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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창조절 조회 수 6260 추천 수 0 2018.10.21 21:33:57
설교듣기 : https://youtu.be/xsOj6atVzCc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욥기 38:1-7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38:1-7, 창조절 8, 20181021

 

1.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무죄한 이의 고난

욥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읽어본 분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욥기를 전체적으로 읽기 힘든 이유는 욥기의 상당 부분이 신학논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욥 이야기는 예상 외로 간단합니다. 전체 42장 가운데서 처음 1,2장과 마지막 42장만 거기에 해당됩니다. 믿음과 삶에서 완벽했던 욥이라는 인물의 운명이 뜻하지 않게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훗날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이전보다 두 배나 잘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3장부터 41장까지 대대분의 내용은 인간이 당하는 이유 없는 재앙에 대한 길고 지루한 논쟁입니다. 욥은 친구 세 명과 논쟁을 벌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당한 재앙의 이유를 죄라고 보았습니다. 죄를 회개하라고 다그칩니다. 나중에 등장하는 젊은 학자 엘리후는 좀더 세련된 방식으로 욥을 비난합니다. 욥의 재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라는 겁니다. 이런 충고와 비난은 오늘도 우리가 교회에서 자주 듣는 내용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불행은 죄와 관계없다는 겁니다. 자신은 여전히 의롭다고 강조했습니다. 친구들이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욥의 태도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당하는 재난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아내도 욥을 향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게 차라리 낫다고 악담 아닌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이 여자의 처지에서는 그럴 만도 합니다. 욥 부부에게는 아들 일곱에 딸 셋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가장 행복한 가족 구성입니다. 재산도 상당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졸지에 잃었습니다. 자녀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재산을 강탈당했고, 급기야 욥은 악성 피부병에 걸려서 격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욥은 아내가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지 않으면 하루도 버텨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형식적으로라도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을 거라고 인정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이 의롭다고 끝까지 강변합니다. 욥에게서 모든 사람이 떠나는 건 당연합니다.

욥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친구나 이웃들과의 대화나 논쟁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 어떤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확실한 것은 두 가지 사실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모순입니다.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면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하고,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확신하면 하나님을 부정해야만 합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욥은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은 정의롭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고, 이럴 바에야 빨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투정이기도 하고 저항이기도 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에 떨어져 고통당하는 욥의 운명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운명을 미리 맛봅니다. 이는 성서 신앙에서 가장 따라잡기 힘든 신정론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전능한 존재라면 왜 무죄한 이들에게 고난이 주어지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재앙과 불행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만납니다. 어린이 암 병동에서 벌어지는 일들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신혼부부가 동시에 교통사고로 죽기도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자연재해와 내전이나 전쟁 등으로 인한 수많은 비극이 일어납니다. 4년반 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가능한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런 일에 관여되는 게 귀찮기도 하고, 우리의 할 일이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욥의 친구들과 젊은 학자가 제시한 죄와 시련이라는 논리에 숨어서 참혹한 현실을 회피합니다.

욥은 친구들과의 논쟁이 끝나는 부분인 30:19-21절에서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이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마지막 발언(31:35)은 다음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이제 그 어떤 논리로도 해명이 불가능한 이 상황을 하나님이 직접 해명하라는 주장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온갖 설득과 호소와 비난에도 기세등등하다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42:5,6절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나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은 무죄한 이들에게 왜 재앙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이유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욥이 불신과 불만과 불가지론과 자기 의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을 눈으로 보듯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 답은 욥이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실질적으로 깨달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욥기는 그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방식을 빌려서 당시 사람들에게 전한 문서입니다. 첫 마디가 오늘 설교 본문에 속하는 욥 38:4절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4절 이후로 비슷한 문장이 반복됩니다. 8절은 이렇습니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16절에는 바다의 샘이나 깊은 물 밑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31절에는 밤하늘의 별이 언급됩니다. 37, 38절이 재미있습니다.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 지금의 물리학이 설명할 수 있는 내용도 있고, 설명할 수 없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 모든 현상에서 키워드는 땅의 기초입니다. 세상과 자연의 시원적 깊이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런 시원적 깊이는 인간 인식 너머에 있어서 초월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과학이 발전하면 그것의 모든 비밀이 풀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그건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연과학의 본질은 아는 게 많아질수록 알아야할 것들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자연과학으로 세상의 시원적 깊이를 밝혀낸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땅의 기초

