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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날과 십일조

대림절 조회 수 19532 추천 수 0 2009.12.07 17: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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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말라기 2:17-3:5 
 

주의 날과 십일조

(말 2:17-3:5)


말라기는 학개와 스가랴의 뒤를 이어 기원 전 460년경에 활동한 이스라엘의 예언자입니다. 말라기서는 한국교회에서 주로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용될 때가 많습니다. 십일조 제도는 구약의 몇 군데서 거론되는데, 말라기서에서 가장 강한 어조로 강조됩니다.(말 3:8-10)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을 가리켜 도둑질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으므로 저주를 받았다고도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지 아닌지 시험해보라고도 했습니다. 아주 노골적인 표현들입니다. 말라기의 이런 표현을 근거로 우리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를 거꾸로 읽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고 해도 성서를 거꾸로 읽으면서까지 주장하는 건 잘못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말라기 예언자가 십일조를 거론하게 된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주의 날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패배주의, 또는 냉소주의입니다. 말라기는 그 사실을 말 2:17절에서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여호와를 괴롭게 하는 말을 하면서도 시치미를 뗐습니다. 둘째,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자를 여호와께서 좋게 본다고 주장했습니다. 셋째, 사람들은 정의의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과 생각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던 당시 사람들을 유별나게 못된 사람들이라거나 불신앙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은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했고, 나름으로 신앙적인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악인들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실제로 악인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런 악인을 비호하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들이 본 세상에는 정의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분인데, 세상에 악인들이 횡행하고 정의가 실종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말라기 당시의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이전에 예언자들이 선포하던 그 하나님을 실제로는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악인을 좋게 보고, 하나님이 정의롭지 않다는 주장은 당시의 시대정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시대정신이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 적당하게 타협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살길만 찾으면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주 당연한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말라기 예언자는 말 3:1 이하에서 이들에게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사자(使者)를 보내신다고 말입니다. 그 사자는 하나님의 길을 준비할 것이고, 준비가 끝나면 주가 갑자기 성전에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주는 창조자이며 완성자이며 심판자이십니다. 주는 그야말로 세상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라기는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정의입니다. 주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이며,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입니다. 불과 잿물은 제련과 정화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불 앞에서 녹지 않는 금속은 없습니다. 잿물에 담겨서 떼가 씻기지 않는 옷감은 없습니다. 이처럼 주는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고 단련시킬 것입니다. 레위 자손은 이제 ‘정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것입니다. 여기서 레위 자손은 열 두 지파를 대표합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입니다. 심판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앞서 언급한 정의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정의는 곧 심판을 불러오며, 심판은 정의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말라기는 심판의 대상을 다섯 가지로 말합니다. 점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꾼의 삯을 떼먹는 자,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자가 그들입니다. 점술과 간음은 이교도적인 우상숭배와 연결됩니다.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 종교는 풍요를 절대화하는 대표적인 이교도적 우상숭배입니다. 그런 우상숭배는 간음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짓 맹세는 부동산의 소유관계가 명확하지 않던 시대에 일어났던 현상들로 사회의 토대를 허무는 불의한 행위였습니다. 그 뒤로 나오는 두 개 항목은 주로 지배층이 행하는 범죄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말라기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외쳤습니다.

말라기의 예언 선포를 들은 당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귀담아 들은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일 겁니다. 앞에서도 여러 예언자들이 말라기와 비슷한 내용을 선포했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실현되지도 않았고, 그의 심판이 임하지도 않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정의와 심판은 하루의 인생살이를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으로 들리고, 풍족한 사람들에게는 남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물론 정의로운 세상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악인이 오히려 복 받고, 무죄한 사람이 고난당하는 시절에 정의는 아무런 실효성도 없는 추상적인 말로 들립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의로운 세상은 오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대의 시대정신이었습니다. 말라기는 이런 시대정신과 투쟁했습니다.

말라기를 비롯해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부패하고 무능력한 왕이나 귀족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투쟁한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신탁을 받았습니다. 그 신탁을 외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신탁을 들을만한 영적인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언자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적으로 일치하지 못한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하게 신뢰했지만, 백성들은 약속 보다는 실증적인 사실을 더 의지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정의와 심판으로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약속에 자신들의 전체 영혼을 걸고 살았지만 백성들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지금 말라기와 백성들 사이에도 이런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둑질 

말라기는 바로 이런 대목에서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뜬금없어 보입니다. 말라기는 왜 갑자기 십일조를 언급한 것일까요? 말 3:5절로 정의와 심판에 대한 신탁은 끝나고 이제 새로운 주제로 넘어온 것일까요? 정의와 심판을 순전히 정치 경제적인 문제라고 보고 반면에 십일조를 순전히 종교적인 문제라고 본다면 일리가 있는 설명입니다.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예언자의 신탁에서 정치와 종교 문제를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속의 영역에 속한 것이 따로 있고 종교의 영역에 속한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총체적인 사건입니다. 앞에서 외친 정의와 심판은 십일조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말라기 예언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규례와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십일조였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었습니다. 말라기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9) 이어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이 축복하는지 않는지 시험해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설교 말머리에서 이런 구절을 근거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거꾸로 읽는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말라기 예언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십일조라는 돈이나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와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과 그런 삶의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십일조가 아니라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지도 않았습니다. 마음이 떠났으니 일종의 종교세인 십일조를 하지 않는 건 당연했습니다. 성전세가 없어서 성전 관리와 보수는 힘들어졌고, 성전에서 순전히 종교적인 업무에 종사하던 레위 지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말라기는 도둑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라기 예언자가 십일조를 하라고 강조한 것은 분명한 게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도 그 말씀을 따라야 하는 걸까요? 십일조는 이스라엘 역사에 필요했던 종교세입니다. 그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제도였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구약의 모든 구절들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 우리는 지금 삼겹살도 먹지 말아야 하고, 무당들은 모두 죽여야 합니다. 이러한 고대 이스라엘의 독특한 역사 경험에서 나온 종교 형식을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일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 말씀을 폐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 말씀이 말하는 근본을 찾아야 합니다. 구약의 형식은 접어두고 본질을 취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 본질은 무엇일까요? 말라기 예언자가 십일조라는 형식을 통해서 말하려는 하나님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정의의 하나님

우리는 이 답을 십일조 개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일조의 기원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고 근본 취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일조는 두 가지 필요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종교적인 일이고, 다른 하나는 구제에 관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레위 지파는 가나안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인 일만 수행했습니다.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다른 지파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또한 과부나 고아, 또는 갑작스런 재난을 당한 이들을 위해서도 십일조가 사용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고대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정의를, 특히 경제정의를 세우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말라기의 예언을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심판의 대상은 다섯 종류였습니다. 모두 사회적인 경제정의를 파괴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품꾼의 삯을 억울하게 하고,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이들이 거론되었습니다. 일용직 노동자들, 과부, 고아, 나그네는 생존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이들입니다.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다고 했습니다. 품꾼의 삯을 떼어먹는 것은 곧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과 똑같으니까요.

오늘 말라기의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이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지 않는 것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로는 여러분이 각자가 처한 자리에서 경제정의를 바르게 따라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인건비를 줄이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겠지요. 그러는 과정에서 역시 품꾼의 삯을 억울하게 하는 일이 자의반타의반으로 일어날 겁니다. 이런 일들은 여러분이 신앙 양심에 벗어나지 않도록 매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사회적인 차원입니다. 이게 더 본질적일 수가 있습니다. 사회적인 제도가 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개인은 그 안에서 무기력해질 수 있으니까요. 사회적인 차원에서 경제정의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세금 징수와 그것의 사용입니다. 세금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수입이 많은 사람에게서 많은 세금을 걷고, 적은 사람에게서 적게 거둬서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하고, 더 나아가서 어려운 사람에게 훨씬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 하면 됩니다. 복지 정책의 강화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빈부의 격차가 줄여나가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세금이 너무 적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부자들에게서 더 많이 거둬서 대학교육도 무상으로 시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잠시 경험한 독일은 그런 복지 제도에서 모범적이었습니다. 거기서는 돈이 없어서 대학에 못 가는 청년은 하나도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의료 혜택을 못 받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이 된 뒤로 이런 경제정의 개념이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로 종합부동산세를 폐기했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서 세금을 많이 받게 하는 제도를 없앤 겁니다. 수 조원의 세금이 줄어들었습니다. 그쪽의 주장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들의 세금을 깎아줘야 그 남은 돈으로 기업에 투자한다는 겁니다. 그런 주장은 경제논리로는 일정한 부분에서 옳지만 전체적으로는, 또한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제가 지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말라기가 처한 상황도 똑같은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정의의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출세하고 복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했습니다.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라기는 목이 터져라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말라기의 시대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뻔뻔해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고 핑계를 둘러댑니다. 어리석어 모르기도 하고, 알면서도 모른 척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개인이 남보다 조금 더 편안하게 산들, 그렇게 살다가 죽은들 그게 무슨 대수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용산참사를 생각하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망하지 마십시오.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주님이 곧 오십시오. 아니 이미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에서 궁극적인 정의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를 믿음으로 참된 생명을 약속으로 받았는데, 우리가 무엇을 감당할 수 없겠습니까? 힘을 냅시다.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 2009.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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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박창식

December 08, 2009
*.181.69.22

 

존경하는 정목사님,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우연하게 인터넷에서 정목사님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 설교비판 서적 3권을 구입하여 정독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주 다비아에서 정목사님의 설교에서 항상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초점을 맞춘  강론을   기쁜 마음으로 경청하고 또 프린트해서 다시 정독하고 있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정목사님의 해석을 위 서적에서, 또 작년 년말 ”종이냐, 자녀냐“ 설교에서,

또 이번 주 “주의 날과 십일조”에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교회의 설교단상에서 듣던 “말라기/십일조”에 대한 말씀과 다른 해석을 듣게 되어 마음이 착잡합니다.

