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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사순절 조회 수 14895 추천 수 0 2009.03.16 2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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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2:13-22 
 

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요 2:13-22)


표적을 보이라

오늘 설교의 성서본문인 요 2:12-2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것과는 크게 달라 보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을 보시고,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상과 돈을 모두 엎어버렸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폭력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어도 완력으로 이런 소란을 피운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요즘 노점상들의 좌판을 뒤엎거나 리어카를 트럭에 싣고 가는 단속반원들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소란을 지켜본 유대인들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세메이온)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하고 따졌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자격이 있는지 그 증거를 보이라는 말입니다. 공관복음서도 비슷한 것을 전합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소란을 피운 다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막 11:28) 하고 물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유대인들이나 마가복음 대제사장들이나 모두 예수님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증거를 대라고 요구했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증거, 즉 표적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표적은 물론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이런 표적, 즉 기적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증거를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했습니다.(창 15장) 번제물의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가는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호렙 산의 불타는 가시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도 확실한 증거를 구했습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로 변하며, 손에 나병이 생겼다가 낫는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출애굽의 홍해 사건을 비롯해서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의 물 등,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표적의 반복이었습니다.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에도 이런 표적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 탓인지 그들은 늘 표적을 구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고전 1;22) 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의 이런 표적 신앙은 이해할만 합니다. 하나님이 명실상부하게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과는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걸 보여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녀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믿을 수 있으려면 아버지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메시아도 메시아로서의 표적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는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당신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요구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이 없거나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았거나 깊은 영적 통찰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메시아로서의 표적을,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표적, 능력, 기적은 모든 진리를 결정하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하려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투쟁한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표적을 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표적이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면 그런 증거들이 나타난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바울의 진술도(고전 4:20) 자주 인용됩니다. 노골적으로는 사업도 잘되고, 건강도 좋고, 출세도 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믿음만 좋으면 은으로 만든 이빨이 금으로 변한다는, 허황한 이야기도 합니다. 그런 표적이 따르지 않는 것은 신앙이 죽은 탓이라고 주장하겠지요.

손기철 장로라는 분이 몇 년 전부터 치유 대중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한 모임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인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병명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많은 이들의 난치병이 치료된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심지어 그 집회의 능력이 핸드폰을 통해서 다른 곳까지 전달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이런 일반적인 종교현상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현상도 표적 신앙의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손 장로 스스로 오늘 한국교회가 말씀 과잉이고 표적 상실이라고 하면서, 표적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종교 현상은 표적 신앙을 요구하는 한국인들의 신앙적 정서에 딱 들어맞았습니다. 그는 그런 신앙에 불을 지피는 능력이 탁월한 분입니다.


성전을 허물라

표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엉뚱한 답변입니다. 성전을 허물라니요. 그리고 그것을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니요.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신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어떤 건물인가요. 다윗이 건축 자재를 마련했고, 솔로몬이 완공한 이 성전은 몇 번에 걸쳐서 파손되었다가 복구되는 등, 예수님 당시에도 재건축 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임재 한다는 믿음을 이어왔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 성전을 건축, 복원, 그리고 유지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바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의 실증적인 표적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삶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경건한 이들은 유대교의 기도 시간에 맞춰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성전이 없는 유대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종교가 성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 건물은 세계적인 건축물입니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천정화와 벽화, 그리고 조각품들은 이루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들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도 이런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웅장하고 멋진 교회당을 짓는 것이 바로 신앙의 업적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도 절을 꽤나 호화롭게 짓고, 부처의 상을 어마어마한 크기로 세웁니다. 건축물을 통해서 종교심을 발휘하겠다는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기가 막혔겠지요. 이렇게 되묻습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만에 일으키겠느냐.”(요 2:20) 이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그 중심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삼일 만에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창조 질서의 파괴를 표적이라고 한다면 그건 신앙이라기보다는 마술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눈속임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할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의 질문은 일단 피하는 게 최선입니다. 다른 경우에도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피하신 적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4:48절에서 예수님은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는 관리의 요청을 들으시고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39절에서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물론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초자연적 사건도 일으키셨습니다. 표적에 관한한 예수님의 태도는 이중적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표적을 행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표적을 거절하셨습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예수님의 모든 표적은 그것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표적의 방식으로만 예수님의 정체성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든 표적은 하나의 사실을 말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성전을 허물라, 내가 다시 일으키리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 하나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것입니다.  