땅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세상과 자연의 시원에 대해서 질문해보셨는지요? 우리는 지금 지구에서 삽니다. 지구의 나이는 대략 45억 년쯤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불덩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구의 온도가 내린 다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물리화학적 변화를 통해서 지구에 생명체가 살기 시작했습니다. 54천만 년 전부터 1억년 가까이 지구 생명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캄브리아기라고 합니다. 인간의 조상인 유인원이 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과 같은 인간 문명의 역사는 훨씬 짧습니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지구에서 살다가 멸종되었듯이 현재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리는 인류도 그런 운명에 떨어질 개연성이 없지 않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인간은 지구 외에서는 살지 못합니다. 지구 외의 행성에 이주한다는 계획은 몽상에 가깝습니다.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인공지능과 결합된 새로운 종에게는 가능할지 모릅니다. 태양계에 속한 행성인 지구는 실질적으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행성입니다.

태양은 은하계에 속한 수많은 별들 중의 하나입니다. 은하계에는 1천억 개의 별들이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밤하늘에 보는 은하수가 바로 그 별무리입니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또 하나의 태양까지의 거리는 대략 2.5광년이라고 합니다. 이런 거리를 계산해내는 우주 물리학자들의 능력이 대단하긴 합니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 빛의 속도로 2년 반이 걸리는 이 거리가 얼마나 먼지는 실감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우주선으로는 수백 년도 더 걸릴 겁니다. 태양계 외의 행성에 가서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만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인터스텔라라는 영화가 묘사하듯이 은하계에서 다른 은하계로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웜홀은 공상입니다. 이 세상과 우주가 비밀 가득하니 언젠가 그것이 현실로 나타날지 모르긴 합니다. 태양은 천억 개의 별로 구성된 은하계의 변두리에 속한 평범한 별입니다. 우주에는 이런 은하계가 천억 개 이상이나 됩니다. 어쩌면 이런 우주 너머에 또 다른 차원의 우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대 과학이 알고 있는 것은 바닷가의 모래에 불과합니다. 욥기에 언급된 땅의 기초를 욥 시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여전히 모릅니다.

거시 우주만이 아니라 미시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끼리의 몸이나 사람의 몸이나 모기의 몸도 기본적으로는 모두 세포로 만들어졌습니다. 세포 안으로 들어가면 물질의 최소 입자인 원자가 나옵니다. , 우라늄, 수소, 산소 등이 다 원자입니다. 원자의 결합으로 물질이 만들어집니다. 예컨대 H2O라는 기호로 표시되는 물은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1개의 결합입니다. 일정한 형체가 없는 액체의 물이나 형체가 갖추어진 나무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신기한 겁니다. 원자는 중심에 있는 핵과 핵을 도는 전자로 구성됩니다. 전자 숫자에 따라서 원자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원자 내부는 대부분 비어있습니다. 원자를 큰 교회당으로 비교하면 핵은 교회당 의자 위에 놓인 찬송가의 음표 정도에 불과합니다. 원자의 공간 구조는 태양계의 대부분이 비어있는 거와 같습니다. 원자의 물리적 메커니즘을 다루는 양자역학에서는 물리현상에 관해서 사람이 확정적으로 알고 있는 게 없습니다. 그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입니다. 이런 것들이 땅의 기초에 관한 것입니다. 세상의 기초, 태초, 그 시원성은 짙은 안개가 자욱한 깊은 숲과 같아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비밀 가득하고 신비롭다는 사실만 더 분명해집니다.

개인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저는 누굽니까? 왜 이 자리에 앉아있을까요? 아무개의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시인, 교수, 의사, 목사, 노동자 등등, 자신의 주변 환경과 조건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환경 조건은 일시적인 겁니다. 어머니 자궁에서 배아로 자라던 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전혀 다른 여러분이 확인될 겁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까지 갑니까? 까마득해서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10년이나 20년 후에 우리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살아갈 겁니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이미 죽는 사람도 나오겠지요. 일상에서도 우리는 이런 아득한 것들을 경험합니다. 책 한권이 제 책상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과 연관된 모든 사연들을 추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책의 내용도 내용이고, 종이라는 사물에 담기 사연도 땅의 기초에 닿아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매우 명백하다고 여기는 시간과 공간에서 경험하는 모든 삶들은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이 순간은 우주 전체 시간으로부터 단절된 게 아니라 비밀한 방식으로 연결됩니다. 시간과 공간과 사물과 역사와 우리의 운명에 이르는 모든 것들은 시원적입니다. 모든 것들은 태초의 창조 사건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이 욥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세상의 시원성에 관해서 질문합니다. ‘땅의 기초를 아느냐고 말입니다.

