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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사랑, 가능한가?

주현절 조회 수 18836 추천 수 0 2011.02.22 10:54:15
성경본문 : 마태복음 5:38-48 

원수사랑, 가능한가?

마태복음 5:38-48, 주현절후 일곱째 주일, 2011년 2월20일

 

     마태복음 5장은 두 가지 점에서 다른 복음서들과 구별됩니다. 하나는 팔복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다섯 반명제를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팔복은 누가복음이 부분적으로만 다루고 있습니다. 다섯 반명제도 마찬가지로 다른 복음서가 부분적으로만 다루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인, 간음, 맹세, 악한 자, 원수가 그것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모세의 율법을 먼저 거론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이 반명제를 거론하게 된 배경은 유대전쟁과 연결됩니다. 유대는 로마를 대항해서 독립전쟁을 벌였습니다. 기원후 66-73년입니다. 73년에 그 유명한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3년 전인 기원후 70년에 이미 예루살렘이 함락되어서 실제로는 끝난 전쟁이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전쟁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무장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바리새파 운동입니다. 율법의 강화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당시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던 그리스도교를 향해서 율법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든지 아니면 유대교 밖으로 떨어져 나가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그리스도교는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이방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율법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있었지만 유대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압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율법을 어느 정도 따르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 5:20절이 이를 반영합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구절에 이어서 다섯 반명제가 나옵니다. 단순히 율법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율법보다 차원이 훨씬 높은 의(義)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작년에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정의에 목말라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김영사 출판사의 출판 전략이 성공한 것인지, 또는 샌델이 하버드 대학교 교수라는 명성이 빛을 발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인문학 서적이 이렇게 많이 팔렸다는 건 일단 좋은 현상입니다. 샌델도 정의를 말하고 유대의 율법도 정의를 말합니다. 복음도 정의를 말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의나, 루터가 말하는 칭의론(Rechtvertigungslehre)도 바로 정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입장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지금 율법이 말하는 의에 대한 반명제의 형식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는 악한 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마 5:38-42) 예수님은 먼저 율법을 거론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출 21:24)가 그것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오는, 거의 모든 고대 문명사회에서 하나의 기준으로 제시되었던 이 명제는 원래 좋은 뜻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법의 강제규정이 없으면 사람은 당한 것보다 더 심하게 앙갚음을 합니다. 말하자면 ‘눈은 눈으로’ 명제는 정의 사회를 위한 안전장치인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합니다. 속옷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주라고 합니다. 그 뒤로 비슷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당시의 정의를 넘어서는 윤리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이렇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런 절대적인 무저항, 비폭력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성전(聖戰) 개념을 앞세워 원수를 증오하고 피를 흘리며 싸웠습니다.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만이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교도인 로마가톨릭과 개신교가 30년 동안 싸운 적도 있습니다. 무저항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비주류에서만 받아들여졌습니다. 퀘이커 교도나 아미쉬 종파,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들입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는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이 군대에 가지 않고 오히려 감옥에 갑니다. 일전에 사법 연수원을 졸업한 변호사가 법무관으로 가기를 포기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결국 감옥에 갈 것이고, 6,7년 동안 변호사 개업도 못하겠지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변호사처럼 살라는 요청인가요?