제가 지난 주 들은 “종이냐, 자녀냐” 설교에서 은혜받은 후 댓글에서 Dr. Jung님의 글을 보고 울컥하여 사무실 제 방에서 의자를 뒤로 돌려놓고 한참동안 울었습니다. 왜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는  십일조는 부당하다는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가 없었다. 

  바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유다가 쓴 성경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전무 합니다.

- 중세 교회에서도 4세기 무렵 십일조를 채택하고 나서 근 1000년 가까이 지난 13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시켰다.  이렇게 화폐 소득을 중심한 '모든' 소득이 십일조의 대상이 됨으로써 십일조가 변질되고, 그것이 전통적인 십일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 종교개혁 이후 유럽교회에서 십일조 제도가 사라졌다.


또 다른 글에서는 말라기 3장을 다르게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말라기 3장의 말씀은 일반 백성이 아닌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다.

말라기서는 주전 약 430 년경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던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1장 6절을 보세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2장1절에도 "너희 제사장들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2장10절에 가면 "우리는"이란 말이 나옴으로써 유대 백성들을 향한 책망이라고 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8절로 가면 헌물을 도적질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헌물은 이미 백성들이 성전에 바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제사장들을 향한 책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물(תּרמה ㆍ תּרוּמה 테루마 | 기부금, 조세, 제물, 거제)이 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에 바치던 것입니다. 헌물은 원래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헌물을 잘못 냈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백성들이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을 제사장들이 도적질했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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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8, 2009
*.120.170.243

muddy 님,

저의 설교지평집 3권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데 도움을 받으셨다니,

제가 헛수고를 한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고맙습니다.

위에서 인용해 주신 십일조에 대한 해명은

성서신학적 근거가 충실해보입니다.

헌금으로부터 시작해서 주일성수,

우리의 모든 신앙적인 삶의 근본은

자유와 해방에 놓여 있습니다.

율법적인 행위는 오히려 하지 않음만도 못할 때가

아주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향한 길에 큰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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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Dr. Jung

December 10, 2009
*.97.129.143

돌린 등 속에 흐르는 눈물이

나의 아픔이요 우리의 아픔인 것은

 

진실에 대한 자유의 소리 없는 외침의

메아리만 들리는 세상 속 고독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엇이기에

그리도 많은 사람이

복을 구하는 도구가 되었는지?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복을 받고 하나님을 만난다면

얼마나 쉬운 길이 겠습니까?

 

그렇지 않기에 아파하고

진실을 말하고 싶지만

현실은 자유를 항상외면하는

부조리만 가득한 곳이 된 것 같이 보여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깊음은 내버려 두고

한 자 한 자 글자에 메어 신앙하는 그 모습에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금강경에 보면

그 것이 그것이 아니요

오직  이름일 뿐이라 말합니다.

 

십일조도 주일 지키는 것도

시대마다 다른

방편이고 이름 뿐 아니겠습니까?

 

복음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예수의 팔복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새기며

살아가다 보면

눈물이 기쁨이 되는 날들이 올 것이라 기도하고 바래봅니다.

 

빛이 갈 바 없는 길을 간 것처럼

복음의 길도 한 바 없이 한 것

예수의 삶을 닮아가는 제자의 모습,,,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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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상광

December 08, 2009
*.203.204.49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말라기서에 이렇게 현 시대에 적용될 메시지가 담긴 줄은 잘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은 제가 성경 읽기에 게을리한 탓일 것이고, 굳이 남 탓을 해본다면 바로 설교자들이

이렇게 깊은 메시지가 담긴 말라기서를 단지 십일조 강조하는데만 아전인수격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이러한 일들이 참으로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요).

 

말라기서에 그렇게 심중한 메시지가 있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물론 전에도 말라기서에 대강 그런 내용들이 있다는 것을 보기는 했었지만, 이러한 메시지를 올바로

전하는 "말씀 사역"이 우리에게 이처럼 필요한 것이지요.

 

목사님 말씀에 따르니, 십일조를 떼먹는다고 꾸짖던 말라기 선지자의 말의 의미는, 쉽게 말하면 요즘

의 고소득자 무리(예. 변리사, 변호사, 의사, 부동산 임대소득자 등등)가 소득세를 탈루하는 그러한 반

사회적이고 파렴치한 일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겠습니다.

 

 (그런 목사님들이 구약을 들추며 돼지고기 먹지말라는 말은 왜 안할까요.

  혹 돼지고기를 좋아하셔서 일까요. 아니면, 축산업 발전을 위해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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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8, 2009
*.120.170.243

진상관 님,

설교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서 정리해주셨군요.

품군의 삯을 떼어먹는 일이

곧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겠지요.

구약성서의 불신앙이 오늘에도 반복되는 걸 보면

인간 영혼에는 진보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좋은 대림절을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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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사람사랑

December 08, 2009
*.154.19.175

목사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부목사로 교회 현장에 있으면서 십일조는 굉장히 난처한 부분입니다.

담임목사님은 십일조 강조하면서 축복의 통로라고 하는데..

제 생각은 다르기 때문이죠.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가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꼭 십일조를 해야한다고 하지만

결국 십일조를 하는 것은 축복받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보면

더 큰 축복을 받기 위해 일정부분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더 깊이 연구하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바른 신학과 겸손함으로 말씀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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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8, 2009
*.120.170.243

사람사랑 님,

부목사로 애를 쓰시는군요.

담임 목사님과 다른 신학의 세계를 추구하면서

함께 목회 현장에서 일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그러나 영성의 중심을 잃지 말고

앞으로 나가봅시다.

십일조가 중세기의 면죄부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더욱 성서의 진리에 바로 눈을 떠야할 것 같습니다.

결국은 진리가 우리는 자유하게 하니

그렇지 않은 것의 힘에 주눅이 들지는 맙시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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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December 08, 2009
*.61.23.114

목사님을 통해 신학의 세계로 발을 내딛으면서, 주변의 신앙인들과 거의 소통불능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말싸움을 한다거나, 말이 표면상 안 통한다는 건 아니지만, 왠지 느껴지는 그런 것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외롭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 분의 인도하심 안에서 철저히 고독해졌는데요.

이것이 어쩌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주어지는 '소속감과 소외감의 변증법적 긴장관계'겠죠?

연애용어를 차용하면 '하나님의 밀고 당기기'가 되겠고요.

이런 신학적인 방황이 썩 기쁘지는 않지만 이를 통해 나아가고 싶은 꿈이 있다면,

인간의 신앙고백보다는, 인간을 향한 큰 긍정을 품고 계신 하나님의 신앙고백을 진술하는 신학자로,

라이프스토리보다는 러브스토리를 노래하는 설교자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별로 설교말씀과 상관은 없는 댓글이지만, 몸담아왔던 학생부를 서서히 나오는 심정을 토해내고 싶었습니다.

사실 올해 가을 샘터교회를 알면서부터 옮기고는 싶었지만,

그러한 은사주의권 교회의 학생부에 계속 남아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독한 짝사랑 때문이었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리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지만 속이 많이 쓰렸는데, 여운있게 고백하고 작별인사를 하려구요.

왠지 댓글이 넋두리처럼 되어 죄송합니다. 본격적인 샘터교회에서의 생활이 많이 기대되고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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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8, 2009
*.120.170.243

용남 군,

'고독'이라는 표현을 했군.

그거 놓쳐서는 안 되네.

신학자는 고독을 실존으로 한다네.

고독하지 않는 자는,

고독을 두려워하는 자는 신학자가 될 수 없지.

하나님 앞에 직면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단독자로 선다는 것 아니겠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직면한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조차

별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갈 때가 많다네.

우리가 생명에 직면한다는 것도 결국 고독의 길이지.

더 근본적으로 인간은 언제나 고독하지.

대신 숨을 쉬어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이게 확인된다네.

용남 군은 이미 그 깊이가 무엇인지 눈치채고 있을 터이니

겁내지 말고 고독을 친구로 삼아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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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캔디

December 08, 2009
*.129.47.161

용남형제님 에게는 감히 댓글달기도, 이야기 걸기도, 긴장이 되는군요.^^*

나이를 뛰어넘어야 겠지요?...

 

주변의 신앙인들과 거의 소통불능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형제님의 글.

아마도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다비안들의 공통적인 상황일겁니다.

 

아무튼 형제님의 꿈,

한껏 펼칠수 있기를 응원하겠습니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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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sunshinetj

December 08, 2009
*.245.12.224

용남형제님께 쏟아지고 있는 다비아의 모든 분들의 사랑중에 저도 한사랑 끼여들고 싶습니다.

어린 나이에 비해 성숙한 신앙관을 갖고 있는 걸보면 가슴이 든든해 집니다.

근데 용남님께서 하신 주변의 신앙인들과 거의 소통불능 단계로 접어들게 되어 고독이란 단어를 썼는데... 무척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당연히 우리들이 거쳐가야할 당연한 단계들이 아닐지?

아직은 푸르고 푸름이 있는 계절이네요..

주님과의 시간이 귀하지않을 것이 무엇하나 있겠습니까만  젊은 날의 아픔과 갈등과 방황은 장래에 있을 깊고 큰 그릇의 귀한 전주곡입니다.

삶의 경륜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생명인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에 이르기에는  체질과 인격으로 십자가의 삶을 간과할 수가 없기때문입니다. 그 길을 가는 데는 전적인 성령의 도움으로 가지만, 그 믿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님의 성정을 깨우치고 십자가의 고난으로 나의 가슴이 뚫혀져 내 이웃으로 그 은혜의 생명력이 나아가야하는데 그 절대조건이 바로  지금 예수님이 나와 함께 삶의 현장에서 아무것도 보이지않는 길속에 말씀과 기도로 고난과 핍박속에서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의 뼈를 깍는 영적투쟁인데, 도저히 자신도 믿기지못할 일이, 기이한 평안에서 부터 찾아와 기이하게도 그 핍박의 대상들이 연민의 대상으로 바꿔지는 체험을 할 수있다면 제대로 가고있다는 믿음을 가지셔도 될 것입니다.

