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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성탄절 조회 수 23450 추천 수 0 2009.12.28 22: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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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4:16-30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 4:16-30)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주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은 이 사실을 예수께서 안식일을 맞아 자라나신 나사렛의 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었다고 언급합니다. 그 앞 구절인 15절도 예수님이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이런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당시 일반적인 랍비와 마찬가지로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한 곳에 붙박이로 활동하는 랍비가 아니라 유랑 랍비입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말씀을 읽고 배우는 곳으로, 종교교육의 센터라 할 수 있습니다. 회당에는 회당장이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담임 목사입니다. 공생애 초창기에는 예수님이 회당장들과의 관계가 좋아서 회당 출입이 자유로웠는데,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형편이 달라졌습니다. 회당장의 눈치를 보면서 회당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 뒤로 예수님은 시장이나 해변, 광야 같은 곳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회당에서 배척을 당하게 되셨을까요? 그 단초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구원 신탁

예수님이 성경을 읽으려고 앞자리에 섰습니다. 예수님은 회당 일을 도와주는 사람에게서 양피지 두루마리 성경을 받아들었습니다. 이사야는 전체가 66장이나 됩니다. 부피가 커서 여러 두루마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중의 한 권을 받아서 예수님이 읽었습니다. 그 부분이 이사야 61:1 절 이하입니다. 공교롭게도 메시아의 역할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대목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해방과 자유가 그 핵심입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의 역할이고,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겁니다.

어떤 학자나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이 메시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라는 겁니다. 실제 내용이 그렇습니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들입니다. 이들의 해방을 위해서 오늘 현실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은 오늘 한국처럼 빈부의 격차가 구조적으로 악화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안정되고 힘이 있는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둬도 잘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경쟁력이 턱없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휴머니즘의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과 직결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정의롭고 평화롭게 사는 건 하나님에게서 부여받은 권한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 기독교인들이 악한 사회구조로 인해서 인간 존엄성을 상실하는 사태를 방기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회당에서 읽은 이사야의 신탁을 사회 구조의 개혁이라는 차원에서만 접근한다면 원래 누가복음 기자가 말하려는 근본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구약이 신약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왜 회당에서 배척되었나 하는 앞에서의 질문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읽고 전한 뒤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눅 4:21) 마틴 루터는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직역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 이 성경의 말씀이 여러분의 귀 앞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의 글을 회중들이 단순히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훨씬 깊은 의미입니다. ‘오늘’은 이사야의 글을 읽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은 이 사실을 몇 군데에서 설명했습니다. 1) 눅 2:11에서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목자 전승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 눅 19:9은 삭개오 이야기를 전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3) 23:43은 십자가 처형이 집행되는 장면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당한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런 누가복음 신학의 배경에서 볼 때 오늘 본문에서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는 말씀은 결국 이사야의 구원 신탁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뜻이라는 게 분명합니다. 

그 장면을 다시 상상해보십시오. 회당에 사람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드리고,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까지는 모든 게 자연스러웠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마지막 멘트입니다. 이사야의 신탁이 자신에게서 성취되었다니요? 도대체 이런 해괴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겠지요. 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증언한다는 뜻의 헬라어 ‘마르투레오’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로 동시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찬양했다는 뜻도 되지만 거꾸로 정죄했다는 뜻도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헬라어 ‘타우마조’에도 서로 상반되는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설교에 관해서 좋은 뜻으로 놀라워했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부정적으로 놀라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단어는 그것 자체로만은 전자인지 후자인지 확실하게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천천히 좀더 따라가 봅시다.

이사야의 신탁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한 사람들이 이렇게 빈정대듯이 말합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22) 이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핵심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이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바르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두 가지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를 고향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당연히 고향 밖의 사람들이 알아봅니다. 선지자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정하지 못하고 대신 이방인들이 인정합니다. 실제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요?

