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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관계의 자리로!

성령강림절 조회 수 12710 추천 수 18 2008.10.26 17: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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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태복음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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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6. (마 23:1-12)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느끼는 예수님에 대한 인상은 온화하고 따뜻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자기의 안전을 안중에 두지 않는 목자처럼 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책망하기보다는 위로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예수님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구약의 예언자처럼 사람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책망을 받는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요즘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거룩한 책들을 바르게 해석하고, 필사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려면 학문적인 업적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 합니다. 마치 요즘 신학대학교 교수들이 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 논문을 많이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전문적인 업적이 있는 사람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인정을 받기 마련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요즘으로 말하면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에서 가장 모범적인 목사나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단어의 뜻은 ‘구별된 사람’입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을 ‘구별된 무리’라는 뜻의 하기오스, 즉 성도라고 불렀는데, 의미가 비슷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실제의 삶에서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중요했지만 바리새인들의 율법 준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성문 율법만이 아니라 구전율법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율법학자들은 학문적으로 권위가 있었다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실천에서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의 책망
예수님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들을 불러서 넌지시 충고한 게 아니라 공개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한 그들의 잘못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그들은 말만 하고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3b) 남을 가르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앎이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삶의 태도입니다. 저에게도 이런 태도는 흔하게 일어납니다. 말은 학자 연, 도사 연 하는데 실천은 잘 따르지 않습니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선생 티를 내는 사람들은 똑같습니다.
2) 그들은 무거운 짐을 남의 어깨에 메워주기만 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합니다.(4절)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임무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원래 그렇습니다. 무언가 다른 사람보다 성취한 게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것을 요구합니다. 남에게 내세울 게 많은 부모들은 일반적으로 자식들에게도 그런 종류의 부담을 줍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목사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신자들에게 신앙적 짐을 떠맡깁니다. 기도하라, 헌금하라, 전도하라, 순종하라고 말입니다. 그런 강요로 인해서 그들은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5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적힌 천을 옷에 달고 다니고, 집에서 곳곳에 달았습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목사 가운이나 박사 가운을 입고 길거리를 다니는 형국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기도와 성서일과와 금식과 십일조 헌금에 투철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모든 신앙적인 노력이 자랑의 구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4) 마지막으로 이들은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6절)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칠 때는 지금 예배에서 목사가 앞에 나서듯이 회중들을 압도할 수 있는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야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높은 자리가 바로 자기의 권위를 지켜주는 것처럼 확신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마태복음의 이런 보도에 따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철면피하고 몰염치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상대적으로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따진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로 유대교가 지탱되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유대교의 경전과 경건생활이 그들의 손에 의해서 전승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와 유대 공동체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기자는 왜 이렇게 이들을 매도하고 있을까요?  
마태복음의 이 진술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속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가 아니라 훨씬 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찾는다고 했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유대 사회에서 이럴 정도로 주도적인 자리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사회력 영향력은 기원후 70년에 유대전쟁에서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함락당하고 유대 공동체가 파괴된 이후 불기 시작한 바리새파 운동에서 강화되었습니다.
그런 문제가 초기 기독교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마태복음 기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정색하고 비난하는 걸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2천 년 전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한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대-기독교가 바리새파 운동이 벌어지기 전에는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유대교와 큰 마찰 없이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그 유대-기독교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제자인 베드로 같은 이들이 중심으로 활동한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었지만 유대교로부터 떨어져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대교 측에서도 이 유대-기독교를 굳이 내쫓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등이 있듯이 유대-기독교는 나사렛파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함락 이후 벌어진 바리새파 운동으로 인해서 유대교와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던 유대-기독교는 큰 시련을 맞게 되었습니다. 유대교가 이들에게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완전히 유대교 안으로 들어오든지 아니면 아예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로 뛰쳐나가라고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미 갈라디아, 마케도니아, 로마 등지에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이방인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이 유대-기독교를 어떻게 하든 정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기독교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강도로 바리새파의 율법을 지키라고 닦달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파 운동이 유대-기독교의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을 위선자로 몰아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승과 형제
오해는 마십시오. 지금 마태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꾸며서 ‘픽션’을 쓰고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가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심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앞에서 본문 1-7절은 간접적으로 연결된다면 8-12절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1-7절은 마태복음을 비롯한 초기 유대-기독교가 처한 상황과 연결된다면 8-12절은 예수님의 공적 삶과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두 가지 이야기를 하나로 묶은 이유는 그것이 결국 비슷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앞의 본문 마지막 구절인 7절은 사람들이 스승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라는 바리새인들의 속셈을 거론했으며, 뒤 본문은 7절에서 스승 소리를 듣지 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스승’이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은 것입니다.
제가 조금 복잡하게 설명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성서 텍스트에 초기 기독교의 고유하고 구체적인 신앙이 녹아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스승인 체 하는 바리새인들의 신앙 행태가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과 완전히 위배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여기서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권위를 행사하는 세 집단을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스승, 둘째는 아버지, 셋째는 지도자입니다. 우리는 주로 이런 권위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런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도 거기에 종속되어 있기는 매 한 가지입니다. 그 밑에 있는 사람이나 그 위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그걸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거기에 종속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했습니다.
첫째,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한 분은 물론 하나님입니다. 사람에게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형제 관계라고 했습니다. 둘째, 세상의 어느 누구를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스승인 체 하지 말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은 심한 것처럼 들립니다. 셋째,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이렇게 스승, 아버지, 지도자를 모두 거부하거나 무시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까요? 학교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어이, 김 형!” 하고 부른다면 학교 질서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배우며 가르치는 학습자체도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집에서 자녀들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가정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어이, 이 씨” 하고 부른다면 한 국가의 체제도 허물어지고 말겠지요. 예수님은 왜 이렇게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자처럼 발언하신 걸까요?
예수님이 가정과 사회의 모든 기존 질서를 부정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인 사회 구조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바실레이아 투 데우’, 즉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런 차원에서 행동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스승, 아버지, 지도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역시 이런 차원에서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것 없이 무조건 스승, 아버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 자체를 예수님이 부정하는 것처럼 말하면 예수님의 생각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우리의 모든 삶, 그 삶을 구성하는 세상 질서, 윤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질서와 관계는 아주 구체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못한 건데 어떻게 세상의 질서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할 수 있느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게 바로 기독교인들이 삶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독교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지른 불의는 바로 이런 오해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조금 생생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2003년 4월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대량살상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무력으로 침략했습니다. 프랑스, 독일은 반대했고, 유엔 사무총장도 유감을 표시했습니다. 이라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 정부는 이라크를 샅샅이 뒤졌지만 대량살상무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가장 큰 이유가 거짓이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부시는 전쟁을 시작하면서 백악관에서 보수적인 복음주의 목사님들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미군만 해도 수천 명이 죽었고, 가난한 이라크 국민들은 수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적인 양심과 영적 감수성을 예민하게 유지하기만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크게 어긋나는 일은 저지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간접적으로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스승인 체 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형제로 생각합니다. 아버지인 체 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형제로 여깁니다. 지도자인 체 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형제로 여깁니다. 물론 실제의 삶에서는 스승의 역할도 해야 하고, 아버지의 역할과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영적인 차원에서는 그런 자리에 올라서지 않습니다. 참된 스승, 참된 아버지, 참된 지도자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그가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되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보십시오. 내가 더 배우고, 육체적으로 힘도 강하고, 돈도 많이 버니까, 기도도 많이 하니까 당연히 그에 걸맞은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생각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시나요? 그렇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학생,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직원들을 모두 형제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이게 말은 쉬운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늘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운용되는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엄두를 낼 수가 없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아랫사람들에게 진정한 형제관계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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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October 26, 2008
*.109.68.69

