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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의 길

성령강림절 조회 수 15944 추천 수 0 2009.10.12 15: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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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레위기 1:1-17 
 

번제의 길

(레 1:1-17)


레위기에는 다섯 가지의 제사 종류가 나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그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은 번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번제는 말 그대로 동물을 전체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3-9절에는 소를 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10-13절에는 양이나 염소처럼 작은 가축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13-17절에는 날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각각 자신의 재산 정도에 따라서 제사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재산이 넉넉한 사람은 소로, 없는 사람은 비둘기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위의 번제 종류가 제물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절차가 약간 씩 차이가 나지만 큰 틀에서는 똑같습니다. 우선 제주(祭主)와 제사장의 역할이 적절하게 분담되어 있습니다. 소를 제물로 하는 제사만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3절에 따르면 흠이 없는 수소를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제주는 소의 머리에 안수를 해야 합니다. 이는 소가 자기를 대신해서 죽는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4절에 따르면 그 소를 바침으로 죄가 용서받는다고 합니다. 안수 후에 그는 소를 잡아야 합니다. 그가 직접 도끼나 칼을 들고 잡는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걸 대신 해 주는 사람이 있는지는 정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소는 아무나 잡기 힘든 짐승이니 그 일을 대신 전문적으로 맡아주는 백정 같은 사람이 있었겠지요.

그 뒤로 제사장들이 소의 피를 회막문 앞 제단 사방에 뿌렸습니다. 피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피를 뿌린다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생명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제주가 소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제사장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인 뒤 불이 잘 타도록 나무를 벌여 놓습니다. 그리고 각을 뜬 소의 살을 나무 위에 올립니다. 다음에 제주는 소의 내장과 정강이를 씻어야 하고, 제사장은 그 모두를 제단 위에서 불에 살라야 합니다. 내장은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도 들어 있고, 균도 많이 있으니까 특별히 깨끗하게 씻어야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제주와 제사장의 역할이 좀 복잡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간단합니다. 제주는 소를 잡고 각을 뜨고 분류하는 일을 하고,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에서 불에 사르는 일을 합니다.


왜 제사를 드리는가

제사에서 소를 잡는 행위는 좀 낯설어 보입니다. 거룩한 찬송과 기도를 올려야 할 제사에서 소의 피를 뿌리고 살을 태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우선 이것이 고대 유대인들의 특별한 제사행위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대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들 고유의 풍습을 지켰습니다. 어떤 고대 민족은 사람을 신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심청전이라는 판소리에 나오는 내용도 이와 비슷합니다. 바다의 신인 용왕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처녀를 바다에 던진다는 이야기입니다.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조장이 행해진다고 합니다.

소를 잡아서 피를 뿌리고 불에 태우는 고대 유대인들의 제사행위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제사 드리는 방법이 아니라 제사 드린 이유에 있습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들은 개인과 민족의 생존이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는 유대인들의 제사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리나요? 예배를 꼭 드려야 할까요?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주일성수라는 말을 주술처럼 생각합니다. 간혹 주일을 지키지 않았다가 큰 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주일을 잘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말도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앞으로는 유럽 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인이지만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날 겁니다. 이런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주일성수를 율법적으로, 주술적으로 따르는 것도 문제지만 냉소적으로 대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예배는 삶의 근원을 향한 인식과 통찰에서 시작되었으며, 거기에서만 가능합니다. 소를 드리는 순서에서 제주가 소의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와 제사장이 피를 뿌리는 행위를 기억하십시오. 먼저 안수를 생각합시다. 안수는 소가 사람을 대신한다는 뜻입니다. 소는 사람을 대신해서 죽습니다. 이를 통해서 사람은 죄를 용서받습니다. 속죄가 일어납니다. 속죄가 왜 필요합니까? 죄는 인간 삶을 파괴하는 악한 힘입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은 생명의 풍요로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죄의식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둘째, 죄의 결과인 악행은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존재론적 능력입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입니다. 속죄입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교리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보다는 자기가 알아서 잘못을 인정하고, 그 뒤로는 정의롭게 살면 되지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과 죄의 관계를 정말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만 인간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이걸 알고, 통감하는 사람은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사장이 피를 뿌리는 행위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종교적 상징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별로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자신들이 생명의 주인이라고 확신합니다. 신자들도 겉으로만 그러려니 하지 실제로는 별로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현대 문명의 책임이 큽니다. 하루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고 정리되는지 보십시오. 자신이 성취해야 할 일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큰 업적을 세워야 합니다. 티브이는 끊임없이 우리를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부추깁니다. 현대 문명은 우리가 우리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강요합니다.

