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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기타 조회 수 11457 추천 수 39 2005.07.24 23:46:36
성경본문 : 마태복음 13:44-51 
http://wms.kehc.org/d/dabia/ENCO-001.MP3http://wms.kehc.org/d/dabia/ENCO-001.MP32005. 7.24.        
마 13:44-51
하늘나라와 일상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포리즘’과 ‘비유’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아포리즘은 짤막한 경구로서, 예컨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같은 형식의 가르침이며, 비유는 한편의 이야기 형식을 갖춘 가르침입니다. 아포리즘은 인간 삶의 내면을 정확하게 뚫는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비유는 주로 직접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나라는 직접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할까요? 우리 인간의 인식이 한정적이라는 게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늘나라에 관한 세 가지 비유를 연이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보물

4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당연히 하늘에 있어야 할 하늘나라가 밭에 묻혀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선 간단한 대답을 찾는다면, 하늘나라는 그냥 눈에 흔히 뜨이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겠지요. 오늘 본문은 이 보물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소작농이었을까요? 아니면 <보물섬>이라는 동화의 주제처럼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보물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밭을 헤치고 다닌 사람일까요? 본문 자체만으로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45,46절에 나오는 진주 장사꾼의 비유와 연결해서 본다면 이 사람도 역시 보물을 찾기 위해서 애를 쓴 것 같습니다. 숨어 있는 하늘나라는 아무의 눈에나 뜨이는 게 아니라 보물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처럼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뜨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집에 돌아가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합니다. 보물을 발견했으면 원래의 밭주인에게 돌려주든지, 아니면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게 옳은 행동처럼 보이는데, 이 사람은 주인에게 보물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 밭을 샀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아야겠지요. 그러나 성서는 그 사람이 도덕적인가, 근면한가에 관해서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세계에 집중하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기쁨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기쁨에 겨워서 보물이 묻힌 밭을 사기 위해 자기의 모든 재산을 처분했다고 말입니다. 이 비유에서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절대적인 세계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그 이외의 것이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변한다고 말입니다.

장사꾼

두 번째 비유는 진주 장사꾼입니다. 45,4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또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앞의 이야기가 땅과 농사꾼의 관계라고 한다면 이번의 이야기는 진주와 장사꾼의 관계입니다. 이 장사꾼은 훨씬 노골적으로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진주는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건가요? 다른 사람들도 그 진주를 보긴 보았겠지만 그렇게 값진 진주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장사꾼만 그 값비싼 진주를 알아보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앞에 나온 보물의 비유에서 보물이 밭에 묻혀 있었듯이 값진 진주도 역시 겉으로는 사람 눈에 뜨였겠지만 그 실체는 여전히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게 바로 절대적인 세계의 속성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최선을 다 기울여 살아가긴 하지만 삶의 본질을 의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우주 안에서 유일하게 생명이 가득한 지구를 자기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생명 현상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황홀한 사건인지 절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개는 이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런 삶의 기준을 따라가는 것에만 모든 삶을 소진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삶도 모두 귀중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절대적인 사태를 발견한 사람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전혀 다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절대적인 삶을 위해서 그렇지 못한 것들을 포기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물

세 번째 비유는 ‘그물’입니다. 47,4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차면 해변에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린다.” 어부가 던진 그물에는 어부가 원하는 물고기만이 아니라 온갖 물고기와, 경우에 따라서는 잡동사니까지 들어옵니다. 유대인들은 물고기 중에서도 먹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엄격하게 구분했기 때문에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선별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유능한 어부라고 한다면 단번에 선별했겠지만 그렇지 못한 어부라고 한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겠지요.
이 비유는 앞서의 보물이나 장사꾼 이야기와 좀 달라 보입니다. 앞의 이야기는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사거나 진주를 샀다는 것으로 끝나는데 반해서 그물 이야기는 세상 끝 날에 천사들이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악한 사람들을 가려낸다는 설명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비유가 초기 기독교 안에서 전승의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변형된 결과가 이런 보충설명으로 나타난 것이겠지요. 물론 이 비유는 알곡이 훼손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추수할 때까지 가라지도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가라지’ 비유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어쨌든지 이 그물의 비유에서 핵심은 그물 안에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들어있다는 사실과 어부가 그것을 구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물 비유는 앞의 비유와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밭에 묻힌 보물도 처음에는 숨어 있었으며, 진주도 역시 숨어 있었던 것처럼 그물 안에도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한 데 섞여 있습니다. 밭에 묻힌 보물은 농사꾼의 눈에 뜨였으며, 진주도 역시 장사꾼에 의해서 그 실체가 드러났던 것처럼 그물 안의 물고기도 역시 어부에 의해서 그 실체가 드러났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에 관한 이 세 비유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이미 앞에서 중요한 대목은 언급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숨어 있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에 관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았다는 사실에 관해서, 그것들을 구별할 줄 아는 영적 통찰력에 관해서 대충 짚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비유는 그런 가르침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 가르침을 밑바탕에 두고, 또는 그것의 좀 더 심층적인 의미를 따라잡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다른 영적 시각이 필요합니다.

