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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과 하나님 나라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561 추천 수 0 2009.10.19 18: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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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가복음 10:17-31 
 

재물과 하나님 나라

(막 10:17-31)


근심이 많은 부자

오늘 설교의 본문 막 10:17-31절에 나오는 어떤 부자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은혜로워서라기보다는 뭔가 우리를 찜찜하게 만들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에 대한 질문인데, 이는 곧 구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바람직한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떻게 부자로 행복하게 사는가에만 마음을 두는데 반해서 이 사람은 그 너머의 삶을 추구했으니까요. 이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영적인 만족을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당연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으로 그런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인생은 아주 간단합니다. 재물과 소유는 이 세상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편리하게 살아가도록 도움을 줄 뿐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영혼을 걸어둔다면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좋은 차를 처음에 샀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것도 시들해지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영생을 구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그의 질문을 정확하게 보십시오. ‘무엇을 하여야’ 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영생, 또는 구원을 행위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율법시대에는 옳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라고 말씀하셨지 율법을 행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은 안식일을 비롯해서 율법을 범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이 사람이 질문하는 방향이 잘못되었지만 예수님은 일단 이 사람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눈높이를 이 사람에게 맞추신 겁니다. 예수님은 일곱 가지 계명을 열거하셨습니다.(19절) 그것은 십계명 중에서 두 번째 돌판에 나온 계명입니다. 이 사람은 대대로 율법을 준수하는 모태신앙으로 살았기에 이 계명을 어릴 때부터 잘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부터 다 지켰나이다.” 이 사람은 두 가지 생각을 했을 겁니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모범적으로 살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뭔가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르쳐줄 거로 기대를 했는데 별거 아니군, 하고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율법을 잘 지키고 산 이 경건한 사람을 좋게 보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그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대충 그런 정도로 대답하고 이 사람을 돌려보냈을 텐데, 예수님은 이 사람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차원의 말씀을 하십니다. 재물을 모두 처분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준 다음에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탓에 곤혹스러워하면서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좀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귀한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이고,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기도 했는데, 이제 오히려 고민거리만 안고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을 다시 찾아와 제자가 되었을까요? 아니면 이것으로 예수님과의 인연이 끝나고 말았을까요?

이것을 남의 이야기로만 듣는다면 속 시원합니다. 이 사람이 잘난 척하다가 큰 코 다쳤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이 요구 앞에 서야 하는 경우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기조차 합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모두 처분할 자신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재산을 처분하라는 요구가 불편하게 들립니다. 그런대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게 이상한 일입니다. 본문의 부자는 재물에 시험이 들어서 예수님을 떠났는데, 우리는 아무런 말씀도 듣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지금 저는 재물 문제로 여러분의 약점을 지적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건 설교하는 저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들의 신앙양심에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재산을 모두 처분한다는 것은 고대 부족사회나 아니면 완전한 공산주의사회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 모두 절대적으로 빈곤하거나 모든 소유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가톨릭의 사제나 수녀, 또는 무소유를 선택한 수도승들은 가능하겠지요. 세상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야할 평신도들에게는, 특히 지금처럼 자본주의 이후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가족과 먹고 살고, 자식 교육을 시키고, 노후 준비를 하는 일에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합니다. 국가가 이걸 다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재산을 모두 처분하라는 성서의 말씀은 곧이곧대로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의 부자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허투루 들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딜레마입니다. 재산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는 명령과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거나 긴장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

오늘 본문말씀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부자에게 하신 말씀은 사실은 제자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부자가 떠난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 이 경구는 당시에 유대 랍비들에게 잘 알려진 것이며, 여러 변형들이 전해집니다. 낙타가 코끼리나 밧줄로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구절은 부자가 구원받기 힘들다는 사실을 과장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다시 물었습니다. 도대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이 경구만으로 본다면 제자들이 놀라는 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부자가 구원받기 힘들다는 말을 곧 가난한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됐으니까요. 제자들이 놀랐다는 건 이 경구가 그런 뜻이 아닐 때 가능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조상들은 모두 부자들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그런 부에 대한 약속도 많습니다. 가난을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난은 징벌입니다. 부는 구원의 상징이고, 가난은 징벌의 상징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면 가난한 사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제자들이 놀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니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걸 다 하실 수 있다고 말입니다.(막 10:27)