 

욥의 하나님 경험

욥이 하나님을 이전에는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고백한 이유는 이 세상의 시원성에 대한 비밀을 알고 나니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시시비비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42: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압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습니다. 우리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구약성경은 종종 토기장이와 질그릇으로 비유합니다. 요즘 수요일에 공부하는 사 45: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냐, 사람의 역할이 너무 과소평가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각각 자신이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몫은 최선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물리학자들은 물리현상에 대한 연구를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몫을 감당해야 합니다. 소를 키우는 사람은 여전히 소를 키워야 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여전히 농사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욥기가 말하려는 핵심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식과 경험은 창조의 깊이를, 즉 세상의 시원을 판단할 근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앙 전통에 근거해서 욥을 충고하고 판단하고, 결국에는 비난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자본주의 시각으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죄를 지은 겁니다. 성실하지 않게 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노골적인 표현은 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자 나라는 가난한 나라를 무시합니다.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평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이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남의 불행을 즐기는 것입니다. 천재지변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는 목사들도 적지 않습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개신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상반된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신교회는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며 기복적이고, 또한 특정한 대상을 혐오하는 집단이라는 평가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며칠 전 북한을 방문할 생각이 있다고 의지를 밝힌 교황에게서 보듯이 소외된 이들과 세계 평화를 위해서 전력투구하는 교황을 세계가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욥기에 적용시키면 개신교회는 자신들의 신앙 전통과 경험으로 욥을 비난하는 친구들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자기중심으로 교만하게 다른 이들을 재단하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또는 거꾸로 잘난 척하며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의 지식과 논리에 휘둘리어 자책하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욥에게 땅의 기초에 대해서 질문하신 것처럼 우리 삶과 역사와 세상과 일상이 닿아있는 시원과 근원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욥처럼 이제는 귀로가 아니라 눈으로 하나님을 본다고 고백하는 순간이 여러분에게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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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October 22, 2018
*.118.117.106

분가지론  불가지론

읽으며 항상 은혜가 충만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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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2, 2018
*.182.156.135

예, 은혜 충만하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오자는 고쳐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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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October 22, 2018
*.136.195.15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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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2, 2018
*.182.156.135

'아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들어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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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은목오크

October 23, 2018
*.104.250.13

베드로,욥.jpg말씀에 큰 울림이 있어 사진으로 글로 표현해 봤습니다.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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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3, 2018
*.182.156.135

낙동강을 형제처럼, 자매처럼 여기면서사는 오크 님의 영성에서

베드로와 욥이 한데 어울려서 풍성한 창조 신앙의 깊이가 열리는군요.

제 설교보다 울림이 더 큰 시화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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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October 23, 2018
*.151.83.22

욥이 깨달은것은

세계는 시공간과 사물과 역사와 운명이

태초의 창조사건에 연결된 시원적인것이다는 사실이군요.

사람의 지식과 경험은 창조의 깊이와 시원을

판단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네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계내의 세상이 전부인듯 착각하여

뜻대로 되기를 바라고 안되면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어린아이 같습니다.

무죄한 자의 고난에서도 그 원인이 무엇인가 다 알수 없는것이 마땅한데

죄의결과라 하고 하나님이 단련시키시려고 한다하며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군요.

이제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사람의 지식과 경험에 불과한 운명론의 차이가

조금 보이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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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3, 2018
*.182.156.135

무죄한 이들의 고난이라는 신정론 문제는

우리가 돌파해나가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만물의 시원성이 가리키는 창조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온 몸으로 받아내거나

생명의 영인 성령에 마치 화염에 휩싸이들이 휩싸여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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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October 24, 2018
*.86.237.246

현재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성경 1독을 할 때 욥기에서 참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감정이입이 되기도 했고...., 욥기의 정서는 단순하지만, 그 울림은 크게 다가왔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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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4, 2018
*.182.156.135

성경 일독을 하면서 욥 이야기에 감정 이입이 되었다니

특별한 경험이군요.

대개는 지루해하거든요.

나중에 저도 욥기를 좀더 찬찬히,

개역개정이 아니라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으로,

또는 유진 피터슨의 사역으로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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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October 25, 2018
*.224.70.184

욥기는 참 막막하였었는데

목사님 덕에 그 깊은 질문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별세하시고

저는 그 분의 메세지 성경을 읽고...

이렇게 지나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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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5, 2018
*.182.156.135

예, 욥기는 지금도 막막하긴 여전합니다.

저 멀리 불빛이 보이기는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깜깜하니까요.

이런 느낌은 아마 죽는 순간까지 계속될 겁니다.

