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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주의를 넘어 생명으로

성령강림절 조회 수 12990 추천 수 0 2009.07.20 15: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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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무엘하 5:1-10 
 

승리주의를 넘어 생명으로

(삼하 5:1-10)


오늘 설교 본문인 삼하 5:1-10절은 다윗 왕조가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된 두 가지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이 있는 헤브론에 와서 다윗을 왕으로 섬기겠다는 충성서약을 한 사건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다윗은 남유대의 작은 지역에서만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여부스 족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가나안 전체를 지배하게 된 일입니다. 사사시대와 사울 왕 시대에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여부스 족의 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천연요새라서 함락시키기가 어려운 탓이었습니다.   

다윗은 원래 왕이 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사울이었고, 그에게는 요나단을 비롯해서 몇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사울의 아들들 중에서 한 명이 왕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목동출신인 다윗은 사울의 부마이기도 하고, 경호대장이기도 하고, 수하 장군이기도 했습니다. 사울의 말년에 다윗은 남쪽 유대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는 중에 세 명의 아들들이 같이 죽습니다. 그걸 계기로 다윗은 헤브론을 거점으로 남유다의 왕으로 정식 등극합니다.

그것으로 사울 가문과 다윗의 정권 쟁탈전이 끝난 게 아닙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으로 등극하자, 사울의 군사령관인 아브넬은 마하나임에서 사울의 남아있는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웁니다. 다윗은 남유다의 왕이고, 이스보셋은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자리를 잡은 겁니다. 다윗은 남유다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했지만 이스보셋은 자기를 왕으로 세운 장군 아브넬의 눈치를 보는 형편이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2년 동안 전쟁을 치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스보셋의 군사령관 아브넬이 죽고, 이스보셋도 이어서 죽습니다. 두 사람 모두 타살되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이 가리키는 대로 그제야 다윗은 남유다만이 아니라 북이스라엘까지 통치하는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서기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해졌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했기 때문에 다윗 왕조가 강성해졌다는 성서기자의 진술은 옳은 건가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다윗은 실제로 하나님이 선택한 왕인가요?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윗은 누군가?

남북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 다윗처럼 위대한 왕은 없었습니다. 성서기자들은 다른 왕들을 선한 왕과 악한 왕으로 평가했는데, 선한 왕의 기준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빛나는 성군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사치와 부패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지경에 놓였을 때도 아버지 다윗 덕분으로 솔로몬 생전에는 심판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신약성서 기자들도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살핀다면 다윗에게도 잘못이 많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칼을 차고 다니는 야전사령관이었습니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어야 할 전쟁을 밥 먹듯이 한 사람입니다. 힘이 없을 때는 비굴하게, 힘이 있을 때는 건방지게 행동했습니다.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신세인 요즘 한국의 정치인들처럼 아무리 개인으로 순수하더라도 때가 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권모술수도 많이 행했습니다. 그의 운명도 기구했습니다. 왕궁의 근친상간을 막지 못했고, 왕자의 난도 막지 못했으며, 심지어 쿠데타를 일으킨 아들 압살롬을 피해 야반도주하기도 했습니다. 솔로몬만 제외하고 대다수의 아들들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다윗은 편안하게 눈을 감지 못했을 겁니다.

