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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572 추천 수 18 2008.11.09 16:03:01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dawp_081109.mp3 
성경본문 : 마태복음 25:14-30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2008.11.9.(마태 25:14-30)

마태복음 25:14-30절에 나오는 소위 ‘달란트의 비유’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돈을 맡겼습니다. 그 돈이 상당한 액수입니다. 그 당시 금은의 중량인 한 달란트는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7억 원이라고 합니다. 한 종에는 다섯 달란트, 다른 종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이렇게 차이를 둔 이유는 종들의 능력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종들은 단순히 힘든 일만 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이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큰돈을 맡길 리가 없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 돈으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를 맡은 종도 두 달란트의 이익을 거뒀습니다. 오랜 만에 돌아온 주인은 그들을 향해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걸 땅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에게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주인은 이 종을 향해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이 종이 갖고 있던 한 달란트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원래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주었습니다. 주인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주인의 태도에 대해

여러분은 이 주인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단순히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이 주인의 태도는 아주 당연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살려서 많은 일을 한 사람은 칭찬을 받아 마땅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은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이 주인의 태도가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닙니다. 이 주인은 종들에게 돈을 맡기면서 무얼 어떻게 하라고 지침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속으로는 장사를 해서 돈을 남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면 한 달란트를 맡은 종도 장사를 했을 겁니다. 이 한 달란트를 맡은 사람을 너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는 자기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겁니다. 공연히 잘 할 줄도 모르는 장사를 했다가 한 달란트마저 잃는 것은 주인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요즘처럼 중국 펀드에 가입했다가 순식간에 재산이 반 토막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었습니다. 재산을 땅에 감추는 것은 그 당시에 재산을 가장 안전하게 지키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돈을 벌지 못했으니 잘한 게 아니지만 그 동기만은 일단 순수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크게 꾸짖었습니다. 동기의 순수성을 인정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주인의 책망에는 돈을 굴리는 방법도 들어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은행에 넣어서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유대의 율법 정신에 따르면 이자를 받는 건 옳은 행동이 아닙니다. 이자 운운한 걸 보면 이 주인은 스크루지 영감처럼 돈에 환장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한 달란트마저 빼앗았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종은 갑절의 돈을 남긴 동료들이 칭찬을 받은 걸 보면서 뭔가 부끄러운 마음으로 자책하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만약 제가 주인이라고 한다면 이미 다른 두 종들이 돈을 충분히 남겨서 기분도 좋고 하니 이 세 번째 종을 그렇게 몰아붙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괜찮아, 다음에 잘 하면 돼, 하고 말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런 비유를 일반적인 이야기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특별한 상황을 전제합니다. 이런 상황을 전제하지 않으면 두 가지 문제가 벌어집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편견입니다. 여기서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완전히 수전노이며 폭군입니다. 성서가 이런 방식으로 오용되는 일은 흔합니다. 예컨대 여리고 성과 아이 성에 사는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집단 살해하는 게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진술하는 여호수아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한 상황을 전제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은사론의 왜곡입니다. 이런 달란트 비유를 읽는 신자들은 자기도 달란트를 남겨야 한다는, 그렇지 않으면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휩싸이는 일이 많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는 우리의 일반적 신앙생황의 어떤 기준을 제공하는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아주 특별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특별한 상황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재림의 지연과 바리새파 운동