이 말씀 뒤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절) 이어서 보상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집, 형제, 자매, 부모, 자식, 땅을 버린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백배의 축복을 받고 저 세상에서 영생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이 보상에 대한 약속은 이미 유대교의 묵시문학에서 그 틀이 잡혔습니다. 제4 에스라서 7:89-91에서는 율법을 위해서 겪는 고통과 위험은 하늘나라에서 일곱 배의 영광으로 보상된다는 약속이 나옵니다.

이런 보상의 약속은 초기 기독교가 처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실제로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재산과 가족, 그리고 직업까지 포기해야 할 경우가 있었습니다. 유대 종교와 로마 정치의 억압 아래서 생존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았습니다. 로마에는 지금도 초기 기독교인들이 숨어서 예배를 드리던 지하묘지인 카타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이 세상에서 백배나 받는다는 말은 교회 공동체에서 새로운 가족관계를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새로운 형제와 자매 관계를 맺었습니다. 교회가 늘 그런 것을 보장해주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내세의 영생으로 주어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어떤 시련을 당했을지 조금만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유대교로부터는 율법을 요구받았고, 로마로부터는 황제숭배를 요구받았습니다.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굳이 예를 들면 오늘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종교적 신념으로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에 가는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왜 없었겠습니까? 자식들을 잘 공부시켜서 출세키고 싶다는 꿈이 왜 없었겠습니까?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학적인 생각으로 고난과 시련을 즐긴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보기 싫다고 은둔한 쿰란공동체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황제숭배의 요구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이 그 대답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성이 바로 이 명령에 있습니다. 불교는 이와 다릅니다. 그들은 역사적 인물이었던 싯다르타를 따르거나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부처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따르라는 말은 곧 예수‘만’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예수도 따르고, 율법이나 황제숭배도 겸해서 따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게 아니라, 키에르케골의 방식으로 말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입니다. 이런 신앙으로 인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세상살이에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일과 완전히 단절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건강한 기독교 신자라고 한다면 어느 한 순간에도 세상에 대한 책임을 포기한 적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며, 그 세상을 완성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요 3:16) 교회는 세상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로 나갔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저자거리로 돌아오셨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은 세상과의 결별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힘든 요구인지 모릅니다.  


“나를 따르라.”

본문의 부자에게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그것도 “나를 따르라.”였습니다.(막 10:21) 재물을 “버리라.”는 말씀보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핵심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똑같은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모든 걸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고(막 1:18)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품꾼들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고 합니다.(막 1:20) 본문의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른 게 아니라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합니다. 제자들과 정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이 부자의 문제는 무엇인가? 재물에 대한 욕망이 문제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재물이 그에게 짐이 되었다는 게 근본 문제입니다. 그는 소유에 절대적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기의 존재 근거이고 행위 근거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에게 소유는 바로 ‘무엇을 하여야’와 깊이 연결된 것입니다. 그는 부를 물려받았든지 사업을 잘했든지 남이 볼 때 무언가 잘 해서 소유가 많았습니다. 그것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영생은 그것과 더불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즉 행위와 소유가 상대화되었으니,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들었으니 그가 그 상황을 어찌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재물이 바로 자기의 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자기의 삶을 확인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그 나라에서 필요 없는 것에 관심을 적게 갖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제가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정신없이 구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그 나라에서 필요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넓혀 가십시오. 그것이 무엇인가요? 그 나라에서는 오직 한 가지만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그에 대한 신뢰와 찬양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을 그쪽으로 확장시키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건 그때 가서 하면 된다고요? 여기서 안 되면 거기서도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어디에 우리의 영적인 관심을 집중시키는가를 연습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직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못하기에 우리의 일상에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또는 운에 따라서 재물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불편할 일도, 때로는 절망적인 일도 자주 겪을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임시로 필요한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영혼을 걸고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6:13)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소유와 재물이 주님을 따르는 일에,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영혼을 세밀하게 돌보십시오. (200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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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October 19, 2009
*.217.40.88

"하나님의 나라에서 필요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라..."

