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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성령강림절 조회 수 6864 추천 수 0 2018.07.15 21:16:20
설교듣기 : https://youtu.be/oAtqbTZj_Bk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사무엘하 6:1-5, 12(후)-19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삼하 6:1-5, 12(b)-19, 성령강림 후 여덟째 주일, 2018715

 

1.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12()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법궤의 정치-종교사적 의미

다윗은 헤브론에서 76개월 머물다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에 도읍지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일종의 천도입니다. 이성계가 권력을 잡은 뒤에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거와 비슷합니다. 예루살렘은 지정학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중요했습니다. 하나는 천혜의 요새라서 웬만한 공격에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의 중간 위치이기에 이스라엘의 남 지파와 북 지파를 통치하게 안성맞춤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계속 괴롭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습니다. 다윗 왕조가 점점 힘을 받아가는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정책은 예루살렘을 종교 성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훗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을 때 북이스라엘의 아킬레스건은 자신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거나 절기의 성지순례를 위해서 남쪽의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형상 두 개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웠습니다. 다윗 왕조의 확립을 위해서 필요한 정책이 예루살렘을 종교 중심지로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다윗은 국가적인 차원의 큰 행사를 추진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 본문인 삼하 6장에 나옵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프로젝트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구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법궤, 언약궤, 증거궤 등등입니다. 우리는 법궤로 통일해서 부르겠습니다. 법궤는 가로 114센티미터, 세로 68센티미터, 높이 68센티미터인 장방형 상자입니다.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위에는 순금 판이 씌어 있고, 양쪽 끝에는 날개 달린 천사 조각상(그룹)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강단에 놓인 제단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모세의 형인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 있다고 전해집니다. 광야 40년 시절에 제작된 이 법궤는 훗날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보관되다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기원전 587년 이후에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불살라지지 않았겠습니까.

삼하 6:1절에 따르면 다윗은 법궤를 이전하려고 삼만 명의 사람을 모았습니다. 북 지파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전체 백성들의 내부 결속을 위한 정책으로 보입니다. 내부 결속을 위해서는 이런 대규모 행사가 가장 효과적입니다. 오늘날 월드컵 축구대회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북한의 아리랑 축전도 비슷한 효과를 거둡니다. 열광적이고 드라마틱한 대규모 집회에 참석함으로써 사람들은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면서 참여한 사람들끼리의 연대감이 깊어집니다. 이런 퍼포먼스 자체를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좋게 사용될 수도 있고 나쁘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히틀러는 그걸 가장 나쁘게 사용한 사람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대중집회를 통해서 독일 민족이 유대인을 제압하고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법궤 이전 프로젝트에 동원된 3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대한 퍼레이드를 펼쳤습니다. 5절에 따르면 그들은 여러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길거리 연주를 했습니다. 길거리에서는 더 많은 군중들이 나와서 환호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법궤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거룩한 기물이었기에 경외심으로 대했습니다. 그들은 법궤에 복과 재앙이라는 특별한 능력이 담지 되었다고 믿은 것입니다. 전쟁에도 종종 법궤를 들고나갔습니다. 법궤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멀리는 여호수아가 40년 광야시절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요단강 앞에서 법궤를 멘 사람들이 먼저 요단강에 발을 딛게 했고, 철벽 요새인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도 법궤를 멘 사람들이 매일 성을 돌게 했습니다. 법궤를 강탈했던 블레셋 사람들은 큰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그야말로 하나님을 대하듯이 했습니다.

이에 관한 하나의 에피소드가 다윗의 법궤 이전 이야기 중간에 나옵니다. 삼하 6:6절 이하입니다. 법궤 행렬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습니다.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들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날뛰었습니다. 소몰이를 책임진 두 형제 중의 하나인 웃사가 손을 들어서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기자는 웃사의 행동으로 인해서 진노하신 하나님이 웃사를 쳐서 그 자리에서 죽게 했다고 보도합니다. 이런 성서기자의 보도는 이상하게 들립니다.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웃사가 소들이 날뛰는 순간에 충격을 받아 심장 정지에 이른 것인지 모릅니다. 그만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를 특별한 것으로 여겼다는 말이 됩니다. 어쨌든지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진행되는 중간에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자 심히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다윗은 법궤 이전 계획을 포기했습니다. 법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몇 달 후에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이 내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다시 생각을 바꿔서 법궤를 다윗 성으로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이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에봇을 입고 춤추는 다윗