이 달란트 비유는 독립적인 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이야기와 한 묶음에 속합니다. 본문의 앞 구절인 마 25:1-13절에는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오고, 뒤 구절인 마 25:31-46절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한 이 세 이야기는 모두 재림 및 심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신랑이 왔을 때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는 영벌에 해당되는 왼편으로 분류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묻어두었던 종은 어두운 곳으로 쫓겨납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왜 이런 이야기를 이 대목에서 집중적으로 제시하고 있을까요?
예수 재림의 지연으로 인한 신앙심의 이완이 그 대답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바로 이것으로 인해서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재림 공동체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을 정도입니다. 바울의 편지에도 그 날이 가까이 임했다는 표현은 흔합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징조는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고,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느슨하지만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던 유대교에서 바리새운동이 과격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종교 체제를 잡지 못한 어린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런 모든 현상들은 위기입니다. 그들 안에서 유대교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신앙을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들에게 재림과 심판 신앙이 공수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주인이 곧 돌아온다고 말입니다. 그 주인은 우리와 계산을 할 거라고 말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마태복음 공동체의 특별한 상황에서만 효력이 있지 지금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의 특별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지만 분명히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예로 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집단 살해가 고대 유대인들의 특별한 삶을 전제하고 있지만 고유한 하나님 경험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달란트의 비유도 역시 그렇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개인과 공동체가 처한 자리는 늘 특별합니다. 그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고유한 방식으로 그들을 만납니다. 마태복음 공동체의 특별한 상황에서 그들과 만나신 바로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신가요? 하늘나라의 주인인 그분은 우리와 어떻게 계산, 또는 계시하는 분인가요?

유일하고 배타적 셈법

마태 25장에 나오는 세 비유에서 논점은 하늘나라에서 거절당한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특별히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이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어려움을 당한 것이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에 속한 이들은 나름으로 주님을 섬겼으며, 오늘 본문인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역시 자기 딴에는 최선으로 재산을 지켰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속으로 억울하게 생각할 겁니다. 뭐가 문제냐, 하고 말입니다. 주인이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호소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일정한 기준으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형평성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반 법정에서는 살인자에게 어느 정도의 구형이 선고되어야 하는지 대략적으로라도 정해져 있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그런 일반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는 우리가 참고할만한 판례도 없습니다. 천명 모이는 교회를 목회했는지, 백 명 모이는, 또는 오십 명 모인 교회를 목회했는지에 따라서 일괄적으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신앙적 기준에 올라섰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오직 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기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형평 운운하지 마세요. 그렇게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객관적 기준으로가 아니라 개별적인 기준으로 행해진다는 말은 그분이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본다는 뜻입니다. 그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속을 정확하게 뚫어보십니다. 그런 분 앞에서 우리가 어찌 객관적인 기준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게 내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고, 그리고 한 달란트마저 빼앗기는 선고는 사람의 중심을 정확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고유하고 배타적인 판단입니다. 사람은 그 중심을 못 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중심을 정확하게 보십니다.  
이 종의 중심에 무엇이 있을까요? 주인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잘 보십시오. 그는 주인을 가리켜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인을 판단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도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헌금을 낸 것만큼 받으려고 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권선징악의 장본인처럼 규정합니다. 율법주의가 바로 그런 태도입니다. 자신의 업적으로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안에 담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뜻에 맞는 행동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전혀 다른 기준으로,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고유한 기준으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을 난폭한 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고유한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분의 자비이며, 은총입니다. 만약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따진다면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차는 것은 아닙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거꾸로 세상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 있던 세리 같은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배타적 판단은 폭력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계산의 순간

위의 설교를 듣고 좀 막막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하나님의 판단이 배타적이고, 따라서 우리가 거기에 맞춤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지금 우리가 무얼 어떻게 하라는 거냐, 하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공동체의 삶을 다시 보십시오. 저는 앞에서 그들에게 영적인 위기가 닥쳤다고 했습니다. 안으로는 신앙의 매너리즘이고, 밖으로는 실제적인 불이익입니다. 밖의 문제는 종속변수입니다. 안의 문제가 핵심입니다. 그들은 예수 재림의 지연으로 인해서 종말론적 신앙의 긴장과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주인의 속성이 어떻고 하면서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면서 말입니다. 주인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안도감에 빠져 있었겠지요. 그것은 자기기만이며, 허위의식입니다. 결국 졸지에 주인을 돌아왔고, 그는 쫓겨났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태복음 공동체와 동일한 영적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의 실체를 못 보고 있을 뿐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 재림의 지연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마태공동체는 그나마 불안감이래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것마저 망각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업적을 쌓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해체되고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셈법으로 계산해야 할 날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거나 때로는 못들은 척 외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그의 고유한 계산법이라는 말이 좀 막연한 것처럼 들리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신앙과 삶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겁니다. 신앙은 둘째 치고 삶만이라도 직관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십시오. 지난주에 안경모 교우가 부친상을 당해서 서울을 다녀왔는데, 우리 모두에게 죽음의 그날은 도적같이 임합니다. 무덤에 묻히는 자나 그를 묻고 있는 자나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죽음이 실제로 이르기 전에도 우리는 그 날이 속히 임한다는 사실을 아주 실증적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피부와 머리카락이 생기를 잃어가면서 우리의 생명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습니다. 지금 젊음을 만끽하는 청소년들도 우리 나이든 사람들의 길을 속히 따라옵니다. 이것이 절대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 어떤 노력으로도 늙음과 죽음을 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인류라는 종도 그렇고, 지구가 포함된 태양계도 그렇고, 우주 전체가 그렇습니다.
성서는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인 그분의 고유한 셈법으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사건입니다. 이 땅의 생명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계산대에 올려지는 때입니다. 그 날은 우리에게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쁨의 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참된 생명으로 해방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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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November 09, 2008
*.162.230.126