는 말씀이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이것, 혹은 저것이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 관심의 목적이 변함이 없다면 진리의 성령께서 도우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미련함을 도우시기를...

 

본문의 마지막 절에 보면 제자들에게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하셨습니다.

평소에는 그 연결이 잘 되지 않았으나

문득 그 자리를 슬픈 기색으로 떠난 부자 청년에게 희망을 봅니다.

자기의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의기양양함에

예수님께서 찬물을 끼얹는 느낌입니다.

부자 청년이 한번의 결단에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라면,

목사님 말씀처럼  무엇이 필요한 가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좋은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부자는 아니지만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과도 같지않기에

마지막 구절에 미묘한 기쁨이 생기는군요....^^

 

마 20장에서 시간차를 두고 포도원의 일꾼으로 입장한 자들에게

동일한 삯을 주는 장면에서도 비유의 마지막 구절이 위와 같은데

진리를 예비하시고 기다리시며 도우시는 성령님을 늘 기대하겠습니다.

목사님,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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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09
*.180.172.45

유니스 님이 본문을 제가 언급하지 않은 마지막 구절과 연결해서 설명하시니

본문이 훨씬 명료해지는군요.

나중 된 자로 먼저될 자가 많다는 말이지요?

하나님 나라 사건은 인간의 모든 인식과 범주를 뛰어넘는,

오직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라는 뜻이겠지요.

구원의 신비이기도 하구요.

하나님은 독재자는 아니되

홀로 세계를 책임지시는 분이겠지요.

거기에 운명을 걸고 살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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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Dr. Jung

October 20, 2009
*.97.128.59

근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심어져있기에,,,

사람은 그열망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다른 그 무엇으로

그 마음의 불안함을 덜하기 위해 보이는 그 무엇에

의지하나 봅니다. 그게 재물이요 권력이고,사람이고,,,

 

불교에서는 아상이 있기에 아집이 생기고 인상이

그리고 중생상이 수자상이 생겨 그 모든것이

苦가 된다 말합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조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기의 위치를 구했는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야

어떻게 말로 표현 하겠습니까?

 

그래서 집착의 대상도 되시길 원하시지 않는 하나님 조차

우리는 소유하려하고 이용하려하는

끝없는 인간 내면의 욕심을 보게됩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그에 대한 신뢰와 찬양,

영혼을 세밀히 돌보라는  목사님의 말씀에

나의 욕심을 보고 주님을 따르는 삶에

다시 한 번 깊은 묵상으로

은혜를 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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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09
*.180.172.45

닥터 정 님,

눈깜빡 사이에 지나는 우리의 한평생이

오직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겠지요.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말이 추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말아야 할 텐에요.

우리가 의식하지 않은 채 숨을 쉬듯이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와 일치하시는 분이신데요.

다만 우리가 그걸 거부할 때가 많다는 게 문제가 아닐는지요.

물질이 그런 계기가 되기에 주님이 그걸 처분하라고

부자에게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만 주님을 따르는 일이 가능하니까요.

"나를 따르라."가 우리의 운명으로 다가올 때

"버리라."는 명령도 실질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요.

시행착오가 반복되더라고

방향만 바르게 되어 있으면 결과가 좋으리라고 봅니다.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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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October 20, 2009
*.136.37.19

어제 저는 얼만큼이나 하나님과의 일치를 하였을까.

오늘 전 얼마나 하나님과 일치하려고 노력하고 있을까.

죄송할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와 저에게 맞춰주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반성도 되네요.

 

오늘 남은 시간을 하나님께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엄청 노력해야겠습니다.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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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09
*.230.207.61

하나님과의 일치는 물론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저도 이렇게 말은 하지만

이게 그건가 혹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있습니다.

