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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주님

기타 조회 수 13063 추천 수 50 2006.04.16 23:05:35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5:1-11 
http://wms.kehc.org/d/dabia/06.04.16.MP3살아 계신 주님
고전 15:1-11
2006년4월16일


1. 본문주석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고린도전서 15:1-11의 내용은 신약성서에서 이곳에만 나옵니다. 물론 이 본문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원시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복음 선포의 기본적인 의미는 명명백백했습니다. 이 기본적인 의미는 신약성서 곳곳에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부활의 사실을 제시한 특징적 표현은 그 어디에서도 비슷한 유형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루돌프 불트만은 이것이 역사적 실증을 시도한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옳은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 이런 증명은 눈으로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있어야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의해서 거명된 증인들 가운데 멀찍이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오직 기독교 신자들만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런 실증의 무게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부활한 분과의 개인적인 만남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사건입니다. 이런 만남에서 예상된 어떤 사실이 예수님의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 없는 사건 말입니다. 앞서 바울이나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같이 불신자였든 사람들도 부활의 현실성과 조우함으로써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15장 전체에서 핵심은 죽음을 극복하는 기독교적인 희망인데, 이 희망은 고린도 사람들에게서 논란거리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기대하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바로 논란거리였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희망의 토대를 근거로 해서 그 희망을 변증하기 위해서 바울은 15장 서두에서 기독교의 선교 메시지에서 중심이 되는 신앙고백인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거론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선 자신에게 전승되었던, 즉 예루살렘 공동체로 소급되는 신앙고백 형식을 인용합니다(고전 15:3b-5). 그 신앙고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의 무덤, 그의 부활. 이것은 곧 부활한 예수님이 베드로와 열 두 사도들에 의해서 증언된 내용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한 다음에 바울은 부활한 분에 대한 더 많은 증인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오백 명의 형제들’, 야고보와 ‘모든 사도’의 무리들, 끝으로 바울 자신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부활한 분의 현실성을 목격한 사람들의 숫자를, 또한 이를 통해서 부활 사건을 증거 할 사람들의 숫자를 충분히 늘려 잡고 있는데, 이것은 이 사건의 사실성을 “완전히 확실한 것으로, 그리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H. v. Campenhasen) 설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의 부활경험은 사도의 첫 전승이라는 틀에서 임시로 언급된 것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바울이 언급하는 부활의 사실성은 그런 것들보다 훨씬 진지한 그 무엇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공허한’(고전 15:14) 것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복음 선포는 결정적인 내용을 훼손시킬지 모르며, 따라서 그 내용에 대한 신앙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만들지도 모릅니다. 즉 신앙은 더 이상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확보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닐지 모릅니다.
바울이 부활한 분의 현실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오늘의 본문은 별 말이 없습니다. 다만 15장 마지막 단락에 이러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난 마지막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영”입니다(고전 15:45). 그 영은 현재 우리처럼 살고 죽어야 할 생명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외부적으로 부여받은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7에 따르면 첫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의 영을 불어넣으시자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간은 완전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영을 통해서 출현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일종의 ‘영적인 몸’(고전 15:44)입니다. 따라서 그는 죽지 않습니다(15:4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사람은 죽어야 할 생명이 변화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15:53 이하). 이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바울은 15장4절에서 그리스도가 무덤에 장사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어떤 잘못된 결론을 끌어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도가 이런 전승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또는 그런 전승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 당시 유대의 세계관에 따르면 죽은 자의 부활은 실제로 무덤이 비어있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현대 주석학자들의 편견은 일단 접어두고) 바울이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15:3-5에서 인용한 고대 양식은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셨다는 사실과 부활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빈 무덤도 역시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제 15장을 좀 더 풀어본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매우 특별하게 강조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의 희망을 강화하는 기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되며, 또한 그의 영원한 생명에도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혼란에 빠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역시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15:14). 이것은 곧 흄과 라이마루스로부터 뤼데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부활 전승에 대해서 근대 비판가들이 줄기차게 반복하는 논증과 똑같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도 역시 부활할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바울은 이와는 정반대로 자기주장을 펼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15:20).