설교모음 링크블로그에 링크시켰습니다. ^^*;
target=_blank>http://indiadabia.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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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조용한 산책

November 10, 2008
*.59.33.216

흔히 교회봉사를 사역이라는 말로 치장하며 그 행위를 믿음의 기준으로 선포하는 오늘의 교회상황이 목사님의 표현처럼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과 삶의 매너리즘에 빠진듯한 우리들이 신앙은 둘째 치고 삶만이라도 직관하라는 말씀에 민망하여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도무지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게 현실에서 가능할런지요?
하나님의 고유한 셈법 앞에 날마다 두렵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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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돌아온왕따

November 10, 2008
*.121.180.101

요즘 월요일 아침 목사님 설교를 대하는 것이 저에게 새로운 기쁨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하여 늘 저 안에 있었던 문제점이 해결되었습니다.
늘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되자는 말씀이었는데...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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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김바울

November 10, 2008
*.95.255.51

자신의 업적으로는 하나님께 인정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미 5백여년 전 신앙의 선배인 마르틴 루터를 통하여 훈육되었지요. 교황의 업적주의에 반하는, 오직 성서로만! 아멘.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 오바마를 두고서 <제 논에 물대기식> 주문을 외우는 자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거품을 무는 자들이 말이죠. "변화와 개혁을 주장하니 나와 같다.",고.

나는 오늘 박재동화백이 오바마에게 보내는 그림(한겨레신문 만화)을 내 피시의 바탕화면으로 바꿨다. 어떤 인물을 바탕화면으로 한 건 첫경험이다.

이 곳을 방문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간하시는 계절의 향기가 수고하고 지친 심신의 위로가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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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November 10, 2008
*.235.166.149

우리가 이 달란트 비유를 대할 때
획일적인 내용의 설교들이 있습니다.
설교자의 의도에 따라 부지런한 종의 행동방식으로
전도, 헌금, 교회봉사..등이 강조되어 집니다.
종말론적인 언급을 하지만
그것을 향한 권면하는 행동양태는 거의 정해져 있지요.
목사님의 설교 마지막 부분의
'우리의 업적을 쌓는 일에 골몰을 하고 있다.'
가 그 점을 표현하신 것같습니다.

저는 천국비유의 이 '달란트'를
한 사람이 갖게 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보, 지식, 경험, 감정..이 모든..
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총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그것의 종류와 양은 틀리게 각자에게 주어집니다.
주인이 가면서 그것을 주었는데
오시는 그 날까지 각자의 삶의 토대에서
이 덩어리들을 운용 혹은 굴려가는 겁니다.
위와같은 입체적인 덩어리들을
항상 주목하고 묵상하고, 행동하며..
하여간 뜨거운 감자라고 표현하면 이상하지만
식지않는 감자 혹은 땅에 묻지않는 상태를 지속하여야하는..