선지자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전이해가 진리를 아는 데 오히려 방해거리입니다. 그들은 선지자가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만 기억합니다. 더 나쁜 경우는 그 선지자들의 나쁜 점만 골라서 기억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회당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빈정댄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요셉은 평범한 목수입니다. 그 동네에서 이렇다 할 정도로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촌장도 아니고 랍비도 아니고 부자도 아닙니다. 그냥 그렇고 그런 노동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런 요셉의 아들로만 기억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는 나사렛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당시 기존의 종교 엘리트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가 모두 못마땅했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행위는 그들의 전통과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거부했다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로만 바라보았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다른 곳에서 환영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구약에 나오는 두 가지 사건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는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사렙다 과부 이야기이고,(왕상 17:8 이하) 다른 하나는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수리아 사람 나아만 이야기입니다.(왕하 5:1 이하) 사렙다 과부나 나아만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비록 이방인 과부였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러 온 엘리야를 알아보고 극진하게 대접했습니다. 그 가정에 놀라운 은혜가 임했습니다. 나아만은 이방인 장군으로 한센병(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알아듣고 순종한 그는 병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은 회당 사람들은 크게 화가 났다고 합니다. 화를 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추방시킨 겁니다. 고향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했습니다. 일종의 멍석말이와 비슷합니다. 상대 못할 종자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낭떠러지에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생사람을 잡는 잔인한 테러입니다. 자칫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전에 고향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을지 모릅니다. 그 낭떠러지는 예수님이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놀던 곳이었겠지요. 성난 고향 사람들의 힘에 밀려 강제로 낭떠러지로 끌려갔습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큰일을 당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도왔을까요? 어릴 때 함께 놀던 죽마고우들이 어른들을 설득했을지 모르겠군요. 예수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니 그를 죽이지는 말자고 말입니다. 혹시 바알세불에 사로잡힌 탓인지 모르니 조금 기다려보자고 말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영적 권위에 사람들이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고 순순히 물러섰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왜 이렇게 크게 화가 났을까요? 그들의 성격이 원래 이렇게 과격한 탓일까요? 성격 문제로 돌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험악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비판하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은 나사렛 사람들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낭떠러지도 데리고 가서 죽일 생각했다는 건 아무래도 지나칩니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신성모독

나사렛 사람들이 마치 인민재판식으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었다는 사실을 다시 주목하십시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도 아주 드문 일입니다. 행 6:8-7:60에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열두 집사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고발했습니다.(행 6:11) 스데반은 예언자들을 죽인 이들이 바로 당신들의 조상이고, 당신들이 그런 못된 전통에 따라서 지금 의인을 잡아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쳤습니다.(행 7:59) 오늘 본문 말씀과 상황이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선고를 받을 때도 신성모독이 죄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람을 때려죽일 정도로 과격해지는 경우는 신성모독이라고 느껴질 때입니다. 오늘 나사렛에서 벌어진 소동의 핵심도 역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절대적인 존재를 상대화하는 행위가 바로 신성모독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의 어떤 것이 하나님을 상대화한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이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은 뒤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이사야의 구원 신탁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진술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상대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사건이 자기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예수님이 신성모독자로 비친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그런 생각과 판단이 이해가 갑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읽은 이사야의 구원 신탁을 예수님이 실제로는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왔어도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고, 포로 된 사람은 여전히 포로로 남아 있고, 눈 먼 자는 여전히 세상을 못 보고, 눌린 자는 여전이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이사야가 선포한 구원 신탁의 완성자라니, 이게 말이 되나요? 이런 질문은 초기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어려운 숙제였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그들은 세상을 향해서 그에 마땅한 대답을 해야만 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여전히 억압적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오리무중입니다. 그 어디에서도 이사야가 선포한 구원 신탁의 조짐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메시아라니요? 초기 기독교가 처한 상황이 바로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낭떠러지와 비슷합니다. 로마의 지성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들이라고 말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능력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오늘 우리도 똑같은 상황에서 삽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분명히 별 볼 일 없는 나사렛의 목수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를 우리는 그리스도,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심판자, 생명의 완성자로 믿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우리의 영적 관점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이건 말이 안 되는 주장입니다. 신성모독일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영적 관점은 가장 궁극적인 생명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영적 관점으로 돌아서는 게 바로 ‘메타노이아’, 즉 회심입니다. 이렇게 회심한 사람들은 이사야의 구원 신탁이 예수님에게서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깁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현실을 여전히 어둡고 침침한 지금 여기서 고난 받는 이웃들과 서로 나누면서 살아갑니다. (성탄절 후 첫째 주일, 200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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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8, 2009
*.120.170.243

제 설교가 언제부터인가 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샘터교회에서의 설교가 특히 기네요.

<설교듣기>는 서울샘터교회에서 행한 설교이고,

<설교보기>는 대구샘터교회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듣기는 무려 39분이나 되네요. 참.

보기는 그래도 32분이 채 안되니, 참아줄 수 있는데요.

서울에서의 설교에 군소리가 많이 나오는가 봅니다.

똑같은 원고로 하는 설교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어쨌든지 현장에 있었던 교우 분들의 인내심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설교를 질질 끄는 조짐이 또 다시 보이면

저에게 눈치를 주십시오.

앞으로 좀더 집약적이고 절제된 설교를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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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7]paul

December 29, 2009
*.245.115.30

목사님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신인가?"

바로 기독교와 타 종교를 가르는 중요한 질문인것 같습니다.

친구 중에서 하나님은 믿지만 기독교는 아니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절대자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부처도 신이요, 자연도 신이라고 믿습니다. 이 친구가 기독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 = 하나님 = 성령 3위의 절대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안티 기독교 싸이트에 가 보면 예수님이 신이라는 것은 초기 기독교에서 만들어 진 것이며 -- 다빈치 코드에서 처럼 --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거죠.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그냥 한 좋은 선지자로서 말씀을 전하다 순교한,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했던 사람들 중 하나일 수도 있겠죠. 오로지 기독교에서 줄기차게 우기는 성경도 기독교인의 것이니 증거로 채택될 수 도 없구요.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메시야일까요? 우리가 믿는 것은 역사적 증명 때문도, 과학적 근거도 아닌 바로 믿음이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는 단지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냐의 믿음의 차이인것 같습니다.