오늘도 얼마 남지 않은
노숙자의 삶을 기꺼이 살았습니다
특히나 오늘 한데 생활은 우리 부부 외에
박찬선님과 함께 등을 기댈 수 있어서 더 훈훈했습니다

낼 모레, 거액의 재산을
상속 받을 익명의 재산가 처럼
오늘의 잠깐 허기짐에도 위풍 당당 하기만 합니다

오랜 시간 실체 없던 신앙 생활과
몇 개월의 노숙 생활을 경험으로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신학의 토대위에 해석된 설교와
모든 생명의 불가시적 현실성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개방되고 소통하는 길 위에서,
높임과 권위를 그 분에게만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뼛골 깊이 귀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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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조용한 산책

October 26, 2008
*.59.33.216

목사는 잡학박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교회공동체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형제 관계!
스승의 위치에서가 아닌, 아버지의 위치에서가 아닌, 지도자의 위치에서가 아닌,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믿음의 행위가 교회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길임을 이미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오늘 목사님의 설교로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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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6, 2008
*.181.51.93

시 그림 님,
'시'와 '그림'의 조합이
빈 말이 아니구료.
노숙자들에게는 단칸방도
무궁화 다섯개짜리 스위트 룸처럼 느껴지겠지요.
영적 노숙자들, 모-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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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6, 2008
*.181.51.93

지금 '조용한산책' 이름으로 들어온 분이
이병진이요, 김은옥이오?
씩씩하고 진실하고 의식이 있는
두 부부 전도사님,
용기를 갖고 잘 사세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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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바람

October 27, 2008
*.77.132.48

언행불일치, ~~체, ~~척 으로 이어지는 교만,
사무실로 출근하는 차안에서 지난 주 삶을 돌아보며
위의 세가지를 곱씹고 곱씹게되었지요...
그러면서 도저히 어찌할수 없는 나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기도하였는데...
컴을 키고 서둘러 말씀을 보니
참! 유구무언입니다.