다윗의 마지막 장면은 왕상1,2장에 나옵니다.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장군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함께 왕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서열로 본다면 당연히 자기가 다윗을 이어 왕이 되어야했지만 궁중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이 불리하다고 여겼는지, 먼저 치고 나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단은 왕비 밧세바를 찾아가서 솔로몬을 왕으로 옹립할 계획을 짰습니다. 밧세바가 먼저 다윗의 침실을 찾아갔습니다. 다윗은 너무 늙어서 거동하기도 힘든 때였습니다. 밧세바가 무슨 말로 늙은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았을지 뻔합니다. 이어서 나단이 들어옵니다. 나단은 다윗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밧세바 사건으로 나단에게 큰 약점이 잡힌 적도 있습니다. 나단은 늙은 다윗을 압박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솔로몬을 후계자로 선포합니다. 다윗은 곧 죽습니다. 그 뒤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에 맡깁니다. 솔로몬은 배다른 형 아도니야와 그에게 협조한 장군 요압을 죽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다윗이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모든 행복한 삶은 끝났습니다. 그는 평생 싸움꾼으로 살았습니다. 한번 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적을 제거하는 일을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정치라는 게 그렇습니다. 자식들도 똑같은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가 죽음에 임박한 순간까지 두 아들이 싸우는 걸 지켜봐야했습니다. 그가 눈을 감을 때 속이 얼마나 쓰렸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악한 왕이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는 크게 훌륭한 것도 없고, 그렇게 나쁜 것도 없는 왕이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때 그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탄탄한 국가로 만든 최초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의 능력이라면 능력입니다. 그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영웅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완전한 통일국가로 세운 데에는 그의 능력만이 아니라 운도 많이 따랐습니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지 않았다면 다윗의 운명도 달라졌을 겁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달아날 때도 운이 좋아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그에게 수 없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는지, 그게 얼마나 올바른 믿음이었는지를 우리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믿음이라는 명분으로 행한 것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점령할 때 기독교 신앙을 앞세웠습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노예상인들에게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흑인을 돈으로 샀습니다.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은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들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948-1994년까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법)를 주도한 이들은 모두 기독교 신앙을 잘 따르는 백인들이었습니다. 이런 불의하고 불미스러운 역사를 믿음으로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 왕조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자랑하는 지금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팔레스틴 원주민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들은 무력으로 팔레스틴 원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기도 하고, 팔레스틴 사람들이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도록 높은 벽을 치기도 합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고 있으며,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들도 언제 있을지 모를 팔레스틴 원주민들의 테러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해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 기자들이 보도하는 다윗에 관한 이야기도 이와 비슷합니다. 정략과 완력으로 정적을 소탕하고, 예루살렘 성에 살고 있던 여부스 족을 쫓아냈습니다. 다윗이 점점 강성해졌습니다. 그 모든 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승리주의 신앙의 모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가 강한 사람들이 될까요? 목동이었다가 왕이 되고, 졸병이었다가 장군이 되고, 월세 집에 살다가 호화주택에서 살게 될까요? 거꾸로 우리가 강성해져야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일까요? 이것은 승리주의신앙입니다. 승리주의 신앙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게 우리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존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승리주의 신앙에 물들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영혼이 잘되고 번성하고 강건해진다는 삼박자축복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번성의 신학으로 포장합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불가능이 없다고, 긍정의 힘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메시지는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상식적이지도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는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모두가 강성해질 수 없습니다. 모두가 건강하게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사람들만 편애해서 잘 되게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를 잘 믿지 않는 일본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부자이고, 가장 장수한다고 합니다. 예수 잘 믿어도 큰 사고나 질병으로 죽기도 하고, 예수 안 믿어도 인생이 잘 풀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슨 이유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다윗이 강성해졌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강성해졌다는 것에 초점을 두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말에 초점을 두고 읽으십시오. 성서기자에게는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함께 했습니다.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고난당하던 시절에도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40년 광야시절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그들은 놀라워했고, 거기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다윗이 강성해졌다는 말은 곧 유대민족이 강성해졌다는 뜻인데, 고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한 방식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과 강성해졌다는 말은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흔한 예를 하나 들어야겠군요.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아이들은 어머니를 배고파 울면 젖을 주는 대상으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촉감과 후각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때로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기도 하고, 삶에 대해서 어머니와 깊은 대화도 나누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머니에 대한 경험 자체입니다. 어머니가 자기와 함께 있다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오늘 성서본문은 다윗 왕조가 강성해진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물론 승리주의 신앙입니다. 그것을 신약시대의 우리가 똑같은 차원에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학생으로 자란 딸이 어머니 젖을 그리워하는 것과 비슷하겠지요.


예수가 임마누엘이다

장성한 사람이 된 후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고백하는 바울처럼(고전 13:11) 우리는 이제 하나님 경험을 승리주의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승리주의를 버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서조차 눈이 어두워지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경전이며, 초기 기독교가 그대로 받아들인 구약성서를 통해서 그 하나님 경험의 진정성을 배워야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구약의 영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전혀 새로운 하나님 경험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출생 전승을 전하면서 이사야 7:14절을 인용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임마누엘은 오늘 설교 본문 삼하 5:10절에서 표현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신약의 신앙은 구약의 승리주의 신앙을 넘어섰습니다. 그 단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자들이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선 뒤에도 여전히 승리주의 신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아론도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시오니즘, 정치 경제적인 승리주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수난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리던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나라.”고 꾸짖기도 했습니다.