지금 사이비 교주가 나서서 "내가 재림 예수다"라고 했을 때 그를 믿어야 할까요? 어떻게 보면 2천년전 유대인들처럼 기도 안찼을지 모르죠? 그럼 그때 그들은 무지해서 몰랐을까요? 그럼 지금의 우리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사이비 교주를 덮석 믿어야 할까요? 저는 그 차이가 바로 성령의 임재라고 믿습니다. 만약 성령님이 제게 오시지 않았다면 정말 그 사이비 교주가 예수님이라 해도 저는 알아 볼 수 없을 것이요, 아무리 모두들 미친 사람이라 해도 성령님의 임재로 믿을 수도 있겠지요.


목사님 말씀을 읽으면서 믿음은 은혜로 된다는 말씀이 떠오르는 군요. 참 죄 많고 -- 아직도 죄를 짓고 있는 -- 제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P.S. 저는 글로만 읽어서 그런지 목사님 설교가 늘어지는 것을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포토방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의 그 푸짐한(?) 상을 보았을때 왜 그런지 조금은 짐작이 되는데요 ^^

목사님 언제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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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9, 2009
*.120.170.243

"성령 님의 임재로 믿을 수도 있"다거나

"믿음은 은혜로 된다."는 paul 님의 생각은 옳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세계에서 인식은 기본적으로 성령론적이며,

그 성령에 사로잡히는 것이 곧 은혜이니까요.

여기에 좀 복잡한 문제가 연루되어 있습니다.

성령과 인간의 영이 어떻게 공명하는가, 하는 점이에요.

인간의 영은 인식의 가장 깊은 차원이거든요.

그래서 기독교는 영적인 깨우침이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이는 곧 성령의 임재 사건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 똑같습니다.

바르게 배우고 이해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에 관해서 바르게 전달받고

그걸 정확하게 이해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게 되겠지요.

이런 문제는 이렇게 짧은 글로 정리하기는 힘들겠군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여,

저희의 미련함을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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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December 29, 2009
*.206.68.40

저는 paul 님의 의견에 100% 동의 하는 바입니다.

제가 다비아를 알고 난 뒤  또한 정 목사님의 많은 글을 읽고 역사 해석학적 성서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곳 다비아에서 많은 것들을 새로 배우고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2% 부족한 것..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목사님의 성령관 입니다.

유럽과, 서구의 여러 신학자들의 책 들 읽을 만합니다.

아니 이 세상에 모든  학문들은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paul 님도 지적 하였듯이 개인 적인 강한 성령의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비로움을 올바로 섭렵 했다고 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학문과, 석학도 하나님을 나에게 보여 줄수는 없더군요..

그러나 성령은 저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셨고,  생명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더군요..

저는 학문으로는 신을 증명 할수 도 없고, 학문의 힘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기에는 역부족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직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께서 나에게 친히 가르쳐 주시고, 보여 주시는 것을 깨달을때, 

그 때에야 비로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조금 알수 있을것 같더군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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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December 30, 2009
*.104.196.202

저별과 달님, 오랜 만이시군요..^^

그냥 제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별달님께서 글의 중반부터 언급하시는

 "...2% 부족한 성령관, 개인적인 강한 성령의 체험... "

이 부분에 대하여 저의 생각은 좀 틀립니다.

별달님께서  말씀하시는 개인적인 성령 체험이라는 것이

기도 중에 체험하는 것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사실 저는 목사님의 성령관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당신의 평생을 통하여

점점 더 풍성해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누가 완벽하리요...

문제는 오히려 부족한 2%에 해당하는 성령 체험(=은사적 체험일 듯 한데 별달님의 대답을 아직

듣지 못하였으나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을 100%로 신봉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군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더 알아가기를 원하지만 그것에 대하여

평신도들에게 제공되는 것이 일천하여 그 목마름을 적시고자 기도와 체험에 몰입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체험은 개인적인 은사체험과 거의 동일시 하는 것이지요. 

말그대로 개인적인 체험이라서 어떻게 표준화할 수도 없습니다.

 

저의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어려서부터 외조모께서 옆에서 방언기도로 새벽을 여시고

제 건강상의 이유로 외조모와 기도원 순례를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체험이 없다고는 말씀 못드리지만

다비아를 알고부터 개인적인 성령 체험이 더 풍성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짧게나마 대하게 된 신학의 내용들이 도저히 성령의 인도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에

너무 공감하게 되며 그 공감은 동일하신 성령으로부터 온 것임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저의 화답이 생기고..기쁘지요.

 

안타까운 것은 '강한 성령 체험'의 형태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감과 육감, 지성과 감정, 영혼육을 창조하신 분으로부터

성령 체험은 어떠한 형태여야 한다는 것이 있으셨는지요?

