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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사순절 조회 수 9917 추천 수 0 2018.03.04 21:59:14
설교듣기 : https://youtu.be/89eOKSORr9c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8-25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사순절 셋째 주일, 20183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없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도 많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과해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잘못한 게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시키는 자들을 큰 능력으로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고분고분 십자가에 처형당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기는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대답이 그것입니다. 이런 대답이 모든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건 아닙니다. 30대 초반의 한 유대인 남자의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십자가 처형은 구원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멀어 보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거 아닌가, 하고 절망을 토로하신 적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주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집단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시선을 바울은 고전 1:22,23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표적 신앙과 지혜 신앙

위 구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신앙적 특징이 표적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옳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표적에 매달렸습니다. 표적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리킵니다. 출애굽 당시 홍해가 갈라진 사건이나 광야생활에서의 먹을거리였던 만나와 메추라기가 이런 표적들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에게도 초자연적인 기적이 많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표적이었습니다. 16:1-4절을 따르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표적이 없으면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바다에 수장되었다가 구출된 요나의 표적밖에는 아무 것도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표적 신앙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에서, 그리고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은 표적 신앙입니다. 벤처 기업을 일구어서 이름을 날리는 것도 사실은 표적 신앙입니다. 21세기 현대인은 모두 이런 표적 신앙에 기울어져 있는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소위 대박이 나기를 바랄 겁니다. 표적 신앙의 밑바닥에는 성공주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적 신앙에서 볼 때 예수의 십자가 운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기에 거리낌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함께 헬라인을 거론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는 반면에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philosophy)입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모두 헬라 사람들입니다. 지혜는 단순히 지식이 많다는 뜻만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그런 전통에 따라서 오늘날의 학문과 과학이 발전되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도 지혜를 얻으려는 데에 있습니다. 지혜가 특별히 많은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와 바울이 활동하던 시절에 지혜로운 사람들의 눈에 예수의 십자가는 미련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지혜로웠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겁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회당에서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지 말고 안식일이 다음날 고치면 당시 유대교 권력자들과 큰 충돌이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옳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십자가 운명을 피하지 않은 것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미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불문하고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죽 했으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운명을 거칠게 반대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당시에는 몰랐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거리낌의 대상이나 미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생각의 완전한 반전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두 번에 걸쳐서 그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먼저 18절과 24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바울의 이 진술은 정말 옳을까요? 신앙생활의 어려움에 떨어진 신자들에게 종교적 덕담을 전한 것일까요? 18절에 나오는 십자가의 도라는 표현에서 도는 헬라어 로고스의 번역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24절에 나오는 그리스도23절에서 표현된 십자가에 못 박힌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두 구절 모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바울의 말을 당시 다른 사람들이 들었으면 비웃었을 겁니다.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을 종종 오해합니다. 두 가지로 오해합니다. 하나는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을 받아 편안히 잘살게 된다는 오해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고통 받으나 죽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천당 가면 행복하게 영원히 살 거라는 오해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무능력의 표본인 예수의 십자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인가요? 그런 능력을 경험하셨습니까?


우선 표적과 지혜의 삶이 얼마나 무능력한지를 뚫어봐야 합니다. 표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공신화입니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확인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그걸 성취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뉴스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처럼, 이명박 전임 대통령은 대기업 회장 출신으로 돈이 넘치도록 많은 사람인데도 대통령 직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일들이 양파껍질처럼 벗겨지고 있습니다. 그분 한 사람만 지목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공신화에 매달리면 죽을 때까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재산 증식을 인생의 목표로 여기는 겁니다.