신약의 신앙이 승리주의가 아니라면 실패주의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십자가에 처형당하듯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비루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예수 믿는 사람이 염세적으로, 비관적으로 세상을 사는 건 옳지 않습니다. 우리도 승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구약이 말하는 승리주의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 승리는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섰습니다. 이 승리는 다윗왕조가 강성해지는 차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승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승리와 실패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노력합니다. 삶을 생존경쟁의 원리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이고 종말론적 승리에 있습니다. 그의 승리는 죽음을 넘어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승리가 어디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이런 승리를 믿고 희망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 승리는 미래에 일어날 기다림의 대상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비밀스럽게 개입해 있습니다. 구원의 신비와 생명의 신비가 지금 여기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너무 막연한가요? 이런 경험의 실증을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워서 우리의 자아가 축소되는 경험이 그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알게 될 것입니다.(2009.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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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July 20, 2009
*.136.116.53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승리한다' 가 아니라

 

승리한 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고백한 것이라고..

 

마치 자수 성가한 사람도 성공한 후에 부모님 덕분에, 누구 덕분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요셉을 총리로 만들었다가 아니라

요셉이 총리가 되고 나서 하나님께서 해주셨다고 고백한 것이라고..

 

다비안님들 다 알고 계시는 내용이겠지만 한 번 써봤습니다.^^

 

부모님 욕 안먹이고, 자식 잘 키웠다는 말 듣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더니

나도 잘되고 부모님도 영광을 받더라..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잘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구약적인 승리주의 신앙은 신앙에 오히려 해가 될 뿐..

 

예수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신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 이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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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0, 2009
*.139.165.36

눈사람 님,

재미 있는 해석이군요.

은혜롭기도 하고, 실용적이기도 하네요. ㅎㅎ

바로 요 대목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잘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로 옮길 수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신앙의 큰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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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July 20, 2009
*.164.230.58

우리의 자아가 한없이 축소되고 예수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그 참된 자유가  얼마나 크고 놀라울지 설렙니다.

'우리는 더이상 이세상의 승리와 실패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노력합니다.'

생존경쟁의 원리가 아닌건 알겠는데, 생명을 경험하며 산다는 건 어떤걸까요?

자아가 축소되어야 하는 건 기본인거지요.

여기는 갑자기 비가 오는데 대구는 열대야인가요ㅠ..

목사님, 좋은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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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1, 2009
*.139.165.36

선영 양이 정말 중요한 걸 질문했군요.

생명을 경험하며 살다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하지요?

그걸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아직 완료된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간접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런 간접 경험의 하나가 '존재의 충만감' 같은 거에요.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에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로잡히는 거에요.

신앙적인 관점으로는 예수 부활에 사로잡히는 거지요.

이런 말을 더 공부하려면

영혼, 부활 등에 대해서 더 알아야겠군요.

행복한 비오는 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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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uly 21, 2009
*.234.35.112

구원의 신비와 생명의 신비가 경험되는 실증은

우리 자아가 한없이 축소 되어 지는 것..

그것이었군요. 목사님,

우리가 먼지임을 깨닫는 거.

그래서 어제의 성시교독과 설교 말씀이 '한 길' 위에 서 있었군요.

 

제가 늘 질문 드리고 싶었었어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부담을 가진 사람들의 표징은 삶에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까요?"

단적인 예가 자기 축소였군요.

그래서 목사님께서 '개인 영성에 천착하고 그 외 것들은 최대한 단순화 하자"라고 하시는 거군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통로 일 테니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자들은 결코 들레지도 서둘지도 않겠지요.

오직 '오시는 하나님 나라',  생명의 바다에 누워 유영하는 자들일테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왜 자유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상자곽안에 들어 가지 못해서 안달일까요? 

마치 오랜수형생활를 마치고 나온 사람처럼, 우리에겐 자유가 오히려 버거운 걸까요?

우리를 족쇄로부터 풀어 주셨는데, 여전히 족쇄를 차고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실존,

아, 이 딜레머를 언제까지 안고 가야 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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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1, 2009
*.139.165.36

라라 님이 말하는 딜레마를 완전히 해결한 사람은 없겠지요.

각각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구요.

그래도 그런 사태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과 전혀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큰 차이가 있지 않을는지요.