이것은 착각입니다. 사람은 생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걸 계속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지난 30년, 40년의 인생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앞으로 지나갈 겁니다. 우리가 무(無)에서 왔으니 다시 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1만년이 흐르고, 10만년이 흐르겠지요. 삶은, 시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잠정적입니다. 유한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사라집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생명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주인이십니다. 이 사실을 절실하게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겠지요. 우리가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제단에 피를 뿌려야겠지요.


번제와 향기

번제의 하이라이트는 깨끗하게 씻어 정리해놓은 소의 부위를 모두 불에 태우는 장면입니다. 요즘의 바베큐나 숯불구이와 비슷한 장면입니다. 이 번제를 화제라고 불렀습니다. 번제는 태운다는 뜻이고, 화제는 불로 드린다는 뜻입니다. 똑같은 제사에 다른 이름을 붙였습니다. 레위기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9) 향기로운 냄새가 여기에 덧붙여졌습니다. 고기를 태우면 연기도 나고 냄새도 납니다. 연기와 냄새는 위로 올라갑니다. 고대인들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상달된다고 믿었겠지요. 여기서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은 문학적으로 읽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실제로 고기 태우는 냄새를 즐기셨다는 게 아니라 번제로 드리는 제사를 즐겨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번제는 신앙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소는 사람을 대신해서 죽습니다. 소의 피는 사람의 피를 대신해서 제단에 뿌려집니다. 이제 소의 몸이 남았습니다.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불에 태웠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번제는 우리 삶의 진면목을 그대로 가리킵니다. 한눈팔지 못하게 합니다. 무엇을 남기고 숨기고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소의 몸뚱이가 연기와 냄새로 변했듯이 우리는 결국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레위기는 바로 그 사실을 직면하라고 명령합니다.

번제는 단순히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입니다. 우리의 몸은 불에 살라집니다. 언젠가는 죽습니다. 지금 산소를 마시면서 살고 있지만 이것도 사실은 우리 몸을 산소로 태우는 겁니다. 타는 동안 연기와 냄새가 납니다. 더 이상 태울 게 없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여기서 제외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일찍 그런 일을 당하거나 조금 늦게 당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겁을 주려는 게 아닙니다. 죽음으로 위협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똑바로 믿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번제의 운명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번제물로 바쳐지는 건 은총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그것을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제가 죽음을 예찬하고 독려하려는 게 아닙니다. 성서는 죽음을 결코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 자체를 예찬하는 것은 사이비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 결과는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 자체만 놓고 본다면 우리의 운명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고, 높은 지위와 재산을 가졌어도 곧 모든 걸 송두리째 놓아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이런 운명 자체를 예찬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인데, 왜 번제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말인가요? 모순처럼 들립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두 가지 사실을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인간이 모두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포함한 우리의 전체 삶이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사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인식하는 게 바로 신앙입니다. 전자에만 모든 걸 걸어둔다면 그야말로 모든 게 끝장입니다.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으로 살면 그만입니다. 어떻게 살든지 죽으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삶은 전혀 다릅니다. 보십시오.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제사행위의 도구로 만족합니다. 소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아니라 죽임을 당하고 각으로 나뉩니다.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예수가 번제물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제물로 자기를 바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무언가를 위한 제물로 바쳐진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의 길을 가야 하듯이 모든 사람이 각자 번제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앞에서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데 현대문명이 큰 역할을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가 현대 문명이라는 신 앞에 바쳐진 제물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평생 돈을 벌고 소유하고 소비하는 일에 인생을 던집니다. 그게 옳은 거라고 믿습니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의와 평화는 무의미합니다. 돈에만 ‘올인’하고 있습니다. 돈 없이 어떻게 사냐, 하고 묻지는 마십시오. 거기에 번제로 바쳐지는 오늘 우리의 삶을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추석 당일에 정운찬 총리께서 용산참사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총리는 250일이 넘도록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있는 유족들의 아픔을 위로하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저도 개인적으로 바랍니다. 그 용산 참사를 다시 기억하는 일은 고통스럽습니다. 그 지역에 세입자로 살던 일부의 사람들이 망루를 만들고 저항하다가 경찰의 진압 작전에 의해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저는 지금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늘의 문명사회가 개발과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서 사람을 번제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열하고 어리석은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삶을 물질과 권력이라는 우상 앞에 번제로 바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야 합니다.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이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상과 하나님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아무리 다짐해도 구분을 못하니, 결국 반복해서 우상숭배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유대 민중을 향해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반복해서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상이 훨씬 더 매력적이어서 유대 민중들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자체가 우상이 됩니다. 기독교 신앙 자체가 우상이 됩니다. 헌금이 우상이 됩니다. 교회 봉사가 우상이 됩니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번제로 바쳐집니다.