돈만이 아니라 세련되어 보이는 지혜도 그렇습니다. 우리교회에 대학교부터 초등학교까지 선생님들이 비교적 많습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여러분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순식간에 지혜를 상품처럼 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박사 학위를 가진 전문가로서 더 깊은 학문의 세계를 파고든다고 해도 그것으로 사람이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요즘 천안함 사건이 다시 불거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과학자들이 소신 있게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4대강 문제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정부에 밉보이면 연구비를 받지 못하거나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자신의 지혜를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겁니다. 물론 표적과 지혜를 선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표적과 지혜는 생명을 얻는데 무능력합니다. 그것으로 우리 영혼이 해방을 얻지 못합니다. 물리학에서도 알면 알수록 모른 것이 점점 더 많아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표적과 지혜가 상대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기는 하되 절대적이지 못하기에 그것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건 바울의 표현으로 미련함’(20)입니다.


이걸 제 문제로 받아들이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목사들에게 표적과 지혜는 목회 잘해서 교회를 놀랍도록 성장시키는 겁니다. 한국교회에는 세속사회와 마찬가지로 성공신화가 무용담처럼 회자됩니다. 나름으로 신학을 좀더 많이 공부한 목사들에게는 신학적인 업적을 남기는 것이 바로 표적과 지혜입니다. 여기에 매달리는 한 목사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 그런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아무리 큰 표적과 지혜를 이룬다고 해도 그것으로 영적인 만족인, 즉 생명 충만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당시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면벌부를 판매한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솔라 피데솔라 그라티아를 외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론적 의로움은 믿음으로만 가능하고,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절대 고독의 자리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표적 신앙과 지혜 신앙으로부터 배제된 사건입니다. 절대 고독의 자리입니다. 사람들로부터의 박수와 격려와 위로가 없는 자리입니다.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만족감과 삶의 재미가 단절된 자리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운명에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자리에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매달립니다. 만에 하나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까 몸서리를 치면서 삽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자리로부터 멀어질수록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아주 실질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영지주의적 가현설론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림자로 십자가에 달린 게 아닙니다. 구약의 욥처럼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으로 인생이 곤두박질 친 겁니다. 이 사건이 무슨 근거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바울의 이 말에 동의가 됩니까? 바울은 지금 열광적인 상태에서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여기까지가 설교자로서 최선의 설명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성령께 위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음 단계는 제가 알고 있는 것의 차원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라고 한다면 여기서 설교를 마쳤을 겁니다. 예수의 십자가 운명은 표적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미련한 것이지만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라.’고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설교자로서 책임감이 더 많아진 탓인지, 아니면 용감해진 탓인지 다음 단계를 설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능력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와 다릅니다. 사람의 능력과 사람의 지혜로만 본다면 불행할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로는 행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5장에서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표적과 지혜를 추구하는 세상 논리에서는 불행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에서는 복이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만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삶의 조건 자체가 선하다거나 가난한 사람이 무조건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 아니라 한 눈을 팔 것이 없는 삶의 조건에서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은 혼란을 벗어나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친구가 많아야 행복하고, 취미가 많아야 인생이 재미있을 거라는 착각입니다. 이시영 시인의 시 순간들을 읽겠습니다. ‘천상의 어딘가에서/ 참새 한 마리 묵직이 내려와 앉는다/ 나와 온 우주가 함께 팽팽해진다/ 사람들 바쁘게 걷는다.’ 참새 한 마리를 통해서 우주와의 공명을 팽팽하게 느끼는 사람과 사람들끼리 어울려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할 것이며, 누가 더 삶의 능력을 보이는 사람일까요?

 

못 박힌 그리스도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못 박힌 분입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 자리에 이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혁명적입니다.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 운명의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갔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즉 하나님의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혼자 죽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비유적으로, 한 밤중에 깊은 산길을 가야할 어린이가 있습니다. 무덤도 옆에 있습니다. 산짐승 소리도 들립니다. 다행히 그 산길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면 아이는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막상 절망적인 운명에 떨어지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한다는 생각보다는 걱정에 사로잡힌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운명을 벗어나려고 온갖 수고를 다합니다. 그건 인간이기에 어쩔 없긴 합니다만, 정신을 차리고 삶의 실체를 돌아봤으면 합니다. 그곳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으면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졌던 일화입니다. 가스실로 많은 유대인들이 들어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죽지 않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가스실 밖에 있던 한 젊은이가 랍비에게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방관하는 하나님이 가능하냐, 하고 말입니다. 랍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저기 가스실 안에 계신다네.’