또 하나,
목사님께서 예수 재림의 지연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는 점을 짚어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뜨끔한 대목입니다.
예수 공동체 초기에는 눈 앞에서 다시 오마하고 가신
주님에 대한 재림의 임박감이 당연히 있었지만,
2000년 후 지금에는, 성경의 능숙한(?) 해석을 통한
재림의 시기를 예견하려는 얄팍함이 있습니다.
세계선교의 동향과 이스라엘의 회심의 시점,
지구환경의 변화의 연구 등으로 이 타이머에 맞추어보려는
아주 비상한 유니스였습니다.
목사님, 정말 회개합니다.
주님 그분의 오심은 그 분만이 아심을 겸손히 인정하고
오늘의 이 말씀 아래에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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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January 21, 2009
*.54.79.126

유니스 님 말씀 맞습니다!!!  정말 공감이 많이 됩니다... 보통은 이 달란트가 무슨 "인간적 재능"이라든가 이런 쪽으로만 집중되는 것 같습니다... 그게 결국에는 재능과 가치의 척도인 "돈" 으로 귀결되기 일쑤구요...

그런데 달란트는 그 것 이전에...  

한 사람이 갖게 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보, 지식, 경험, 감정..이 모든.. 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총체적인 것... 저도 이런 생각을 했지만 표현할 길이 없었는데 유니스 님께서 너무 잘 표현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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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0, 2008
*.181.51.93

유니스 님은 영적으로 민감한 분이에요.
그런 건 신학공부를 했다고 해서 주어지는 게 아니랍니다.
선헙(아프리오리)이라고 할는지,
선지라고 해야 할는지...
이 말은 곧 신앙적 언어를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단지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세계를 맛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 영성이 풍성해지고 심화되어야 하는데,
최선은 좋은 책을 읽은 거에요.
그런 깨우침의 과정이 없으면
결국 영성도 소멸된답니다.
구도정진의 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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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November 11, 2008
*.146.251.215

유니스님의 댓글이 설교 못지 않은 깨달음을 주네요.
목사님의 설교를 꽉 채우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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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시드니

November 11, 2008
*.101.112.210

좋은 설교 감사드립니다.

이 본문은 요즘 저에게 많은 묵상거리를 주는 부분입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이나, 인과응보의 원리가 아니고, 우리는 어떤 원인도 제공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는다고요.

그러나, 열처녀, 양과 염소, 달란트 비유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크게 보아서 세 비유 모두, 우리 쪽의 무언가가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심판의 결과가
달라짐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 무언가가 봉사나 헌신을 뜻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과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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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harris

November 12, 2008
*.151.112.164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
이라는 귀절과 단순히 주님을 인간인 종이 판단했기에 책망을 받았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연결이 잘 안되서 한참 헤매고 있습니다.종의 중심에는판단의 문제말고 다른 무엇이 있었기에 책망을 받았을까요?
다른 교회 설교에서는 마태복음 25장에 대한 모범적인(?) 정답이 있겠지만 사유의 깊이를 요하는 다비아에서는 그만 손을 놓게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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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데오그라시아

November 12, 2008
*.100.189.44

정목사님 설교본문을 따라 묵상하며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달란트비유(마25:24-30)