사도바울의 그 영감이 넘치는 서신서들은 그의 강력한 성령 체험의 산물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신학의 글을 보면 '...참 제 정신으로 쓴 것이 아니구나...'  합니다.

이런 것이 시공간을 초월한 성령의 교통하심과 체험의 한 형태라고 새롭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감사하는 것은

'주께서 새로운 성령 체험의 길을 내어주셨구나...'

하는 거랍니다.

 

별달님께서 말씀하시는 성령 체험에 대한 정의가 제 글과 다르다면

참 부끄러운 글이 될 수도 있겠으나, 맞으시다면 참고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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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December 30, 2009
*.206.68.40

제가 정 목사님께 대글을 달았는데 유니스님이 대글을 주셨군요 ㅎㅎ

 

제가 말한 강한 성령 체험이란 굳이 기도중에 맛보는 그런 경지의 것들에 국한 되지는 않습니다..

성령 체험은 꼭 기도중에만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예전에 동영상 강의 "성령" 코너 인가에 제가 정목사님과  나누었던  대글이 있는데

거길 한번 들어 가볼려니 저는 권한이 없다고 하는군요..

그래도 저의 글쓰기에 지장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정의 하는데 정 목사님과 다른 신학자나, 다른 목사님들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정목사님은 성령을  '생명체의 활동성, 어떠한 존재론적 힘의 작용으로 이해 하시는것 같던데요..

예전에도 제가 질문을 드렸지만 정 목사님은 성령의 인격성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못하시더군요..

즉 성령은 하나님의 영 으로서 신자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만나주고, 눈으로 볼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신자 개인에게 영적인 존재로 임한다는데 대해서 긍정 적인 입장이 아니더군요..

정 목사님은 성령을 문자 그대로 프뉴마.. 바람과 같이 우리가 만질수도 잡을수도 없는 어떠한 힘의 작용으로

해석 하시더군요..

그런데 성령 이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 370회 정도 나오는데

 여기서 대부분은 실제적인 靈 또은 聖靈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바람의 뜻으로 사용된 경우는 요 3:8과 히1:7 두 군데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세례를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 성령 충만하라, 성령을 소멸치 말라  는

말씀 들은 성령이 분명 성도 개인에게, 우리의 심령속에  영 으로서 임한다는 말씀 일진대

정 목사님은 예전에 동영상 강의에서 이 점을 부정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동영상 강의를 제가 들어가 볼수 있으면 저의 의견을 더 분명히 제시 할수 있겠는데요 ㅠㅠ

 

제가 왜 성령에 대하여 이런 말 을 꺼내었냐 하면은요..

사실 우리의 믿음 이라는 것, 하나님 이라는 존재, 구원, 생명,  이런 중요한 것들이

성령의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 입니다.

기독교는 성령의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모세, 다니엘, 에스겔, 다윗, 스데반, 사도 요한, 바울 이런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감동되고

성령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전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말로서 설명할수 없는 환상을 보고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계시하고.. 성경으로 기록하고... 구원을 가르치고..  증거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 라고 할수 없느니라 는 말씀이 있지요..

여기에 한가지 더  첨부 하자면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복음의 참 맛을, 구원의 진정한 기쁨을 누릴수 없다고 생각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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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0, 2009
*.120.170.243

별달 님의 글이 내 글에 대한 대글이었어요?

나는 paul 님의 글에 대한 대글인 줄 알았네요.

동영상 메뉴로는 들어갈 수 없어도

성령에 대한 저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글은 여기에 많답니다.

일단 온라인강의실의 <조직신학>으로 들어가서

'성령론'이나 '영성'에 대한 대목을 읽어보시구요,

또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에 대한 저의 강의를

인도 사티아 님이 녹취로 풀어서 올린 <사도신경해설> 42-46강을 읽어보세요.

일단 읽어보시고 궁금한 게 있으면 다시 질문해 주세요.

별달 님의 성령 경험이 어떤 건지 듣고 구체적으로 싶군요.

한 해가 저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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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December 29, 2009
*.61.23.114

전 예수께서 낭떠러지로 밀침을 받으셨다가 무리 가운데로 지나 오셨다는 대목이 참 코믹하게 생각되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예수의 소외성과 세계 중심성을 동시에 드러내고자 한 설화 같더라고요.

목사님께서 설교비평에서 회심을 가리켜 '전(全)존재의 자리바꿈'이라고 표현하신 부분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이 세계를 거대한 팝콘 옥수수로 생각한다면, 종말이란, 무르익은 팝콘이 터지듯,

예수께서 자신의 세계 중심성을 뜨겁게 발현하심으로 세계를 뒤집어버리는 사건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까요.

성령께 사로잡힌 회심자는, 그 팝콘을 데워가는 예수의 열성분자들일테고요.