표적과 부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이 말씀을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그 말씀을 믿었다고 합니다. 부활 이전까지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는 비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어떤 새로운 말씀을 가르쳐도, 악한 영을 쫓아내고 죄를 용서했어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야 그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그 모든 것들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아니 그것만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참된 표적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바로 그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 삼일 만에 다시 일으키겠다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가리킵니다. 앞서 언급한 요나의 표적도 역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이 유일하고 참된 표적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 부활로 인해서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신약성서는 이 사실 하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 부활체인 예수님의 운명, 그를 통해서 일어난 사건 이외의 것들은 모두 참된 표적이 아닙니다. 이는 곧 우리 인간에게서 나오는 표적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산해내는 것들은 구원의 표적이 아닙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생명 안으로 아직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고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용서를 받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야 할 존재들에게서 무슨 구원의 표적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걸 일상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행하는 것들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 보십시오. 우리에게서 선한 열매가 맺고 있을까요?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업적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표적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교회에도 금년에 수능을 볼 학생이 몇 명 있습니다. 좋은 점수를 받아서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이 표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것으로 그 학생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면서도 우리는 무조건 그것을 생명의 표적인 것처럼 확신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이들을 위한 사회봉사입니다. 우리는 남을 섬기고 봉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행하는 이런 섬김과 봉사가 어떤 결과를 빚을지 전혀 예측하지 못합니다.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금 인간 행위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교회만 잘 다니면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유대인들과 같은 표적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중입니다. 끊임없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에 빠져들고, 더 나아가서 종교적 이기심이나 주술신앙에 사로잡힐 위험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표적들은 우리의 영혼을 왜곡의 방식으로 자극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 같은, 나와 함께 하는 것 같은 확신을 갖게 합니다. 이런 표적으로만 말한다면 박태선의 전도관, 문선명의 통일교, 이만희의 신천지가 우리 정통 기독교보다 훨씬 역동적일 겁니다. 

표적 신앙을 쉽게 벗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그런 표적이 없으면 우리는 삶을, 신앙생활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삶과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표적을 구하고 성취하려고 애를 쓰는지는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표적 신앙의 잘못을 확인하는 것으로 우리 삶과 신앙에 있는 모든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표적 신앙이 답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실제적인 대답인가 하는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 대답을 여러분이 이미 찾았을 겁니다. 구원의 유일한 표적인 예수님의 부활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입니다. 너무 간단한 대답인가요? 너무 뻔한 대답인가요? 우리의 삶을 담아내기에는 그 대답이 너무 가벼운가요, 또는 너무 무거운가요? 그래서 현실적인 대답이 아니라고, 뭔가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이 드시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은 우주의 역사에서 유일회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으며, 종말로 열린 생명의 생생한 신비입니다. 그것만이 참된 현실(reality)입니다. 이 부활은 생명의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계시 사건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원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난파선에 올라탄 사람처럼 이 세상살이의 파도와 싸우지만 이미 구명선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는 생명을 얻을 것에 대해서 더 이상 걱정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절기인 사순절 셋째주일입니다. 자신의 운명, 그리고 세상의 운명을 뚫고 나가기 위해 투쟁하되 이미 부활 생명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는 사실에 영혼을 집중시키십시오. 예수님의 부활만이 구원의 유일한 표적입니다.(0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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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March 16, 2009
*.116.154.86

목사님!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표적을 보이라 했던 유대인들은 그런대로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들이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늘 생기곤 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많은 뉴욕에서는 이래 저래 막강한 파워 그룹이잖아요.
하긴 전세계가 늘 주목하는 곳이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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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6, 2009
*.120.170.254

모래알 님,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추종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아주 드물게 예수님을 믿게 될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드러난
전혀 새로운 생명 경험이랍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믿을 수가 없었지요.
이런 문제를 좀더 깊이 이해하려면
부활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질문해야 합니다.
저의 강의안 <조직신학해설>에 나오는
"십자가와 부활"을 읽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여기 온라인 강의실로 들어가면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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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March 16, 2009
*.116.154.86

목사님!  정말 고맙겠다는 말씀이 우스워서.. ㅎㅎ

"은폐"와 "계시" 인가요? 아닌가요?
아무튼 마가복음 "하나님 나라" 묵상 중 독일어로 설명하신 것을 영어 단어로 뭘까 많이 고민했는데
Hidden God(은폐의 하나님)와 Revealed God(계시의 하나님)이라고 쓴다는 걸 배웠지요.
철학과 신학 2 장에서 언급하신대로 이해하는 언어라 할지라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건 참 어렵네요. ^^

참.. 조직신학 책.. 저도 받았는데 목차만 보았어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많이 묵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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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히로