이 설교가 여러분의 생각을 복잡하게, 또는 여러분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앞의 내용은 모두 잊고 다음의 사실만이라도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위해서 번제로 바쳐진 유일한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자신의 전부를 십자가에서 우리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생명체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거룩한 번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200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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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Dr. Jung

October 12, 2009
*.97.129.7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대상도 우리의 규범도 아니십니다.

 

오늘도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말씀을 통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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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2, 2009
*.120.170.243

닥터 정 님,

그렇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은혜만 바랄 뿐이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그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그분의 계시에 놓여 있습니다.

이게 긴장이에요.

다른 설교에서 언급했지만

죽어야만 볼 수 있는 그분의 계시를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는,

그것을 언어로 해명해야 한다는 엄청난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건 바르트 식으로 말해서

불가능한 가능성입니다.

또는 가능한 불가능성이겠지요.

그분의 계시의 빛에 온전히 사로잡히는 게

번제의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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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October 12, 2009
*.244.165.186

우리의 피조성을 이렇게 철저하게 인식시키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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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2, 2009
*.120.170.243

앗, 내가 위 설교에서 피조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단어를 생각해내다니요.

숨은그림을 찾았군요.

나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 피조성이 위 설교의 핵심 주제로 보입니다.

훗날 똑같은 본문으로 피조성이라는 주제로 설교해야겠습니다.

역시 영문학자의 섬세한 눈은 다르군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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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기쁨이

October 12, 2009
*.47.78.4

목사님 번제 소제가 제사를 드리는 방식인지 아니면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처럼 제사의 종류에 속하는지 질문 드립니다 그러면 요제는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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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2, 2009
*.120.170.243

기쁨이 님,

질문에 대해서는 좀더 문헌을 찾아 연구해야 대답할 수 있겠군요.

인터넷에서 '번제'를 쳐보세요.

다섯 가지 제사에 대한 설명이 잘 나올 겁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이 모든 걸 다 말해주지는 않아요.

제사라는 게 유대의 한 시대에 결정된 게 아니 거든요.

광야생활, 가나안 사사시대, 성전시대 등등....

시대마다 서로 다른 형식의 제사들이 있었겠지요.

그게 문서로 정리되면서 서로 중복되기도 하고...

좀 복잡한 전승의 과정을 거치거든요.

위 다섯 가지 제사도 서로 중복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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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October 12, 2009
*.105.165.212

목사님, 어제는 설교를 듣는 내내 제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당연히 하나님의 제물이라고 믿고 살아 가지만,

실제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아닌가?  