     다른 하나는 이웃과 원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마 5:43-48)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레 19:18)고 명령합니다. 그것이 율법에서 정의입니다. 이 율법 명제를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무조건 원수처럼 미워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에는 이방인 나그네와 과부처럼 소외된 이들을 돌보라는 가르침도 많습니다. 이 명제는 ‘제로섬’ 게임과 같은 상황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원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생존 자체가 허물어지는 상황에서 원수를 미워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지 이 율법은 선악 이원론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자기와 같은 편과 다른 편을 철저하게 분리했습니다. 이웃과 원수의 분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거론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해를 비추며 비를 내리신다는 사실을 제시했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앞서의 이야기와 원수 사랑이라는 이야기는 똑같이 율법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율법을 뛰어넘는 마태 공동체의 고유한 윤리입니다. 여기에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로부터 벗어나는 단초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사랑, 이것은 가능한가요? 누가 우리의 원수인가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인가요? 파렴치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인가요? 이슬람교도들인가요? 동성애자들인가요? 북한 공산당인가요? 아니면 나와 경쟁하는 사업가인가요? 한 달쯤 전에 ‘쥐 식빵’ 사건이 있었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빵가게를 하는 사람이 쥐가 들어간 식빵을 만들어 상대편 상표로 포장해서 유통시켰다고 합니다. 기업 경쟁에서도 이렇게 비인격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마당에 원수 사랑이 가능할까요? 가능하든지 않든지 주님의 명령이니까 무조건 지켜야 할까요? 원수사랑은 그렇게 노력하라는 당부일 뿐이지 실제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말씀인가?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차원에서 위기입니다. 첫째, 실제 삶에서 원수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원수사랑은 고사하고 원수를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수준에도 이르기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명령(mission impossible)을 붙들고 살아야 할 사람들의 영혼은 지칩니다. 이런 명령을 모른 체하는 게 오히려 속이 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대충 살아도 별로 불편한 걸 못 느낍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실제 삶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실제로는 다를 게 없는데 달라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문제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많겠지요. 이 말씀은 신앙생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또는 자기를 학대하기도 합니다. 왜 자기는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지 몸부림을 칩니다.

     둘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정의로운 투쟁을 망설이게 한다는 점에서도 위기입니다. 일전에 이집트에서 민중들의 봉기로 30년 장기 독재를 하던 무바라크가 물러났습니다. 이집트 민중들을 향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해야 할까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 사랑이라는 말씀에 기대서 사회정의를 치열하게 전개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원수 사랑이 정의로운 투쟁까지 포기하게 하는 것이라면 공허하기 짝이 없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그런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걸까요? 다시 묻습니다. 원수사랑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요청하는 걸까요? 이것을 모든 상황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원수와 투쟁할 때는 투쟁해야 하고, 참을 때는 참아야 하고, 양보할 때는 양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각자가 알아서 선택해야 합니다. 복음은 신자들이 무조건 지켜야 할 도덕적 시행규칙이 아니라 영혼을 의존시키고 살아가야 할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은 본인이 결정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것까지 원하는 사람은 어린아이겠지요.

     그렇다면 오늘 원수 사랑이 말하는 생명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이미 마태복음이 이를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윤리는 이방인들도 다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정도에 머문다면 이방인과 다를 게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윤리를 넘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윤리의 수준은 하나님 차원입니다. 마지막 48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윤리적인 삶과 질적으로 다른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당황스럽습니다. 일반적인 수준의 윤리를 실천하지도 못하는 우리가 신적인 윤리를 따라야 한다니 말입니다.

     마태복음의 요청은 일단 명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실정법보다 더 높은 수준의 윤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정의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유럽과 미주의 선진국은 제삼세계에 빌려준 돈을 모두 탕감해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선진국은 그 돈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가난한 나라는 그게 늘 큰 짐으로 남습니다. 탕감해주면 거지근성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믿는다면 당연히 탕감해줘야겠지요. 오늘 한국의 신학자는 남북관계에서 어느 수준의 윤리를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북한 주민들과 김정일 정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정치는 정치인들이 나름으로 풀어가야겠지만, 하늘의 아버지를 믿고 있는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인들보다 훨씬 높은 단계의 윤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남한의 교회는 ‘아이러니’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원수 사랑이라는 성경의 말씀은 못 본체 합니다. 원수 사랑이 단지 관념으로 떨어지면 곤란합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떻게 실현될지를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살펴봐야 합니다. 기회를 얻는 대로 용감하게 이를 실천해야겠지요.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구제를 할 경우에도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누가 원수인지 아닌지도 잘 모릅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어떤 경우에도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요구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수 사랑의 차원까지 나가야 한다는 명령과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긴장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걸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를 찾고 있습니다. 아무 고민 없이 율법에 묶이거나 열광적 종교현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른 길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는 길이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집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여러분에게 덧입혀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완전한 의를 보아야 합니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 완전한 정의입니다. 여러분이 실제 삶에서 원수 사랑을 완전히 실천하지 못해도 여러분은 여전히 완전합니다. 원수 사랑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원수 사랑의 경지를 향해 지혜롭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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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한밀

