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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기타 조회 수 12602 추천 수 128 2005.10.30 18:43:42
성경본문 : 여호수아 3:7-17 
http://wms.kehc.org/d/dabia/10월30일.MP3http://wms.kehc.org/d/dabia/10월30일.MP32005. 10.30.       수 3:7-17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여호수아의 지도력
엑서더스 이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배회하던 이스라엘은 이제 야훼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땅인 가나안 초입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달이면 횡단할 수 있었던 그 광야생활을 그렇게 오래 끌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가나안을 목표로 하지 않은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만약 그들의 목표가 처음부터 분명했다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한 본격적인 전투를 여러 번 시도했어야 했을 텐데, 성서는 그것에 대한 암시조차 없습니다. 물론 광야의 삶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기간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합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이제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렇게나 들어가서 살아도 될 그런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곳에는 이스라엘 보다 훨씬 앞선 문명의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우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는 땅을 비집고 들어가서 함께 살자고 한다면 그들이 순순히 양보할까요? 땅덩이가 좁아서라기보다는 서로 이질적인 민족들이 더불어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에 그들은 ‘제로 섬’ 게임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이런 싸움을 좀 더 객관적인 눈으로 본다면 분명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 가나안 땅을 자신들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구약성서는 가나안 안에서 벌어진 전투를 오직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만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야훼 하나님이 좀 편파적인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대장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일까요? 엑서더스가 가능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모세의 강력한 지도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는 가나안을 목전 두고 방금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없을 때마다 혼란에 빠진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걸 감안한다면 결국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모세에 버금가는 지도자가 나와야 하는 것이겠지요. 모세는 흡사 김일성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명했듯이 죽기 전에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지도력이라는 게 그런 지명만으로 확보되는 건 아닙니다. 잠시 동안은 일종의 유훈 통치로 끌어나갈 수 있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그런 것만으로 지도력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지도력을 강화하는 게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읽은 요르단 강의 끊김 현상입니다. 모세의 권위가 홍해의 갈라짐이었던 것처럼 여호수아는 이번의 사건으로 인해서 확고부동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홍해와 요르단 강
이 요르단 강이 어떻게 끊어지게 되었는지는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멘 사제들의 발이 요르단 강물에 닿자마자 “위에서 흘러 내려오던 물이 우뚝 일어서서 아담에서 사르단 성곡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둑을 이루는 것이었다. 아라바 호수라고도 하는 사해로 흘러내리던 물이 다 끊어져 백성들은 예리고 맞은편으로 건너갔다.”(16절). 모세는 자기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는데, 지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궤를 맨 사제들을 통해서 요르단 강을 갈랐습니다. 여기서 사제보다는 하나님의 궤가 훨씬 중요하겠지요. 성서학자들은 이 궤가 여기에 등장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곤혹스러워합니다. 궤 안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십계명 돌판, 만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물건이 모두 역사적 사건과 깊이 연관이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접어두겠습니다. 이 궤를 광야에서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홍해 사건이 엑서더스의 백미라고 한다면, 요르단 강 사건은 이제 가나안 정복에 이르는 긴 여정의 단초입니다. 홍해 사건으로 인해서 광야 40년의 생활에 영적인 활력소를 얻었다면, 요르단 사건으로 인해서 여리고 성과 아이 성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확신을 얻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그 요르단 강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궤를 멘 사제들이 강물에 발을 딛자 곧 강물이 끊어지고 마치 둑처럼 되었다는 이 성서의 기적 보도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요? 요르단 강물은 연한 석회암으로 된 두 암벽 사이를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 암벽이 간혹 무너지게 되면 강물이 거기에 갇히고, 그래서 위로는 호수처럼 되고 그 밑으로는 맨땅처럼 된다고 합니다. 역사가의 연구에 의하면 1267년 12월7일 밤에서 다음 날 새벽 사이에 이 암벽이 무너져 16시간 동안 강물의 흐름이 멈추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1927년과 1960년에도 있었습니다, 대개는 지진이 일어날 때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데, 1927년 7월11일에는 21시간 30분이나 강물의 흐름이 멈추었습니다.
지금 성서기자가 보도하고 있는 게 바로 이런 자연현상일까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런 현상을 가끔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잘 알고 있을 여호수아나, 또는 그의 참모들이 그런 기회를 기다렸다가 요르단 강을 건넌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이런 현상을 기억하고 있던 성서기자가 훗날 가나안 정복에 과한 전승을 역사적으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끌어들인 것으로 보는 게 훨씬 합리적인 성서읽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3-5장은 이스라엘의 제의전승에 포함된다는 점에서도 역시 이런 추정이 훨씬 바람직합니다.
노파심으로 한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왜 성서를 그렇게 자꾸 역사 비판적으로 읽느냐, 그냥 기록된 대로 믿으면 되지 않느냐,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그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지 성서의 보도 자체를 믿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서는 텍스트이고, 하나님은 구원 실행자이며 통치자이십니다. 흡사 사랑은 텍스트가 아니라 능력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식론적 능력이 허락하는 한 그 성서 텍스트의 지평 안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성서기자가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전하려고 한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정확하게 따라잡기 위해서 성서 텍스트를 비평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성서 기자는 요르단 강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전하고 있습니까? 성서기자는 여호수아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계신다. 가나안족, 헷족, 히위족, 브리즈족, 기르갓족, 아모리족, 여부스족은 반드시 쫓겨나리라.”(11절). 바로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성서기자는 매우 극적인 사건을 끌어들였습니다. 오늘 성서를 읽는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배워야 할 부분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태도로 읽지 않는다면 구약성서는 단지 호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방적인 역사 해석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역사 해석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성서 기자가 오늘의 우리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는 요르단 강의 끊김 현상을 전달하고 있는 이유는 아주 명확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달하는 게 곧 그의 관심이었습니다. “살아계시다”는 이런 표현은 그렇게 정확한 건 아닙니다. 이 말을 그대로 따른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요. 죽을 수도 있는 존재는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성서 기자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이유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아마 고대 사회는, 특히 근동에서는 여러 신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집트에도 신들이 있구요, 바벨론도 그렇고, 그리스에는 훨씬 다양한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미디안 광야와 가나안 땅에서 여러 신들이 숭배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신들을 섬기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이 다른 종족의 신들보다 위대하다는 사실을 여러 면에서 증명하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와중에서 신들이 자고 있다든지 죽었다는 표현들이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성서기자도 역시 그 당시의 표현을 빌려서 야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까? 성서기자는 요르단 강이 멈추는 사건을 그 증거라고 주장하는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그것에 대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어떤 사람들은 망해가던 사업이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거나 불치병이 치료되었거나, 세상에서 타락했던 남편이 마음을 잡게 된 일들을 그런 증거로 생각할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르단 강의 끊김을 그 증거로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한 사람들은 그런 특이한 사건들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여전히 미숙한 신앙입니다.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 자체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그 증거입니다. 그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그 증거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냥 우주 공간 어디엔가 영원불변하는 절대자로 남아있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게 곧 성서기자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과 인류의 역사에 개입한다는 사실은 별로 실감하지 못합니다. 계몽주의 이후로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을 확보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은 하나님이 개입한다고 보기에는 마뜩찮은 사건들이 넘쳐납니다. 무죄한 자의 고난이 끊이지 않고, 불의한 자의 행운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천재지변과 테러, 전쟁으로 인한 무고한 아녀자들이 희생도 이 세상에서 일상사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칫 광신처럼 보이기 마렵니다.
오늘 본문은 요르단 강물이 흐름을 멈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계신하고 말하고 있지만, 오늘 우리는 어디서 그걸 발견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더 이상 요르단 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기적적인 사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 최소한 3천 년 전의 사고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기독교 지성인들이 헤어나올 수 없는 함정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성서의 보도를 믿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대개의 지성인들은 신앙을 자기 삶의 변두리로 밀어놓습니다. 삶의 문제는 요령껏 시대정신에 따라서 해결하고, 신앙 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남겨둡니다. 이런 상태는 곧 삶과 신앙의 이원론입니다. 삶과 신앙의 이원론으로 인해서 정신적으로 심한 갈등 가운데 빠지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그런 갈등 없이, 그러나 막연한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요르단 강물이 멈추는 그런 기적에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정확한 대답을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대답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대답을 여러분이 별로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내가 딸들에게 생명의 비밀을 알기 원한다면 바람 소리를 듣고 그 바람을 온 몸으로 맞아야 한다고 말하면, 이 딸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아마 속으로 “우리 아버지 맛이 가셨나?”라고 생각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가 오늘 여러분에게 영적인 실체로 경험되시는지요? 그가 선택한 십자가의 삶이 실감이 나십니까? 그에게 일어났던 부활의 생명에 실제로 마음이 가시나요? 이런 신앙으로 인해서 이웃과 다른 생명체와 그리고 온 세계를 향해서 마음이 활짝 열리고 있습니까? 이런 삶의 경험들이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면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합니까?