유사시에 그 짐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가

아마 전자에 속한 사람들에게 훨씬 많이 주어지겠지요.

전혀 새로운 자유의 세계로,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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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uly 23, 2009
*.234.35.112

전혀 새로운 자유..

목사님, 구름 너머의 '빛내림'(^^)을 말씀 하시고 계시군요.

참으로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렙니다.

주님이 오실 '그날'을 기대하기에 우리 현실의 삶이

아무리 척박하고 고단하다 할지라도,

결코 좌절 할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기도할 힘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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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두터비

July 21, 2009
*.149.5.144

글이  읽기에 쉬워져 저 같은 무식쟁이는  좋습니다. 대통령도  이렇게  국민들의  수준과  눈 높이로  맞춰 주셨으면 좋으련만!저는  이 글을  쓰기 까지 시간이  엄청 걸려요!그런데  대통령 보다도  종교 지도자들 특히  목사들이  변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 분들이 변해야  국민들도  변해서 옳바른  판단을  해서  좀더  나은  생활을  할수 있지  않을까  저는  생각해  봅니다.다비아를  통해서  가치관의  기준이  변했읍니다.  정목사님  저의 생각입니다만  어디서  꼭  특히  어릴적  뵌 분  같읍니다. 강원도  원주 출신입니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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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1, 2009
*.139.165.36

안녕하세요. 두터비 님.

원주에 사신다니 부럽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그곳에 주로 사셨지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요.

컴퓨터 글 쓰는 게 서투신가 보군요.

자꾸 쓰다보면 빨리 좋아질 겁니다.

다비아가 두터비 님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분이 좋군요.

제 아버님 고향은 강원도 양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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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브레이너드

July 21, 2009
*.149.206.62

구약을 읽다보면 하나님을 믿으면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고, 가축이 번성하고, 포도주가 가득하고, 인생살이 형통해 질것이다라는 글들을 보면 목사님 말씀처럼 승리주의와 성공주의에 젖어들기 쉬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고대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편린, 부산물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저에게 하나님의 임재보다는 그런 부산물들(돈, 명예, 안전)을 더욱 찾는것 같습니다. 어제는 잘아는 부동산사장님이 급매물이 싸게 나와서 사놓으면 돈이 된다는 말에 솔깃해서 급매물로 나온 집을 보고 살까말까 고민을 엄청 했더랬습니다. ^^ 결국 사지는 않았는데, 불로소득과 부동산투기등을 그렇게 성토하던 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집을 사면 얼마가 남고 주판알 튕기는 저만 있더라구요. 어쨋든 연약한 인생입니다.T.T

 

하박국의 '무화과 나무잎이 마르고, 외양간송아지 없어도.....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 라는 고백이 항상 나의 삶속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귀한말씀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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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1, 2009
*.139.165.36

브레이너드 님,

풍요가 제공하는 포만감은 아주 원초적이고 숙명적입니다.

거기서만 불안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학습해온 결과이지요.

성서는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만 참된 만족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는데,

그걸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일치시키며 사는가 하는 게 숙제입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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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July 22, 2009
*.104.196.177

기본적으로 성공과 승리가 저를 포함한 인간들의 본능적인 지향점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을 배경으로 한 후에 성공과 승리를 획득했다는 생각..

살아가면서 성공하지도 못하고 승리하지도 못했을 때 이중고를 격습니다.

내 능력의 미달이라는 생각과 하나님으로부터 왜 후원을 받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생각..

저와 제 신변에 찾아온 이런 일들 앞에서는

성실과 능력을 점검하고

말게 질 정도로 나의 죄과를 점검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조상과 가족의 혐의도 훑어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왜 승리하지 못했는가?

승리의 하나님이라면 패배의 원인은 자신이라는 강박이 도사립니다.

하지만 목사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본문에서 강성해졌다는 것에 초점을 두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말에 초점을 두고 읽으십시오.

 성서기자에게는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

승리와 성공은 하나님 경험방식의 일부라는 것..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에 포인트를 다시 옮깁니다.

승리와 성공은 뼈아픈 경험방식이 아니고 '희노애락' 중에 '희락'이라서

인간이 선택적으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고정시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가운데는 분명, '노애'도 있는데 말이지요.

평생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 분에 대하여 눈뜨는 시간들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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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July 22, 2009
*.104.196.177

얼마전 서로 교인이라는 걸 통성명한 손님께서

나가시면서 '승리하세요~' 하십니다.