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살게 될 것입니다.”(15:22).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연결된 모든 사람들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부활의 사실성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부활을 그 어떤 다른 현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 신앙이 토대하고 있는 전체 현실성에 대한 이해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고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5:1-11을 중심으로 설교할 때 바울이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논증 연관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설교가 이 본문을 중심으로 전개되려면 우선 우리가 선택한 본문인 1-11절의 특별한 의도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 부활의 사실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활한 분의 현현에 대한 바울의 보도를 통해서 이 사실성이 어떻게 증거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주제에 관심을 집중시켜야하며, 그 주제의 중요성에 대한 몇몇 증언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부활의 사실에 연관된 많은 것들을 이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의 중심에는 여전히 이런 사실 자체가, 즉 부활 사실 자체가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한 주님에 대한 사도 바울 자신의 진술이(15:8-10) 중심 주제가 되면 설교는 오늘 본문을 정확하게 풀어낼 수 없을지 모릅니다. 차라리 바울의 이 문장 그 자체만으로 설교 내용을 구성하는 게 낫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의 사명과 다른 사도들의 사명이 동일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비록 부활한 분을 목도한 많은 이들 중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부족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더구나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동일한 구원의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바울과 나머지 사도와의 차이를 상대화합니다. 그들 모두가 똑같이 부활을 증거하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자들과 다른 이들 앞에, 즉 부활한 분을 만남으로써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 앞에 살아 계신 주님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은 당연히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의 주장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 선포는 이런 반대 의견과 싸웠으며, 부분적으로 이미 처음부터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이에 대한 명확한 이유들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는 다시 살지 못하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이로써 15장 전체에서 발전하고 있는 바울의 논증도 역시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역시 부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15:13).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부활한 주님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고린도의 기독교 공동체가 이미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15:11). 오늘날 이런 논증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즉 이 부활한 분의 현현 사건에서는 수신자의 영적인 취향으로 해명될 수 있는 환각이 핵심일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이런 문제 제기의 타당성은 죽은 자의 부활이 도대체 있을 수 없다는 기본적 원리에 절대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즉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이 없다면 이 예수의 현현은 어쨌든지 다른 방식으로 해명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비껴가든지 아니면 포기하든지 말입니다.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원칙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예수의 부활 현현에 대한 대안적 해명들은 극도로 손상 받든지 불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설에 관한 진술을 더 이상의 예방적 조치 없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으니까 오늘 우리는 기독교의 부활 전승을 다룰 때 전설적 요소를 중요한 것으로 다루어야 할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물론 바울도 고린도전서 15:1-11에서 예수 부활이 사실이라는 점을 훨씬 인상 깊게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 문제가 모든 사도가 선포한 의도이며 내용이라는 점을 진지하게 주장합니다. 오늘의 기독교 설교는 이런 요청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죽은 자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주장은 오늘날 논박의 여지가 없는 경험 원칙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런 경험 원칙 앞에서 바울의 요청을 어떻게 믿을 만 한 것으로 제시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언급을 사도들이 부활한 분의 목격자들이라는 자신들의 증언과 애초부터 연결시켰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런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예수 부활에 대한 사도의 복음 선포를 이미 받아들였다는 점을 상기시켰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대목에서는 바울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게 하고 비존재를 존재로 부르시는”(롬 4:17) 하나님으로 설명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오직 무(無)로부터의 창조와 비견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또한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바로 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활한 분을 목격한 사람들은 ‘거짓 증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고전 15:15). 따라서 여기서는 예수 부활이 고립된 사건이라는 주장을 판단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성(Wirklichkeit) 일반에 대한 이해가 핵심입니다. 세계 현실성이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 훨씬 거대하고 비밀 가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은 기독교의 복음이 주장하고 있듯이 예수 부활의 사실을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세계 현실성은 이미 성서가 말하는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제시된 적이 있습니다. 거꾸로 예수 부활의 사실을 신뢰하고 긍정하는 데서부터 현실성 일반과의 새로운 관계가, 즉 우리 생명의 세계가 담보하고 있는 현실성과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세계와 우리의 고유한 삶은 더 이상 죽음의 마력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뛰어넘어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룸으로써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2. 설교