기본이 튼튼한 젊은 형제님께 어미같은 맘으로 자식에게 드리는 사랑입니다. 

이 믿음의 큰 역군들 속에서 이 미천한 것이 노파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좀 쓰게 들릴 지 모르지만 진정한 주님의 제자라면,

자신을 배척한 바로 그 곳이 바로 예수님이 용남형제를 기다리고 계시는 곳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학으로  말씀의 뼈대를 굳건하게 세우고 주님의 살과 피가 잘 돌고 있어도,

사랑하는 용남형제가 그들속에서 함께 가슴을 나누며 살면서 갈고 깍여 체질하여지지않으면,

결코 가슴이 트여지고 그들을 품어 안을 수있는 십자가 사랑이 돋아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아프면 아플수록 더욱 은혜가 깊어져 십자가의 능력이 쌓여질 것입니다.

바로 그 거룩한 고난으로 인하여  말씀 깊은곳을 뚫어져나가야 살아있는 십자가의 비밀이 형제님의 가슴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이 땅의 언어로 잘 전달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예수님의 가슴을 어떻게 이 땅의 언어로 감히 접근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앞에서 감히 자신만만하게 언성을 높여 말씀을 남용하거나,

십자가의 고난없이 찬양의 기교를 부리는 자는 진실로 미련하고 가증한 자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신자가 세상에서 배척당했던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만 했는지, 지금 어디에 계신는가를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예수와 묶여있기메 죽도룩 이웃을사랑하사 전 인생을 바쳐 사랑을 할 지라도 끊이없이 배쳑과 핍박만이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며, 깜깜한 흑암중에 바랄 길이 예수님을 찾아 목을 놓아 기도할 길일 뿐일 때,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친 자녀에게 예수님께서 어디에 살아역사하고 계신는 지를 가르켜 주시지않겠습니까? 

하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잠시 정도에서 벗어 났을 때, 우리가 먼저 돌아가기를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시고 계시지만.

어둠의 권세와 손을 잡고 온갖 교활한 권모술수로 예수를 몰라서 삶의 노예로 죽어가는 그 곳에 또다시 예수님이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다면, 그곳에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녀가 들어있다면, 하나님이 왜 진실로 예수를 영접한 자녀에게,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는 제자에게 그 길을 보여주시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가 주님앞에 진실로 진실로 진실하지않기 때문에 이렇게도 주님을 아프게 하는 시간이 평생 걸리는 겁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가 자녀를 위하여 기본 체면치레로 하나님께서 민망하게 말씀을 내려놓은 것을 왜 이해할 수없을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쯤 십일조가 우리들의 구원에 비교할 가치라도 있을까요?  아무리해도 인간의 소득으로 영혼이 죽어가는 이웃을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깨닫는다면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십의일조니 십의 구조니하는 것자체가 하나님께서 민망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치의 오차없이 잘 보고 알고 계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앞에 내 이웃앞에 공인으로써 신자라는 단어를 들고 우린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 헌금들이 백성들의 피를 발라먹는 왕같은 목사도 허다하거니와 시퍼렇게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우리들의 역할은 그런 역한 현실속에서 그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잠잠하게 주님만을 믿어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묶여져 하나가 되어가는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일 뿐입니다.

사실 주님과 함께 사는 신자의 삶이  단순하고 정감이 있어야겠고 향수보다는 차라리 노동의 땀냄새가 더 정감있고 좀 싸구려식품을 먹어도 넉넉한 마음으로 이웃과 나누는 정이 더 귀할것이며, 기간이 한참 지난 식품을 먹어도 계절의 태양빛과 비바람을 함께한 과일의 껍질채 먹어서 오히려 건강해지는 지혜를 배우며, 오히려 건강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구나 깨닫으면서 사랑을 덤으로 누리면서 겸손과 청빈과 정감으로 예수님의 빛을 반사시킬 수 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입고 살아도 상관없이 인명재천이지요. 

쉽게 돈과 명예 그 정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그 인간의 본능을  밝히 보여주시고자 빛과 진리로 오셨고 그 해결책이 십자가의 길뿐이겠지요..  세상이 혼탁해 질수록 빛은 더 발하며 더 멀리 나아갑니다. 

그 삶속에서 자신의 내부를 깊이 깊이 세밀히 빠져들여다볼 수있는 은혜 앞에서 우리의 끝없는 참회의 여정은 나아가게 됩니다. 그 속에 이웃사랑과 그에대한 회개가 다 포함되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억지로 인간적인 행위로 인해 매케한 연기만 피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인간의 본능에 앞서,

모든 말을 함구하게 되는 기도하는 삶을 주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나라와 의를 이루는 삶은 바로 자신이 죽는 그 후에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의 삶입니다.

젊은 용남 형제님 신앙이 머리에 머물러 있는 깨달음은 바로  함정의 웅덩이 입니다.  성령님이 알게하신 그 진리의 깨달음이 하나님이 질그릇을 던져 깨어부수면 부숴져야하듯이 우리는 언제든지 이 삶을 운영하시는 자녀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아름답고 거룩한 뜻에 맞혀 삶속에서 녹아있는 예수님의 피와 물로 말씀으로 심플하여 더욱 명확한 진리의 진수를 누리고 세울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내 이웃의 삶과 함께하여 그들의 한숨과 피와 땀을 거두어 품어 살아있는 숨결로 주님께 십자가에서 부르짖는 주님의 기도의 삶을 계속 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의 간 곳이 바로 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의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 묶여진 우리가, 죄의 종노릇을 하는 그들속에 들어가 사랑하였으므로 그 영혼을 구원하기위해 그저 죽어가는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부디 은혜를 ... 

아참! 축하합니다. 대구샘터교회를 출석하게 된 것이 저도 함께 기뻐집니다

특별히 정목사님 아래서 귀하게 자라실 것 생각하니 하나님께서 용남형제분게 대단히 기대를 갖고 계실 것임에 틀림없어요

젊은 형제님의 겸손함이 아름답습니다.

귀하신 정목사님의 말씀으로 깊고 깊은 영성의 수렁으로 들어갑니다.

더불어 이뻐하시는 용남님과 함께 하게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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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제임스리

December 0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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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새로움에 도전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정용섭 목사님의 사역에 발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설교하시는 정목사님이 부럽기도하구요...

조그만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로서 십일조는 여러모로 중요한 헌금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목회에서 깨어 있는 목사님들도 왠만하면 십일조에 대해서 '축복을 받기 위한 필수'정도로는 강조하지 않더라도 그냥(?) 수긍을 하던지, 덜 강조를 하지만요. 사실 재정적으로 완전히 자립하는 교회의 의식있는 목사님들은 십일조를 거의 강조 하지 않죠. 할 필요성도 못느끼시겠죠. 사실 이 십일조 문제는 간단하지만은 않은것 같습니다.

교회의 십일조 헌금이 없어도 실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는(?)분들은  자신있게 십일조 문제에서 논쟁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한국교회 70% 이상이 어려운 교회라고 할 때 이 문제는 그냥 이런 식으로 넘어가기에는 좀 그런것 같네요...혹 누군가가 그런걸 각오하고 목회를 해야 한다고 말하면 할 말은 없겠지만요....그래서 전 나름대로 철학을 정했지요...

저도 주일성수나 십일조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나중에 책을 한번 써보리라 마음은 먹었는데요..

 

* 구약의 십일조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

당연히 동의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자유로 율법을 뛰어넘기 때문이죠. 그래서 삼겹살도 먹구요. 저도 이해가 안가는 목사님들은 삼겹살은 드시면서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죠...구약의 어떤 부분은 지키고 어떤 부분은 안지켜도 되는냐는 문제죠..안지켜도 되면 다 안지켜도 되는 것일 때 우리는 십일조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안식일 문제도 그렇구요. 지금의 주일성수와 구약의 안식일을 동일선상에 놓고 일요일이라는 날짜를 지켜야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상태로 빠지는 거죠..

그래서 저는 정목사님께서 위에서 말씀하신대로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정신을 기억하고 실행해야 한다고 알고, 가르치죠. 그럴때 구약의 성경이 폐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하나님께서 제사가 아니라 순종을 원하시는 것은 구약의 율법 이전에 제사의 정신을 이미 구약에서 언급하고 계신거죠..그걸 놓칠 때 제사는 의미가 없는거죠. 그런데 신약에서는 이러한 제사 자체가 의미가 없고, 이제는 롬 12:1-2에 말한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한 거죠. 위에서 언급한 경제정의 실천 이라든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의 실현 등등..교회에서의 예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죠....

 

* 그럼에도 십일조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면.....

지금 한국교회에서 십일조가 폐지된 교회는 그것 없어도 목회자의 생계나 교회의 운영이 비교적 자유롭거나, 이것이 자유롭지는 않지만 목숨 각오하고(?) 목회하시거나, 까마귀를 통해 먹이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앞서는 의식있는 선각자들은 십일조를 폐지하거나 강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식있는 목회자들의 한국교회라도 십일조를 내도록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십일조를 신앙의 기본 자세와 교회의 재정 역할에 중요한 통로로 가르칩니다.

십일조를 안내면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했거나, 축복을 못받는 다는 개념에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십분의 일 정도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고 보는거죠..전혀 율법과 상관없이 말이죠..그럼 꼭 십분의 일이여야 하는가. 자발적으로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좋습니다. 십분의 이, 십분의 삼, 그 이상을 드릴 수 있죠. 때로는 십분의 일을 못드릴 수도 있죠.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할 문제죠..허나 중요한 건 사람이 아니 성도들이 그렇게 다 성숙하지만은 않다는 것이죠. 대부분 교회를 못 나오는 불신자를 보면 헌금(?) 문제가 걸려있죠.. 아니 성도들도 때로는 인색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쓰다가도 헌금을 위해서는  전혀 아닌분들이 꽤 되죠..(왜 이런 비판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십일조 강조하는 목회자들 비판은 많은데, 헌금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하지 못하는 성도들에 대한 비판은 이곳에서는 별로없는지, 모든 성도들이 알아서 잘 헌금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비판은 공정해야 한다고 보는데...)

