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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기타 조회 수 9870 추천 수 32 2005.04.18 09:50:05
성경본문 : 사도행전 2:42-47 
2005.4.17.          
행 2:42-47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공동체적 삶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을 요약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본문(행 2:42-47)은 약간 뒤에 나오는 행 4:32-37과 병행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자가 ‘공동체 생활’과 비슷한 내용을 연이어서 진술하는 이유는 어떤 특별한 문학적 방식이라기보다는 그 내용을 강조하려 데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이 기원 80-85년 사이에 집필된 게 옳다면 누가는 지금 50년 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중입니다. 이미 교회 안에 정착된 전승도 있었을 것이며, 누가가 개인적으로 들었던 전승도 있었을 것입니다. 비교적 긴 세월의 두께 안에 갇혀 있는 전승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새롭게 정리하면서, 특별히 초기 공동체의 특징을 두 군데로 나누어 배열시킨 것은 그것이 저자에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사도행전이 보도하고 있는 여러 극적인 사건들보다 이렇게 개괄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내용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클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보도는 기독교의 한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적인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묘사된 초기 공동체의 모습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들이 사유재산을 포기했다는 사실입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44,45절).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요즘의 그 어떤 공동체보다 훨씬 원칙에 가까운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건 놀랍습니다. 이런 표현만으로 본다면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것만큼 분배한다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기독교의 정신이 완전히 일치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이런 모습이 언제까지 유지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누가가 이런 사실을 두 번에 걸쳐 강조했다는 건 그만큼 중요했다는 의미이겠지요. 두 번째 설명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행 4:34,35절).
역사의 혁명을 부르짖던 모든 사람들은 오늘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완전한 공산주의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는,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공동체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희망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이런 공평한 통치라 할 수 있습니다. 간혹 천국에도 상급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야무진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천국에 가서도 다른 사람보다 나은 대접을 받으려는 것은, 또한 자신의 행위에 상당한 보답을 받으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라기보다는 정치인들의 논공행상이며,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밥상공동체’와 비슷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해보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걸 오늘 본문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원시 공산주의는 기독교에서도 완전하게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삶이 왜 불가능한지는 그렇게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에덴동산 이후의 현실적인 삶에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전력투구하는 본성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생존하려면 선의이건 악의이건 늘 경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완전히 공평한 삶은 단지 이상으로만 가능할 뿐이지, 또는 몇몇 위대한 혁명가들에게만 가능하지 본성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민중들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이런 완전한 공동체 생활이 계속 유지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도 있긴 합니다.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었다는 게 바로 그 이유입니다. 예수의 재림이 현안이었을 때는 실제로 재산을 소유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연되면서 소유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적 이유였든지, 신학적인 이유였든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들이 일시적이지만 완전한 평등을 실현해보려고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건을 역사적으로 회상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곧 그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들이 이런 평등의 실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서의 가장 이상적인 삶을 추구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 모습은 재산을 팔아서 함께 나누어 사용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46절) 공동체를 꾸려갔다는 사실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초기 공동체는 예배 차원에서 나누는 성만찬의 빵 이외에 모든 지체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의 식사를 매우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습니다. 이 땅에서 함께 먹고, 함께 웃고 우는, 함께 춤추고, 같이 축제를 여는 그런 구체적인 삶을 신앙의 이름으로 끌어갔습니다.
물질적인 평등과 구체적인 삶의 친교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구성하는 요소였다는 사실은 그런 전통을 오늘의 삶에서 새롭게 회복해야 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기독교 신앙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아기 낳고 살아가는 이런 삶의 현실이 망각된다면 그가 아무리 고차원의 영적인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과는 상관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종교적 삶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 근거는 그런 삶의 현실에만 놓인 게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현실인 신앙에 놓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들었으며(42절), 성전에 모였고 빵을 나누었으며(46절),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47절). 이들의 이런 행동은 지금 우리가 예배당에 모여서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으며, 성만찬에 참여하고 찬송을 부르는 예배와 거의 비슷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런 전통은 그렇게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이미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입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습관적으로 참여한 유대교의 모든 종교적인 형식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성만찬을 유대교의 유월절 행사로 하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예배 모임의 순서로 삼았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점에서 기독교 역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런 종교적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기독교인들이 단지 역사를 변혁하려는 운동가들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신앙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하나님과의 일치를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형상화하는 예배는 빼놓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신앙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을까요? 예배를 드리면서 거룩한 존재를 경험하고 있을까요?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거룩해지는 경험이 있나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영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을까요?
어떤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예배의 위기가 임박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현실인 영적인 경험이 한편으로는 일방적으로 무시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왜곡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기독교인이었지만 이제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지성인들이 제법 많습니다. 푸닥거리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반역사적인 모습을 보이는 기독교와 그 예배에 참여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행위는 그것을 주관하는 사람들의 도덕성이나 역사의식과 상관없이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예배를 멀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제가 더 이상할 말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선택이 교회를 갱신하는 데 더 실질적인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보다는 일종의 신앙 편이주의에 빠져서 예배를 비롯한 신앙행위를 접는 사람들이 훨씬 심각합니다.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린다거나, 교회에 나가지 않고 각종 성서연구 모임으로 만족하는 태도는 자신을 향한 성령의 접근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한국교회와 예배의 위기입니다.
또 하나의 위기인 예배의 왜곡은 무엇일까요?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예배의 열정만 본다면 위기가 아니라 성공입니다. 이들은 온갖 현대 기기를 통해서 예배 참석자들에게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합니다. 소위 ‘열린예배’로 지칭되는 이런 예배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콘서트처럼 한 순간의 흐트러짐도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복음찬송가, 세계선교를 위한 세리머니, 대형화면을 가득 채우는 화려한 장면들, 우리를 감동시킬만한 예화 중심의 설교가 예배를 구성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예배에 참석하면 무언가 가슴을 울리는 경험이 있을 겁니다. 저는 이렇게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이벤트 중심의 예배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현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의 현실을 착각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예배가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것보다는 기본적으로는 예배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두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예배에서 은혜를 많이 받는데 무슨 말이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은혜는 모든 사이비 이단의 모임에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받는 은혜보다는 그 은혜의 원천인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열광적인 심리상태와 참된 은혜를 혼동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예배의 중심은 사람들의 종교적 호기심에 놓인 적이 없습니다. 흡사 진정한 연주자는 바하의 음악을 자기 취향에 맞도록, 또는 청중의 감수성에 맞도록 마음대로 조작하는 게 아니라 그 바하의 음악 세계로 들어가는 데 진력하는 것처럼 기독교 역시 그런 방식으로 신앙의 현실을 경험했습니다. 비록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이러한 신앙의 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삶의 상호성
저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삶의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요소는 각각의 독특한 세계를 담고 있지만 상호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신앙의 현실과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삶의 현실은 매우 긴밀한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구체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 의미를 확보할 수 있으며, 거꾸로 신앙의 현실은 이 세상에서의 현실적 삶을 통해서 실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의 삶에 영적인 차원이 상실하게 되면 인간은 단지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다는, 즉 심층적 의미를 상실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우리의 신앙이 삶의 차원과 소통하지 못하면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설명한대로 신앙과 삶이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을 원래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도 열심히 드려야 하고, 이 세상에서도 모범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바로 이런 균형감각에 있습니다. 이런 말이 매우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해명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칫 또 하나의 왜곡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또한 그건 무슨 의미일까요?
삶의 현실과 신앙의 현실이 소통한다는 말은 각각의 삶을 잘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두 현실이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현실에 속한 예배와 삶의 현실인 이 세상살이가 단지 인식론적으로 구별될 뿐이지 결코 다른 두 현실이 아닙니다. 좀 줄여서 말한다면 삶이 예배이고, 예배가 곧 삶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다.”(46절)는 말은 실제로 자주 모였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예배와 삶이 하나였다는 의미입니다. ‘신생불이’(信生不二)라고 불러도 될 겁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의 삶이 예배라는 건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에 궁극적인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도록 일구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삶이라는 건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종교적인 자기만족에 머물지 말고 생명의 역동성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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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조기성