달란트 비유의 말씀이다. 이 비유에는 한 달란트 두달란트와 다섯달란트 받은 사람에 대해 말한다. 먼저 두 달란트 받은 사람 다섯 달란트 받은 이 둘은 자신이 주인에게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 배를 남겨 주인에게 가져가므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고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초청도 받았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의식이 분명하고 자신이 해야될바를 바로 알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묵묵히 주인만 생각하고 자신들이 해야 할 바를 행하였다. 자신들은 주인이 아니고 종이며 자신들이 가진 것은 주인의 것이며 나중에는 돌려 주어야 할 것임을 알고 주인이 준 달란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활용하여 배를 남겼다. 이점이 착하고 충성되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떠했는가 ? 그는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주인이 회계할 때 그대로 가지고 나왔다. 그는 그 달란트를 활용하지도 않고 그대로 땅에 묻어 둔 것이다. 이에 대해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였다. 이 한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준 그 달란트를 자신의 마음대로 행하였다. 주인이 준것이므로 자기마음대로 해서는 안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그냥 땅에 묻어 두었다. 그것은 주인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주었는데 자신은 한달란트만 준것에 대한 불만 그것이 그로 하여금 주인이 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게 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였다. 그런데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할 때 차이가 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두 달란트를 남겼다. 비교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 사람은 자신이 그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책임을 주인에게 돌렸다. 주인은 굳은 사람이다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하였다. 책임을 주인에게 돌린다. 그리고 두려워하여 하였다. 주인을 두려워하였다. 우리는 어떤가 ? 우리도 우리의 삶에 대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원망 불평하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포기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은 소중한 것이다. 내게 꼭 맞는 삶을 허락하였다. 이 속에 하나님의 내게 주신 은사가 있는 것이다. 삶을 소중히 내게 주어진 일을 소중히 내가 처한 환경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속에서 내가 할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로마서8장에 보면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이가 그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내게 주신 모든 삶은 은사이다. 절대로 땅에 묻어두어서는 안된다. 이제 그 결론을 보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에게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고 그 가진 것 까지 뺏앗겨 어두움에 던져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달란트는 열달란트 가진자에게 주어졌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원리이다. 있는자에게 더해주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절대로 낙심하고 좌절하고 원망과 불평하는 마음으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이루어진 모든 것은 주인은 다 내게 주는 것이다. 그 열달란트를 가진자에게 하였다. 주인이 도로 가져가지 않으신다. 다 주셨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고 그것을 누리기 바라시는 하나님의 선한 마음이 그속에 있다. 우리도 모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을수 있도록 하자 아멘...

주여 절대로 내 삶에 대한 책임을 그 누구에게도 돌리지 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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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3, 2008
*.181.51.93

해리스 님,
그렇지요?
그런데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내뱉은 말의 내용을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군요.
그건 아마 구약의 어느 구절이나 유대인들의 생각을 담은 거에 불과하니까요.
그가 하나님을 재단했다는 사실을 문제리고 본 거에요.
그 시도, 그 행위 자체말이지요.
그 이외의 다른 문제가 있는지는 해리스 님이 더 잘 찾아보세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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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오군

November 13, 2008
*.238.200.79

정용섭 목사님의 글을 읽다보면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이질적인 혹은 소수자들의 삶 까지 잘 이해하고 인지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설교말씀도 그런 한 부분들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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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harris

November 14, 2008
*.151.112.164

목사님 부언 설명 감사합니다.병행구절인 누가복음에 대한 국제성서주석에서 언급한 그 당시 배경 설명과 현재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니 퍼즐이 조금은 풀리는군요.요즘 경제상황이 상황인지라 헌금을 드릴 때도 저 자신의 셈법으로 주저할 때가 있으니 이게 바로 저의 중심이자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중심인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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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November 14, 2008
*.99.193.27

댓글을 읽다.. 여전히 달런트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증을 저는 스스로 버리기가 힘들군요...
목사님 말씀은 이것일지 모른다고 혼자 생각해 봅니다.
달런트는 종말을 생각하는 기다림이라고...그 기다림을 자꾸 키워야 하는 것이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 맞나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14, 2008
*.181.51.93

상수리 님의 지적이 옳습니다.
재림, 심판, 종말, 새 하늘과 새 땅과 직면할 준비를 해야겠지요.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셈법으로 우리가 판단받는
바로 그 카이로스가 다가오고 있답니다.
이 순간에도.
profile

[레벨:22]머리를비우고

November 22, 2008
*.146.226.204

하나님의 판단이 배타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도리어 우리의 은혜가 된다는 것이 저에겐 복음입니다.
절대가 아닌 기준... 그게 큰 축복이죠... 아멘..
profile

[레벨:3]타필흥왕

January 21, 2009
*.3.32.43

이 페이지에서 설교내용을 읽으려니 눈이 피로하네요.
글자가 너무 작아서.
글자를 확대해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을텐데
해결방법이 없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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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시드니

January 21, 2009
*.167.253.3

키보드에서 'control key'와 '+ key'를 동시에 누르시면 화면이 확대됩니다.

저도 노안이 와서 이 방법을 애용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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