 

* 의식있는 성도들의 헌금 자세

이제는 교회도 구약의 율법식으로 헌금이나 십일조를 강조하거나 협박(?) 해서는 안되겠죠...

지금은 신약의 자유시대 이니 책임감있는(교회운영, 목회자생활, 사회구제등등)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소득의 십분의 일(꼭 아니어도 됨니다. 형편에 따라 더하거나 덜 할 수 있죠, 때로는 십분의 십을 다 드릴수도 있겠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과격한 십일조 폐지론이나, 과격한 십일조 옹호론 으로부터 비교적 자유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반론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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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9, 2009
*.120.170.243

제임스 리 목사님,

건강한 신앙의 세계를 익히 아시고

신자들을 바르게 인도하시는 분으로 보입니다.

저도 1986년부터 현풍에서 목회를 할 때는

십일조 헌금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마 목사님과 비슷한 입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굳이 십일조를 강조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그런 헌금 하시는 분을 막지도 않았구요,

그럴 능력이 없는 분들에게는 월정헌금을 드리라고 권면했습니다.

위 설교가 현재 건전하게 십일조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 교회에서

그것을 당장 때려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건 아닙니다.

모든 교회 형식은 구체적인 자리에서 나오는 거니까

이왕 십일조 헌금 제도를 받아들이고 있다면

헌금의 본질에 근거해서 그대로 끌고 나가도 좋습니다.

좋은 대글, 감사드리구요,

섬기시는 교회와 교우들에게 대림절의 기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profile

[레벨:13]눈사람

December 10, 2009
*.136.37.60

제임스리 목사님께 감히 올립니다.

 

"대부분 교회를 못 나오는 불신자를 보면 헌금(?) 문제가 걸려있죠.. 아니 성도들도 때로는 인색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쓰다가도 헌금을 위해서는  전혀 아닌분들이 꽤 되죠.."

목사님의 이 말씀 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안나가면 하나님을 제대로 안 믿는 불신자 라는 뉘앙스가 풍기고,

교회에 안나가는 사람들이 돈이 아까워서 안나가는 것이라는 뉘앙스도 풍기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증거가 헌금이라는 뉘앙스까지 풍기니 말입니다.

무언가 성도들에 대해 잘못 생각하시고 계시지 않나 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목사님께서는 저보다 어떤 면으로든지 더 나으시지만 위치가 목사님이다보니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것은 저보다 부족하시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내용입니다. (솔직히 이 글을 쓰면서 훌륭하신 목사님께 감히 일개 성도가 지적질 하는 것 같아 상당히 죄송스런 마음입니다.)

 

"교회 재정이 충분한 곳은 십일조를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십일조가 필요 없을 수도 있겠지만,

재정이 열악한 교회는 십일조가 필요하다" 라는 말씀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성도들이 알아서 잘 헌금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라는 질문을 하시는 것도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성경 어느 구절에 교회 재정을 위해 십일조가 필요하다고 나와 있는지요(제가 성경을 다 외우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전대하나만 매고서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어디로 가버렸는지요.

십일조 명목이 아닌, 심지어 온갖 명목을 붙인 헌금이 아닌 그냥 헌금을 하게 내버려 두면 될 것을...

온갖 종류의 감사헌금, 주정헌금, 주일헌금, 장학헌금, 심방 헌금 등 무수히 많은 헌금 명목을 만들어 놓은 것은

헌금을 내기 싫어하거나 헌금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 모르는 성도들에게 헌금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헌금은 말 그대로 헌금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알아서 헌금을 잘 하지 못하면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성도 중에는 알아서 잘 하는 사람도 있고, 돈이 아까워서 안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저마다의 이유로 헌금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목회자께서 가지셔야 할 올바른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정목사님의 설교 내용은 십일조를 하지 말라 라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가 이러한 것이니 십일조를 강요하거나 십일조에 부담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잖아요

하고 안하는 자유스럽게 생각하면 된다는.... 

감히 어려운 재정에 힘든 사역을 하시고 계시는 목사님들께

당신이 택한 길이니 고통도 당연히 당신이 짊어져야지 라는 말로 제 글이 들리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 이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헌금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어찌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재물로 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어찌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목사님 교회에 출석하시는 성도님들이

목사님께서 헌금에 대한 어떠한 얘기도 하지 않으셔도 자발적으로 헌금을 팍팍하기를 소망합니다.

 

설령 헌금을 째째하게 하더라도 불신자라거나, 믿음이 적다거나 생각하지 마시고(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지만)

헌금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셨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가져봅니다.

성도가 헌금을 잘내도록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이 목사님께서 하셔야 할 의무나 사명은 아닐테니까요.

.

무례했다면 너그러운 용서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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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제임스리

December 10, 2009
*.36.65.101

눈사람님..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 글은 제가 목회하면서 헌금에 대한 철학을 정리한 것으로서 이 공간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궁금했는데, 정목사님의 코멘트를 보며 내가 틀리게 목회를 하고 있지는 않구나..라는 생각과 각자의 목회적인 '삶의 정황'이 중요하구나. 성서도 역시 그 당시의 삶의 정황 을 파악해야 훌륭한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눈사람님의 생각이 저의 행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것을 보게되네요..그리고 실제 목회의 현장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몇가지 님의 생각에 대한 저의 의견을 나누고자 합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것중 먼저,

"교회에 안나가면 하나님을 제대로 안 믿는 불신자 라는 뉘앙스가 풍기고,

교회에 안나가는 사람들이 돈이 아까워서 안나가는 것이라는 뉘앙스도 풍기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증거가 헌금이라는 뉘앙스까지 풍기니 말입니다.

무언가 성도들에 대해 잘못 생각하시고 계시지 않나 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우려안하셔도 됩니다. 교회에 안나가도 하나님을 믿는 좋은 신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무교회주의자 이지만 신자가 있을수 있고,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든지 하는 분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니까요..(뉘앙스만으로 남의 글을 단정하는 것은 행간을 놓치는 아쉬움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 목회에 있어서 전도를 하거나 초신자들의 경우에 '헌금'문제로 갈등하고 고민하는 분들이 많죠. 전혀 헌금을 강조안했는데요. 지레 교회가면 헌금 해야하는 줄 알고 걱정하는 거죠.(그런데 실제 교회 생활 뿐만 아니라 신앙공동체는 헌금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꼭 교회재정(님이 생각하는 교회재정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신앙공동체를 위해서(예를 들어 공동체식사를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하고,  목회자의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교회의 사회를 향한 구제나 선교를 위해서도 필요...)

또한 실제 초신자나 생활이 어려운 분은 헌금 안하셔도 되고, 할 필요도 못느낍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중직이면서 비교적 풍족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인색한(?) 분들을 말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월500만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시는 분과 월 30만원의 생활비가 전부이신 분의 건축헌금이 2만원 이었다고 한다면 같은 선상에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님께서 헌금은 자윤데 얼마를 하는게 무슨 상관이냐, 자유롭게 해야지 라고 한다면 더이상 할 말이 없겠네요...

그리고 저는 하나님을 믿는 증거가 헌금이라는 뉘암스를 풍기진 않았습니다. 님께서 그렇게 느끼고 해석을 한 것 같네요. 이런건 말도 안되는 내용이죠....

 

두번째로 

"교회 재정이 충분한 곳은 십일조를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십일조가 필요 없을 수도 있겠지만,

재정이 열악한 교회는 십일조가 필요하다" 라는 말씀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구약 개념의 십일조가 아니라 신약 교회 공동체의 헌금의 본질에 충실한 내용(그것이 십일조 일수 있고, 그 이하와 그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이죠..꼭 재정이 열악한 교회에 십일조가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구요. 이것도 잘 해석해야 할 것 같구요...

 

셋째로

"또한 모든 성도들이 알아서 잘 언금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라는 질문을 하시는 것도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성경 어느 구절에 교회 재정을 위해 십일조가 필요하다고 나와 있는지요(제가 성경을 다 외우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전대하나만 매고서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어디로 가버렸는지요.

== 이 부분은 제가 위에서 말한대로 교회 재정이란 것이 공동체의 운영과 사역을 위해서는 중요하고 필요합니다.(잘 사용해야겠죠.) 성경 어느 구절에 있는지...그렇게 극단적으로 묻는 것보다는 생각을 하시면 될 것 같네요..예수님도 제자 공동체와 함게 생활하시면서 물질을 갖고 다니셨죠.  그 물질이 어디에서 났을까요. 가롯 유다가 회계였다죠..또 신약 교회 공동체는 오히려 전 재산을 위해 헌신한 많은 성도들이 있고, 사도 바울 조차 일하면서 복음을 위해 물질을 하나님께 드렸죠. 성경을 읽어보면 대충 알 수 있지요. 그 헌금속에는 십일조도 들어 있다고 보면 무리일까요..또 님께서 말한 '전대하나만 매고서 복음을 전하라' 이것을 지금 시대의 사역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죠. 정목사님께서도 그렇게 못하시죠. 아니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이렇게 못하시죠. 그분들이 잘못된건가요..극단적인 성서의 적용은 (2000년 교회역사의 많은 분파들이 이와 같은 극단적 적용으로 인해 일어났죠. 참 재미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교회사 전공했거든요..) 잘못된 해석을 가져오죠...