profile

[레벨:1]똑소리

July 06, 2006
*.204.68.109

아래는 목사님의 설교문 중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노파심으로 한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왜 성서를 그렇게 자꾸 역사 비판적으로 읽느냐, 그냥 기록된 대로 믿으면 되지 않느냐,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그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지 성서의 보도 자체를 믿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서는 텍스트이고, 하나님은 구원 실행자이며 통치자이십니다. 흡사 사랑은 텍스트가 아니라 능력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식론적 능력이 허락하는 한 그 성서 텍스트의 지평 안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성서기자가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전하려고 한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정확하게 따라잡기 위해서 성서 텍스트를 비평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위의 주장에 대하여 전전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한국교회의 현실로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성서관은 거의가 다 축자영감설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성서를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는 목사님의 주장은 이 둘 명제 사이에 놓여있는 변증법적 관계를 해명하지 않으면 오해받기 십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믿지 않는다는 건 자찻 논리적 모순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성서는 은폐된 말씀이기에 어디까지나 정당한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하지만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신자들에게 이 두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하나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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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06, 2006
*.249.178.27

똑소리 님이 이해했다면
내가 설명을 잘 한 겁니다.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은 없는 거 아닐까요?
성서를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거라는 말을 풀어내려면
성서의 형성과정과 정경화 등등의 기초,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론과 인식론 등등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하루 이틀에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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