성서와 성서에 대한 해석인 신학적 통찰이

우리가 하나님과의 일치로 가는 길에

좋은 안내서 역할을 하겠지요.

오늘도 우리는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군요.

생명의 영이 눈사람 님에게 차고 넘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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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October 20, 2009
*.151.252.103

우리는 하나님과의 일치에 자신이 없기에 '키리에 엘레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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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09
*.230.207.61

정성훈 님,

우리가 영혼 깊은 곳에서

키리에 엘레이송을 고백할 수 있다면

이미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그분의 통치 안에 들어갈 것이겠지요.

그것이 바로 그분과의 일치겠지요.

주님의 자비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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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잠수토끼

October 20, 2009
*.74.49.193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으나

나의 열망이 기록된 공책이 빼곡함을 보고 회개하게 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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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09
*.230.207.61

잠수토끼 님,

정말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 주셨네요.

나의 열망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에게 대한 관심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게 사는 지름길입니다.

자기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에 대한 집중이 구분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게

우리가 이 세상살이에서 감수해야 할 고단한 현실입니다.

비록 시행착오가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방향이 바르게 자리잡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신앙의 연조와 더불어 깊어지리라 본니다.

이게 간단한 것 같아도

사실은 용맹정진의 용기와 결단을 요구한답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우리의 영혼이 심취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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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오명철

October 20, 2009
*.243.153.40

 "그건 그때 가서 하면 된다고요?. 여기서 안 되면 거기서도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어디에 우리의 영적인 관심을 집중시키는가를 연습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기와 거기 ... 여기서 임박한 그 나라를 기다리며 하나님과의 일치와 신뢰 그리고 찬양에 영적인 관심을 집중 시키면

거기인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한 것이며, 여기서 하나님과의 일치와  신뢰,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집중되지 못하면 거기인 하나님 나라에서는 불가능 하다는 것으로 이해 되어집니다.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그때와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거기는 같은 시공간적 개념을 가진것으로 이해했는데.... 그리고 그때와 거기는 하나님나라가 임한 그때의 같은 의미로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서 생각하는 그때와 목사님 말씀하신 여기와 거기 라는 말의 개념은 이미와 아직의 관계와도 같은 개념이 아닌가요?


하나님과의 일치 그리고 신뢰와 찬양 등이 연습량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이 아닌 것은 분명할 것인데,

인생이 얼마나 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하나님 나라에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며 이것을 심화 시키는 과정을 연습량이라고

생각한다면 저에게는 이런 연습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 지는 것인지 아니면 분리된 것으로 이루어 지는 것인지

분별하기가 상당히 어려울것 같습니다. 재물쯤이야 충분히 버릴수 있는 사람도 요즘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두렵습니다. 여기서 어떤 연습이 필요한지, 하나님 나라에 불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 개인 마다 성별마다

나라마다 다르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잠못이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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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09
*.230.207.61

오명철 님,

생각이 깊으시군요.

여기와 거기, 지금과 그때의 관계는

간단하게 한 두 마디로 정리해낼 수는 없습니다.

그때가 이미 여기에 들어와 있을 수도 있고,

그러나 분리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은 창조 이후에 일어난 현상이기에

창조가 끝나는 종말 이후에는 시간이 없어지겠지요.

시간이 없는 상태를 영원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없는 걸 단순히 무시간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지금과 같은 시간 너머의 시간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위 설교에서 오명철 님이 인용한 대목이 말하려는 것은

경건의 훈련량과는 관계 없는 내용입니다.

양이 아니라 질이라고 해야겠군요.

오늘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저 나라에서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격체가 지금과 그때와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수도승들의 영성이 우리에게도 경험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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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정병선

October 21, 2009
*.77.225.78

재물은 영원한 숙제입니다.

재물을 통해 영위해야만 하는 삶의 현실과

재물을  상대화해야 할 삶의 당위 사이에서

인간은 거의 항상 실패했으니까요.

매이지 않으면서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데

기독교 교육이 매진해야 하리라 봅니다.  

 

목사님, 최근에 이사를 했습니다.