기독교는 오늘날 예수에게 일어난 놀라운 사건만을 기억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서 발현한 세계 전환점을 기억합니다. 그 이전에 인간들은 모든 희망을 괴멸시키는 죽음의 그림자 안에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이 없다면 한 인간이 자기의 삶에서 성취하거나 도달하게 되는 모든 것은 죽음을 통해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부자 농부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자기 재산에 만족스러워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눅 12:20).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을 알지 못하는 세계는 차안에 속한 삶만을 추구합니다. 바울은 이렇듯 위로가 없는 인간 삶의 형식을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고전 15:32)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이것은 곧 참된 희망이 없는 삶(엡 2:12)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차안에 속한 모든 삶의 의미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죽음을 뛰어넘는 삶이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이 땅의 삶은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차안의 일에 몰두함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소진시키는 사람들과 달리 참된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을 향한 세계사적인 전환점인데, 그 생명은 곧 죽음 너머의 영원한 삶을 확신함으로써 획득되는 참된 희망 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기독교적인 확신에 기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인상 깊게 여러 목격자들을 열거합니다. 이 목격자들은 앞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생명을 얻은 분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신 분을 본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즉 부활한 분과 만난 자기의 경험을 제일 먼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만남의 경험은 바울로 하여금 첫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하던 입장에서 백성의 사도로 돌아서게 한 그것입니다.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의 토대는 자기만의 고유한 체험에만 놓여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독립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 목격자들을 일련의 순서에 따라서 나열했습니다. 부활한 분의 현현 순서에 맞게 말입니다. 제일 처음에는 베드로, 그 다음에는 열두 사도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복음서의 보도에 어울리는 순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요한복음서에만 보도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오백 명의 형제들에게 현현 하셨다는 사실도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 보도는 이곳 이외에서는 다른 데서는 전혀 전승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들 중에 몇몇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물어보아도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 뒤로 바울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나타나셨다고 언급합니다. 야고보는 베드로가 44년 헤롯 아그리파 왕의 박해를 받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 ‘모든 사도들’ 앞에서 예루살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된 사람입니다. 즉 사도 무리는 열두 사도보다 상위의 집단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부활한 분의 현현을 통해서 선교 사명을 위탁받은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사도 무리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목격자 순서의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배치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부활한 주님을 통해서 사도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목격자를 열거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은 고대의 역사에서 가장 믿을만한 증거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며, 또한 모든 이성적 의심과 인간 경험의 모든 법칙으로부터 예외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기정사실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이 현현 사건이 그것 자체로 비상한 것이 아니었다면 바울은 당연히 이성적인 방식으로 언급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경험이 말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죽은 자는 죽어 있을 뿐이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바울도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지 자기의 경험만을 증거로 삼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경험으로 인해서 자기 삶의 방향이 전적으로 바뀌었지만 말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가 살아나셔서 만나주신 증인들의 전체 목록을 열거했습니다. 이 증인의 목록에 나오는 이들이 모두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그들의 신앙은 아마 망상일지 모른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습니다. 증인들 중의 일부는, 즉 최소한 바울 자신과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부활한 분의 현현 이전에는 신앙이 없었다가 그 이후에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이 증인들의 증거를 편견에 불과하다고 무시하는 건 정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증언과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경험의 일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죽어 있을 뿐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일반 법칙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부활 복음에 대한 모든 반대는 바로 이 명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직접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한다는 말이 옳다면 그리스도도 역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부활 증인의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이런 선입견에 농축된 경험 원칙이 분명하게 잘못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서 세계 전환점은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죽을 운명의 마력은 파괴되었습니다. 우리의 세계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우리는 실제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까? 자연과학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조심스러워집니다. 자연에 대한 지식의 발전 자체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갑자기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자연 사건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지식 훨씬 너머에 모든 것을 창조한 분이 계십니다. 창조자의 권능을 믿는 사람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에게도 역시 불가능하다고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자를 있게 만드시는 분이라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합니다(롬 4:17). 창조 행위와 죽은 자의 부활은 바울의 이 진술에서 밀착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놀랍게도 무로부터 세계의 창조와 똑같습니다. 거꾸로 창조자의 능력만이 그가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선입견에 동조해서야 되겠습니까?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일련의 증인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사실은 모든 것을 새로운 전망으로 끌어들입니다. 현실성과 우리의 삶에 대한 시각을 변화시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으로부터 이제 능력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마력이 분쇄되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파괴된다는 두려움에서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우리의 삶은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삶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고 그와 더불어 죽는다면 우리는 그의 약속에 따라서 그의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되며, 하나님과 하나 되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희망은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비판하고 있듯이 이 땅의 삶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새로운 빛으로 바라봅니다. 지난 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것들이 이제는 중요하지 않게 되며, 거꾸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중요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의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 쫓겨 더 이상 숨 쉴 틈도 없이 이 땅의 삶을 즐기려고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있으며 확신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앞으로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제로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 함께 노래하고 기뻐합시다. 아멘. (1998. 부활절,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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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6, 2006
*.249.178.21