February 22, 2011
*.231.141.176

목사님,

지난번 저의 두서없는 의견에

좋은 답변을 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의 지배하에, 그것도 치열한 독립전쟁과 그것을 무력으로 제압했던

유대전쟁의 살벌한 배경하에서 이말씀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전이해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대하면

진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지에 대한 질문을 갖게 하는군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서슬퍼런 시절에 다분히 로마당국에서 보기에 고맙게 여길만한 얘기들을 하신것 같습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외람되지만, 오늘 본문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말씀속에서 원수사랑이 가능한것인가 또는 가능한 방향으로의 해결책에 대한 고민보다는

오히려 왜 마태공동체가 오늘의 본문들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억하고 고백했는지에 대한

이해와 마태공동체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소극적 신앙에 대한 비판적 숙고가 먼저 있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속에서 고백되어지고 그 말씀데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할때

마태공동체와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는

어떻게 보면 시대를 지나면서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겪어야하는 어려운 상황들의 한 모습일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일제시대나, 서슬퍼런 군사독재시대처럼 말이지요.

마태공동체가 유대 그리스도교로 대표될수 있다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서슬퍼런 상황에서 초대교회(?)를 유지하고 그 기득권들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에 대한 생존원칙이었다면, 마가 공동체가 고백하는 그들의 삶의 자리와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요한이 잡힌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막1:14)

요한이 잡히고 박해의 서슬퍼런 상황이 왔을때 예수님이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를 전했다는 고백은

마태공동체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 어떤 연관성을 가질 수 있는지요...?

목사님이 자주 강조하시는(최근에 목사님의 책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본문과 본문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공동체에 대한 비판적이해가 선결되어야 하는것은 아닌지요...?

우리의 역사적 현실속에서도 정의(하느님의 나라)가 악인(?)들에 의해 침노당할때

그당시 많은 교회들이 마태공동체가 고백한 예수님의 오늘 본문말씀들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희생과 침묵을 요구하며 교회의 역할들을 감당하지 못했던것들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신앙을 고백했던 이들에 의해 하느님의 나라가 조금이나마 실현되는 것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적은 문제건 큰문제건 주님의 신앙을 고백하는 결단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희석되어버린 예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기위해

재해석 되어야 하지는 않을까요.......?

 

이곳은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먼저 댓글을 달게 됩니다 (죄송..)

주일만 지나면 목사님 설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워싱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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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2, 2011
*.120.170.250

한밀 님,

글읽기나 쓰기가 대단히 정밀하군요.

좋습니다.

위의 주제로 신학석사 논문을 써도 되겠네요. ㅎㅎ

설교시간에 마태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를 너무 깊이 들어가면

또 복잡한 문제가 생긴답니다.

설교가 아니라 신학강연의 성격이 강하게 되지요.

복음선포와 신학강연 사이에서

설교자가 어떤 자리를 잡느냐 하는 것은 본인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한밀 님이 설명하는 것처처럼

마가복음 공동체와의 관계까지 끌고 들어가는 건 좀 심한 것 같군요.

