 죄다 앞질러

부활생명을 완성하시는 위대한 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의 설교는 마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 8장 28절의 해설 같아요.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우리의 운명 마지막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진술에서 흥분된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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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4, 2009
*.139.165.36

김철우 님,

제 설교를 간단명료하게 요약을 잘 하셨군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과 그 약속이

우리의 영혼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답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절망이지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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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김재학

June 25, 2009
*.190.166.232

목사님~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 말씀을 통해서 요셉 이야기에 대한 point를 제대로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꿈의 사람 요셉,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와 같은 제목으로 어느 목사님들은 우리도 Vision을 품어야 한다고 그래야 애굽의 총리와 같은 인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설교하기도 하지요..

그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도대체 요셉이 꾼꿈과 우리가 가져야할 Vision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꿈이고, 게다가 그 꿈 때문에 요셉은 핍박을 받았지, 그 꿈 때문에 총리가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요셉이 술맡은 관원장과 바로의 꿈을 해석하긴 했지만, 그것도 Vision과는 전혀 상관 없다고 생각이 되구요..

현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한 요셉 이야기를 한낱 성공 방법론 쯤으로 전락시키는 값싼 설교들에 치를 떨게 되네요..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제가 느끼는건..

정말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를 감사하며 성실하게 사는 것 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하나님께 보탬이 되지를 못하는 것 같아요.

정말 모든 것이 은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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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6, 2009
*.139.165.36

김재학 님,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대한 인식과 고백인 성서를 통해서

우리의 현재적 삶에 역동성이 주어질 겁니다.

그 역동성은 세상이 주는 것과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겠지요.

김재학 님의 바람처럼 우리 모두가

그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현재를 감사하면 성실하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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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모통이돌

June 25, 2009
*.46.125.253

최근들어  출근길에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다가 나라가 이렇게 되었나, 도대체 왜...? 라며

그래 70-80년대는 더 흉흉했겠지, 그래도 민주주의 만들었잖아, 하며 애써 자위하지만 

그래도 이건 도무지 '아니다' 싶은 생각이 절절합니다.

하지만 '악마저도 하나님의 통치아래있다'는 말씀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이번 설교말씀, 영성이 담긴 '신학적 시국설교'로^-^, 갑갑할때마다 읽고 또 읽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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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6, 2009
*.139.165.36

모퉁이돌 님의 대글로

제 설교가 한 한계 업그레이드 된 것 같군요.

영성이 담긴 신학적 시국설교로 말이에요.

성서 텍스트와 오늘의 컨텍스가 신학적 영성 안에서

접목되는 길을 찾는 게 바로 설교의 자리겠지요.

제 설교가 도움이 되셨다니 주님의 은총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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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잠자는회색늑대

June 26, 2009
*.21.59.18

넘어의 세계를 바라 보고자하는 이상을 갖지만 늘 현실의 벽이 크게만 다가옵니다.

왠지 모를 괴리감에 빠진다고 해야 할까요?

동전에 앞면과 뒷면같이 앞에서 환한 미소와 함께 기쁨과 찬양의 시를 노래하지만..

돌아서면 한숨짓고 원망과 분노가 끊이질 않으니 그 상황을 어떻게 지혜롭게 넘어로 바라 보아야 할지

많은 고민들이 절 자유롭지 않게 합니다..

물론 말씀이 지혜를 주시는 것이 사실이고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연결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큰 어려움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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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6, 2009
*.139.165.36

늑대 님,

신앙을 삶과 일치시킨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닌 거 맞습니다.

나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봐야지요.

아는 건 단지 정보로 소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깨닫는 건 그 세계 안으로 풍덩 하고 들어가는 거죠.

동양의 선승들이 장좌불와로 수년동안 수행하는 이유도

아는 것에서 깨닫는 단계로 나가려는 데 있답니다.

당장은 잘 안 되도 방향을 갖고 천천히 나가면

성숙한 신앙의 경지에 다다를 것으로 봅니다.

함께 가 봅시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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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잠자는회색늑대

July 08, 2009
*.21.59.18

감사합니다^^

 

반짝하고 쉽게 해결되는 문제는 없는법이니까요..

 

또 찾아 뵙겠습니다..^^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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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지니

June 29, 2009
*.169.92.180

안녕하세요. 목사님 주로 눈팅만 하다가 이렇게 글 올립니다.

제가 다니는 엘에이에 있는 교회 목사님께서도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부분이 목사님 설교하신 부분과 겹치는 게 있다보니 궁금해져서요. 창세기 47장 13-26까지의 요셉의 군주제정책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이부분은 요셉이 영악하게 바로에게만 이득이 되도록 머리를 써서 모든 토지를 바로의 것으로 돌려, 당시 자유농을 모두 소작농으로 만든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도 일차적이며 인본주의적이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러시면서 이 내용을 자기부인, 자기부정을 하고 하나님 주관으로 모든 것을 맡기는 삶에 대한 태도로 봐야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것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그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그 처분대로만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라고...그러시면서 민주주의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이상일 뿐이지,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기독교적인 형태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비운 채 살아가는 기독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것이라고 이야기 하시더군요. 그렇다고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이야기 하신것은 아니고요, 세상의 것을 바라고 사는 현대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부정을 하지 않은체 하나님한테 뭐 해달라고만 한다고 지적하면서, 세상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선지자들의 이야기지 절대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아니라는 내용의 설교였습니다. 요셉의 군주제 확립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하는 방법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면 이 내용이 왜곡되어 절대 권력의 교회목사님 혹은 정치세력에 대해 비호하는 내용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목사님께서는 이런식의 해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서요. 갑자기 황당한 질문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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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지우파

July 04, 2009
*.233.229.194

그렇군요.

사탄 조차도 인간의 역사속에서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심을 ......

더 넓은 세계를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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