 

헌금은 말 그대로 헌금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알아서 헌금을 잘 하지 못하면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성도 중에는 알아서 잘 하는 사람도 있고, 돈이 아까워서 안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저마다의 이유로 헌금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목회자께서 가지셔야 할 올바른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  그냥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목회자의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 공동체를 위해 바르게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는거죠. 성도들이 알아서 헌금을 잘 하지 못하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헌금의 본질과 가치를 가르쳐야죠..그리스도인은 그냥 세상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심플 라이프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할 책임이 있는거죠. 제 아이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그냥 내버려 둘까요. 아니지요. 가르쳐서라도 타인을 위한 삶을 살도록 해야죠. 그것이 부모의 책임이듯 말입니다....

 

 정목사님의 설교 내용은 십일조를 하지 말라 라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가 이러한 것이니 십일조를 강요하거나 십일조에 부담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잖아요 하고 안하는 자유스럽게 생각하면 된다는...

==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설교하시는 정목사님이 부럽다고 글 서두에 말했는데요.. 그리고 님의 윗글에서 느끼시듯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해도 되고 안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헌금의 본질과 가치를 충분히 공감하면서 신앙생활 하라는 말씀이죠...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목사님 교회에 출석하시는 성도님들이

목사님께서 헌금에 대한 어떠한 얘기도 하지 않으셔도 자발적으로 헌금을 팍팍하기를 소망합니다.

== 좋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굉장히 이상적인 말씀처럼 들리네요..자발적으로 헌금을 팍팍...그 날을 기대해 봅니다..

헌데 때로는 어떤 성도는 주보에 헌금 이름이 누락되었다고 상처받고(하나님만 아시면 된다고 해도 막무가네 소용 없고) 항목별로 안 써 줬다고 서운해하고, 어떤 교회는 공예배시 이름 안불러 줬다고 서운해하고....아직 한국교회의 실정이 이렇다면 아니라고 하실 수 있나요...정목사님의 설교비평 책을 보십시요. 아직 한국교회의 갈 길은 먼듯합니다. 목회자만의 책임일까요...아니요, 저는 의식있는 성도들이 더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성도들이 그런 목회자를 만들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어떻게 생각하든 자유...)

 

자, 이쯤에서 정리해보면, 밑의 글 방랑자님께서 쓰신 글이 오늘의 토론의 중요한 행간을 이해한 말씀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순수한 마음으로 헌신하시는 분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헌금을 그렇게 기복적인 측면으로만 몰아가는 목회자분들과 교회에 몸 담고 있으면서도 나눌수 있는 여유가

있음에도 공동체 운영비용을 부담하는 것에는 너무나 인색한 얌체같은 사람들에게 또 무엇보다 마음은 있으되

형편때문에 하지 못하면서 죄책감을 갖고 사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선포되어지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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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맑은그늘

December 10, 2009
*.2.198.171

목사님, 안녕하세요.

성도들을 아끼시며, 옳은 목회를 바라시는 마음이 전해지는군요. 주님의 도우심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한가지 질문 좀 할게요.

맨 아래 대목 '의식 있는 성도들이 더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에 대한 질문이에요.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의식있는 성도들이 그 교회에서 있기가 힘든걸로 알고 있어요.

목사님은 의식있는 성도라면 교회에서 어떤 식으로 하는 걸 말씀하시는건가요?

한가지 덧붙여서요.

목회자의 책임이다  성도의 책임이다를 말해보자면 성도입장에서는 목회자가 책임이 있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그것이 세월이 흘러서 굳어졌고요.

그렇다보니 이제는 목회자 입장에서 성도들이 목회를 어떤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이 만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고요.

개척교회든 기성교회든 의식있는 성도들이 활동을 한다면 어떤식으로 해야하는지 궁금하군요.

목회자 입장에서 그것이(의식있는 성도들의 활동) 용납될지도 궁금하고요.

목사님께서 사역하는 교회라면 충분히 목사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서 바른 신앙생활을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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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제임스리

December 10, 2009
*.36.65.101

그늘님, 반갑습니다. 좋은 질문 감사드리구요..

두가지 질문인것 같네요.

먼저, "의식있는 성도라면 교회에서 어떤 식으로 하는 걸 말씀하시는건가요?" 에 대한 답변..

쉽게 이야기해서 이 사이트가 정목사님의 다비아 이니까요. 정목사님 쓰신 설교비평에 보면 거의 대형교회 목회자의 교인들은 말씀의 깊이에 나가지도 못하고, 초보도 한참 초보에 머물르지요.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런 설교에도 열광을 하고, 헌금을 엄청 하고, 헌신을 해서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보죠. 그런데 정목사님이 쓰신 설교비평을 보거나 의식있는 신학자나 목회자가 그건 아니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듣지를 않죠..그래서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했겠지요...'

자, 그럼 구체적으로 의식있는 성도란 '과감히 아닌 말씀에 아니다라고 그 자리를 뛰쳐나갈 수 있는 성도.../ 그리고 의식있는 조그만 교회에 가서 말씀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깊이 들어가서 그 말씀대로 실천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참된 기독인으로 이 세상에서 영향력있게 사는 것' 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 조그만 교회가 커지고(제 생각으로는 한 300명정도 까지, 그 이상으로 가면 신광은 목사님께서 쓰신 '메가처치 논박' 이란 글을 보면 거의 비정상적이고 비성경적인 교회인듯 해서 분립 개척이 좋을듯 합니다.) 작금의 대형교회들의 성도들이 물밀듯 빠져나간다면 그런 교회 목회자들 정신이 버쩍들고 그렇게 설교하거나 목회하지 않겠죠..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저는 대부분의(? : 제 생각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의식이 없거나, 있어도 자신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라 생각이 듭니다. 대형교회의 편리함과 축복을 외면할 만큼의 성도가 몇이나 될까요. 이곳 다비아에 들어오시는 분들도 한국교회 전체로 볼 때는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작은교회 성도들이 다 의식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작은교회 목회를 지금 하고 있는데, 여긴 여기대로 대형교회에서 누리지 못하는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분도 있는것 같구요, 교회 가까워서 그냥 다니는 분, 목사님이 알아주기 원해서 다니는 분, 꺼떡하면 교회 옮기겠다고 협박하는분(?,), 상상을 초월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가 쉬운것이 아니죠...복잡합니다....

아무튼, 정목사님 말씀대로 창조적 소수가 모여 이 땅과 교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면 더 바랄것이 무엣이겠습니까...

 

둘째로,  "개척교회든 기성교회든 의식있는 성도들이 활동을 한다면 어떤식으로 해야하는지 궁금하군요.

목회자 입장에서 그것이(의식있는 성도들의 활동) 용납될지도 궁금하고요.

목사님께서 사역하는 교회라면 충분히 목사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서 바른 신앙생활을 할 것 같습니다." 에 대한 답변

 

목회자라고 해서 완변하거나 온전하지 않습니다. 저도 교회사 박사과정 수료했지만, 아직 모르는 것 천지입니다. 다비아의 정목사님의 글을 읽다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모른다'가 나오더군요..어찌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다 알겠습니까. 교회사 2천년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는데요. 그러나 지금은 희미해도 그날이 오면 환희 알게 될것을 믿죠(바울의 말씀)..

이렇게 목회자와 성도가 성서의 바른 가르침을 함께 묵상하고 좋은 공동체(이것이 얼마나 가능할지는 교회역사를 보면 자신이 없네요...)를 이루기 위해 서로 대화하고 비판하고 수긍하고, 긍정하고 보완해준다면 용납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제가 보고 경험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러한 의식을 갖기보다는 교회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죠...저희 교회 성도들이라면 바른 신앙생활할것 같다고 하셨는데요, 바른 신앙생활 좋아하는 성도들 별로 많지 않습니다. 왜요, 힘들고 고난의 길이고, 어려운 길이고, 좁은 길이기 때문이죠.

쉽게 설명해서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 하지 않고 '옥살이 하거나 죽음을 택한 목회자나 성도들 많지 않는것과 같이...'

통합교단이 자랑하는, 아니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한경직목사님 조차도 신사참배의 부끄러움을 숨기시고 목회하시다 템플턴상 수상하실 때가 되어야 회개하셨죠..(뭐 어떤 사람은 그때라도 했으니 성자라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바로 하셨어야죠. 그 사실을 숨긴채 목회를 하신 것은 그분의 오점이죠. 어떤 신학자는 아예 그분의 신사참배를 부정하더군요. 요즘 한경직목사님 평전도 신사참배 없는 내용이 많은데...그건 아니죠. 바르게 비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스승님인데 어떻게..........바른 신앙생활..이렇게 어렵답니다.)

저 역시 이 길을 가지만 때때로 타협하는 제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부족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를 구할 뿐이죠....

 

* 정말 성도들이 깨어있어야 할 것은 한국교회의 모범교회(누가 그랬는지 정말...)라고 하는 사랑의교회 성도들 조차 2500억원의 예배당 건축에 희망을 걸고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데 말이죠. 분립해야죠. 성도가 많아지면....그런데 그렇게 가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한국교회에서는 수준있는 평신도들이 모였다는 사랑의 교회가 말이죠..제 말뜻을 좀

 이해하시겠습니까...(이건 아니다 해서 사랑의교회가 텅 비면 건축못하죠..이게 의식있는 성도 아닌가요..조금 심했나요..)

 

아무튼 오늘 시간이 좀 많이 나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이야기하니 너무 좋네요...님께 주님의 복이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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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콩뜰이

December 09, 2009
*.151.198.27

십일조는 나의 모든것을 드리라는 말씀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일 것 같네요. 

주님께서 그저 주신 이생명, 그저 주신 영원한 삶의 십분의 일을 떼어내서 바치라는 것도 아닌데,

무얼 그렇게 째째하게 그러십니까? 

저는 십일조가 본받고 싶은  성도들의 좋은 믿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온전한 십일조 잘 못하고 있구요.