또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가 처한 삶의 자리를 살피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참고사항일 뿐이지 거기에 너무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는 성경에서 부수적인 것이니까요.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 삶의 자리를 살피자는 것이지

거꾸로 되면 '꼬리가 개를 흔드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제 설교를 기다린다니 감사하구요,

또 다음 주일에 만나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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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삼송

February 23, 2011
*.119.241.105

친인척이나 같은 교회다니는 성도들도 마음에 안들때는 보고 싶지 않는데 원수를 사랑하다니요? 정말 불가능한 말씀이시죠

정말 이말씀 붙들고 묵상해보면 예수님께서 너무 높은 수준의 신앙을 왜 우리들에게 지금 요구하시는지 의문이 들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삶의 자리에서는 이런 말씀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뜻이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당시 사람들의 삶의 방법 아니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삶의 처세라고 할지!!웬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키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가 아닐런지요 이 땅위의 삶은 잠정적이고 결국 그말씀은  천국을 소망하는 삶의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의 삶이 마지막때까지 연결되니 원수라도 삶을 존중할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지요. 사랑도 사람이 할수 없고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이라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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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3, 2011
*.120.170.250

삼송 님,

잘 지내시죠?

원수 사랑, 참으로 어려운 주제이지요?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우리도 온전하라는 말씀 역시 어려운 주제지요?

원수 사랑을 이루시고

하늘 아버지의 온전함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은총을 받은 우리가

그런 삶을 향해서 분발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구요.

율법이나 광신으로 도피하지 말고

온전한 정신으로 주님의 명령에

우리의 영혼을 던져봅시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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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삼송

February 24, 2011
*.109.42.2

목사님 말씀을 늘 마음판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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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광토

February 24, 2011
*.11.37.96

선생님 안녕하세요 항상 글 감사히 보고있습니다.

마지막 마디가 가장 중요한것 같은데, 전혀 이해를 못하겠네요..

안타깝네요 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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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5, 2011
*.120.170.250

광토 님,

저 글을 즐겁게 읽고 있으신 것 같아 저도 즐겁습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마지막 마디는 무엇을 가리키는지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진다는 진술을 가리키나요?

어떻게 보면 관념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대체적으로 그렇습니다.

관념적이라고 해서 우습게 생각할 건 없습니다.

궁극적인 것은 실증적인 차원이 아니라

관념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덧입혀진다는 말은 '안에'라는 말로 바꿔 보세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다고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합니다.

그것도 좀 관념적이지요?

그게 언어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덧입혀진다거나 안에 있다는 말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고유한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그걸 확인할 수도 없지요.

다만 당사자가 어떤 힘에 사로잡히는 걸 경험할 수 있어요.

이는 마치 모차르트 음악의 깊이로 들어가면

모차르트의 음악이 제공하는 힘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한 의를 이룰 수 없어요.

원수사랑은 아예 불가능한 목표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우리를 맡기면

천천히 그런 삶으로 방향이 움직이기 시작하겠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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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광토

February 25, 2011
*.244.221.1

말씀 감사합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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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떡진머리

February 25, 2011
*.223.35.140

차이는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죽고 사는 차원의 '원수'로 생각되는 대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극단적 대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와 가족에 대한 생명이나 재산에 대한 위기와 위협이 동반되는 경험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서에는 이러한 상황들이 존재했을 만합니다. 종교적 박해도 있을 것이고 독립전쟁과 관련된 많은 생사의 위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가 극단적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이러한 관계는 보다 첨예화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아닌 상대적 강도가 약한 갈등에서 오는 인간관계의 형성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사랑은 쉬운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량이나 인내 정도로 말입니다.

저에게는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형성된 '불구대천의 원수'라 불리울 만한 자들이 있는데 이자들에 대하여 '관용'같은 이야기로 사랑을 풀어내기에는 경험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아마도 목사님의 말씀대로  "스스로 선택을 하여야 한다"는 말씀이 위로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을 해 봅니다.