그러니 '끼리에 엘레이손'을 부를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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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복서겸파이터

October 29, 2018
*.175.120.34

목사님. 설교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갑니다. 


저번에 '욥에의 응답'이라는 융의 관점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런 융의 관점이 극복되는 것 같아 매우 감동이 됩니다. 


융의 관점은 반쯤 짓밟혀진 인간벌레에게 자신의 창조를 자랑하는 싸이코패스(?)적인 하나님이었습니다. 세월호로 자식을 잃은 부모 앞에 세월호의 설계자가 나타나서 배가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어졌으며, 처음 배가 항해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벅차더라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 사람을 우리는 용서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아 욥기를 보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관점에서 욥기를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욥에게 창조 때의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욥도 보게 해주시는 모습 말입니다. 이전에는 욥에게 맞서서 적처럼 몰아부치는 것처럼 하나님이 보였다면 이제는 욥을 품에 안고 말씀하시는 듯이 보입니다. "네 자식들이 죽고, 재산을 잃고, 아내가 떠나서 너의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으냐? 그렇지 않다. 내가 보는 세상을 너에게도 보여주겠다." 하나님의 관점을 공유하게 된 욥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모습(Image of God )을 가진 새로운 창조물이 된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가슴이 벅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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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9, 2018
*.182.156.135

복서 님 같은 분들이 있어서 저도 설교자로서

한편으로는 힘이 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설교에 대한 책임감이 더 강하게 느껴지니까요.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제 눈으로 주를 뵙는다는 욥의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깊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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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October 30, 2018
*.86.237.246

실존 너머의 그 어떤 존재에 대한 관점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창조자 관점에서의 욥의 관점전환이 공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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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30, 2018
*.182.156.135

'실존 너머'라고만 하면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분은 실존에 내재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욥도 자기의 실존을 가볍게 뛰어넘은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의 비밀로 실존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느낀 거지요.

기독교 신앙에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피와 살로 살아가는 이 실존은

어떤 경우에도 약화될 수 없습니다.  

그걸 약화시킨 기독교 분파가 있었는데,

이름 하여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하늘 님의 저 표현은 위의 설명이 다 포함된 거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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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October 31, 2018
*.86.237.246

고맙습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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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Искра

December 17, 2018
*.232.230.154

목사님 안녕하세요. 다비아에 처음으로 댓글을 남겨봅니다. 


사실.. 욥기를 대할 때마다 '이게 전부인가'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인간의 고통과 고난을, 우린 이해불가한 신의 전능을 인정함으로써, 혹은 신의 존재를 느낌으로써 극복해야 한다는 성경의 메시지는 너무 건너뛴 게 많다는 느낌입니다. 이 공백들은 욥기 작성 당시 사회의 한계일까요? 


그리고 신의 전능과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고통과 고난을 극복한다는 건 (제 생각에) 정말 사회 속에서 지옥같은 삶을 견디는 누군가에겐 허탈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섭리가 공정하기라도 하면 모를까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그저 복종하라는 욥기의 텍스트는 결국 고난을 몸으로 받아내는 사람들에게 복종과 불복중,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게 만드는, 또다른 고민거리만 던져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욥기 저자의 논리는 제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을 하고 싶어 억지와 비약을 신의 이름으로 포장한 것으로 느껴지네요.. 


셀 수 없는 인과율이 축적돼 나타난 현재를 그저 의지나 의미없는 당연한 세상의 이치로 받아들이거나, 스티븐 호킹처럼 세계를 주재하는 하나따윈 없다고 생각하거나, 그 무의미가 주는 오늘이 두려워, 마치 고도를 기다리듯, 없어보이는 신을 믿거나..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아주 적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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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7, 2018
*.182.156.135

최한솔 님은 철학을 공부하든지 신학을 공부하는 분 같군요.

욥기는 우리에게 대답을 주는 게 아니라

그 이전의 대답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 부정의 방식으로 말하는 과정에서 조금씩이나마 바른 대답을 찾아갈 수 있겠지요.

그게 신학과 철학의 지난 역사가 아닐까요?

최한솔 님의 생각보다 제가 더 앞으로 나아간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는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는 것만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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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Искра

December 19, 2018
*.232.230.154

목사님, 다시 읽어보니 제가 쓴 댓글에 가시가 돋혀있네요. 그럼에도 넉넉한 마음으로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탁하기에 아직은 세상에 대한 욕심과 미련이 참 많습니다. 


흐르는 강물에서 잡고 있는 밧줄을 '탁'하고 놓고, 순리대로 흘러가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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