온전한 십일조라도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꼭 이루어 주십사고 기도드리는 중입니다.

사실 큰 교회를 참석하면, 십일조 생활에 대해서 무디어 지지만, 작은 개척교회를 생각해 보세요. 거기다가 가족이

여럿 딸린 가난한 교회 목사님들...  (십일조 해서 귀한 사역 돕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까지 흔들지 마시어요~~~)

지는요~~  십일조를 하나님께 기꺼이 드리기도 하고, (내가 십일조를 해서가 아니라,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물질때문에

죄 짓는 일 없을 정도의 축복도 받고 싶네요.  항상 물질때문에 힘들거든요.  

그리고, 여전히 십일조 잘 못하고 있던 시절,  십일조를 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설교 말씀을

들었는데, 그때는 그 목사님의 설교 내용이라고만 생각했었지, 성경에 그말씀이 있다고 알지도 못하던 무지한 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은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구나. 회개의 심정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내 재능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내가 일할 수 있도록 직장을 허락하셨음을

믿는데, 왜 도둑질이 아니겠느냐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씀이 성경말씀에 있는 줄도 모르고요.

근데, 나중에 보니 말라기에 그말씀이 있더라구요.  그 목사님 개인의 생각이라도 수긍이 되는데, 성경말씀에

있는 말씀을 왜 부정하십니까?  신약 성경에는 십일조가 아니라, "너의 모든것을 나누라"는 말씀이 더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십일조라도 해서 나누면 안됩니까요?    내 가진것 다 나눌 믿음의 분량이 안되면요.

그렇게라도 하게 태클 걸지 마세요. 

십일조 하시는 성도님들, 나 십일조 했으니 복 만땅 주세요! 하는 분 몇사람 될걸요.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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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9, 2009
*.120.170.243

콩뜰이 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위 제 설교가 진실한 마음으로 십일조 헌금을 드리는 분들에게

상처가 된 것 같군요.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에 십일조 헌금이 얼마나 요긴한지는

저도 잘 압니다.

제 설교는 제가 섬기는 샘터교회 교우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니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쪼록 교회를 향한 그 따뜻한 마음이

앞으로 더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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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December 09, 2009
*.183.92.105

모두들 너무 진지하시고 해서 저처럼 두어줄 댓글다는 사람은 감히 범접을 못하겠습네다..ㅋ

왠지 시시한 댓글도 하나쯤이 있어야할거 같아서 쓰윽지나갑니다..

옛날에 얼마안되는 조교월급으로도 십일조했던 기억이나네요..
뭐 그때도 그냥저냥 살아지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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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1, 2009
*.120.170.243

조교 월급으로 십일조를 했다니

병훈 선생도 옛날에는

신앙이 특심하셨소이다.

남은 독일 생활 잘 하고,

대구에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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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December 11, 2009
*.183.92.105

그렇게 되어 보려고 노력했었지요.. 그래도 안되더라구요..ㅎㅎ

그렇게 고민하다 목사님을 만나 이제 다른 쪽으로 깊어지려고 노력하려구요..

역시 잘 안네요..ㅎㅎ


실험은 약간 산으로 가는 느낌이 있지만 몸 조심히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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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프시케

December 10, 2009
*.151.204.18

십일조와 무관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가끔 극동방송 듣다보면 방송선교를 위해 극동방송에 전파선교사로 가입하고 기부금을 냈더니

그 다음달 월급이 300배로 뛰었다. 생활고가 바로 해결됐다... 그러니 여러분도 전파선교사로 빨리 가입하시라.

이런 노골적인 간증들이 전파를 통해 자주 흘러나옵니다.

순간적으로 '정말?  그럼 나도?' 이런 마음이 들지요.

그분들의 간증은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간증을 이용하는 극동방송의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떨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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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1, 2009
*.120.170.243

ㅎㅎㅎ

월급 300배라는 주장도 있어요?

그런 정도면 사기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사람은 모르면서도 사기를 치고,

알면서도 사기를 칠 수 있구요.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사기행각은 가능하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복음서를 찬찬히 잃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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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December 10, 2009
*.109.153.14

십일조도 참 풀리지 않았던 난제중 하나였습니다. 여태껏 십일조를 포함해서 모든 헌금을 축복의 통로로

강조하시는 걸 들으면서 참 순진하게도 근데 월급쟁인 뭘로 축복받지? 사업하는 사람들이야 사업이

번창하는 걸 축복이라 할테지만 나같은 월급쟁인 어떤방식의 축복을 받을까? 혹시...로또인가?ㅎㅎ^^

결론이 나지 않자 '아! 요즘같은 불황기, 고실업율에 회사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가족이 별탈없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축복인가 보다' 하다가 또 근데 헌금 안하는 사람들도 그 정돈 사는데 아니 오히려 주변 동료중

18평 전세사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물론 그보다 더어려운 사람도 많지만) 아이들 커가면서 나는 점점 더

쪼들리기만 하니.....그러다 문득 저희목사님 말씀이 떠올라요 헌금을 믿음으로 기쁨으로 드리지 못하고

자꾸 의심하는 마음으로 드리니까 축복을 못받는거라고 하시는 말씀이요. 그래서 받는 복이라도 안뺏길려면

좀 안믿어져도 그냥 드리자 했습니다.

근데 다비아에서 그에 관한 여러 글들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헌금은 교회공동체 운영을 위해 필요한 비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요 그것을 많이 한다고 축복하시고 또는 적게한다거나 안 한다고 복을 주시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 절대 아님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더불어 이번 말씀을 통해 십일조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내 삶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일까? 매순간 신앙 양심에 따라 내가 선택해야

할 경제정의는 무엇일까? 하는 것을요 아마도 마음을 열고 보면 작은 것부터 실천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댓글을 보면서 느끼는 건 외람되지만 오늘 말씀은 순수한 마음으로 헌신하시는 분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헌금을 그렇게 기복적인 측면으로만 몰아가는 목회자분들과 교회에 몸 담고 있으면서도 나눌수 있는 여유가

있음에도 공동체 운영비용을 부담하는 것에는 너무나 인색한 얌체같은 사람들에게 또 무엇보다 마음은 있으되

형편때문에 하지 못하면서 죄책감을 갖고 사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선포되어지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실제 그런 많은 분들에게 이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지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아 참! 목사님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근데 순진한 저희 집사람이 자꾸 걱정하네요 무슨 이상한 출력물을

갖고 와서 보더니 이젠 뭔 책까지 사오냐고 혹시 이단아니냐고 그러면서 자기는 절대 안본데요 저 단순하신

마눌님을 어떻게 꼬셔야 할지^^.....무슨 비결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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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상광

December 10, 2009
*.203.204.169

서두에 언급하신 "풀리지 않는 여러 난제들".

그렇습니다. 그런 난제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질적인 상승을 순간순간 가로막기도 하고, 심지어는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거나 때로는 실의하여 아예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제가 (경험상) 한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현세적인 모든 것들(교회생활 포함)이 우리를 혼미케 할때 우리는 복음서(마태~요한복음)들을 통해서

주님을 직접적으로 만나고 그분과 접촉함으로써, 그렇게 함으로써 (전하는 사람으로 인한 와전됨이 없는)

진정한 주님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저는 최근 얼마동안을 복음서만을 계속해서 읽었습니다. 진정한 주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전체를 깊이 이해하면 최상이겠지만, 우리 각자에게는 언제나 현실적

어려움이 따릅니다. 성서 전권을 속독으로 읽어내려가서 그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그분은 머리가 특수하거나 혹은 특별히 주님이 쓰실 분이거나 그 둘중 하나겠지요.

워치만 니의 견해에 의하면, 기왕 성경의 모든 장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라 하므로

이러한 방식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성경에서 복음서는 분명한 중심인 것이지요.

 

복음서가 그냥 읽으면 쉬운 하나의 "이야기"처럼 간단하게 생각되지만, 그 안에서 주님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고자하는 심정으로 읽으니, 실은 복음서는 엄청나게 어려운 말씀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더군요. 겨우 이제야 뭔가 우리 주님의 세미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저는 요즘도 계속 (한영성경으로) 읽어가고 있습니다.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실지 몰라서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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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December 10, 2009
*.109.153.9

도움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아직은 더디지만 다비아를 통해 저의 영성이 점점 깊어지면 저도 복음서를 통해 진정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리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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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1, 2009
*.120.170.243

방랑자 님,

부인 되는 분과 신앙의 문제로 다투지는 마세요. ㅎㅎ

한번 굳어진 종교적 확신은 바뀌기가 힘들답니다.

아주 천천히 대화를 통해서

생각의 여지를 열어가는 게 필요합니다.

등산을 할 때 한걸음씩 올라가야 하듯이요.

주님의 평화가 두분 위에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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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December 11, 2009
*.136.37.60

제가 너무 우둔해서인지

제임스리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자꾸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머리를 스칩니다.

현재의 목사님의 모습은 정말 본받을 만한 모습이고, 설교를 들어보진 않았지만 세상적인 설교가 아니라

말씀 중심의 설교이리라 여겨집니다.

 

저에게 뉘앙스만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그러면서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목사님께서 쓰신 글을 다시 읽어보시면

그러한 느낌을 많은 사람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글에 대한 댓글에서

자녀의 예를 들어서 말씀하셨는데요. 

당연히 자녀에게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법, 돈을 잘 쓰는 법등을 잘 가르쳐야지요.

하지만 그 자녀에게 " 내가 너를 이만큼 키웠고 돌보아주고 있으니

우리 집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네가 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나에게 항상 내고, 때때로 여러 명목의 돈을 내라" 라고

가르치지는 않잖아요.

제가 위에 드렸던 말씀은 헌금에 국한되어있는 얘기이지 성도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시라는 말이 아니잖아요.