다윗은 이번에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13,14절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앞서 수레를 끄는 소로 인한 소동을 아는 터라 이번에는 사람들이 직접 법궤를 멨다고 합니다. 상여가 나가는 모습입니다. 중간에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렸고, 다윗은 앞장서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가 입은 베 에봇은 제사장 복장입니다. 그의 춤은 일종의 종교 의식으로 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환호하면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의 성소에 설치하고, 다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다음에 모든 백성들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삼하 6:19절에 따르면 남녀 불문하고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간 품목은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가 들어간 떡 한 덩이입니다. 이제 법궤 이전의 모든 행사가 완전히 끝난 겁니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중간에 간략하게 작은 풍경을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미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삼하 6:16절에 따르면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첫 번째 부인인 미갈이 왕궁의 창문에 기댄 채 법궤가 들어오는 광경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다윗 성의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던 순간이니 미갈도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았겠습니까. 미갈은 못 볼 걸 보았습니다. 다윗 왕이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미갈이 마음속으로 다윗을 업신여겼다고 기록했습니다. 성경기자의 평가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개연성이 높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삼하 6:20절에서 미갈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과 미갈의 관계는 한두 마디로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합니다. 성경기자는 그런 남녀관계의 복잡한 심리를 설명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미갈은 사울 왕가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사울 왕가의 입장에서 볼 때 목동 출신인 다윗은 수준이 낮은 사람입니다. 교양이 없는 사람입니다. 왕으로서의 체면을 차릴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법궤 행렬 앞에서 다윗이 옷이 찢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황홀경에 빠져서 춤을 춘 것은 예루살렘 원주민들의 종교의식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왕족 미갈의 눈에는 목동 출신 다윗의 행동거지가 품위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교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금요 심야집회에서 열광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기독교인들의 행태가 저의 눈에 이상하게 비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윗은 미갈에게 이렇게 대꾸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 아버지와 가족을 버리고 나를 왕이 되게 하셨으니까 춤추고 즐거워하는 게 마땅하지 않는가. 당신은 나를 우습게볼지 모르나 당신이 거론한 계집종들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는다는 걸 알아두라.’ 성경기자는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코멘트를 23절에 달아둡니다. 만약 미갈이 아들을 낳았다면 그의 아들이 다윗의 뒤를 이었을 겁니다. 이후로 사울 왕가는 이스라엘에서 재기할 수 없는 상황에 떨어지고 다윗 왕조는 더 굳건해졌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상징물입니다. 법궤만 있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그걸 제작하게 했습니다. 다윗이 대대적인 행사를 통해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 미갈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춤을 춘 이유는 법궤가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그런 상징물들이 있습니다. 독수리 형상이나 송아지 형상이 그런 것들입니다. 세속적인 차원에서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가 일종의 법궤와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태극기를 품에 품고 다녔습니다. 삼일운동 당시에도 태극기가 물결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태극기만 보면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요즘에는 소위 태극기부대가 태극기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태극기만 앞세우는 게 아니라 성조기를 함께 듭니다. 어떤 경우는 이스라엘 깃발도 들고 나옵니다. 그들은 태극기를 독점함으로써 자신들이야말로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애국시민이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기독교 신앙의 상징물은 십자가입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지역에 따라서 물고기 문양이나 닭 문양이 사용되었지만 대표적으로는 십자가입니다. 대다수 교회당에는 정면에 십자가상이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는 법궤 개념과 대립됩니다. 다윗의 법궤는 하나님을 복과 재앙의 관점으로 본 상징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그런 관점에서 생각했습니다. 훗날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는 하나님을 부와 다산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상징물입니다. 이런 태도는 전형적으로 종교적인 것입니다. 세계 모든 종교가 이런 것을 목표로 합니다. 조금 더 세련된 종교는 마음공부를 목표로 합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이런 것들과 전혀 다른 상징입니다. 복 받고 오래 살고, 우아한 정신을 함양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죽음! 십자가는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끔찍한 죽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분명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반역자들에게 가장 처참한 처형방식인 십자가형을 내리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이제는 하나님을 전지전능, 무소불위의 존재가 아니라 가장 무기력하게 죽을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교리를 아는 이들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놓고 하나님 죽음 운운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마저 알라딘의 요술램프쯤으로 여깁니다. 십자가만 믿으면, 십자가 성호를 긋기만 한다면, 십자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찬송가를 열정적으로 부르면 저절로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의 운명 마지막을 장식하는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무기력한 자리, 즉 하나님이 죽었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리를 가능한 피하려고 합니다. 십자가와 반대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표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과는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저주라고 여겼던, 그래서 예수님 스스로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운명에 떨어졌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지만 그 사실에 근거해서 법궤와는 전혀 다른 구원의 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 처형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냐?’라고 저에게 질문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실제로 그런 상황에 떨어져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십자가에 달렸던 분을 내가 그리스도로 믿기에 하나님이 없는 거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떨어진다고 해도 결국 극복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런 태도로 살아가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둘째, 십자가는 죽음의 선취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일반 신자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즉 구원자로 믿습니다. 구원은 해방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해방과는 거리가 멉니다. 평생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이 어느 정도 주어졌어도 더 벌어야 하고, 인생이 안 풀려도 문제이고, 잘 풀려도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완성함으로써 구원을 받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율법 완성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에 휩싸입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이들과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완전한 해방은 죽어야 가능합니다. 이런 영적 실존을 알고 있는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2:20)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도 이미 죽은 것입니다. 이게 죽음의 선취입니다. 이것을 가벼운 언어유희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예수와 하나 됨으로써 우리는 실질적으로 예수와 함께 이미 죽은 것입니다. 현실에서 아직 죽지 않은 것은 죽음이 유보된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가장 역설적인 방식으로 현재 우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확실해질 때 우리는 부활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법궤를 다윗 성에 안치하는 일은 고대 이스라엘의 토대를 다지는 것을 자기 인생의 최대 목표로 삼았던 다윗 왕으로서 최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더 이상 법궤가 가리키고 있는 복에 대한 미련과 재앙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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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인자무적