일상의 깊이

오늘 우리가 읽은 하늘나라의 비유는 농사, 장사, 고기잡이라는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어떤 신학적 논리로 설명하시지 않고 일상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을 비유로 삼아서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 하늘나라는 일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일상은 단지 표면적인 세계라기보다는 심층적이고 영적인 차원입니다.
하늘나라를 알고 싶은 분이 있다면 그는 일상의 깊이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현재 보존하며, 앞으로 완성하실 하나님은 이 일상의 삶에 은폐의 방식으로 들어와 계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페된 일상의 깊이는 곧 일상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늘 신비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그 신비를 경험한 사람은 곧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지금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살아갑니다. 물과 밥이 우리의 몸속에 들어가서 우리의 몸이 생명을 유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가능하게 만듭니다. 이게 신기하지 않나요? 우리가 마시는 지표수나 지하수는 그대로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증발해서 구름이 되었다가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 물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갔다가 또 다시 구름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지구 안에서 돌고 돌면서 생명을 유지하게 만드는 물은 신기한 물질입니다.
이런 물리적 현상만 신기한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삶 자체가 신비롭습니다. 사람들은 돈이 많아야 행복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돈이 있어야 이렇게 더운 날 시원하게 지낼 수 있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살지 않더라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부를 많이 해야만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게 늘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식이 인간의 지혜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은 기계적으로 재단할 수 없는 그런 깊이와 신비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런 일상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일상의 신비와 만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신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는 신앙의 신비와 일상의 신비를 변증법적으로 결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종의 ‘주술’에 떨어지든지 ‘감상주의’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런 신앙은 일상의 신비를 포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기독교 신앙의 왜곡입니다.
기상 8월호에 저는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하는 글을 게재했습니다. 제목은  ‘신앙의 신비, 주술인가 역사인가?’입니다. 김 목사님은 이 세상이 귀신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곧 믿음의 능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구도에 의하면 일상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신비가 아니라 귀신이 지배하는 주술이 되고 맙니다. 김 목사님의 귀신론만 아니라 정통적인 교회의 신앙도 매우 많은 부분에서 주술에 떨어져 있습니다. 인간에게 복이 기계적으로 임할 것처럼 가르치는 기복주의는 근본적으로 주술적인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신비가 왜곡되는 일은 ‘감상주의’에서도 벌어집니다. 이런 신앙에 매몰되어 있는 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기만 하면 기계적으로 눈물, 콧물을 쏟아냅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랑에 휩싸인 사람들은 이런 열정적인 방식으로 그 신앙을 표현할 수 있지만, 그리고 이런 열정이 기독교적인 삶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게 기계적으로 작동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자기의 미래를 맡기는 결단이지 자신의 종교적 감정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은 아닙니다. 신앙의 토대를 감정에 놓으려는 것은 흡사 부부 사이의 관계를 뜨겁게 유지하기 위해서 연애시절의 편지를 읽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가 늘 연애감정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런 순정파들은 그런 연애감정을 억지로 요구하고, 스스로 그런 감정에 몰입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끼려고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신비를 왜곡하는 주술과 감상주의만이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감각적인 일상을 절대화하는 삶도 역시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 사회에서 발견하는 그런 천박한 세속주의는 이 세상에서 자기를 성취하는 것에만 모든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일상의 신비가 파괴되고 맙니다.
기독교인이 일상의 깊이로 들어가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왕도는 없습니다. 저는 하나의 방향만 제시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일상이 결합되어야만 우리에게 일상의 깊이는 그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단지 교리로서만이 아니라 생명의 깊이에서 새롭게 이해해야 하며,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일상의 실체를 뚫어보아야 합니다. 전자는 신학적 통찰이며, 후자는 인문학적 통찰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보물과 진주와 물고기가 보이게 될 것이며,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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