April 18, 2005
*.224.165.53

어느때인가 부터
'균형'이라는 말을 조금은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자칫 균형이라는 게
양비론에 가깝게
위기를 탈출하는 소극적이고도
자기보호적인 방식으로 자주 쓰여지는 걸 보게 되니까요.
그래서 균형보다는
제목에 사용하신 상호성, 통전성, 조화
또는 긴장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 늘 아쉬움이 남는 건 왜일까요?

선택의 긴 스펙트럼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한 지점에
스탠드를 정해야 하는 순간이 늘 야속합니다.

그리곤 그 선택이 신앙의 현실이
삶의 현실로 반영된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늘 당황스럽습니다.

소견에 옳은대로 선택한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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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9, 2005
*.249.178.13

그렇지요.
결국은 선택해야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유보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종의 '카이로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기다림'의 영성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기다림은 무조건 시간을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향한 패토스입니다.
기독교인에게 그것은 궁극적으로 파루시아, 예수의 재림이겠지요.
그 파루시아가 인간의 열광주의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역사진보주의를 뛰어넘는 사건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다림과 선택의 긴장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긴장이 바로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그런 긴장의 심화가 곧 영의 심층적 활동입니다.
"확인할 길이 없어 ...."라고 하셨죠?
정직한 사람의 자기 인식이며, 세계이해입니다.
바둑의 정수를 찾기가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잖아요?
바두의 수를 읽을 능력만큼만 보인다는 건 당연하잖아요?
'당황'의 경험마저 없는 게 오히려 문제일 겁니다.
바르트도 '복음주의 신학입문'에서
신학자의 실존이 '당혹'이라고 말하지요?
보는 게 없는 사람은 놀랄 것도, 당황할 것도 없어요.
욥의 당황은 그만큼 생명의 신비, 그 심층을 들여다보았다는 의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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