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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기타 조회 수 12478 추천 수 28 2005.11.20 20:02:35
성경본문 : 고린도후서 9:6-15 
http://wms.kehc.org/d/dabia/11월20일.MP32005. 11.20.       고후 9:6-15
풍요로움의 근거

구제금 갹출
오늘 본문의 수신인은 고린토 교회 교우들입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에서 아테네를 거쳐 고린토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개 한두 주일이나 길게는 두세 달 머물렀지만 여기 고린토에서는 일 년 반이나 머물렀습니다. 바울의 선교 활동에서 이곳이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신약성서로 결정된 바울의 많은 서신중에서 고린토전후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양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높다는 것만 보아도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래 그리스의 중심 도시는 아테네였지만 바울이 그리스를 방문한 50년경의 아테네는 로마에 의해서 함락된 도시로서 주민이 겨우 5천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서 고린토는 지중해 해상로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고린토 신전에는 수많은 여사제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지금의 올림픽과 비슷한 스포츠도 발달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피혁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직접 노동하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토 교회에 편지를 쓴 이유가 여럿이지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건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무슨 이유로 이런 모금운동을 펼치고 있을까요? 사도들과 예수님의 동생이 이끌어가던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교의 핍박을 받았을 수도 있고, 그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나 재난이 발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당시에 각 지역의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일정한 액수의 돈을 납부하는, 일종의 부과금 제도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내막을 완벽하게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다만 우리는 초기 기독교가 처음부터 서로 상부상조하는 일치 정신에 충실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고린토 교회가 속한 아카이아 지역만이 아니라 갈라디아 지역과 마케도니아 지역도 역시 이런 모금에 솔선수범했습니다.
이런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방 교회의 경제 형편이 예루살렘 교회보다 낫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뜻 돕는 일에 나설 수는 없습니다. 특히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겠지요. 바울은 개인적인 감정과 교회의 일치를 세워나가는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태도가 곧 살아있는 신앙이겠지요.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부분에서는 상당히 심각한 반성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50개 중에서 반 수 이상이 한국에 있지만, 거꾸로 가장 가난한 교회도 한국에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교회는 통계가 잡혀있지 않았으니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 있는 교회 중에서 30%가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그런 형편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직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고착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한국 경제의 양극화 현상이 곧 한국교회의 모습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마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이런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목사가 능력이 없어서 교회가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하고 넘어가겠지요. 조금만 눈을 돌리면 이게 매우 심각하게 왜곡된 교회의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예컨대 한 가족 안에서 한 사람은 산해진미로 매일 배부르게 먹는데, 다른 한 사람은 한 끼도 먹을까 말까 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걸 한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한국교회가 미국 다음으로 세계 선교사를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해외 선교를 하겠다는 데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그 예산의 반 정도만 국내 미자립교회를 돕는 데 사용한다면 한국교회는 크게 건강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담긴 구제금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구제금의 신앙적 의미를 매우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구제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보겠습니다. “각각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내야지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7절) 아마 그 당시의 고린토 교회에서도 이런 문제로 말들이 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별로 깊은 관계도 없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왜 돈을 내야하느냐, 너무 많은 걸 보낼 수는 없지 않느냐, 다른 교회는 얼마나 내는지 미리 정보를 알아야 하지 않겠냐, 등등, 말들이 많았겠지요. 사람은 지금이나 2천 년 전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행동과 마음의 일치라는 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구제금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삶에서 우리의 행동에는 마음이 담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익명성이라는 특징으로 작동되는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런 경향이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직장 동료들과도 소위 ‘허심탄회’하게 관계하지 못합니다. 형식적으로는 가까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 마음이 소통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정작 필요한 말이 아니라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게 바로 이렇게 마음과 행동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는지요. 이런 관계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야만 유지되지 그게 달라지면 위태로워집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정치, 사회의 일각에서 정부의 북한 지원을 ‘퍼주기’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달러를 갖다 주면 그게 곧 핵폭탄으로 돌아오는데, 왜 그렇게 도와 주냐 하고 문제를 삼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북한 인권 문제를 이 문제와 연계하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이런 정치역학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제가 이 시간에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이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말들이 많아지고, 트집을 잡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이건 일상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됩니다. 