극단적 상황이 상대에 대한 판단에서 모든 것이 한측면의 부각을 통해 극단화 되버렸지만 사실상 사람이란 '이웃'과 '원수' 또는 '좋은 이' '나쁜 놈'같이 이항적으로 나뉘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이분화된 양극에 각각 서 있는  인간은 현실이 아닌 우리의 머리속에 상황에 의해서 강조되어  나타나는 환상일 것입니다.

인간이란 '이웃'과 '원수'의 모든 면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고 '좋은 이'와 '나쁜 놈'이 혼재해 있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에 이쁘던 마누라도 때로는 원수로 보이는 것 아닐까요. ㅎㅎㅎ

농담입니다. 언급된 자가 봐서는 않되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로 부터의 출발, 즉 우리가 사람들을 만남에 그들의 '이웃'된 부분과 접속되고 '좋은 이'의 측면을 친구로 삼을 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가능하지 않을 까 생각해 봅니다.

만인에게 모두 나쁜 사람도 없고, 만인에게 모두 좋은 사람도 없다는 말을 저는 자주 쓰는데 이것은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즉 무엇에 접속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접속을 어떻게 이루느냐에 따라 인간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원수처럼 미워할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사물의 한 단면을 전체로 확장시켜서 보지 않는 것, 사람의 한 부분을 그 사람의 모든 것으로 소급시키지 않는 것, 즉 사물을 있는대로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는 것이 사람에 대한 사랑의 첫 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이 처럼 공자님 말씀 같은 이야기를  저역시 아직까지는 위에서 언급한 '블구대천의 원수'와의 관계속에서 충실히 적용하여 이로운 접속을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 경우 사회적, 역사적으로 얽힌 문제이기에  개인적 인간간의 관계속에서는  문제해결의 열쇠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이란 의미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자적이고 사회적이며 역설적인 의미로 말입니다.

 

늦은 밤  잠은 안오고 해서 몇줄 적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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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5, 2011
*.120.170.250

떡진 님,

돼지를 돌보느라 몸이 지쳐 있을 텐데,

잠이 안 오다니 마음도 지쳤어요?

원수 문제를 특유의 논리로

예리하게 분석하셨네요.

성서기자들도 아마 그런 과정을 다 거쳤을 거에요.

요즘 학문과는 다른 방식으로요.

원수 사랑이 규범윤리도 적용될 수는 없겠지요.

때로는 포청천도 필요하겠구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너무 잘 이해하고

반듯하게 실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내려 놓은 게 좋겠지요.

각자의 수준만큼 일단 살아봅시다.

그분께 모든 걸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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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바다지기

February 25, 2011
*.177.206.111

안녕하세요? 정 목사님!

요즘 제 손에는 목사님께서 쓰신 '설교란 무엇인가?'가 떠나질 않고 있습니다.

그냥 가볍게 읽을 수 없어서 줄을 긋고 제 설교를 떠올려가며 곱씹으며 읽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서 목사님과 가까이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오늘 설교도 잘 읽었습니다.

쓰여진 설교 원고로도 얼마든지 감동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습니다.

설교를 읽으면서 습관이 되어 버린 저를 스스로 책망합니다.

자료 수집이지요.

원수 사랑에 대한 말씀의 배경으로 마카비 전쟁을 상기시키시는 말씀을 통해서

제 설교에 대한 스스로의 허무함을 경험합니다.

배움에 대해 외면했던 제 모습,

그러면서도 늘 설교에 무식하게 자신있어 했던 제 모습이

목사님이 책에서 언급한 J 목사와 다를 바 없었음을 반성하게 합니다.

 

성도들이 설교를 들을 때 생각하게 하는 질문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과 의도로 이끌어 가시는 모습을 배우겠습니다.

일전 비평해 주신 제 설교에 칭찬해 주신 부분인데

언제부턴가 성도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설교가 아니라

듣게만 하는 설교를 해 오고 있네요.

 

늘 감사드립니다.

