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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의 주, 구원의 주

성령강림절 조회 수 9604 추천 수 91 2008.10.12 14:3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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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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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2. (살전 1:1-10)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읽은 데살로니카 전서는 현존하는 바울의 편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고 있던 기원 후 50,51년 사이에 데살로니카 전서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지방 총독 갈리오를 만난 적이 있는데,(행 18:12) 이 갈리오 총독의 이름이 새겨진 명문이 20세기 초에 델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 명문에 따르면 갈리오가 고린도를 통치하던 시기가 바로 기원 후 50,51년입니다. 데살로니카 공동체는 이 편지가 기록되기 1,2년 전인 기원 후 49년에 세워졌습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카 공동체와 바울에게 무슨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2천년이라는 세월을 넘어가야 합니다.

데살로니카 공동체의 모범
바울은 1절에서 일반적인 인사를 나눈 뒤에, 2절에서 데살로니카 교회에 속한 교우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 교회를 위해서 기도드린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은 덕담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감격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격에 빠지는 경우는 대개 큰 어려움이 해결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바울에게는 좋은 일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재정적인 어려움이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우들이 넉넉한 선교비를 지원해 줘서 이제는 더 이상 노동하지 않고 복음 전하는 일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 실제로 중요한 것인데, 데살로니카 공동체가 많은 신앙적 위기를 극복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의 토대에 올라섰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런 소식을 디모데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원래는 바울이 직접 데살로니카를 다시 방문하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디모데를 대신해서 보냈는데, 그가 기대 이상의 좋은 소식을 갖고 돌아왔습니다.(살전 3:6)
데살로니카 공동체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의 기분이 어땠을지는 갈라디아서와 비교하면 확실하게 손에 잡힐 겁니다. 갈 1: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하느님을 외면하고 또 다른 복음을 따라가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갈 3: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왜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여러분의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미혹시켰단 말입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신이 뿌린 복음의 기초가 헛수고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던 바울에게 디모데가 전해준 데살로니카 교회의 소식은 가뭄 끝에 단비와 같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데살로니카 공동체의 무엇이 기쁜 소식이었는지에 대해서 바울은 본문 3절 이하에서 설명했습니다. 데살로니카 공동체는 믿음, 사랑, 희망을 바르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희망을 놓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걸 쉽게 풀면, 믿음과 삶의 이원론적 분리가 아니라 일치를 가리킵니다. 생명의 능력인 성령을 받았다고 말은 하면서 그게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런 일에서 이미 모범을 보였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그 사실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굳은 확신으로 전했다고 합니다. 일례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직접 일을 해서 먹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가죽 세공 기술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삶에서 그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카 교우들은 바울을 본받았으며, 그것은 곧 그들이 주님을 본받은 것이기도 했습니다.(갈 1:6b) 그래서 데살로니카 공동체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의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7절) 결과적으로 주님의 말씀과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모범적인 믿음이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여기서 ‘모범’이라는 말을 조심해서 살펴보십시오. 7절에서 바울은 마케도니아 공동체가 주변의 모범, 즉 ‘튀포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에 앞서 “주님까지 본받았다.”고 하는 6절에서 사용된 단어는 ‘미네테스’, 즉 모방한다는 동사입니다. 이 두 단어는 한 쌍으로 사용된 것인데, 이것은 오늘의 독일어나 영어로 번역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헬라어의 고유한 뉘앙스가 여기에 숨어 있다고 합니다.
이 헬라어의 개념은 단순히 상대방을 그대로 뒤따른다는 뜻이 아니며, 또한 어떤 사람을 추켜세우려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잘나서, 데살로니카 공동체가 잘나서 모범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각인되어서, 성서적 언어로 바꾸면 인침을 당해서 모범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말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도장을 찍듯이 각인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이런 신앙을 본받은 데살로니카 공동체는 다시 주변 모든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즉 이들의 신앙이 주변의 여러 신자들에게 각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모범이 바울과 데살로니카 공동체를 거쳐서 인근 각처의 신자들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보낸 어머니처럼 늘 염려되던 데살로니카 공동체가 이런 모범을 보일 정도로 자랐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기쁨을 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데살로니카의 위기
이런 설명을 듣고 별 것 아닌 일을 두고 침소봉대 하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지금 데살로니카 교회는 기껏해야 2,3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아직 기독교라는 종교가 정식으로 출발하지도 않은 때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와의 관계도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미래가 어찌될지, 더 정확하게는 바울이 뿌린 복음의 씨가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당시에 비주류에 속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자리를 잡는다는 건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도행전의 보도만 보면 바울의 선교 사역이 큰 어려움 없이, 부분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주 역동적으로 확산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복음 활동에는 위기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 위기의 한 중심에 데살로니카 교회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감격에 겨워 데살로니카 교회를 모범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런 데 있습니다. 