아직 오지도 않은 불행한 운명을 미리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따뜻하고 위로가 되고 재미있는 설교를 듣고 싶을 겁니다. 표적과 지혜가 과도하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십자가의 운명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는 쉽지 않기는 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불행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설령 운이 좋아서 무탈하게 인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죽는 순간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 순간이 닥친 후에야 , 이게 뭐지?’ 하고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십자가의 운명을 반복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가야 할 그 운명 앞에서는 표적 신앙도 무의미하고, 지혜 신앙도 무능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위해서, 또는 죽음을 무기삼아 여러분을 두렵게 하기 위해서 오늘 설교를 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능력을 바라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표적과 지혜를 넘어섭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표적과 지혜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도 되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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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복서겸파이터

March 05, 2018
*.17.3.1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 늘 도전이 되고 위로를 받고 중심을 잡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계속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정치적인 견해에 관한 부분입니다. 박근혜, 이명박은 그의 어리석음과 죄악으로 인해 심판받고 있다는 생각에는 정말 100퍼센트 동의합니다. 적폐청산이 올바르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반대편에 있는 문재인 일당이 과연 깨끗한가에 대해서는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들이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하는 자들이라 생각합니다. 이윤택, 고은과 같은 이들의 추악한 성추문이 만일 정권이 교체되지 않았다면 백일하에 들어났겠습니까? 아마 블랙리스트의 일환이라고 공격하며 지금의 여당은 공세적 수세를 그치지 않았을것입니다. 94년도에 이미 이문열이 사로잡힌 악령이라는 소설을 통해 거짓된 고은의 일대기를 고발한적이 있었으나 내부고발자는 참혹히 진압당했습니다.

얼마전에 진주 촉석루에 다녀왔습니다. 논개가 왜장과 함께 떨어진 의암도 보고 끝까지 저항한 진주성 이야기도 박물관에서 봤더랬습니다. 보고 나니 마음이 착찹해지고 슬프더군요. 임진왜란만 봐도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지만 끝난 뒤에는 모두 숙청당할까봐 숨어버리고, 임금을 따라서 명나라까지 수행했던 신하들이 다들 공신이 되어 버렸지요. 그래서 병자호란때는 의병이 거의 없었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6.25만해도 육탄 7용사에서 학도병에 이르기까지 일만 민중들이 자기 목숨을 버려가며 나라를 지켰는데, 정작 지도자들은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가 버렸구요. 고려시대에 대몽항쟁 때는 지도자들은 섬에 들어가 호의호식하는 사이에 한반도 전역이 쑥대밭이 되었구요.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결국 이나라를 지키는 사람은 풀뿌리 민중이었지 지도자였던 적은 삼국시대 이후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지금 북한과 전쟁이 난다면 지금 청와대에 계신 분이나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희생되겠습니까?

저는 정치인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님의 통치를 기다리며 현실의 정치에서는 아무런 희망을 기대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런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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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5, 2018
*.182.156.37

복서 님과 마찬가지로 저도 역시

'문재인 일당'이 깨끗하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낫다고는 생각합니다.

목사들의 목회관에서 볼 때도

절대 선이나 절대 악으로 분리할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나은 쪽은 분명히 있지 않을까요?

설교 행위도 절대적으로 잘못된 설교와

절대적으로 옳은 설교로 분리할 수는 없는 거와 같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제가 십여년 전에 한국의 대표적 설교자들의 설교를 비판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제 설교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본다면 모두가 죄인이지만

역사적 현실에서는 상대적으로 괜찮은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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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복서겸파이터

March 05, 2018
*.235.119.186

목사님. 감사합니다. 현실적인 판단은 해야겠네요. 그런데 자한당이 사두개인을 생각나게 한다면, 더민당은 바리새인 같아요. 둘 다 지지하기가 전 좀 그러네요. 고민해보겠습니다. 다소 무례한 글에도 정성껏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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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March 07, 2018
*.240.61.32