누구를 도울 때도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구걸할 시간이 있으면 일하지 왜 이렇게 사냐, 이번만은 도와주지만 다음에는 어림도 없는 줄 알아라, 하는 식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도와주면서 생색을 내려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마 나도 그런 경우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금 양심적인 사람은 여기서 갈등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당위와 그런 일에 마음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는 현실이 바로 우리가 샌드위치처럼 깨어있는 실존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갈등이 완전히 해결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자신의 노력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죽을 때까지 그런 상태 안에 머물러 있겠지요.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그런 갈등을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한계를 명확하게 뚫어보지만, 그런 한계 안에서 체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약점을 그대로 감수하지만, 전혀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새로운 삶의 차원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제금 문제를 우리의 윤리에서 다루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풍요의 하나님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풍요롭다’는 의미의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충분히’ 주실 수 있으며,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것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고, 좋은 일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으며(8),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주시고(10), 여러분은 언제나 ‘부요하게’ 되어 ‘아낌없이’ 남을 도울 수 있게 될 것이며(11),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을 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15).
바울이 이렇게 풍요롭다는 말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고린토 교우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먹을 걸 떼어낸다면 자기의 것이 그만큼 줄어드니까 사람들은 구제금을 내면서도 불안하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풍요롭게 만드시기 때문에 그런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흡사 자녀들에게 용돈을 넉넉하게 주는 부모 밑에 있는 아이들이 자기 것을 친구들과 나누면서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겠지요.
물론 여기서 다른 생각이 가능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신앙적으로 나누면서 살아도 실제로 부자가 되는 법은 없다고 말이죠. 하긴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해야 나누고 절약하면서 나름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지, 늘 생존에 급급한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풍요와는 거리가 멉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나 북한 주민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선진국처럼 풍요를 경험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경제문제는 신앙과는 별로 상관없는 분야처럼 보입니다. 그 말은 일단 옳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런 주장은 현실적인 게 아니라 ‘공자 왈’ 같은 것에 불과한가요? 고린토 교우들이 구제금을 좀 많이 내라는 뜻으로 이렇게 그럴듯한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단지 종교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목회 업적을 올리기 위해서 고린토 교우들을 선동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게 아니라 기술공학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진정한 생명의 힘을 의식한다는 뜻입니다. 좀 더 천천히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8a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충분히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은총이 충분하다는 이 말씀을 우리가 당장 부자가 된다거나 출세한다는 뜻으로 새기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에게 근거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부자가 되거나 출세하는 것만을 삶의 실체로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에게서 충분한 은총을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 삶은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성취하거나 앞세우는 일보다 훨씬 근원적입니다. 자기를 성취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생명의 리얼리티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걸 좀 더 우리의 일상과 가깝게 연결시켜서 설명한다면, 무한경쟁의 구도가 아니라 참된 사귐의 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8b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것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고, 온갖 좋은 일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모든 것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다는 게 부자가 된다거나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걸 어떻게 우리 모두가 넉넉하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자본주의가 기독교보다 우월하고 현실적인 종교입니다. 우리가 넉넉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생명의 능력이십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곰곰이 살펴보면 참된 사귐을 위해서 사용할만한 여유는 늘 있습니다. 이 여유는 돈만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시간도 그렇고, 의지도 그렇고, 몸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단지 약육강식의 방법으로 작동되는 자기 성취에만 마음을 쏟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풍요로운 은총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 감사
바울은 하나님의 풍요로운 은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는가, 설명합니다. 구제금은 예루살렘 교우들의 가난을 덜어 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12). 바울은 13절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다시 강조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이런 말씀을 단지 종교적인 수사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자신들이 굶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감격해하고, 그 생명의 소중함을 절감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감사가 어디 있으며, 찬양이 어디 있습니까? 생존의 위기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돕는 일보다 더 귀한 전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삶을 저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 동성애자들, 북한 주민들, 장애인들, 이혼가정의 아이들, 여러 방식으로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일지 모르죠. 이들이 다시 삶을 노래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함께 찾아나서야 합니다. 그런 생명의 사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풍요롭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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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2, 2005
*.249.178.8