본격적인 인문학적 성서읽기 수행을 통해 예수께서 진입하셨던 생명의 세계를 풍성히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첫 발걸음이기에 모르는 것도 태산이고 두렵고 아득하지만,

목사님과 샘터교회를 통해 큰 힘을 얻고 나아가게 됩니다. 목사님, 2010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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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9, 2009
*.120.170.243

와, 재미있는 비유로군.

팝콘과 폭발과 팝콘을 달구는 열....

용남이가 말하는 "예수께서 진입하셨던 생명의 세계"는

곧 예수 자체라네.

예수와 생명의 세계는 분리되면서도

동일시된다는 말이지.

예수와 하나님이 분리되면서도

본질으로 동일시되는 것처럼 말이야.

이런 신앙의 공식이야 누구나 들은풍월로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을 자기 삶의 현실로 담아내는 데는 차이가 많을 거야.

예수의 운명이 전체 인류와 우주 전체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보편적 해석의 틀로 변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인의 가장 근원적인 선교적 책임이라고 할 수 있지.

팝콘이 지금 어느 정도로 열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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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pingdol

December 29, 2009
*.146.97.50

선지자가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선지자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전이해가 진리를 아는 데 오히려 방해거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셨네요.그들은 선지자가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만,  

더 나쁜 경우는 그 선지자들의 나쁜 점만 골라서 기억한다고...

 

이런 일들은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은 신학과 삶의 조화라고 생각하는데요

대체로 교회 안에서는 삶만 다루어지지 신학은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에서도, 공동체 지체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적 발언은 거의 금기시되어 있다고 봐야되지요.

설교는 삶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고, 신자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죠.

신학적 고민을 하는 사람은 고향(교회)에서 왕따당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가 처절하게 피를 흘렸던 경험이

이 구절 볼때마다 생각나네요.

더불어 크신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던 경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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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상광

December 29, 2009
*.215.255.212

쉽게 말하면, 겉다르고 속 다른 것입니다(모든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요).

성경을 읽어라 읽어라 하면서도, 성경 말씀의 심오한 부분에 관해 고차원적으로 고민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때로는 어려운 사안들에 관해서 시시콜콜 질문하는 거, 절대로 좋아할 목사님 없어요.

그냥 읽고 무조건 아멘!하고 좋아만 해라 이거지요. 그런 상태가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금속도 용광로에 들어가서 뜨거운 불에

무르익어야만 불순물이 제거되어서 정금같이 변할 수가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미적지근한 불에 아무리

구워봐야 그냥 검게 그을리기만 할 뿐 정금으로 될 수는 없지요.

 

그래도, 일반인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읽는 것을 아예 금했던 중세 교회보다는 좀 나은 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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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9, 2009
*.120.170.243

핑돌 님,

오늘 교회와 신앙현상을 정확하게 짚으셨군요.

신학 무용론이 득세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여기에는 신학자들의 책임도 큽니다.

신학이 기본적으로 영적이지 못했거든요.

영적이라는 말은 생명의 근원이 성령과의 공명이라는 뜻이에요.

그건 그렇고,

교회 안에서 삶만이 다루지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신학과의 대립이라는 점이라면 옳지만

'삶' 자체에서 볼 때는 정확하지 않은 언급 같군요.

교회에서의 삶은 거의 이원론적인 분열상태에 있거든요.

성속이원론, 영육이원론 등등...

한국교회에 신학적 영성의 전통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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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상광

December 29, 2009
*.215.255.212

솔직히 저도 지금껏 50년을 교회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해 마음속으로 식견이 정립된 것이

불과 얼마 되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피상적으로야 누가 그걸 앵무새처럼이야  말하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자신 스스로의 신학(다른 표현으로 영적 판단력)이 진정으로 정립돼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솔직히 지금 강단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해서 그다지 심오한 내용을 전달하는 예가 별반 없어요.

기껏해야,  "예수 = 구세주 = 하나님" 이런 식이지요. 그거야 가르칠 필요 없이 사도신경 암송이면 그걸로

족한 거지요. 그러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라는 영적인 대 명제조차도 올바로 전달하는 예가

거의 없는 실정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목사님들이 워낙 바빠서 그런 거 신경쓸 시간조차 없으신 건지...)

 

시골에 살고 계신 나이 많은 제 큰형님께서 몇년 전에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떤 목사가 됐든, 그 목사

정말로 '예수를 믿는 목사 ' 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그 말이 생략된 표현이지요.

개신교계 돌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극단적인 말을 하게 될 수 있을까요. 우선 당장 이 방송

저 방송 티비에서 씹힌 목사님들에 관한 세간의 비난 내용들을 놓고 봅시다. 그러한 퀘션마크가 생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것입니다.