누군가 칭찬보다는 돌 맞아가면서도 꼭 해야 할 일을 두렵없이 하시는 목사님께

의로운 전사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무작정 설교의 코메디가 싫다고 하지 않으시고

신학적인 근거로 지적하시는 모습 때문에 그렇습니다.

 

매주 목사님의 설교를 읽고, 저도 나름대로 고민하며 설교에 충실한 목사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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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5, 2011
*.120.170.250

ㅎㅎ

박상진 목사님,

내 책과 글은 일부의 시각에 불과하답니다.

목사님은 지금 목회 현장에서

최선의 방식으로 목회하고

최선으로 설교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내 책의 내용을 너무 의식하지 마세요.

그래도 목사님의 설교 영성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나로서는 기분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제 정신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지만

성령을 의지하고 이 길을 가보십시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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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주와종

February 26, 2011
*.147.67.59

목사님 쓰신 '설교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습니다.

베르디의 레퀴엠...에 대한 비유가 마음에 많이 남습니다..

성서 속의 '길'을 발견하고 성서 속의 깊은 샘물을 마시며

그 성서 속의 세계로 성도들을 안내할 수 있는 유익한 설교자가 되어야 할텐데...라는 생각들을 많이 하고 있어요. ^^

 

그런데, '아버지께서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라'는 말씀을

단지 '전가된 예수의 의'라는 교리적인 틀에서 해석적용하기에는 너무 아쉬운 대목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네요.

배경적 설명과 충분한 실존적 질문들을 통해 '완전하라'는 말씀에 대한 더 깊은 고민들을 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예수의 의의 전가'가 답이라면... 결국 열려있는 성서의 깊은 세계를 정형화된 교리적 틀 속에 계속해서 가둬두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예수의 의의 전가라는 부분을 존재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으로 보고 있는데,

입장이 다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원수 사랑'의 대목에서 '완전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면 예수님의 의가 전가되어 나는 완전할 수 있으니 예수님만 의지합시다'라고 적용한 것은, '너희도 완전하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굉장한 초월적 윤리와 이웃과 원수를 향한 관계적 온전함과 성숙함의 모습을, 교리적인 이야기로 도피하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뭐 어쨌든 신학적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교리적 틀과 안경 때문에 '하나님의 우주적 차원에서의 구원'이 더 입체적으로 이해되지 못하는

오늘날의 조직신학중심의 신학적 환경에 큰 근심을 안고 있는,

설교자로서 글을 남겨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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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6, 2011
*.120.170.250

주와종 님,

안녕하세요?

설교하시는 분이네요.

반갑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시는군요.

좋습니다.

'전가된 의' 개념은 그렇게 한가한 건 아니에요.

사회윤리를 포기하고,

본회퍼가 비판했듯이 값싼 은혜로 도피하는 게 아니랍니다.

전가된 의의 깊이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윤리적 책임을 무겁게 생각합니다.

부모가 인정해준다는 사실을 아는 자식이라고 한다면

인정받는 삶을 위해서 구도적으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한 거에요.

만약 칭의만 믿고 '놀고 먹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칭의의 세계로 들어간 게 아니에요.

존재가 새로워지면 당연해 행위가 따릅니다.

행위를 보고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거구요.

그리스도교가 전가된 의, 칭의를 말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율법 신앙을 극복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어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칭의, 전가된 의 개념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겁게 만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갑싼 은혜도 잘못이지만

무거운 은혜도 잘못이에요.

비싼 은혜가 복음적인 거지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아니라,

사실 인간은 아무리 노력도 그게 잘 되지 않는데,

그리고 윤리는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고

그 정도를 따지기도 힘든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값비싼 은혜에 사로잡혀서

원수 사랑의 경지에 이르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그게 안 되고 우리는 여전히 완전한 거에요.

실증적인 차원이 아니라 

칭의의 차원에서 완전한 거지요.

혹시 이게 신앙을 교리로 추상화시키는 것처럼 들리나요?