전쟁 통에 잃어버린 다섯 살 난 아들이 이제 청년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9,10절은 그 위기에 핵심을 암시적으로 설명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카에서 처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상을 버렸다는 말은 지금 데살로니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원래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에 회당을 드나드는 이들은 세 부류였습니다. 첫째는 철저한 디아스포라 유대인, 둘째는 유대교로 개종해서 율법을 지키는 이방인, 셋째는 유대교에 관심이 많지만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들인데,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일컬어졌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회당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율법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이니 율법을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요? 대다수 회당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바울은 줄기차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당에 분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이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용하던 회당을 시끄럽게 만든 장본인이 유대인들이 아니라 바울인 셈입니다. 이런 소동으로 인해서 바울은 회당의 형벌인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고후 11:24)
그런 와중에서도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주로 앞에서 소개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과 상관없으면서도 회당이 가르치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탓에 이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회당의 유대인들과는 거리를 둔 채 조용하게 바울의 복음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상황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복음을 받아들인 탓에 그들은 유대교는 물론이고, 같은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던 유대-기독교인들로부터도 이상한 사람들 취급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카 공동체를 세우고 멀리 고린도로 피신해 있는 바울의 걱정이 얼마나 컸을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재림과 구원
율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았던 바울이 율법을 포기하고 복음으로 돌아선 이유는 아주 명백합니다.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바울의 신학이 원숙해졌을 때 기록한 로마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데살로니카 전서는 바울의 초기 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신학적 논리가 자세하게 다루어지지 않지만 그 단초만은 살아 있습니다.
10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두 가지 명제가 적시되어 있습니다. 첫째,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둘째, 예수님은 장차 닥쳐올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지실 분이다. 요약해서, 전자는 재림이고 후자는 구원입니다. 데살로니카 공동체는 이것에서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바울이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그 모범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데살로니카 공동체의 이런 신앙적 모범으로 인해서 주변 신자들은 복음을 널리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재림이라는 단어가 너무 멀게 느껴지거나, 또는 다미선교회 사건과 연관해서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재림은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단순히 예수님이 손오공처럼 구름타고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에 불과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심판은 곧 진리와 생명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진리와 생명이 아닌 것들은 당연히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바울은 그 심판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표현했는데, 이 진노는 절대적인 생명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다른 한 속성을 가리킵니다. 거짓 생명에 대한 심판과 진노가 없다면 어찌 참된 생명이 가능하겠습니까?
재림, 심판, 진노가 데살로니카 공동체를 비롯해서 초기 이방인 공동체를 근본적으로 위기로 몰아넣었던 율법과 어떤 관계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기준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율법의 노예이며, 그 결과는 파멸과 죽음입니다. 바울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 율법이 명령하는 모든 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은 말문이 막히게 되고 온 세상은 하느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롬 3:19절)
이런 표현을 일상적인 이야기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을 완전하게 지켜야만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해서 성적을 잘 받아야 하고, 학칙을 지켜야 합니다. 교복과 두발과 용모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간섭을 받습니다. 그걸 잘 지키는 학생을 모범생이라고 인정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학생들의 영혼이 어찌 될는지 상상해보십시오. 학교생활이야 당분간 머물러 있으면 그만이니 그렇다 칠 수 있지만, 신앙생활이야 평생 수행해야 하는 것이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입니다. 심판과 진노에 놓이게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율법적인 방식의 삶에 완전히 고착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나는 힘들게 노력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출세하고, 편안하게 살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입니다.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는 마치 매일 통속적인 티브이 드라마에 취해 있으면서 문학과 예술의 깊이를 아노라, 하고 큰 소리 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철이 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입니다. 그 예수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신 분이십니다. 이제 하늘에 올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며, 심판하러 다시 오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분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원초적인 이 가르침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데살로니카 공동체처럼 아직 아무런 신앙적 기초도 세워지지 않는 어린 기독교가 아니라 이미 2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어른 기독교에 속해 있으니까요. 그러나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실제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닙니다. 몸이 컸다고 해서 우리의 생각도 크는 게 아니듯이 신앙의 연조가 신앙적인 성숙을 담보해주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간 사람들일까요?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일까요?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걸 확인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성령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처럼 기독교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영적 훈련이 그것입니다. 그 근본을 오늘 본문이 이렇게 말합니다. 재림의 주님이 여러분을 율법의 절망으로부터 건져주십니다. 이런 믿음으로 세상을 승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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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삶에서..

