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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서

성령강림절 조회 수 16293 추천 수 45 2008.06.22 14: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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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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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6.22. (요 4:5-15)

예수님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여행할 때 사마리아 땅에 발을 딛기 싫어서 요단강 우편으로 우회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에 아주 지독한 지역감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라, 모두 아브라함을 같은 조상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를 싫어한다는 이상하지만 거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사정이 있습니다.
그 역사적 사정이라는 게 힘없는 민족이 겪게 되는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힘이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주변의 여러 제국들의 침략을 자주 받았습니다.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 등이 그런 제국들입니다. 제국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제국과의 동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자기나라 사람들을 정복지에 이주시키거나 정복한 나라 사람들을 자기 나라에 데리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그런 이방 제국의 압력에 굴복해서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잃었지만, 유대 지역의 사람들은 유지했습니다. 그 뒤로 유대 지역의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전 4세기 말에 그리심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세웠으며, 모세오경만을 성서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이나 멜기세덱을 만난 곳도 그리심 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반목을 거치다가 주전 111년 예루살렘의 제사장 요한 히르카누스가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함으로써 양쪽의 적대감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유대인의 거룩한 문서인 집회서 50:25,2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증오하는 민족이 둘 있는데, 세 번째 것은 민족이라 할 수도 없다. 세이르의 주민들과 블레셋인들, 그리고 세겜에 사는 어리석은(신을 믿지 않는) 자들(사마리아 사람들)이다.” 랍비 엘리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빵을 먹는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과 같다.” 아주 모욕적인 언사들입니다. 또 다음과 같은 원칙도 굳어져 있었습니다.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항아리를 함께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 사람은 한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서로 앙숙처럼 지냈기 때문에 유대의 경건한 사람이 사마리아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물을 좀 달라
예수님은 그 당시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마리아 지방의 시카르(수가) 동네에 들어가셨습니다. 유대의 예루살렘에 오셨다가 다시 북쪽 갈릴리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먼 길을 가시느라 피곤하셨습니다. 수가의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수가 동네의 우물은 마을 한 가운데가 아니라 한적한 외곽지에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오전 내도록 걷다가 지친 나그네는 우물가에 앉아서 쉬면서 목을 축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두레박이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물을 길러 나오는 동네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시간이 정오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뜨거운 태양빛이 바로 머리 위에서 내리쪼이는 그 시간에 물을 길러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상외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나왔다고 합니다. 그 지역이 사마리아 지역이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자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 않아도 됐겠지만 요한복음 기자는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밝히는 것 같습니다. 우물가로 조심조심 걸어오는 여자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우리가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 여자가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다는 것은 그가 동네 사람 만나는 걸 꺼림칙하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멀리서 웬 낯선 사람이 우물가에서 쉬고 있는 모습을 보았겠지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사람이 있다는 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수가 동네 사람이 아닌 게 다행이었습니다. 우물가에 가까이 와서 힐끔 곁눈질로 쳐다보니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는 유대 사람이며, 더구나 남자였습니다. 빨리 물 항아리에 물이나 채워서 집에 가야겠다고 서두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유대 남자가 자기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물을 좀 주시오.”
지나가는 나그네가 우물가에서 한 아낙네에게 물 한 모금 주시오, 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옛 그림에도 이런 장면은 자주 나옵니다. 지혜로운 여자들은 물위에 한두 장의 나뭇잎을 띠우기도 합니다. 목이 갈한 나그네가 물을 천천히 마시게 하기 위한 조치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의 장면은 이렇게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물을 달라는 사람이 바로 유대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당혹스런 일이었습니다. 속으로는 기가 막혔지만, 그래서 한 마디라도 대꾸를 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9a절) 요한복음 기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다고 보충해서 설명했습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이상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설명입니다.
이 뒤로 사마리아 여자와 유대 남자인 예수님과의 대화가 진행됩니다. 이 대화의 주제는 물입니다. 왜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하느냐, 우리는 서로 미워하는 사이가 아니냐, 하고 까칠하게 따지고 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10절) 사마리아 여자는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두레박도 없는 분이 어떻게 물을 주겠다는 거냐, 이 우물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내려준 야곱보다 당신이 더 위대하단 말이냐, 하고 따졌습니다. 이미 여러분은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나오는 물이 서로 다른 의미라는 사실을 눈치 채셨을 겁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실제의 물을 말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물을 말합니다. 급기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14절) 그러나 사마리아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15절)
이 사마리아 여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당장 물 길러 나오지 않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그는 매일 물을 길러 나올 때마다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산다는 게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매일 땡볕을 무릅쓰고 정오만 골라서 우물가로 나오지만 이따금 동네 사람을 만날 때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늘 조바심을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러 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에게 현재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물을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가 그런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영적 깨우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이 여자는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전했다고 합니다.(28,29절) 사람들 만나기를 극도로 꺼리던 여자가 사람들에게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전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 여자를 통해서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39-42절)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수가 동네의 우물가에서 휴식을 취하던 시간은 정오입니다. 아주 한적한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언가 먹을거리를 구입하기 위해서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때 한 여자가 물을 길러 왔다가 예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녀는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으며,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 한 분, 다음에는 사마리아 여자, 그리고 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니 무슨 말이냐, 하고 따지던 이 여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의 말을 들은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감이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이야기와 비교해서 볼 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 이야기는 다릅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으며, 유대인들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의 눈을 피해 물을 길러온 사마리아 여자와는 달리 아주 고상한 방식으로 예수님에게 접근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요 3:2)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이 사람은 거듭나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영원한 생수를 마시는 물로만 생각했듯이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을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영적인 차원을 모르기는 사마리아 여자나 니고데모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르는 것은 똑같지만 그 사태의 심각성은 니고데모가 더 큽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전문적인 종교인이지만 사마리아 여자는 유대인들이 볼 때 비종교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니고데모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은 그가 단지 종교 전문가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가 결국 아무런 깨우침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사마리아 여자는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자를 일부러 비교했는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조금 불안합니다. 우리는 자칭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진리를 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아닐는지요.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사마리아 여자처럼 오히려 진리를 깨우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은 건 아닐는지요. 설마 그럴려구, 하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깨어있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니고데모처럼 종교 전문가이지만 참된 깨우침이 없는 사람으로 떨어질 가능성은 늘 열려 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넘어서  
그렇다고 해서 니고데모를 무조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지금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깎아내리고 사마리아 여자를 추켜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당시의 종교관과 세계관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속해 있는 바리새파는 유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통만을 진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전통에 따르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무시당해야 할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는 완전히 단절된 세계였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 경계를 허물 수도 없었고, 허물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스도도 된다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런 민족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선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온 인류의 참된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누가 사마리아 사람들인가요? 우리는 누구를 무시하고 있을까요? 무시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경계선이 자리하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타종교인들이 일종의 사마리아 사람들일지 모르겠군요. 서울의 명동이나 번화가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서울역 광장에도 마이크로 찬송가를 불러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시위를 한다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 자기들만의 경계선을 갖고 산다는 뜻이겠지요.
한민족은 지금 휴전선이라는 경계선을 두고 살아갑니다. 남쪽은 북쪽을 신뢰하지 않고, 북쪽은 남쪽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북쪽 공산당은 나쁘지 않느냐, 그런데 왜 양쪽 모두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말하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북쪽 체제는 많은 부분에서 불량합니다. 저는 지금 어느 체제가 상대적으로 우월하냐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에, 국가 사이에, 종교 사이에 놓여 있는 경계선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도 사마리아인들을 야만인 취급을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생각을 깊이 있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의 경계선 밖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북한 주민들에게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답은 주어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쌓아놓은 마음의 경계를 허물어야합니다. 그런 경계와 장벽이 이 사회 속에, 우리 개개인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작용하고 있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경계를 예수님이 허물었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를 거둬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경계 안의 우리만이 아니라 경계 밖에 있는 모두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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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진주