마친 로이드 존스에 대해서
목사님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교회는 근본주의, 청교도, 복음주의 성향이 강하기때문에
이분의 글을 좀 읽어두어야 할 것 같네요.
지금 목사님은 매우 좋은 교회, 신앙, 삶 경험을 하고 계시네요.
힘들 부분이 있긴 하겠지만,
좋은 기회로 알고 행복하게 지네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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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신완식

November 23, 2005
*.40.131.65

정목사님!

마틴 로이드 존스는 역사 특히 <교회 역사>와 <진정한 부흥>에 매우 관심이 많은 목회자였습니다.

강단 위에서는 ‘용맹한 사자’와 같이 외치다가도 목양실에서 성도들과 대화할 때면 ‘순한 양’ 같은 자세를 견지한 탁월한 인격의 소유자셨지요.

그는 John Calvin, Jonathan Edwards, George Whitefield, John & Charles Wesley 등과 같은 이들의 신학과 목회를 늘 견지했기 때문에 ‘역사비평’이나 ‘인문학적 성서 읽기’ 등과는 거리를 둔 인물일 수 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근본주의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겠지만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지녔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합동측과 고신측 목회자들이 그 분을 많이 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대체로 교리 중심으로 설교한 대표적인 분이신데 언제나 <교회와 목회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기를 언제나 갈망했습니다. 따라서 은사주의, 기복신앙, 물질주의, 교회성장, 적극적 사고방식, 심리학, 상담학, 사회복지 활동, 이벤트나 프로그램 위주의 목회, 인위적 부흥 등에 의존하는 한국교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장점은 있으나, 안타깝게도 목사님께서 강조하시는 <역사와 사회>를 향한 교회와 기독교인의 책임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원, 성경, 종교나 문화 등과 같은 문제를 대할 때는 보수주의의 입장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그 분과 정목사님을 비교하는 재미가 참 큽니다(^^). 근본적인 입장 차가 있음에도 또 무릎을 칠 수 있을 만큼의 상호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3주째 목사님의 글을 프린터 해서 읽고 있습니다 (어제 잉크를 교체했어요). 중국인 식당에서 틈틈이 시리아, 스리랑카, 중국인들 사이에서 한글로 읽는 목사님의 글이 참 맛있네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새록새록 되살아 나서 참 신나는 생활입니다.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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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3, 2005
*.249.178.23

신 목사님,
내년 1월호 기상의 설교비평은
마틴 로이드 존스를 다루어볼까 생각합니다.
혹시 시간이 있으면
아는대로 졍보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금 나는 <설교와 설교자>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몇권의 설교집을 기상 쪽에서 나에게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지금 생존해 계시나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목사들이 신학책을 읽어야 한다고 충고하더군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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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신완식

November 24, 2005
*.40.131.65

정목사님!

제가 읽은 마틴 로이드 존스 관련 책은 전부 이 곳에서 출판한 원서라서 한글로 정리한 것은 없습니다만 상당수의 책들은 이미 우리 말로 번역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그 분을 연구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울산에 계신 정근두 목사님과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이시고 개인적으로 아는 분을 통해 듣기로는 김남준 목사님도 그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한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 벌써 로이드 존스의 성향이 짐작이 되시죠?

제가 정목사님의 <인문학적 성서읽기>와 <설교비평> 등에 관한 글을 대하기 전에는 그 분의 관점이 한국교회 목회와 설교에 하나의 대안으로까지 가능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 했는데 지금은 솔직히 제가 상당히 자신감을 잃은(?) 상태입니다. 전공을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가 하고 오늘 2시간 동안 접시 닦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여성 안수에 대해서도 다수 회의적이었고 (노골적인 성차별주의자는 결코 아니지만 전통적인 성서 해석을 따라 교회 질서를 위해 여성의 안수를 허락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London 신학교에는 여학생은 절대 안 받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도 탐탁지 않게 생각해 그 유명한 존 스토트(John Stott)와도 결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영국교회 대(大)분열의 원인 제공자가 되었으며, 목회자나 교회가 역사와 현실 정치와 같은 분야에 어떤 입장을 표명하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부친의 영향 때문인지 젊은 시절 매우 진보적인 현실 정치 노선에 서 있었답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는 비록 여러 영어 번역 성경들을 대조 하면서 문자주의 혹은 축자 영감설은 넘어서는 듯 하지만 결국은 청교도 신앙노선과 17, 18세기의 대각성 내지 부흥운동(?)의 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나는 그저 바울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른바 정통주의 노선을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그래서 그런지 스펄젼이 목회했던 <매트로 폴리탄 터버너클>을 현재 담임하고 있는 피터 마스터즈 같은 이들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로이드 존스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이 할 수 있었던 제일 큰 일이란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듣는 일뿐이었다’는 식이지요. 하지만 에밀 부룬너에게서는 20세기 최고의 설교가 라는 호평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특히 그의 성령론에 대한 해석은 그가 세운 신학교 교수진들로부터도 비판 받고 있는 실정이지요. ‘성령의 재세례’ 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으니까요. 그래서 그 분의 생존시 교계에서는 혼란이 좀 있었다고 합니다. 교리는 전반적으로 캘빈의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주권적인 부흥’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웨슬리 형제도 자주 연급하고 나아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다 보니 이 쪽에서도 우리 편이다 저 쪽에서도 우리 편이다 했다는 군요. David Watson 같은 카리스마 운동계열의 사람들이 그가 자신들 편인 줄 알고 찾아갈 정도였으니까요. 그 자신이 신학자가 아니다 보니 논리적 일관성에서 좀 한계가 있었나 봅니다. 가끔 ‘저는 지금까지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 왔는데 이런 면에서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라고 언급한 적도 있으니까요.