 

지금 목사님의 모습은 저희가 안타까워하고 있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예전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헌금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과 성도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이 현실에 입각한 정확한 지적임에도 불구하고

헌금에 대한 목사님의 말씀에서 현재의 생활에서 넘어설 수 없는 한계와 결국 교회도 돈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가라는 생각까지 들고(이것도 저의 확대해석이요 목사님의 말씀에 대한 잘못된 느낌이라고 하시면 저도 반성하겠습니다.)

성도를 바라보는 목사님의 관점이 저로서는 왠지 슬프고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성도보다 훨씬 위에 군림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이 떠오르니 제가 아무래도 미쳤나봅니다.

목사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제가 상당히 강력한 언어를 사용하여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목사님의 생각을 한 번 물러서서 보셨으면 하는 생각으로 제 생각보다 더 강하게 말씀 드렸음을 용서해주세요.

 

헌금에 대한 말씀을 전혀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 전해도 교회가 유지되어지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아시겠지만요.

만약 헌금이, 재물이 없으면 교회가 유지될 수 없다면 그 자체가 이미 맘모니즘이 지배하는 교회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한 지금까지 정목사님께서 헌금을 해야 한다고 한번도 강조한 적이 없으시지만

샘터교회는 여전히 잘 유지되고 있고 다비아는 점점 더 자라고 있습니다.

 

전 목사님께 이론적으로나 대화로나 글로나 감히 상대가 되지 않는 풋내기입니다.

그런 풋내기가 푸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곰히 생각해주십시오. 그리고 기도해보십시오.

목사님께 기도해보시라고 말씀드리니 이 또한 저의 교만이요 도가 넘는 말씀을 올린 것 같아 송구합니다.

(인사치레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제 진심임을 알아주십시오. 요즘 세상이 하도 믿기가 힘든 세상이라 덧붙입니다.^^)

저도 목사님의 말씀 곰곰히 생각하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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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December 11, 2009
*.99.193.27

제가 정목사님을 알게된 경위가 목사님께서 쓰신 십일조에 대한 글을 읽고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오늘 또 십일조에 대한 놀라우신 말씀을 듣게됐습니다.

또하나 정치적인 이야기거리가 아니라고 미리 말씀하셨지만, 결국 저와 동일한 (사회현상에 대한)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해서 오늘 말씀이 더 반갑고 그렇습니다. -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치단체에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좀 더 많이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 강자에 대한 견제가 곧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겠는지요...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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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1, 2009
*.120.170.243

상수리 님,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스텐스를 유지하고 살기는 좀 힘들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진보적 역사관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답니다.

성서가 말하는 세계는 정지된 공간이 아니라 움직이는 시간이니까요.

저는 이런 꿈을 꿉니다.

남한의 전체 교회가

일년 예산의 십분의 일을

남북화해를 위한 기금으로 기부하는 날이 오기를요.

금년 한 해도 세 주일만 남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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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December 11, 2009
*.99.193.27

아~!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금년 한 해 남은 날..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길..

늘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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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참믿음

December 11, 2009
*.225.30.34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십일조를 하고 안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봄니다.

주님께서 죽으시면서 찢어 놓으신 성전휘장을 다시 바늘로 꿔메는일에 앞장선다면 저는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달리게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십일조가 신앙의 강박에 묶여 자유함을 얻지 못하게 하고 ,   십일조가 반대로

주술적  신앙으로 또 우상숭배로 변질되게 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것은 엄청나게 심각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저는 무지하지만 목회하시는분들 깊이 생각해 보셔야할거라 생각합니다. 알면서 가만히 계신다면

그심판은 피해가기 어려울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는 헌금에대한 잘못된 습성이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했습니다.  교회가 먼저 주님의 말씀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에 나와있는 십일조에 대해서도 한번 따져 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약에 나오는 십일조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을 볼때도 그의미를 잘모르고 또 잘못 전하는

목사님들 말씀을 볼때 의아해보임니다.

 이로인하여 실족당하는 많은 성도들 어케 할런지요?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는데

그것을 믿는 우리들은 왜이렇게 혼란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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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1, 2009
*.120.170.243

참믿음 님,

신앙의 이상과 삶의 현실 사이에

적지 않은 틈이 자리하고 있지요.

그 틈이 우리를 절망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거꾸로 서로 용서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 현실에 안주해서도 안 되겠지요.

신앙적인 이상을 치열하게 추구하되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요.

참믿음 님의 높은 뜻이 꾸준히 승화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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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December 11, 2009
*.136.37.60

설교말씀에 뭐라고 토라도 달라치면

감히 대언자께서 하신 말씀에 불경스럽게 그런다고 못된 놈으로 몰리는 현실에서

이렇게 설교말씀으로 토론하고 답해주시고 자기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는 곳이

과연 몇군데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글을 남깁니다.

저의 미련함이, 그리고 무례함이 다른 분들께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이런 자유함을 누리게 해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공간과 소재를 제공해주시는 정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대한민국 교회에서 걷혀지는 헌금이 성전을 키우는 곳에 쓰이기 보다 남북 화해와 구제에 쓰여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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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1, 2009
*.120.170.243

눈사람 님,

다비아에서 영적 자유를 경험하신다니,

다행입니다.

눈사람 님과 같은 분들이 많아니지를 바랍니다.

주님이 홀로 이 세상을 통치하는 분이시니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놓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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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안희철

December 11, 2009
*.142.13.23

그야말로

한국 교회 "재건"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은 곳에서의 재건이 아닌,

멀쩡해보이는 담벼락을 모두 허물어야 하는,

사회적 비용뿐 아니라

정신적 비용이 산떠미처럼 들어가는 재건입니다.

5백여년전 종교개혁자들이

이미 십일조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창했건만

우린 프로테스탄트가 아닌 양

다시금 허물을 주워 담았습니다.

희망은 참으로 오는 것입니까?

참으로 주님이 오셨던 것입니까?

두렵습니다.

거대한 교회 옆, 그래서 해가 들지 않는 곳,

그러나 더 서늘한 곳,

더 깊숙하고 깊숙한 지하방에서

부디, 샘이 터져 나오기를.

앞 길을 예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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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1, 2009
*.120.170.243

안희철 목사,

위 대글이

마치 예레미야나 호세아 같은 예언자들의 외침이나 

니체의 고발문처럼 들리는구료.

길게 인용해도 이해를 바라겠소.

 

너희는 저 미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가? 그는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시장으로 달려가서 끊임없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그때 그곳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는 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돌았나 하고 한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은 애들처럼 길을 잃었나 하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는 어디 숨으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우리를 무서워하는가? 고향을 등지고 배를 탔었나? 사고무친한가? 이렇게 말하면서 제각기 소리치고 웃고 떠들었다. 그 미친 사람은 그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을 뚫어지게 보면 소리쳤다. 하나님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나와 너희들, 우리가 모두 그를 죽인 거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도살한 자들이야.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런 짓을 했을까? 우리는 어떻게 바다를 마셔버리는 것 같은 그런 짓을 했을까? 누가 우리에게 모든 수평선을 지워버릴 수 있는 해면(海綿)을 주었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이 지구를 태양의 궤도에서 탈선시킬 수 있었을까? 지금 지구는 어디를 향해 달리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달리는가? 태양의 궤도를 벗어나서 우리는 계속 추락 상태에 있지는 않는가? 앞으로, 뒤로, 옆으로 엎치락뒤치락하지 않는가? 아직도 위와 아래가 있는가? 영원한 무(無)를 통해 우리는 방황하는 것이 아닌가? 빈 공간이 우리를 호통 치지 않는가? 점점 몰인정해만 가지 않는가? 계속되는 것은 밤뿐이고 어두움은 더 깊어만 가지 않는가? 대낮에 초롱불을 켜야 하게 되진 않았나? 하나님을 장례 지내는 요란한 소리밖에 아직 들려오는 것이 없지 않는가? 냄새는 하나님의 썩는 냄새밖에 아직 없지 않은가? 신들도 썩는다!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영원히 죽었다! 우리가 그를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를 위로할 수 있을까? 세상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 중 가장 거룩하고 가장 세력적인 것을 우리가 칼로 쓰러뜨린 것이다. 누가 이 피를 우리에게서 씻을 것인가? 우리를 깨끗이 씻을 물은 어떤 것인가? 이를 위해 어떤 속죄제물, 어떤 성스러운 종교의식을 창안해 내야 할 것인가? 이 범행은 우리 힘을 넘지 않는가? 이 범행을 보상하려면 우리 스스로 신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보다 더 큰 범행은 없었다. 이 범행 때문에 우리의 후예는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보다 더 큰 역사 계열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 미친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구경꾼들을 둘러보았다. 그들도 말없이 기이한 듯이 그를 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의 초롱을 땅에 던졌다. 초롱은 산산조각이 났고 불은 꺼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내 때가 아직 아니다. 이 무서운 사건은 아직 도상에 있다. 진행 중에 있다. 아직 사람들의 귀에까지는 오지 않은 것이다. 천둥과 번개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필요하다. 범행도 시간이 필요하다. 저지른 후 보이고 들리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범행은 그들의 귀와 눈에서 아직 까마득하게 멀다. 아주 멀리 있는 별보다 멀다. 그러나 그들도 똑같은 일을 범했다!” 그 후에 소문이 떠돌았다. 그 미친 사람은 같은 날 여러 교회에 들어가서 죽은 하나님을 위해 진혼곡을 불렀다고. 그리고 그를 끌어내어 말을 시켰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되풀이해 물었다고. “교회가 하나님의 묘표와 묘혈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 125)

 

정신을 차리고 길을 가봅시다.