March 16, 2009
*.11.176.99

유일한 표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사건이고
표적은 인간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리고 저희들은 유일한 표적인 부활사건에 온 힘을 다해 집중해야 하구요.
다비아 신학마당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인식론에 있어서 인식의 토대는 신비가 되어야 한다는 글이 생각납니다.
저희는 거의 감각을 토대로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라든가 부활의 신비에 대해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운것 같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완전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한계내에서 인식하는 데,
깊은 지식과 신앙이없이는불가능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그러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표적에 더 관심을 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집중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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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7, 2009
*.139.165.30

히로 님은 지금 기독교 신앙의 정도를 걷고 있으니
그 길을 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겁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그 길을 가보세요.
주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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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오명철

March 17, 2009
*.243.153.40

본문 말씀에 지배를 받고, 이끌림 받는 셋째주 되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7, 2009
*.139.165.30

저도 오명철 님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사순절 셋째 주간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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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March 17, 2009
*.78.245.77

이 광활한 우주 가운데 던저진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조금이나마 인식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기적이며
신비이며
은총인 것 같습니다.

옆에서 아내가 <조직신학해설>책을 읽으면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 대해
바르트와 부루너, 몰트만의 입장을 이야기를 하더군요.
각 신학자들의 관점들로 통하여 무한한 하나님을 더 풍성하게 드러내는 것 같았습니다.
깊이는 잘 모지만요~~

목사님 말씀처럼 우리가 기독교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천년 기독교역사와 신학, 영성과 우리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 가장
바른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 보게 됩니다.

그 길의 왕도는 끝이 없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꾸준한 공부와 독서, 성서연구가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의 신앙은 표적을 구하는 본말이 전도된 신앙의 세계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네요.

하루 일과가 끝난 저녁시간
저에게는 늘 새로운 시간의 시작인 것 같습니다.
황사가 자주 일어나는 환절기이네요.
목사님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라며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7, 2009
*.139.165.30

주경야독을 달팽이 가족이 실천하고 있군요.
나도 그런 소박한 삶을 살고 싶은데
뭐가 그렇게 바쁜지,
아니면 바쁜척 하는지 잘 안되는군요.
기독교 영성은 달팽이 님이 위 대글에서 지적한대로
꾸준한 공부, 독서, 성서연구, 그리고 예배,
더 나아가서 그런 대화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간에 긴장감이 흐트러지더라도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겁니다.
평화로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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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March 19, 2009
*.109.68.116

그렇게도 표적을 바라는 우리에게
단번에, 하나님께 도달하는 하늘표적을 허락하셨네요
설교본문과 조금 엇나가는 느낌인지 모르지만
표적을 바라는 유대인들의 갈망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표적'과 '갈망'의 깊이가 전제가 되야 하겠지만요

적은 수의 유대인에게나마
예수부활체의 현현은 감각적 체험을 허락한
그분의 능동적 표적이겠지요
온라인 강의 2장 내용중
하이데거는 '물을 사건 속에 해소시킨다'라는 부분과  연결지어봅니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몸', 특히나  인식에 비하면 내세울 단단한 외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감각'에 조금씩 의미를 더 부여하게 됩니다
제가 표현할 수 있는 능력보다 조금 더 나가 표현한다면
"物로의 전향"에서 예수가 선포한 "메타노이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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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9, 2009
*.139.165.30

물로의 전향과 메타노이아라!
와, 사유의 대단한 자유로군요.
그게 아니라고는 말 못지요.
아니 정곡을 찔렀네요. 뭐.
예술가적 상상력으로 딱이에요.
다만 부활 현현과 감각적 체험이라는 말은
조금 더 해석이 필요하겠군요.
부활의 예수가 빵과 물고기를 먹고,
제자들과 대화를 했다는 걸 보면
분명히 감각적인 체험으로 보이기는 한데,
거기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지요.
물론 감각을 뭘로 보느나에 따라서 말이 달라지겠지만요.
어쨌든지 기독교가 영육이원론이 아니라
일체로서의 인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물, 감각 등은 놓쳐서는 안 될 요소라는 게 분명합니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모든 게 드러날 겁니다.
그때까지,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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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March 21, 2009
*.64.66.99

사람 마음이나 사건의 결과 등도 저의 의도나 노력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누굴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그사람도 절 사랑하진 않겠죠

그렇다고 회의적이지도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고
중심잡기가 힘들어요 @_@;;;;;;;;
75일 남았습니다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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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1, 2009
*.139.165.30

자네, 제대가 75일 남았다고?
웬일이오.
입대한다고 야단하던 그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믿을 수 없군.
제대하고 만납시다.
서울샘터교회 한번 오시오.
말년에 몸 조심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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