작은 마을이 있고 산이 둘러 서 있는 좋은 자리입니다.

풍광과 고요함이 정말 좋아요.

조금은 분에 넘치는 집에서 살게 되니

감사하기도 하고 송구하기도 합니다.

언제 한 번 다녀 가시지요??

사모님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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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09
*.230.207.61

와, 기쁜 소식이군요.

오래 준비하신 숲속에 거처를 마련하셨군요.

목사님의 건강이 더 회복되고

여유가 조금 생기게 되면

좋은 날을 잡아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새로운 거처로 옮기신 모든 가족에게 함께 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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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October 21, 2009
*.105.7.230

목사님 ,

저도 저 성경구절을 읽을때마다 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어요.

제 생각에는 율법을 제대로 지킨 사람이라면 근심하여 떠나 갈것이 아니라 삭개오같은 반응이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 해서지요. 하기사 남 얘기 할게 아니라  바로 제 문제이기도 하네요.

 

대체 이런 딜레머는 어디서 부터 해결해야  하는가가 제게 늘 숙제였어요.

죽을때까지 갈등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지치는 것 같구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명쾌하게 해결해 주시는군요.

하나님 나라에 소용되지 않는 것은 다 상대화 하라!!

이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훨씬 가벼워지는데요?^^

이제 하나님 나라에 소용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 봐야 겠네요.

 

어쩌면 그것은 가장 흔한 것일수도 있겠다 싶어요. 햇빛과 공기처럼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이 아닐까 생각되어요.

어제 정병선 목사님 글에서 저는 그 가능성을 엿 보게 되었네요.

아, 우리에게도 형언못할 그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요.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건 틀림없이 '생명의 기쁨'  같아요.

그리고 그 기쁨과 동반하는 자유는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그 자유가 아닐까,

내내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제가, 설교에서 정병선 목사님 글에서 삭개오의 자유

(저는 이것을 노예해방이라고 부르네요^^)를 느꼈다면.. 믿어지실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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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09
*.230.207.61

삭개오의 자유라!

멋진 표현이군요.

누가 삭개오 이야기에서

'자유'를 말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죽는 바로 그 순간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겠지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요.

죽음이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그리고 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겠지요.

그렇기에 지금 여기서

우리가 잘 사는 훈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삭개오의 자유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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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October 29, 2009
*.109.153.15

 전 늘 어정쩡한 중간이었습니다. 학교 다닐때 성적도 그랬고 교회에서도 늘 그랬죠

어중간히 믿고 어중간히 교회일하고 늘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도 거의 그렇죠

전 보단 교회일을 조금 더 하고 주일예배 이외에 금요철야예배를 가끔 나가는 것 빼고는요

정말 하나님은 계신 건지 계시다면 단순히 하나님이 계심을 어정쩡하게 알고 있는 상태로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인지 늘 고민만 하고 있다가 다비아를 만나게 되었죠

근데 이곳에서 한 가닥 희망을 보았던 처음과 달리 약간 우울한 마음이 생기네요

언젠가 극우 보수가 싫어 진보정당을 기웃거린 적이 있는데 그 곳 당원들의 진보주의적 지식,

논리정연한 말과 중도와 보수를 싸잡아서 무지한 사람들로 보는 지식인의 우월적 태도를 보면서

조용히 발길을 끊은 적이 있습니다. 그후에 비록 와해되긴 했지만 유시민이 주도한 개혁정당에

가입하면서 나름 위안을 삼은 적이 있는데요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지금의 상황이 딱 그때를 떠오르게 합니다.

무작정 물질과 행위를 강조하고 아직도 공산당은 빨갱이고 미국은 이상국가로 묘사하는

목사님들을 보면서 대안을 찾다 우연히 알게된 다비아.. 처음엔 정말 영적 노숙자들을 위한

안식처라고 생각했는데 목사님의 말씀과 글들을 접하고 또 댓글로 보는 다비안과 샘터교우

분들의 글들을 차근차근보면서 점점 더 지혜와 지식의 차이를 느끼게 되더군요.