June 22, 2008
*.226.190.76

목사님, 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에서 항상 궁금하게 여기는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인데 왜 유대남자라고 불리우지요? 유대 지방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갈릴리도 역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천한 곳 아닌가요. 그리고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역은 옷이 달랐나요. 어떻게 한 눈에 유대 남자인줄 알았을까요? 공부 잘 못하는 학생은 늘 중요하지 않은 것에 관심이 많던데 제가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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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June 22, 2008
*.237.224.194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이 너무 뜨거웠습니다. 도저히 화해와 소통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사람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마음이 통하게 되는 것을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의 극적인 심정적 변화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것... 그 그리스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만든 경계를 허물고 계신다는 것... 너무나 벅찬 감동이었습니다...

오늘 같이 갔던 후배도 모처럼 시원한 생수를 마신 느낌이라고 합니다... 그 만큼 목이 말라있었다는 것이겠죠... 목사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도 너무 좋았답니다... 속이 시원했다고 하네요... 이 친구도 그 간에 교회 일로 맘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주일이 이렇게 홀가분 하고 기쁜 때가 없었다고 하네요...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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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3, 2008
*.181.51.93

진주 님,
안녕하세요?
지난 6개월 동안 동영상 강의 수강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처음 시도하는 공부 방식이라서
서툰 부분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귀한 시간들이었고,
나름으로 좋은 시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주신 질문을 읽다보니
동영상 공부한 흔적이 나타나느 것처럼 보여서
서론이 길었어요.
수가 동네의 우물가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어떤 역사적 사실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복음 공동체의 해석에 의해서 구성된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성서텍스트의 역사비평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고,
질문한 내용만 대답하겠어요.
역사 비평이 없이 대답하기를 쉽지 않지만, 어쩔 수 없군요.
고대 팔레스틴은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로 구분되었어요.
여기서 유독 사마리아만 왕따를 당하게 된 겁니다.
갈릴리 사람들도 물론 유대인들이지요.
유대라는 단어가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만을 가리킨다면
갈릴리는 배제되겠지만
유대인 전체를 가리킨다면 당연히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격언은
정확히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라고 해야겠지요.
어떻게 첫눈에 유대 남자라는 걸 알아보았나구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요.
1. 요한복음 기자는 그런 세부적인 부분에서의 논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유대와 사마리아의 적대적 관계가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2. 또는 복장이나 외모, 또는 말투에서 차이가 있었을지 모르지요.
좋은 질문, 잘 하셨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 신약시대의 풍문에 관한 문헌을 찾아보세요.
감사.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23, 2008
*.181.51.93