July 16, 2018
*.94.38.134

주일 설교를 통해 죽임이 그리워진다고 한다면 곡해일까요?

인간(나)의 한계를 분명 알기에 진정한 해방은 죽음이라는 표현은 정말 눈물나는 사실인듯 합니다.

허나 현실을 직시할때 어깨를 짖누르는 더러움들을 외면하기 어려워 늘 갈등이라는 갈림길에서 순례아닌 순례의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서너푼 주식값에 일비하고 갑과을을 오가며 하나님을 등뒤에 세우곤 가족이라는 방패막이로 정당화 하려는 것이 자신임을 알때 죽음은 분명 희망임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목사님!.

저는 오늘도 십자가의 자유를 보면서 발걸음은 구속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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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6, 2018
*.182.156.199

'죽음이 그리워진다'는 말은 곧 절대 자유와 해방이 그리워진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태도를 유지해야만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이번 설교에서 저는 예수 십자가를 좀더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죽음을 버텨내야만 생명 경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쨌든지 주어진 이 세상에서의 삶을 충만하게 살아내면서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흥미진진하게 기대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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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July 16, 2018
*.151.83.22

복과 재앙의 하나님에게

부와 다산을 비는 모습이

고대 유대인들과 모든 종교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상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믿음은

전지전능, 무소불위의 신존재가 죽었음과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졌음을 복음을 통해 알게되어

복에 대한 미련과 재앙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어떤일이 일어난다 해도

자유와 평화와 기쁨으로 살수있게 되는것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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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6, 2018
*.182.156.199

맞습니다. 중요한 대목을 짚었습니다.

'복에 대한 미련과 재앙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는 것이야말로 

바로 이 땅위에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구원의 현실성(reality)입니다.

저도 말은 이렇게 그럴듯하게 하지만

미련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마 죽을 때가지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지경에 가까이 가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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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 창조절 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7] 2019-09-15 7215
812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6838
811 창조절 복 있는 삶 (눅 14:7-14) [2] 2019-09-01 7701
810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4887
809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081
808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7011
807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6692
806 성령강림절 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4] 2019-07-28 4847
805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7106
804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9642
803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2] 2019-07-07 6483
802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045
801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0727
800 성령강림절 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4] 2019-06-16 6539
7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7321
798 부활절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행 16:16-34) [4] 2019-06-02 15824
797 부활절 예수의 평화 (요 14:23-29) [4] 2019-05-26 8480
796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7220
795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4468
794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7703
793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6992
792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5797
791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5951
790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5774
789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6200
78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5369
78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5709
78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6893
78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5672
784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273
783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0693
782 주현절 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8] 2019-02-12 8376
78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6634
780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0668
779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6384
778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5441
77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9299
776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6699
775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6439
774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8431
773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8592
772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8083
771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178
770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9803
769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16331
768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7527
767 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4] 2018-10-28 13080
766 창조절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20] 2018-10-21 6259
765 창조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4] 2018-10-15 6208
764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7043
763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12638
762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5773
761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5415
760 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2] 2018-09-10 6257
759 창조절 말씀과 삶의 일치로 인한 복 (약 1:17-27) [4] 2018-09-02 8109
758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5517
757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7037
756 성령강림절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4] 2018-08-13 6363
755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2] 2018-08-05 6196
754 성령강림절 예수는 왕인가? (요 6:1-15) [8] 2018-07-29 6146
753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5344
»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6864
751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6904
750 성령강림절 연보도 은혜다! (고후 8:7-15) [6] 2018-07-01 6423
749 성령강림절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4] 2018-06-24 1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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