저 스스로 되도록 쉽게 해주신 말씀들을 중심으로 읽어 나갈 때는 괜찮다가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맥락을 따라 잡기가 어려워서 이해를 못하다가 결국은 결론으로 쓰신 말씀으로

아 그런 걸 말씀하고 싶으셨나 보구나 하고 넘어갑니다. 근데 댓글을 보면 모두가 공감하는

분위기... 어떤 건 댓글을 통해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건 댓글을 보면서 정말 그런 의미

였나? 하기도 하고 참 이건 뭐...

샘터분들은 교우끼리 철학스터디도 하시고 또 다비안은 각자 나름대로 신학공부도 하시는

것 같고, 특강 같은데도 참여하시고 다비아의 수준을 따라 가려면 결국 신학이든, 철학이든,

성경공부든지 일정한 수준의 지식을 쌓아야 될 것 같은 생각은 강하게 드는데..

저도 처음엔 사실 그런 의욕이 강했는데 게을러서 든 시간내기가 어려워서 든 그게 잘 안되다

보니까 자꾸 딴 생각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결국 그게 그거 아니냔 생각도 듭니다

물질을 포함한 믿음의 행위를 강조해서 열심하지 않은 교인들에게 죄의식을 심어 주는 기성교회나

수행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긴장하고 공부하고 수행함을 강조하는 듯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열등감과 불안감을 심어 주는 다비아나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자들에게는 어려운 건

매 마찬가지 인거 같다는 거죠 물론 희망은 다비아에 훨씬 더 많이 있지만요

결론은 뭘 까요? 그래도 모두가 구원에 참여할까요 누구든 버리워 질까요 결국 종말에 가야 알까요

이런 생각과 연관해서 ‘재물과 하나님 나라’ 설교말씀에서도 나름 삐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의 삶의 방식이 저 나라에서 의 삶과 어떤 연계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간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제가 내린 결론은 결국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해 끊임 없이 수행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미 은총을 받은 사람이나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뜬 사람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당연히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이

저 나라에서도 영향을 끼칠거라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예수를 알면서도 게을러서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차지하고서라도 삶의 환경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 그러니까 예수를 알거나 믿으면서도 예컨대 늘 생활고 때문에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영향받을 까요? 힘들게 생활하는 적지 않은 교인들은 사실

저와 같이 고민하는 것조차 배부른 자들의 생각으로 치부하기가 쉬운 것 같은데...

그것도 결국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영역이므로 알 수 없는 게 맞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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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9, 2009
*.120.170.243

방랑자 님,

정말 중요한 말씀을 주셨네요.

다비아와 샘터교회가 추구하는 영성이

결국은 또 하나의 율법, 짐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냐, 하는 말씀이시지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게 옳을 겁니다.

그런 걸 가장 조심해야 하는데,

부지불식 중에 그런 흔적들이 나타난 것 같군요.

한 마디만 변명을 해도 될까요?

다비아와 샘터교회는 신학과 철학을 강요하지 않는답니다.

그것은 그저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제안에 불과하답니다.

특히 제 설교는 신학 자체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와 성서를 중심으로 한 신앙을 합리적 이성의 틀 안에서 설명하는 거지요.

이건 신학을 공부했는가, 아닌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서울샘터교회에서 몇 분이 철학 공부를 하는 건

교회 정체성과는 직접 관계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런 쪽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활동이지요.

조건이 안 되어 평소에 책도 못 읽고, 성경도 못 읽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오직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동체가 바로 샘터교회의 정체성이랍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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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October 30, 2009
*.105.7.230

방랑자님, 안녕하세요?

충고의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많이 찔렸네요.^^

글구, 샘터교회 철학스타디 말씀이 나와서, 바짝 긴장했어요.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샘터교회 정체성과는 무관한 자체모임이랍니다.

(주일모임이라서, 목사님께서는 예배에 소홀 할까봐 오히려 걱정이셔요^^)

교회 홈피에 모임 공지글을 올리다 보니 본의아니게 외부로 알려 졌는데, 아주 작은모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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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October 30, 2009
*.109.153.0

이런..참 죄송...