형제의 자리보다 더 낮은 자리를 찾아서
말 없이,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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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삶에서..

October 27, 2008
*.114.16.4

어제 교회일정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한참을 괴로워했더랬습니다
맡고있는 중고등부를 이끌어가긴 해야하는데 사람들은 멋진 선생을 원하고 탁월한 지도자를 원하는 듯한
요구를 하고 있는데 저에게는 그럴 능력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에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조차도 부러워보입니다. 최소한 그들은 그들이 믿는 구석에 대해 최선을 다하며 만족은 했더랬으니깐요..
현실의 교회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방황하며 헤매고 있는 저도 노숙자인가요??ㅠㅠ
노숙자 주제에 선생노릇에 지도자노릇에 권위까지 있으려니 도대체 거추장스런 옷 같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주님 말씀처럼 서로 형제의 관계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주 작은 희망의 불빛을 여기서라도 발견할 수 있으니 저는 아직 포기하면 안되는 거지요??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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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데오그라시아

October 27, 2008
*.106.92.146

정목사님의 설교본문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묵상하며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23:1-12)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하든지 말로 올무를 놓아 넘어뜨릴려고 했지만 도리어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지혜와 함께 저들의 악함과 어리석음이 드러나게 되면서 동시 예수께서 메시야 그리스도되심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된다. 그래서 마태는 46절에 “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자가 없더라 라고 하였다.

그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 앞에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 특히 바리새인과 율법사 서기관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 제사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대 제사장들은 바리새인 서기관들보다 더 악하다. 왜냐하면 성전을 더럽히고 그들은 성전에서 일할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저들의 욕심을 채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깊에 타락하였고 정치와 결탁하여 세속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왜냐하면 저들을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신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맡기고 제사장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이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율법사 즉 당시 성경과 율법을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 하셨다. 첫째 저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를 행할 때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 앞에서 행한 것처럼 저들이 지금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처럼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들의 권위주의적 교만을 질타하시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나 실수를 질타하고 비난 정죄하는 것을 본다. . 우리는 사랑과 자비 긍휼을 베풀지언정 절대로 정죄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바로 마치 자신을 모세의 자리에 두는 것이다.

둘째는 말만하고 행치 않는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손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셋째는 저들은 사람들 앞에 보일려고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옷술을 크게 하고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한다. 넷째는 잔치의 상석에 앉는 것을 좋아하고 즉 높은자리에 앉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다섯째는 랍비라 칭함 받기를 좋아한다. 랍비는 선생이란 뜻이다. 선생으로 불리우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첫째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즉 늘 가르칠려고 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배우는 자세로 살라는 뜻이다. 설령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어서도 선생은 하나 즉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으며 우리는 다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둘째는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늘 아버지를 늘 의식하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아비를 아비라고 하지 말고 하셨다. 이 말은 육신의 아버지의 권위를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욱 의식하며 살라는 뜻이다.

셋째는 지도자라 칭함 받지말라 늘 섬기는 마음과 자세로 살라는 뜻이다. 설령 지도자의 위치에 있어도 섬기는 마음으로 지도할 것을 말한다. 그래서 늘 자신을 낮추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높일려고 하고 섬김을 받으려 한다면 도리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그런 지경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섬기는 마음과 자신을 낮추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며 형제됨의 태도이다. 아멘..

주님 주님 말씀하신대로 이런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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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October 28, 2008
*.104.195.102

목사님께서
'신앙양심과 영적 감수성을 예민하게 유지한다면.."
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문제는 나름대로 신앙양심이 있고
영적으로 민감하다고 생각하는
그 '나름'이 문제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군요.