October 12, 2008
*.140.184.194

생명의 능력인 성령을 받았다고 말은 하면서 그게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셨네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우리는 정말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간 사람들일까요?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일까요?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걸 확인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성령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라고 하셨네요.
두 주장이 배치가 되는 듯 하면서도 납득이 가는데요.. 아직 바울이 말하는 것만큼 손에 잡히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이 있어요. 왜냐하면 아무래도 우리의 신앙이 늘 주변으로부터 평가받는 것에 익숙해져있고 주변에서 누구는 믿음이 있네 없네하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야기들때문이겠지요..
과연 우리는 우리네들의 신앙을 서로 평가할 수 있기나 할까요?? ㅠㅠ 매일같이 평가받아야하고 심하게는 누군가에게 신앙으로 내 삶을 증명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힘들게 다가오네요..
그저 하나님 앞에 힘을 빼고 걸어가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자꾸 힘을 주고 있는 거 같아서 힘들기도 하구요..
바울이 말하는 주장이 언젠가는 손에 잡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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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첨단

October 13, 2008
*.156.248.134

말씀으로 나의 생각과 삶을 다 잡으면서 또다시 세상에서 드러나는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러한 것들로 부터 벗어나는 길을 나의 힘이 아니라 온전히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전적인 역사뿐... 그앞에 조용히 힘을 빼고 자신을 낮추고 잠잠히 있는 것이겠지요???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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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October 13, 2008
*.136.37.162

율법을 지켜라 하는 것과 율법을 완성한 것의 차이는

이러 이러한 것을 지켜라 그렇지 않으면 의롭지 못하고 모범적이지도 못하다 라고 해서 지키는 것과
학교를 아끼고 선생님을 사랑하여 스스로 교칙을 지키거나
부모를 사랑하여 스스로 부모가 좋아할 만한 것을 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하는 것의 차이겠지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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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3, 2008
*.181.51.93

삶에서 님,
두 명제가 배치되면서도 각각으로 옳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으면 이제 신학의 맛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증거에요.
믿음과 삶의 일치라는 게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흔적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나타날 수도 있긴 하지만
그 근원적인 삶의 능력이에요.
그것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어떡 객관적인 기준으로 계량할 수는 없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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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3, 2008
*.181.51.93

첨단 님,
성령에게 온전히 의존하는 삶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의 영적 삶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어떻게 생명의 능력인 성령의 이끌림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일단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야 합니다.
비록 중간에 흐트러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방향을 놓치지 않는다면 결국 신앙의 성숙으로 나가게 될 겁니다.
즉 삶을 능력으로 경험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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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3, 2008
*.181.51.93

눈사람 님이 재미 있는 비유를 들어주셨군요.
율법의 차원이 아니라 은총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신앙인으로
우리가 계속 자라가야겠지요.
다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데서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는 겁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뜻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설정해 놓은 어떤 기준과 범주를
바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분의 뜻을 깨달게 해달라는 기도,
그리고 우리를 용서해달라는 기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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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김바울

October 15, 2008
*.95.255.66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정목사께서는 자녀에게서 존경을 받으십니까?
저에게는 아주 조금한 소망이 있습니다.
제 자녀(금년 27세, 무남독녀)에게서 존경을 받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 소망입니다.

교육학자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부모를 사랑하는 학생은 거의 100퍼센트지만, 부모를 존경하는 학생은 아주 미미했다, 는 군요.
부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이렇게 커다란 차이가 있었음을 새삼 느낍니다.
또한, 자녀에게서 존경받은 부모가 됀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요?
요즈음 학생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인격이란 무엇인지 사뭇 궁궁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자녀에게서 존경받는 아버지가 됀다면, 이것이먀말로 출세(?)다. 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도단일까요.
누구에게 모범이 되는 대상이라는 것은 과연 뭘까?

요즈음 서울시교육감 공정택에 관한 흉흉한 이야기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서울의 200백만 초.중.고등학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수장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위로 국감현장에서 논란이 되고 있지요. 공교육을 심화시키고 학생들의 전인교육에 모범을 보여야 할 교육감이, 지난 교육감선거 당시 선거자금으로 공교육을 무력화시키고 학무모들을 허리들 휘게하는 사교육시장 학원장과, 학생들의 먹거리를 볼모로 돈벌이에 혈안이 됀 급식업체 관계자들로 부터 선거자금을 차용,찬조금으로 받았다, 는 군요.
교육을 핑게삼아 교육을 돈벌이수단으로 전락시키고, 학문의자유,사상의 사유로 매진해야 할 학생들에게 <학습노동>으로 신음케하는 교육감.
이제 학생들에게 <상기 학생은 타인의 모범이 되었음으로 이 상장을 수여함.>, 라는 격려는 불가능하겠지요.
공정택이야말로 <타인의 모범(?)>이 돼으니 말입니다.

여러가지 삶의 실존적인 문제로 저의 행보가 흔들거릴 때가 참 많습니다.
저의 삶의 나침판이 삶의 문제로 흔들릴지라도, 나침판의 방향이 항상 제자리도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로들 향해 가르키는 나의 나침판의 방향을 잃지 않도록 정목사께 기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자비의 손을 저와 저의 아내, 저의 자녀가 놓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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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김바울

October 15, 2008
*.127.200.179

안경을 사용치않고 글을 썼더니 오타가 참 많이 났네요.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외부에서 급히 인터넷을 사용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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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5, 2008
*.181.51.93

김바울 님,
오타야 제 글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저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오셨군요.
저는 1950년대 태어나신 분들이 모두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다비아에도 그런 분들이 좀 있답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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