그의 최대 장점이라면 목회자는 정치가, 사회복지사, 상담가, 행정가, 엔터테이너 등으로 부름 받은 자가 아니라 ‘설교자’로 부름 받은 자이니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각인 시켜 준 곳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그가 평생 한 일은 설교 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아요. 그가 담임하던 때는 심지어 성가대도 운영하지 않았고 설교를 방해하는 일체의 요소들을 제거했습니다. 그러니 온누리 교회 식의 열린예배는 그가 가장 혐오(?)한 예배 형식이 되겠지요! (이런 내용은 목사님께서 읽고 계시는 ‘설교와 설교자들’ 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분은 1981년에 작고했지만 다행히 그에 관한 멋진 사이트가 있어요. 매주 한 편씩 설교를 들을 수도 있고요 http://www.mlj.org.uk 에 들어 가시면 <company>에서 MLJ Biography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그가 한일은 그저 설교뿐인데 다행히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라는 책은 설교가 아닌 특강 형식(?)이라서 그의 신앙과 사상적 노선과 특징을 파악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말로는 어떻게 번역이 됐는지는 미처 확인을 못했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분의 책을 읽으면서 정목사님께서 <기상>에 연재하시며 언급하고 계신 한국 목회와 설교의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문제 말이지요. 하지만 복음, 구원, 죄, 교회, 성서, 성령, 죄사함 등에서 기본적인 정의가 다소 차이가 남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은사주의, 신비주의, 기복신앙, 로버트 슐러, 릭 워랜, 조용기, 전병욱, 김학중과 같은 노선을 극복하는 기쁨은 맛본 반면 사회, 역사, 여성, 생태계, 생명 등의 주제에 대해서는 거의 아이디어를 얻지 못했습니다. 제 소견에는 그는 성서주석까지는 나아갔으나 ‘성서해석’에 있어서는 (물론 보수적 노선에서 보면 상당한 해석을 한 것으로도 간주 할 수 있겠으나) <현대신학>의 학문적 성향과 태도를 터부시한 때문에 태생적 한계를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로 어제 밤 목사님께서 쓰신 ‘탈식민지적 글쓰기와 설교문제’와 세 편의 아티클을 프린터 하여 읽었는데 한마디로 ‘깊은 고뇌’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 동안 로이드 존스는 제게 배움의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그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예컨대 19세기 미국 사람들의 부흥운동이나 18세기 유럽의 대각성 운동을 전가의 보도처럼 우리 한민족에게 우격다짐 식으로 적용시키게 되면 그 적실성을 상실하게 된다’라는 지적을 깊이 음미해 보았습니다. 하마터면 저도 로이드 존스를 앵무새처럼 되풀이 할 뻔 했습니다.

제게 더 구체적인 소스를 원하시면 여기로 좀 메일을 보내 주십시오.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노력하겠습니다 mansun1988@yahoo.co.kr 입니다.

목사님과 좀 더 일찍 교제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늘 있습니다. 교단의 신학적 목회적 노선 그리고 특히 11년 간의 군생활 동안 저도 모르게 몸에 깊이 베어버린 여러 요소들을 벗어 나기가 그리 쉽지가 않네요.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걷다 보면 그런 이끼들을 벗겨낼 수 있겠지요?

제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마틴 로이드 존스를 내년 1월 목사님을 통해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니 그 기대감으로 벌써 흥분이 되는 군요.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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