 

참으로 해괴하고 이상한 말 같지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리고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곰곰 생각해

보면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들 말(설교)하는 것, 혹은 교회 운영하는 것을 보면, 과연 예수를 정

말로 믿고 있는지 의아해 질 경우가 비일비재 하지요. 그래서 저분들이 과연 예수를 평소 가르치는 그대로

믿고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저절로 생길 수 밖에 없어요. 매우 죄송한 얘기지만, 예수를 그저 얼굴마담 식

으로(혹은 바지저고리 식으로) 뒤에 앉혀놓고 혹은 아예 그 분의 모습을 감춰 숨겨놓고서는 자신이 모든 걸

"내 뜻대로" 알아서 좌지 우지 하려 드는 건 아닌지, 더 심하게 말하면 "예수"를  이용해먹는 건 아닌지 하는

(실은 그게 바로 사이비적 모습이지요)  그런,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의 기본을 뿌리째 흔들만한 근본적인 의

구심이 생길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는 그 얘기입니다.

 

말세에 거짓 목자, 거짓 선생이 많이 나온다고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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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9, 2009
*.120.170.243

진상광 님,

제가 덧붙일 말씀은 없는 것 같군요.

다 동의합니다.

아마 약간만 정신을 차린 분들이라면

언급하신 내용들을 거의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관망하는 거지요.

기독교를 도구화하고 상품화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끄는 게 좋겠습니다.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의 영성이 깊어지지 않으니까요.

지난 2천년 역사에 훌륭한 기독교 신학자와 목사들이 많구

지금도 말씀에 구도정진하는 목사들도 많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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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상광

December 30, 2009
*.215.255.212

감사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이 땅 사람들에 있지 않고 주님께 있으니,

정신만 차리고 어떻게든 소망의 끈은 놓지 않으면 되겠지요.

 

주님은 우리를 더욱 단단히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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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December 30, 2009
*.229.151.223

마가복음 묵상중에 "놀람"이라는 단어를 다시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놀랍게 여겼다"라는 말씀과 비교하게 되는데요.

부활의 현시 앞에서 놀라워 하는 자들은 하인리히 오트가 말하는 '누미노제'의 놀람이겠지요.

진리를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이 이런 것이 아닐까,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진리)를 만났을때,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싶어서지요.

여기에서 머리로 받아드린다는 것과, 온 몸(인격)으로 받아 드리다는 말이 가능할까요?

온 몸으로 받아 드린 자라야,  '메타노이아'가 가능하겠구요.

또 이런 자들이 생명지향적인 삶을 살아 내겠구요.

저는.. 생명지향적이라는 말을  이렇게도 이해해 봤어요.

귀소본능과 같은 것이라고.

이 배면에는 모두 '놀람'이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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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0, 2009
*.120.170.243

ㅎㅎ

놀람에서 귀소본능까지 진도가 나갔군요.

가능한 논리이기는 하지만

속도를 좀 줄이는 게 좋지 않을는지요.

생각을 확장, 분산시키는 것보다는

그 자리에 더 머물러 있는 것도 필요하답니다.

2009년, 남은 이틀 행복하게 보내세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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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December 30, 2009
*.229.151.223

목사님, 생명지향적이라는 것은 귀소본능과 같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가능한 논리지만, 비약이라는 말씀이지요?

제가 이 생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해 왔었는데요.

아마 목사님께서 이 말씀을 처음 풀어주실때 부터 였던 것 같아요.

최근에, 부활을 경험한 자들...의 맥락에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본 것이거든요.

생명지향적이라는 것이 본질을 향한 추구라는 생각에서예요. 생명은 본질이잖아요?

그래서, 귀소본능과 같은 것일 것이다.. 라고 생각해 봤어요.

저는 그냥 가볍게 본향을 향한 추구.. 이런 생각이었어요. 목사님~^^

 

목사님,

지난 일년간 목사님의 현장설교를 들으며, 참 행복했었습니다.

저희들은 참으로 광대한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그 세계는 끝이 없는 세계였어요.

영원한 생명의 세계였으니까요. 그 중심에 언제나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오직 이 한 분을 증거하시기 위해,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때로는 바울의 심정으로

한 해 동안 서울샘터교회의 강단을 지켜 오셨습니다.

그 노고를 저희들이 털끝만큼은 알기에, 목사님의 설교가 더 가슴에 새겨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2000년전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목사님께서는 우리 '영적 노숙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지금에서야, '영적 노숙자'라는 의미를 깨닫게 되니,

갑자기 울컥해집니다.

목사님, 진정 우리 모두는 가난한 영적 노숙자입니다.

아니 그게 어쩌면 우리 실존을 가장 진실하게 표현한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 노숙자들이니까요.

목사님,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아울러 목사님 가정, 대구샘터교회에도 주님의 은총이 풍성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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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December 30, 2009
*.136.37.60

제가 금년 5월에 담임 목사님의 행보에 강한 반론을 제기하며

목사님께 이 메일로 이단이나 하는 사업들을 하시는 것에 대해 비판과 함께 하지 마시기를 강권하고

교회를 떠났었던 것을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저와 상당히 친하게 지냈던, 문자도 자주 주고 받았던 분이

아무리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그분의 아내가 여전도 회장을 맡았다는 말을 들었지요.