우상에 대해 너무 몰랐다거나, 아니면 애써 피하고 살아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거품을 몽땅 다 빼버리고

이 문제에 직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용산사태로 희생된 분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이들을 억압한 자들(현 위정자들) 또한 '물질과 권력'에 희생된 자들은 아니겠는가,

그런 마음으로 마음 한켠이 늘 묵직했었는데,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비로소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요즘 들려 주시는 묵상 말씀과도 연관성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라는 군중이나,  그 군중들 틈새에서 자신들의 야망을 이뤄 내고 싶었던 사람들이나,

모두 예수님 앞에서는 자비를 구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이라는 것을요.

 

목사님,

깊은 통찰력 있는 말씀 감사드립니다.

제가 어제밤 잠이 잘 안 오던데, 하나는 제 문제였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구 밀려오는 감사함과 기쁨 때문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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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2, 2009
*.120.170.243

억압한 자들 역시 희생된 자들이라는 설명이 의미심장하군요.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본인들이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우리의 삶이 번제물처럼

어떻게 완전하게 드러나서 태워지는가, 하는 게 문제에요.

저게 말로만은 안 되거든요.

죽을 때까지 주님의 자비를 구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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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October 12, 2009
*.164.231.24

물질과 권력이라는 우상앞에 번제로 바쳐지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건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거네요.

그 구분조차 어려워 매력적인 것에 이끌릴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만이 번제의 길이 되어주셨네요. 

그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신가..

알고 싶고, 설레게 하는 설교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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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2, 2009
*.120.170.243

와, 이선영 양이 설교를 몇 줄로 정확하게 요약했군요.

학생 때 공부 잘 한 표시가 나네요.

예수가 도대체 누군가,

그와 일치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졌다면,

그래서 거기에 영혼을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설교를 잘 들은 거에요.

나는 조금 먼저 주님을 따라가 가 볼테니

선영 양은 조금 뒤에 따라가 보세요.

그분은 우리의 영적인 신랑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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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October 13, 2009
*.104.196.166

번제는 인간의 죄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는 것과

그것을 위한 대속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말했을 것입니다.

또, 번제는 예수께서 인류의 대속자로 그 죽음을 감당하실 것을 예표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셨으나,

정작 그 번제의 작업을 해온 유대인들은 

대속자를 받아들이지않고 아직도 이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혹, 우리의 예배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그 실재를 감지못하고 져버리며 되풀이되는 형식만의 퍼포먼스가 되는 것이 아닐까..

진실로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되기 위해 겸손한 각성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인류 가운데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향해 번제를 드려온 유대인이

그리스도의 산제사를 깨닫지 못하는 그 아이러니가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반복되지 않아야한다는 우려가 덜컥 생겨서요.

목사님,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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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4, 2009
*.120.170.243

그렇지요?

번제의 민족이 참된 번제 사건인 예수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건

비극이군요.

그들과 우리 기독교인들은 꾸준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적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메시아 되심에 동의할 수 있는 그 길을 열기 위해서요.

이를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는

예수의 기독론적 사건의 보편적 차원을 넓혀가야겠지요.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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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October 13, 2009
*.109.153.4

다람쥐 쳇바퀴같은 일상...와 닿지 않는 말씀, 답답함속에 보낸 주일...늘 찾아오는 월요병...

그래도 다비아를 만난후부터는 월요일에 기대되는 한가지가 새로 생겼네요 목사님 설교말씀입니다.

여전히 답답함은 있지만 전과는 전혀 다른 저의 무지에 대한 좀 더 알고 싶은 그런 답답함입니다.

목사님 말씀은 늘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신성, 그리고 우리의 피조성으로 귀결되는

어떤 일관성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가끔 드시는 토기장이의 비유에서 더 와 닿곤 했는데요

전 참 못된 것 같습니다. 저는 늘 우리의 피조성 어떤 불가항력적인 그런 우리의 인성이 걸리거든요

왜 우리를 지으셨을까요? 죽음이 예정된 생명.. 영겁의 시간속에서 찰나간의 허무한 인생들..

자유의지가 주어 진건지 모르겠으나(우리가 알수없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국은 구원하거나 버려질 대상들..