이 '승리'는 무엇일까?

어둠을 이기고,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향한 승리,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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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2, 2009
*.139.165.36

유니스 님,

가난하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거든요.

삶의 높이가 아니라 깊이에서 참된 영성이 시작되는가 봅니다.

높이를 깊이처럼 알고 살아야겠지요.

가족과의 제주도 여행 잘 다녀오세요.

장마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데, 그걸 감안해서 여행 계획을 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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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주희아빠

July 22, 2009
*.191.47.28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위한 삶의 모습, 그래서 서울에 있는 신대원에 갔고 큰 교회에 들어 갔나 봅니다.  늘 생존 자체를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삶의 모습이 저에게도 많습니다. 사역의 성과에 의해서 우쭐대거나 좌절하며 사람들의 반응에 불안해하는 모습, 남들 보다 좋은 자리를 선점하지 못해서 고민했던 모습, 사람들의 칭찬과 비판 앞에 흔들리는 모습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참 생명을 전혀 모르고 성공을 향해 달려 왔던 탓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현실을 누리지 못하고 늘 불만족과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강박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이제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으렵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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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2, 2009
*.139.165.36

주희아빠 님,

생존 문제는 개인의 영성으로 극복하기가 쉽지 않답니다.

가족과도 연관된 문제이구요.

한국교회가 제도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겠지요.

물론 개인의 영성이 가장 중요하기는 합니다.

주희아빠 님처럼 자신을 성찰하시는 분이라면

영성의 꾸준한 진보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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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김재학

July 24, 2009
*.41.58.166

목사님 감사합니다.

다 자란 성년에게 어머니의 젖을 그리워하도록 만드는 목회자들의 설교들이 스치네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세상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세상적 승리보다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에 집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

그것을 끊어내기란 참 어렵네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승리하고 싶은 욕심..

알면서도 이겨내기란 쉽지가 않네요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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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5, 2009
*.139.165.36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승리하고 싶은 욕심..." ㅎㅎ

하나님과 승리의 절묘한 결합이군요.

언젠가 우리에게 이런 영적인 세계가 활짝 열리리라 봅니다.

승리나 실패나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라는 사실 말입니다.

살아있을 때 정 안 되면 죽는 순간에는 될 겁니다.

김재학 님에게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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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로켓마을

August 05, 2009
*.13.122.237

최근에 다시 읽은 자크 엘룰의 "돈이냐 하나님이냐"를 되새기도록 하는 말씀이네요.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의 히브리성서에 대한 아전인수격 해석을 멈출 수가 있을까요? 

최근 사회를 보면 욕망에 기대어 있는 청부론과 고지론, 승리주의가 극단으로 치닫을 경우에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항상 뼈대가 굳건히 서있는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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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몰나요

August 13, 2009
*.30.54.57

저마다 하나님과 함께햇다고 이야기하는 구약의 수많은 영웅들많이 정말 하나님이 축복한 승리자의간증일까

그들이 그렇게 저주하는 이방인들의우상이 그들이믿어의심치않던 여호와는포함되지않는다는 보장은증거는 어디에근거하는 가 이름도없이 살다가 다윗의칼아래 죽임을당한 부족의 가난한 병사의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인가 자식을 아버지를  지아비 를 일어버리고 통곡하는 병사의 가족 에게  이방족속 이라는이유많으로 신의위로는 기대할수없는가  당신들처럼 극성스런신앙없이도 처연이 살다간 농부의뒷편에 서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볼수없는가 종교의이름으로 치러지는 팔레스타인 전장터에서 사지가찟겨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부둥켜않고 울고계시는 하나님은볼수없는가  당신의이름으로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이교도를향해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성령충만하여 돌진하는 열두살소년에게 내집에거할곳이 많다고 하나님은격려하시는가  전망좋은 언덕에서 망원경으로 포연을 즐기면서 부라보를 외치는 이스라엘관광객들에게신의은총이 눈처럼내렷다고 다시쓰여질 사무엘 하권 부록편에 기록 되어저서후일에 우리후손이 읽고 아멘하고 은혜받기를 원하는가  구약이 승리한자의 인간들 이야기라면 신약은 실패한사람들의 신의이야기 라고생각합니다

----좋은 사이트에서 매일 혼의목욕을즐김니다 목사님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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