첫날처럼 님,
반가웠어요.
한국교회가 젊은 지성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거 같아서
마음이 불편할 때가 많아요.
그렇게 실망하고 있는 분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구요.
샘터교회에서의 예배와 대화가 좋았다 하니 다행이군요.
새로운 한 주간,
환자들과 좋은 시간을 가지세요.
profile

주께교회

June 26, 2008
*.7.13.27

정목사님 귀한 말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알게 모르게 정목사님의설교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마침 예전에 이 본문으로 올린 묵상글이 있습니다.
http://pray153.tistory.com/273
저는 워낙 보수주의권에 속해 있다보니 그 틀을 완전히 뒤집을수는 없겠지만 항상 조심하고자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경청하는것이 큰 도움입니다. 내용이 좀 길어서 따로 올리기가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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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창조절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1-4, 2:1-4) [10] 2013-11-04 14668
509 창조절 하나님 앞에서 '옳음'의 문제 (눅 18:9-14) [8] 2013-10-27 13887
508 창조절 약속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 (렘 31:27-34) [10] 2013-10-21 14477
507 창조절 이방인 나병환자의 믿음 (눅 17:11-19) [10] 2013-10-13 24759
506 창조절 거룩한 부르심 앞에서 (딤후 1:1-14) [12] 2013-10-07 15443
505 창조절 불행한 부자 이야기 (눅 16:19-31) [10] 2013-09-29 21062
504 창조절 예레미야의 눈물 (렘 8:18-9:1) [8] 2013-09-22 13503
503 창조절 죄의 심연 (딤전 1:12-17) [6] 2013-09-15 11152
502 창조절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 (눅 14:25-33) [10] 2013-09-08 18970
501 창조절 헛되고 무익한 것 (렘 2:4-13) [16] 2013-09-01 13527
500 성령강림절 신앙과 위선 (눅 13:10-17) [6] 2013-08-25 14773
4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절망 (사 5:1-7) [1] 2013-08-18 11035
498 성령강림절 인자가 오리라! (눅 12:35-40) [5] 2013-08-12 13112
49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골 3:1-11) [10] 2013-08-04 10636
496 성령강림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0] 2013-07-29 18926
495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2] 2013-07-21 12296
494 성령강림절 이웃에 대한 질문 (눅 10:25-37) [19] 2013-07-14 17926
493 성령강림절 나아만과 게하시 (왕하 5:1-14) [6] 2013-07-08 20256
492 성령강림절 제자의 삶과 하나님 나라 (눅 9:57-62) [6] 2013-06-30 16360
491 성령강림절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눅 8:26-39) [15] 2013-06-24 13590
490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17] 2013-06-16 13256
489 성령강림절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왕상 17:8-24) [7] 2013-06-09 16202
488 성령강림절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9] 2013-06-02 14016
487 성령강림절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롬 5:1-5) [8] 2013-05-26 14238
486 성령강림절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요 14:8-17) [4] 2013-05-20 15777
485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2013-05-12 12552
484 부활절 환상을 보는 사람들 (행 16:6-15) [12] 2013-05-06 15088
483 부활절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6) [10] 2013-04-28 16779
482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요 10:22-30) [8] 2013-04-22 13180
481 부활절 나를 따르라 (요 21:15-19) [10] 2013-04-14 20825
480 부활절 죽임과 살림 (행 5:27-32) [14] 2013-04-07 11339
479 부활절 생명과 죽음 (눅 24:1-12) [8] [1] 2013-03-31 16208
478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2013-03-24 18816
477 사순절 의식하지 못한 은총 (요 12:1-8) [10] [2] 2013-03-18 15498
476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2] [1] 2013-03-10 17944
475 사순절 여호와를 찾으라, 부르라! (사 55:1-9) [17] [3] 2013-03-03 26284
474 사순절 예수와 헤롯 (눅 13:31-35) [8] [1] 2013-02-24 15554
473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559
472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눅 9:37-43) [8] [2] 2013-02-10 12910
471 주현절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12] 2013-02-03 17009
470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2013-01-27 18939
469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2013-01-21 23800
468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2013-01-13 21730
467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2013-01-07 17957
466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2012-12-30 22303
465 대림절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4] [2] 2012-12-24 17025
464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2012-12-17 18097
463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2012-12-09 21463
462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2012-12-02 17502
461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2011-11-21 18299
460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2011-11-13 23260
459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2011-11-06 20102
458 창조절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11] 2011-10-30 16904
457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2011-10-23 23091
456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2011-10-17 20145
455 창조절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 4:1-9) [6] 2011-10-09 16827
454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2011-10-02 14713
453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2732
452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2762
451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640
450 창조절 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12] 2011-09-05 13352
449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2011-08-29 1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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