그리스도교 교리는

주와종 님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하나님의 우주적 차원에서의 구원'을

그 현실로 담고 있답니다.

그게 간혹 오남용되어서 문제지만요.

좋은 주일 맞으시고,

내일도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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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February 27, 2011
*.239.93.193

인사드립니다. 울산에 사는 진인택이라고 합니다.

2월24일자 신문에서 목사님을 처음뵙고 마음에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기도가 두렵다는 말씀에 정말 두렵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해서 반쯤 읽는 중입니다. 평범한 신자인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이웃의 형제 자매가 저희 집에 놀러와서 책제목 보고 주제 넘는 책보고 있다고 할 것 같아서 조용히 읽었습니다. 제가 목사님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씀을 듣는 중요한 관객과 같은 입장은 될 것같아서 찬찬히 읽으면서  제가 가야할 방향과 하고싶은것들, 그리고 꼭 해야할 중요한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저도 어떤 설교를 들으면서 긴장상태를 끝날때까지 유지하다가 끝이났을 때, 얼른 일어나서 가방들고 집으로 가버리고 싶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긴장이란게.. 지겹고 졸리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설교를 듣고 혼란스럽고 강요당하는 느낌을 받는 누군가가 생길까봐 걱정이 되어서 긴장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신분의 노고를 폄하하는 제가 건방진것인지, 아니면 이해를 못해서인지 그리고 선별적으로 설교를 들어야 하는지...

전 2009년8월 부터 하나님의 창조와 능력을 알게되어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달 뒤부터 어제까지 줄곧 성경책을 읽어 왔습니다. 지금은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데 어제는 목사님의 책을 읽기 시작하니 도저히 내려 놓지를 못해서 근래와서 드물게 성경책을 하루 읽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지엽적인 궁금증을 일일이 묻자니 많은 업무에 시달리는 여러분들께 폐끼치는 것같고 해서 한권씩 한권씩 책을 사서 보게 되었습니다. 힘든것은 제가 그렇게 산 책이 독이 되지는 않을까 하면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형제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전도를 신경써야지 그렇게 책만 읽어서 뭐하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조직신학을 저도 읽어도 되는지요. 성경책을 3번째 읽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터넷으로라도 목사님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목사님 말씀들으러 꼭 가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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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7, 2011
*.120.170.250

진인택 님,

안녕하세요?

제 책을 좋게 읽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지 2년이 채 안 되었군요.

성경 읽기는 좋은 경건생활입니다.

하루 읽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니 걱정마세요.

그 시간에 제 책을 읽으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ㅎㅎ

성경만이 아니라 다른 신앙서적을 읽으신다니, 좋습니다.

그런데 책을 잘 골라야 합니다.

일단은 간증이나 성공신화와 같은 책들은 제쳐놓는 게 좋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책들을 골라보세요.

훌륭한 영적 스승들의 책도 좋구요.

아마 책을 고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다비아에 들어오신 분들 중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책을 다 분서갱유 식으로 처리했다는 말을 하는 분들이

제법 됩니다. ㅎㅎ

노골적으로 말해 쓰레기 같은 책들이 많거든요.

제가 무슨 조직신학 책을 말했나요?

조직신학 책은 나중에 읽어도 됩니다.

아주 기초적인 것은 좋지만요.

저에게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지 마세요. ㅎㅎ

여기 사이트 알림방에 가서 공지로

추천도서 목록이 나올 겁니다.

죽 한번 보세요.

다 읽을 수는 없구요.

그냥 책 제목만이라도 보세요.

저자들의 이름도 알아두시구요.

그리스도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은

바둑의 세계로 들어가거나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단시일이 아니라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하는 게 좋습니다.

대구성서아카데미는 믿을만한 사이트랍니다.

신앙, 영성, 신학의 중심이 바로 서 있는 사이트에요.

잘 오셨습니다.

천천히 구경하시면서 신앙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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