오래 묵고 훈련받을수록
유연함과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획일적, 전투적, 강압적인 인성이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언급한 특징들은 본인의 우월함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나지요.
절대자이신 주님 앞에
동등한 위치로서가 아니라
신앙의 상대적인 선험적, 선취적인 획득자로서
형제되어야 할 자들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요즘...
저 자신을 조금 새롭게 보려고 합니다.
바깥 세상에 대하여는 제 마음대로 뭔 말을 못하겠습니까만은,
위에 나열한 안좋은 점들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들과 저 자신이지요.
좀 더 유연해지려는 눈으로보니
오히려 한 수가 높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속으로 가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dabia를 먼저 알았다고
또 발동이 걸리면 안되는데요........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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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8, 2008
*.181.51.93

유니스 님이 설교의 빈틈을 짚었군요.
설교 진행에서 꼭 필요한 대목은 아니었는데,
이라크 전쟁의 무모성을 강조하다보니 그렇게 됐군요.
그래도 한 마디 설명은 할께요.
서로 '나름의' 신앙과 영성이 충돌한다는 건 분명하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가 바로 그것의 실증이에요.
심지어는 구약의 예언자들도 서로 옥신각신 했어요.
사이바와 정통이 그 당시는 아직 확연하게 구분된 것도 아니지요.
모두 자기가 하나님의 신탁을 직접 받았다고 주장했고,
많은 사이비들도 실제로 그렇게 확신했을 겁니다.
그런 일들은 지금도 반복되지요.
그 판단은 역사가 합니다.
역사의 판단은 준엄합니다.
위의 사실은 우리 기독교인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가리킵니다.
첫째, 오늘 우리의 신앙과 영성은 여전히 잠정적이다.
둘째, 오늘 우리는 지난 2천년 역사의 빛에 신앙과 영성을 반성(reflection)시켜야 한다.
전자는 영성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신학이겠지요.
이 두 가지 사실이 우리의 신앙에서 건강하게 유지된다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거역하는 일은 최소화되지 않을는지요.
이런 태도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을 기다릴 뿐입니다.
오늘 정말 황홀한 늦가을의 정취가 온 세상에 가득했습니다.
좋은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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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November 07, 2008
*.109.122.33

나사렛 예수의 말씀의 진수가 담겨있는 산상수훈 말씀을 따뜻하고 온화하고 사랑이 가득찬 예수의 의도와는 달리 예수 사후에 유대-기독교가 종교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는 바리세파를 비방하고 위선자로 몰아붙이기 위해서 기록하고 있다는 방향의 해석은 다소 새롭기는 합니다만, 그 합리적 타당성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설득력이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본문은 바리세파만 염두에 두고 적혀지는 것 아니라 초림 당시의 주도적인 종교 지도자들 즉 "서기관"과 "바리세인"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바리세파 만을 위선자로 몰고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고발 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은 시각 아닐까? 생각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위선을 고발하고 지적하는 책망과 비방은 특정 역사적 상황하에서 마태복음 저자의 사적인 감정이 의도적으로 개입된 것이라기 보다는 이미 구약 이사야 선지자로 부터 모든 선지자들에 의해서 일관되게 주장되어온 어조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생각 합니다.
저는 초대기독교 신자들의 삶과 글을 읽으며 그들이 적어도 사적인 감정으로 성경을 기록하고 역사를 왜곡할 만큼 사려깊지 못하고 부정직한 사람들로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정도 수준의 사람들의 글 이라면 읽을 값어치도, 연구할 값어치도 없는 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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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November 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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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관하여 다소 다른 입장을 가진 한 부분만 더 언급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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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들은 무거운 짐을 남의 어깨에 메워주기만 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합니다.(4절)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임무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원래 그렇습니다. 무언가 다른 사람보다 성취한 게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것을 요구합니다. 남에게 내세울 게 많은 부모들은 일반적으로 자식들에게도 그런 종류의 부담을 줍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목사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신자들에게 신앙적 짐을 떠맡깁니다. 기도하라, 헌금하라, 전도하라, 순종하라고 말입니다. 그런 강요로 인해서 그들은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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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리세인들이 백성에게 지운 무거운 짐의 핵심은 형식적인 재사 또는 할례 따위의 율법 준수를 말하는 것이라 봅니다. 본문을 인용하여 "기도하라""헌금하라""전도하라""순종하라"는 말을 전후 거두절미하고 신앙의 짐이라 표현 하는 것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지않을까요?. 정목사님의 말씀대로 바리세파와 대립의 관계에 있던 본서를 기록한 유대-기독교 지도자들 또한 "기도와 헌금과 전도와 순종"을 다르 여러 서적들을 통하여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강력히 요구(짐 지우고)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을 인용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의 의미또한 예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언어의 표면적인 의미만으로 인용되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예수가 말하는 "짐"의 의미는 "죄의 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지 율법을 지키는 육적인 짐을 말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 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기독교 세속화의 한 원인은 많은 성도들이 위의 성경 본문을 읽을 때에 자신의 육신적인 짐(여러가지 인생문제들)만을 생각하고 그그 짐을 해결해 주시는 예수만 생각 하고, 예수가 지시고 또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의 "멍에" 와 "짐"을 가벼히 지지는 않으려고 한다는 것 아닐까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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