오늘 설교는 판넨베르크의 설교집 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번역문을 유인물로 만들어서 교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제가 읽었습니다.
이런 방식이 교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지만
저로서의 설교의 부담고 덜고,
깊이 있는 설교를 함께 나눌 수도 있어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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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똑소리

April 17, 2006
*.204.68.109

세계적인 조직신학자 다운 면모가 그의 설교에서도 여지 없이 드러나는군요.
부활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자신의 신학으로 풀어내는 능력이 부럽습니다.
모처럼 부활절에 깊은 설교를 올려주신 정목사님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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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7, 2006
*.249.178.28

똑소림 님,
위의 설교를 읽고 충분히 이해하셨다면,
신학적인 이해력이 많으신 분이네요.
무얼 하시는 분인지 잘 모르겠지만요.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설교는 분명히 새롭지요?
몰트만과도 다르군요.
몰트만은 여전히 바르트의 말씀 신학 구도 안에 머물러 있지만
판넨베르크는 보편사 신학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바르트의 말씀신학과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과 토대로 신학하고 있습니다.
말씀, 역사의 프락시스, 역사 해석을 함께 아우른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 봤자 내 능력으로 별 새로운 것을 말할 자신은 없지만
대충 그런 틀이 신학적 바탕이에요.
앞으로 판넨베르크의 설교를 한국 기독교인들도 즐겨 들을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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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똑소리

April 18, 2006
*.204.68.109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아프리카 흑인신학 한국의 민중신학에 대해서는 한 10여년 전에 심취해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르트와 에밀부르너가 자연신학 부분에서 일치하지 못하는 부분이나,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정도는 수박 겉핧기 식으로, 39세의 꽃다운 나이에 나치정권에 희생된 본회퍼는 쪼깨 읽은 기억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아득하군요. 저의 성향 역시 세속역사에 무게를 두는 쪽이어서 그런지 판넨베르그의 글이 그렇게 낯설지 않는가 봅니다. 어쨌든 판넨베르그의 보편사 신학이 어떤 것인지 목사님을 통해서 듣기만 했을 뿐이지 언젠가 한번 판넨베르그에 푹 빠져 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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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8, 2006
*.249.178.28

기회가 있다면
제가 번역한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한들출판사)를
한번 읽어보시죠.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공부하는 데 그만입니다.
만약 똑소리 님이 평신도라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나라 평신도들이 그런 정도로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관심이 있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습니다.
봄바람이 좋은 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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