메시아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한 제자에게
당신 앞에 놓인 십자가의 길이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는것이라는 ...
십자가의 도가
제자들이 가졌던 세속적 메시아관과 얼마나 다른 길이었는지를 성경속에서 무수히 증거하고 있거늘,
오늘 우리는 그 성경을 읽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지혜와 능력의 동굴안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한채 자기 열심에 갇혀 있으니,
이 설교문 앞에서 " 아멘! 이제 그리 살아야지!" 도전을 갖기보단, 우리는 실날같은 희망조차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임을 새삼 통감하기만 할 뿐입니다

J를 믿는게 이런거란 말인가?
태생적으로 세상을 사랑할수 밖에 없는
질기고 질긴 죄의 본성과, 뼛속까지 중독된 세상살이이의 관성을 거슬러 사는게 가능하단 말인가?
설교문 앞에서 쓸쓸히 돌아갈수 밖에 없는 부자청년의 뒷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일진데
이런 우리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가?
구원이 타자의 절대적인 선택과 은총임을 알지만,
죄의 견인력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위력적이고,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치명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오늘 여기서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는 믿음이 우리에게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자문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랬죠
고집과 무지보다 더 무서운 죄는 없다..

J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우리가, 더군다나
기성교회의 반성경적인 왜곡과 오도를 거부하고 고독한 구도의 길을 나서기로 자처한 우리가 여전히 얼마나 깊은 어둠과 고집 가운데 갇혀 있는지를 꿰뚫어 볼수 있기를 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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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7, 2018
*.182.156.208

부스러기 님은 (좋은 뜻으로) 완벽주의자처럼 느껴지는군요.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신학개념 중에

'기독교자 완전'(Christian perfection)이 있습니다.

죽어야만 영화 단계에 이르지만

죽기 전에도 고급의 영성에 이를 수 있는데,

그게 기독자 완전인 거지요.

웨슬리가 청교도 신앙의 영향을 받았기에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부스러기 님의 영적인 고민과 맞닿아 있는 개념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은 하되

이르지 못하거나 실제 삼에서 달라지는 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나치게 염려하는 건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나'를 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에

훨씬 큰 비중을 두는 게 옳지 않을까요?

솔라 피데, 솔라 그라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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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March 08, 2018
*.240.61.32

출세지향적인 자녀교육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그 작은 저항 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 시대에,
시대정신과 전혀 다른 차원에 삶의 토대를 놓고 살아가야하기때문에 감수해야할 소외감이 어쩌면 우리가 감당해야할 '박해'나 '고난'이 아닐런지요

신자로서의 책임과 쉽사리 변하지 않는 자신의 무력감 사이에서 잠시도 내려놓을수 없는
긴장과 갈등, 이러고도 예수를 믿는다고 할수있는가.. 자책은 우리의 신앙여정에서 평생을 좇아다니겠지요?

"오직 믿음으로" 라는 슬로건이 제도권 교회들에서 전후사정은 거두절미한 채 

자기 합리화의 전가의 보도로 팔아먹는데 거부감이 많았습니다

송곳같은 설교말씀과 달리 댓글은 무딘 칼로 와닿는것 같아 잠시 미소를 지어보았답니다
(댓글속에 담긴 목사님 진의를 왜 모르겠습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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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March 09, 2018
*.151.83.22

표적과 지혜의 신앙이 추구하는것은
부유하고 축복받고 건강함과 즐거움이라면,
그것을 넘어서는 신앙은
부유함과 가난함, 축복과 불복, 건강과 약함, 즐거움과 괴로움 이모든것 속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자리에 이미 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라는 것을
목사님 말씀으로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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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0, 2018
*.182.156.117

예, 표적과 지혜 신앙이 인간의 삶을 끌어가는 에너지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 너머의 십자가 신앙이 가리키는 더 근원적인 생명의 세계를 향해서

구도정진의 자세로 살아야겠지요.