그 교회의 여전도 회장은 얼마나 바쁜지 가정을 돌볼 시간이 거의 없는 직책입니다.

교회에서 결혼식이라도 있는 날은 새벽 5시에 나가서 밤 늦게 들어오지요.

 

그 분도 저와 같은 의사입니다.

전 이런 모습을 보며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저 정도의 지식인이 이단에 빠질까? 라고 생각했던 의문이 풀렸지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신학을 제대로 하지 않고

오직 믿음 하나로(하나님을 믿는지, 목사님을 믿는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목사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

앞뒤 안보고, 귀 막고 그냥 목사님을 추종해버리는..

 

저도 다비아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몰랐겠지요.

그 목사님이 저를 키우려고 부단히 저에게 공을 들이셨거든요.

오죽하면 신약총론 강사를 맡겼겠습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신약총론 강사를 맡고 신학을 공부하다보니 다비아를 알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성경을 제대로 보게 되고 , 결국 목사님의 허물과 잘못된 설교가 보이게 되고

그렇게 해서 교회를 나오게 되었지요.

 

이 시대에 목사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

제발 모든 목사님들이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를

2010년 열심히 기도해볼랍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December 30, 2009
*.120.170.243

눈사람 님,

사람의 운명이라는 게 우연의 연속이지요?

신약총론 강사를 맡았다가 다비아를 알게 되었고..... ㅎㅎ

눈사람 같이 원만하고 신앙적인 분이 버텨낼 수 없는 교회였다면

문제가 아주 심각했겠군요.

목사들이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은

사실 목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평신도들과 상관관계가 있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들 중에서는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깊은 설교를 하면

오히려 눈살을 지푸리는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많다는 걸

하소연 하는 분들이 있는데,

엄살이 아닐 겁니다.

지금은 목사들보다 장로님들이

교회 부흥을 더 원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새로운 목사를 청빙할 때의 조건도

교회 성장 능력이 핵심이구요.

아이구, 제가 쓸데 없는 말씀을 드리고 있군요.

아무리 뒤뚱거려도 주님이 한국교회를 지키실 겁니다.

상처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를 무시하고는 교회를 말할 수도 없구요.

이미 승리한 보이지 않는 교회와 달리

보이는 교회는 여전히 투쟁 중이랍니다.

주여, 우리에게 투쟁할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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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December 31, 2009
*.136.37.60

목사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세상적인 축복에 관한 설교, 듣기 좋은 설교를 해주는 목사님은

유머러스하고 은혜가 충만한 설교를 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을 선포하는 목사님은 재미도 없고 능력도 없는 것처럼 여기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훨씬 더 큰 문제일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이 성숙하면 위정자들이 옳은 길을 갈터인데

그렇지 못하니까 우리 나라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제 주변에 저와 친한 사람들도 하나님 말씀을 말하면 언제 끝나나 하고 따분해 하는 사람 많습니다.

다행히 전 다비아 덕분에 하나님 말씀만 듣는 것이 훨씬 더 평안하구요.

솔직히 지금 정목사님 설교 사람 모으기 힘듭니다.^^ 특히 대한민국 국민을 모으는 건 더더욱 어렵지요.

그런 것을 다 아시면서도 꿋꿋이 옳은 길을 가시는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정목사님 화이링!

샘터교회를 비롯하여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교회들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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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December 31, 2009
*.99.193.27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

이 구절이 그렇게 놀라운 말씀이었군요..

짧게 선포하신 이 말씀에 귀를 귀울여 봅니다.

언젠가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말의 능력을 잃어버린 우리들은(나는) 예수님께서 한마디 말씀으로 얼마나 놀라운 능력 -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을 선언하시는지 -감당하기가 참 힘들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 그러니 참 황망한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겠지요..

올 한해 저물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올해만큼 다사다난했던 때가 있었을까요..

그래도 정목사님을 알게 되어 참 행운이었던 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조금씩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내년에도 희망해 봅니다.

늘 가정이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시길..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01, 2010
*.120.170.243

상수리 님,

지금 막 저는 송구영신 예배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 예배의 설교 중에서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어느 한 구절, 한 토막도 생각 없이 나온 것은 없습니다."

너희 귀에 응했다는 진술도 창조와 종말에 이르는 넓이와 깊이를 갖고 있어요.

성경이 계시라는 말도 이런 차원에서 옳은 거지요.