좋은 대림절, 성탄, 연말을 보내시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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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상광

December 12, 2009
*.203.204.84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땅위에 (육의 존재인)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셨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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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sunshinetj

December 12, 2009
*.122.85.169

울었습니다.
나는 왜 저 미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이들과 하나되지 못하고
무엇이 어찌되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이 비굴한 생명을 안고
안에서 다시 사신 그 분안으로
왜 자꾸만 품겨져 살아가는가
살아가야 할 것인가...죽어가야 할 것인가...
주님의 심장이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부끄런 풋내기 가슴으로 흐느낍니다...
주님! 우리 모두 주님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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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상광

December 12, 2009
*.203.204.135

그렇습니다.

주님없이는 인간은 여타의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움직이는 고깃덩이에 불과합니다.

특히나 문명 이후, 즉 성서상 개념으로 인간이 도시를 이루며 살기 시작한 소돔, 고모라성

번성기 때부터 자만의 모습이 극에 달하기 시작한 그때 이후의 인간들의 자화자천은, 마치

지 애비 모르는 패륜자식 바로 그런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우리가 그간 교실에서 배워온 이성주의론이나 과학지상론 같은 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영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갔는지 모릅니다.(적그리스도적인 요소가 아닐런지요)

그런데 현대 교계가 그에 관해 경고의 "고함"을 지르지 않는 것 또한 이상한 일입니다.

기독교적 지성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있는 우리, 그것으로 벌서 축복받은 상태가 아닐런지요.

profile

[레벨:4]sunshinetj

December 12, 2009
*.245.12.224

젊은날

생가슴으로 니체의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닌 적이 이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야 심중에 닿는 그의 숨겨진 뜻...

신을 따르는 인간들의 패륜함의 비추는 한 철학자의 학문이 세기를 거쳐 지금까지도

인간들의 가슴을 반전하는 힘을 가졌군요

진실로사랑을 헌신하는 자만이 그 반전이 주는사랑을 받을 수있겠지요

우리 인생들속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반전이시겠죠 

그러기에 우린 어둔 가시덤불속에서 한치 학문이나 이념이 없어도

가슴으로 통하는 영혼을 갈망하는 길을 찾아 품어 함께 걸어갈 수있겠지요...

 

오늘도 성육신의 하루가 연장되어 갑니다.
그 놀랍고 귀한 은혜에 이 가슴이 다 녹아 내릴 때
예수그리스도의 반전! 그 거룩한 하나님의 역전이 이 가슴을 향해옴을 기다리며
오늘도 성육신의 하루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연장되어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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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진상광

December 12, 2009
*.215.255.197

"주님 곧 오십니다!" 라는 초대교회 신앙 선대들의 귀엣말이,

오늘, 지금도 잠들지 않은 우리 귓전에 또렷하게 속삭여 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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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December 12, 2009
*.183.92.105

멀쩡해 보이는 담벼락을 허물어야한다는 말에서 절절함이 느껴지네요..


더더욱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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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December 12, 2009
*.151.252.103

니체의 고발문은 너무나 정확하군요..

 

한국교회에서 이 니체의 고발문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얼마나 있을까요!!..

 

주여, 이 시대와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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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히로

December 14, 2009
*.252.23.203

하나님의 정의를 어떻게 실현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합니다.

종부세폐지, 미디어법개정,  무자비한 개발 정책등으로 나라가 혼란한 지금,

저는 경제서적과 정치서적들을 읽으며 어떻게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을까 고심했는데,

성경자체에 이미 많은 해결방안들이 주어져있다는 것을 이번 설교를 통해 배웠습니다.

지금은 신학에 더 충실해야할 때인데, 조금은 곁길로 나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인문학적 공부는 병행 되어야 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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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4, 2009
*.120.170.243

ㅎㅎ 히로 님,

성경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인문학 문서랍니다.

그 성경에 대한 지난 2천년 동안의 해석인 신학이야말로

인간 삶과 역사가 빼곡히 쌓인 곳간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접어놓고,

그분의 비유만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과 사회의 실체가 보이고

나갈 방향이 보일 겁니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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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December 15, 2009
*.183.92.105

역시 십일조 관련글은 나올때 마다 많은 이들의 관심이 대상이 되는 듯합니다..

이 설교도 조회수에선 평소보다 약간 많은 수준이지만 댓글 수는 최고로 많네요..

다른 설교는 그냥 지나가다가도 십일조 설교엔 찬이든 반이든 한마디씩 달고 싶은게 우리네 마음인가 봅니다..

이도 역시 우리가 자본주의를 살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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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이삭과리브가

December 15, 2009
*.177.78.105

목사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보면서 그간 교회에 대하여 제가 느낀 비통함을 몇자 올려봅니다

마21장 12절에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안에서 매매하는 모든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진리)을 듣는곳이라 가난한자 병든자 소외당한자를 위로하고 사랑하고 치료하는곳이라

교회를 바라보는 모든사람에게 이런 느낌으로 다가오는 곳이 되어야 주님이 기뻐하실텐데 ..............

위 말씀으로  보아 하나님으로 장사하는곳이 되었고  오늘날 현대 교회는 복을 파는교회 바로 더 진실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파는교회로 전락하고 있음을 여러군데서 보는것 같습니다

 

그중에 말라기서는 가장 큰돈이 되는 상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의든 무식이든 진심이든 이 구절은 오늘날 모든 교회에 팽배해 있고 교회의 쓰임새가 워낙 크다보니 상품되는 교인에게 관심이 크지고 예우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다 보니 교회는 강도의 굴혈로 전략해가는 현실을 깨달을 능력마져 상실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시대에 새로운 말라기 선지가 필요하고 성전을 정화시키는 강한 외침이 필요한 시대인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목사님의 설교는 보고 듣는이로 하여금 깨달음을 더하고 교회를 정화시켜갈 새로운 지도자를 키우는 중요한 시작이 되리라 믿습니다 앞으로 이런 진실된 말씀을 중심으로 교회를 섬겨가는 종이 되기를 힘써보겠습니다

목사님 주안에서 평안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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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롬 15:4-13) [10] 2013-12-08 13967
514 대림절 여호와의 빛 (사 2:1-5) [13] 2013-12-01 15272
513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눅 23:33-43) [4] 2013-11-24 10353
512 창조절 하나님의 평화, 평화의 하나님 (빌 4:4-9) [15] 2013-11-18 10965
511 창조절 삶과 죽음의 경계 (눅 20:27-38 [8] 2013-11-10 11180
510 창조절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1-4, 2:1-4) [10] 2013-11-04 14669
509 창조절 하나님 앞에서 '옳음'의 문제 (눅 18:9-14) [8] 2013-10-27 13887
508 창조절 약속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 (렘 31:27-34) [10] 2013-10-21 14478
507 창조절 이방인 나병환자의 믿음 (눅 17:11-19) [10] 2013-10-13 24760
506 창조절 거룩한 부르심 앞에서 (딤후 1:1-14) [12] 2013-10-07 15443
505 창조절 불행한 부자 이야기 (눅 16:19-31) [10] 2013-09-29 21062
504 창조절 예레미야의 눈물 (렘 8:18-9:1) [8] 2013-09-22 13504
503 창조절 죄의 심연 (딤전 1:12-17) [6] 2013-09-15 11153
502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8973
501 창조절 헛되고 무익한 것 (렘 2:4-13) [16] 2013-09-01 13528
500 성령강림절 신앙과 위선 (눅 13:10-17) [6] 2013-08-25 14773
4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절망 (사 5:1-7) [1] 2013-08-18 11035
498 성령강림절 인자가 오리라! (눅 12:35-40) [5] 2013-08-12 13115
49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골 3:1-11) [10] 2013-08-04 10636
496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8931
495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2] 2013-07-21 12299
494 성령강림절 이웃에 대한 질문 (눅 10:25-37) [19] 2013-07-14 17929
493 성령강림절 나아만과 게하시 (왕하 5:1-14) [6] 2013-07-08 20262
492 성령강림절 제자의 삶과 하나님 나라 (눅 9:57-62) [6] 2013-06-30 16360
491 성령강림절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눅 8:26-39) [15] 2013-06-24 13591
490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17] 2013-06-16 13257
489 성령강림절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왕상 17:8-24) [7] 2013-06-09 16202
488 성령강림절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9] 2013-06-02 14017
487 성령강림절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롬 5:1-5) [8] 2013-05-26 14238
486 성령강림절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요 14:8-17) [4] 2013-05-20 15778
485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2013-05-12 12553
484 부활절 환상을 보는 사람들 (행 16:6-15) [12] 2013-05-06 15088
483 부활절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6) [10] 2013-04-28 16780
482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요 10:22-30) [8] 2013-04-22 13181
481 부활절 나를 따르라 (요 21:15-19) [10] 2013-04-14 20827
480 부활절 죽임과 살림 (행 5:27-32) [14] 2013-04-07 11339
479 부활절 생명과 죽음 (눅 24:1-12) [8] [1] 2013-03-31 16213
478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8819
477 사순절 의식하지 못한 은총 (요 12:1-8) [10] [2] 2013-03-18 15499
476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2] [1] 2013-03-10 17944
475 사순절 여호와를 찾으라, 부르라! (사 55:1-9) [17] [3] 2013-03-03 26288
474 사순절 예수와 헤롯 (눅 13:31-35) [8] [1] 2013-02-24 15555
473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559
472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눅 9:37-43) [8] [2] 2013-02-10 12911
471 주현절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12] 2013-02-03 17010
470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8941
469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2013-01-21 23801
468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2013-01-13 21732
467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2013-01-07 17957
466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2012-12-30 22305
465 대림절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4] [2] 2012-12-24 17031
464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2012-12-17 18104
463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2012-12-09 21477
462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2012-12-02 17506
461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2011-11-21 18300
460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2011-11-13 23263
459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2011-11-06 20102
458 창조절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11] 2011-10-30 16905
457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2011-10-23 23094
456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2011-10-17 20147
455 창조절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 4:1-9) [6] 2011-10-09 16828
454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2011-10-02 14713
453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2732
452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2762
451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640
450 창조절 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12] 2011-09-05 13353
449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2011-08-29 1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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