어제 사무실 눈치 보면서 틈틈히 막 써나갔는데 다시 읽어보니 괜한 딴지를 건거 같네요

소중한 말씀들 조용히 묵상하며 눈팅족만으로도 만족하고 살아야지 했는데..쩝

그래도 주제넘은 댓글을 통해 앞으로 흔들리지 않을 확실한 한가지 답은 얻었네요

바로 샘터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깨우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간 꼭 오프라인으로 목사님도 뵙고 샘터교우분들도 뵐거라는 희망을 안고

여기 들리면 서울샘터를 꼭 한번씩 들려봅니다. 미리 정탐(?)해보는 거죠

교우간 대화나 공지도 한번씩 보고 앨범도 보면서 교회분위기도 살피고 특히

혹시 저처럼 허술해 보이는 사람은 없나 찾아보곤 하죠 ㅋㅋ

그저 예로 든다는 게 어떻게 철학스터디가 부각이 되어 라라님께 송구스럽네요

충고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소중한 모임들 잘 이루어 나가시고

언젠가 여건이 되고 용기가 생기면 참석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profile

[레벨:26]병훈

October 30, 2009
*.183.92.105

 저는 대구 샘터교회로 나가고 있습니다..지금은 잠시 외국에 나와있지만요.. 저도 첨에 교회 출석하기전에 이 분들은 모이면 철학+ 신학 스터디 같은 분위기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살끔했었지만 기우였습니다..ㅋㅋ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알아가기 위한 노력으로 신학적사고 철학적사고등을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하나님나라는 기쁜 소식 아닙니겠습니까.. 교우분들 모이면 웃고 떠드느라 신학얘기는 거의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ㅎㅎ 기본에 충실한 것이지요..

아마 현학적 분위기를 원했던 분들은 실망하실지도 모르지만 여튼 샘터교회는 그렇습니다..^^

profile

[레벨:12]진상광

November 07, 2009
*.203.204.218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성서아카데미가 어떤 곳인지 몰라(이런 이름 가지고 엉뚱한 일 벌이는 정체 모를 곳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들어오지

못하다가 오늘 대강의 성격을 확인하고 회원가입을 하게 됐습니다.

첫번째 드릴 말씀으로, 이 설교말씀이 참 좋습니다. 물론, 좋은 말로건 나쁜 말로건간에 설교를 비평하자는 것이 본래의

제 뜻이 아니고, 이 설교가 항간의 지극히 도식적이고도 고민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는 제가 이름 지어낸 소위 "웰빙형 설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고, 그래서 신앙적 사고와 판단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하는 결과론적으로 전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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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눅 9:37-43) [8] [2]

  • 2013-02-10
  • 조회 수 12913

주현절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12]

  • 2013-02-03
  • 조회 수 17014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 2013-01-27
  • 조회 수 18944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 2013-01-21
  • 조회 수 23802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 2013-01-13
  • 조회 수 21734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 2013-01-07
  • 조회 수 17960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 2012-12-30
  • 조회 수 22308

대림절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4] [2]

  • 2012-12-24
  • 조회 수 17036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 2012-12-17
  • 조회 수 18111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 2012-12-09
  • 조회 수 21484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 2012-12-02
  • 조회 수 17507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 2011-11-21
  • 조회 수 18302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 2011-11-13
  • 조회 수 23263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 2011-11-06
  • 조회 수 20103

창조절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11]

  • 2011-10-30
  • 조회 수 16905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 2011-10-23
  • 조회 수 23096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 2011-10-17
  • 조회 수 20147

창조절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 4:1-9) [6]

  • 2011-10-09
  • 조회 수 16828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 2011-10-02
  • 조회 수 14714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 2011-09-26
  • 조회 수 12732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 2011-09-19
  • 조회 수 12762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 2011-09-11
  • 조회 수 12640

창조절 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12]

  • 2011-09-05
  • 조회 수 13353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 2011-08-29
  • 조회 수 1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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