상수리 님도

이제 막 시작한 2010년의 영적 항해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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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 사순절 유혹 받으신 예수 (마 4:1-11) [10] 2014-03-09 18332
528 주현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다. (출 24:12-18) [14] 2014-03-03 11497
527 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마 5:38-48) [26] 2014-02-23 15234
526 주현절 하나님은 생명이다! (신 30:15-20) [5] 2014-02-16 10370
525 주현절 법과 자유 (마 5:13-20) [18] 2014-02-09 10561
524 주현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31) [16] 2014-02-02 18567
523 주현절 하나님 나라와 제자도 (마 4:12-23) [4] 2014-01-26 11420
522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182
521 주현절 세례 받은 하나님의 아들 (마 3:13-17) [4] 2014-01-13 16090
520 성탄절 여호와는 구원자다! (렘 31:7-14) [6] 2014-01-05 9438
519 성탄절 시험받은 예수 그리스도 (히 2:10-18) [14] 2013-12-29 13666
518 성탄절 성육신의 신비 (요 1:1-14) [12] 2013-12-25 14042
517 대림절 임마누엘은 예수다 (사 7:10-16) [8] 2013-12-22 13476
516 대림절 메시아 질문 (마 11:2-11) [17] 2013-12-15 13000
515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롬 15:4-13) [10] 2013-12-08 13967
514 대림절 여호와의 빛 (사 2:1-5) [13] 2013-12-01 15272
513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눅 23:33-43) [4] 2013-11-24 10353
512 창조절 하나님의 평화, 평화의 하나님 (빌 4:4-9) [15] 2013-11-18 10965
511 창조절 삶과 죽음의 경계 (눅 20:27-38 [8] 2013-11-10 11180
510 창조절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1-4, 2:1-4) [10] 2013-11-04 14669
509 창조절 하나님 앞에서 '옳음'의 문제 (눅 18:9-14) [8] 2013-10-27 13887
508 창조절 약속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 (렘 31:27-34) [10] 2013-10-21 14478
507 창조절 이방인 나병환자의 믿음 (눅 17:11-19) [10] 2013-10-13 24760
506 창조절 거룩한 부르심 앞에서 (딤후 1:1-14) [12] 2013-10-07 15443
505 창조절 불행한 부자 이야기 (눅 16:19-31) [10] 2013-09-29 21062
504 창조절 예레미야의 눈물 (렘 8:18-9:1) [8] 2013-09-22 13504
503 창조절 죄의 심연 (딤전 1:12-17) [6] 2013-09-15 11153
502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8973
501 창조절 헛되고 무익한 것 (렘 2:4-13) [16] 2013-09-01 13528
500 성령강림절 신앙과 위선 (눅 13:10-17) [6] 2013-08-25 14773
4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절망 (사 5:1-7) [1] 2013-08-18 11035
498 성령강림절 인자가 오리라! (눅 12:35-40) [5] 2013-08-12 13115
49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골 3:1-11) [10] 2013-08-04 10636
496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8931
495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2] 2013-07-21 12299
494 성령강림절 이웃에 대한 질문 (눅 10:25-37) [19] 2013-07-14 17929
493 성령강림절 나아만과 게하시 (왕하 5:1-14) [6] 2013-07-08 20261
492 성령강림절 제자의 삶과 하나님 나라 (눅 9:57-62) [6] 2013-06-30 16360
491 성령강림절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눅 8:26-39) [15] 2013-06-24 13591
490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17] 2013-06-16 13257
489 성령강림절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왕상 17:8-24) [7] 2013-06-09 16202
488 성령강림절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9] 2013-06-02 14017
487 성령강림절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롬 5:1-5) [8] 2013-05-26 14238
486 성령강림절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요 14:8-17) [4] 2013-05-20 15778
485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2013-05-12 12553
484 부활절 환상을 보는 사람들 (행 16:6-15) [12] 2013-05-06 15088
483 부활절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6) [10] 2013-04-28 16780
482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요 10:22-30) [8] 2013-04-22 13180
481 부활절 나를 따르라 (요 21:15-19) [10] 2013-04-14 20827
480 부활절 죽임과 살림 (행 5:27-32) [14] 2013-04-07 11339
479 부활절 생명과 죽음 (눅 24:1-12) [8] [1] 2013-03-31 16213
478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8819
477 사순절 의식하지 못한 은총 (요 12:1-8) [10] [2] 2013-03-18 15499
476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2] [1] 2013-03-10 17944
475 사순절 여호와를 찾으라, 부르라! (사 55:1-9) [17] [3] 2013-03-03 26288
474 사순절 예수와 헤롯 (눅 13:31-35) [8] [1] 2013-02-24 15555
473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559
472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눅 9:37-43) [8] [2] 2013-02-10 12911
471 주현절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12] 2013-02-03 17010
470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8941
469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2013-01-21 23801
468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2013-01-13 21732
467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2013-01-07 17957
466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2012-12-30 22305
465 대림절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4] [2] 2012-12-24 17031
464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2012-12-17 18104
463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2012-12-09 21477
462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2012-12-02 17506
461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2011-11-21 18300
460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2011-11-13 23263
459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2011-11-06 20102
458 창조절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11] 2011-10-30 16905
457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2011-10-23 23094
456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2011-10-17 20147
455 창조절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 4:1-9) [6] 2011-10-09 16828
454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2011-10-02 14713
453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2732
452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2762
451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640
450 창조절 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12] 2011-09-05 13353
449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2011-08-29 1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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