그게 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서 마땅한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평화로운 주말과 주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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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4 성령강림절 성령이 도우시리라! (롬 8:22-27) [4] 2018-05-20 5824
743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6974
742 부활절 성령 임재의 증거 (행 10:44-48) 2018-05-06 7662
741 부활절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4] 2018-04-29 7245
740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2018-04-22 5564
739 부활절 예수의 살과 뼈 (눅 24:36-48) [4] 2018-04-15 7827
738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9016
737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9521
736 사순절 예수의 죽음과 매장 (막 15:33-47) [4] 2018-03-25 7365
735 사순절 예수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요 12:20-33) [4] 2018-03-18 6626
734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11820
»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17
732 사순절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1-38) [7] 2018-02-25 8341
731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2
730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7303
729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9612
72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5839
727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6487
726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2
725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8703
724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8651
723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7409
72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4] 2017-12-17 7736
721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3] 2017-12-11 15686
720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0813
719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6761
71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17
717 창조절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12] 2017-11-12 6578
716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622
715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208
714 창조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출 33:12-23) [2] 2017-10-22 7566
713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31
712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 21:33-46) 2017-10-08 8192
711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05
710 창조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 1:21-30) [7] 2017-09-24 8819
709 창조절 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2] 2017-09-17 8775
708 창조절 죽음 넘어! (출 12:1-14) 2017-09-11 8184
707 창조절 십자가와 생명 (마 16:21-28) [6] 2017-09-03 7802
706 성령강림절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2] 2017-08-27 7468
705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7] 2017-08-20 12882
704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84
703 성령강림절 빈 들에서 배불리 먹다 (마 14:13-21) [8] 2017-08-06 8049
702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4988
701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647
700 성령강림절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시리라." (롬 8:1-11) 2017-07-16 6881
699 성령강림절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 11:16-19, 25-30) [5] 2017-07-10 9240
698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2017-07-02 7109
697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60
696 성령강림절 돌보시는 하나님 (창 21:1-7) 2017-06-18 7369
695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 28:16-20) [5] 2017-06-12 6807
694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267
693 부활절 하나님은 누군가? (벧전 5:6-11) [8] 2017-05-28 7741
692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475
691 부활절 순교 영성 (행 7:55-60) [3] 2017-05-14 5826
690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19
689 부활절 눈이 열리다! (눅 24:13-34) [4] 2017-04-30 9742
688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2] 2017-04-23 6396
687 부활절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7] 2017-04-16 6650
686 사순절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 [4] 2017-04-10 6890
685 사순절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 (겔 37:1-14) 2017-04-02 25978
684 사순절 영적 시각 장애 (요 9:35-41) [2] 2017-03-26 8182
683 사순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롬 5:1-11) [5] 2017-03-19 9653
682 사순절 심판과 구원 (요 3:1-17) [7] 2017-03-13 9357
681 사순절 죄의 본질 (창 2:15-17, 3:1-7) [1] 2017-03-05 8629
680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679 주현절 완전한 사람 (마 5:38-48) [2] 2017-02-19 8804
678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6
677 주현절 금식 (사 58:1-9a) [2] 2017-02-05 7771
676 주현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1] 2017-01-29 7406
675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399
674 주현절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사 49:1-7) [4] 2017-01-15 8231
673 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6] 2017-01-09 8735
672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2983
671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002
670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3701
669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720
668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56
667 대림절 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11] 2016-11-27 15081
666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2
665 창조절 새로운 창조를 기다리며... (사 65:17-25) [4] 2016-11-14 8229
66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40
663 창조절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4] 2016-10-30 22698
662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33
661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586
660 창조절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21] 2016-09-11 16465
659 창조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 (눅 14:25-33) [15] 2016-09-04 8269
658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267
657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048
656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48
655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6
654 성령강림절 "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11] 2016-07-31 7072
653 성령강림절 "이렇게 기도하라!" (눅 11:1-13) [28] 2016-07-24 12107
652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38-42) [15] 2016-07-17 15084
65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골 1:1-14 [9] 2016-07-11 7994
6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16] 2016-07-03 6506
649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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