어쩔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처럼 여겨지다가 또 어쩔땐 이건 뭐 우리가 결국 꼭두각시 인형이 아닌가

하는 반항심이 생기기도 하고.. 그런 경계선에서 늘 왔다 갔다 합니다

저도 대다수의 이곳 다비안들처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온전히 은혜로 바라 볼수 있는 날이 오긴 올까요

이런 생각을 할때마다 아주 가끔은 차라리 제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늘 이런 고민을 안고 반복되는 삶 자체가 참 피곤한거 아닌 가요

근데 쓰다 보니 당초 취지보다 얘기가 비관적으로 흘렀네요 저도 좀 은혜로운 댓글 남기고 싶은데 죄송....

어쨋든 주어진 시간동안 끊임 없는 수행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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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4, 2009
*.120.170.243

방랑자 님,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  하는 생각은

절대 은혜를 구하는 마음과 통한답니다.

자기를 무화하는 거니까요.

문제는 그 무화가 자기 파괴냐,

또는 영성으로의 올림이냐, 하는 차이에 있겠지요.

예수님도 왜 나를 버리셨는가 하는 탄식의 기도를 올리셨잖아요.

제 생각에 방랑자 님의 삶에 

은총의 빛이 어둠을 조금씩 밀어낼 것입니다.

들을 귀를 닫아놓지만 않는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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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October 13, 2009
*.117.246.250

많은 사람들이 '죽음은 끝'이라고 말할 때, 부활로서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가르치신 예수님...

기독교 신앙 안에서 죽음의 의미에 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됩니다.

결국 현세와 내세를 이어주는 중심 사건이 죽음이라면, 죽음은 '예수 경험'이라고도 규정할 수 있을까요?

한편 목사님의 설교에서 번제의 의미에서 출발한 케리그마와 용산 참사라는 현실 문제가...

오묘하게 연결되는 신비를 보면서, 또다시 은혜와 도전을 받습니다.

세상의 '중심'이신 예수도 충분하게 설명하시면서, 세상의 '표면'적 현실에도 은은하게 적용하시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목사님의 글을 통해 '존재론적 깊이'가 무엇인지 알아가면서, 제가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선포할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단지 설교자나 신학자가 아니라 '예수과학자(Jesus-Scientist)'라는 이상한 꿈을 갖게 되었달까요. ^^;

아무튼 정 목사님은 은혜 끼쳐주시는 분을 넘어 제게 가장 모델적인 목사님이십니다. 이번에도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이번주 샘터에서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매주 시간상 성경공부 시간에만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꼭 예배도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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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4, 2009
*.120.170.243

김용남 군, 지난 주일에 직접 얼굴을 봐서 반가웠네.

예수 과학자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니, 그것도 멋져보이는군.

영성가는 분명히 기술자가 아니라 과학자이지.

앞으로 꾸준이 내공이 깊어지기를 바라네.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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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퀄리아

October 13, 2009
*.111.172.208

돈과 권력에 욕심 내지 않아도, 우상에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너무 먼 것만 같습니다.

반복해서 걸려 넘어지는 우상의 덫은 피하기가 쉽지 않아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많은 이들은 모두 구원이 절실해 보입니다. 

저와 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거룩한 번제물이 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목사님 말씀을 묵상하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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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4, 2009
*.120.170.243

퀄리아 님,

너무 먼 것 같다, 피하기 쉽지 않아보인다는 말은

아주 솔직한 고백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삼을 때가 많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함께 기도드리고 싶군요.

주님, 말씀으로 우리를 완전히 태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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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깨달이

October 14, 2009
*.32.57.100

번제.. 너무나 이질적이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현재에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와는 별개로, 그냥 미개한 원시시대 고대인들의 주술과도 같은 모습으로만 와닿네요. 대속으로 애꿎은 짐승의 생명을 바치는 것을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했을지 의문입니다. 단지 지능이 낮고 열등하다는 이유로 대속의 제물이 되어버린 수많은 짐승들, 차라리 먹이사슬에 의해 자연의 일부로 헌신되는 것이 더 고귀한 섭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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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4, 2009
*.120.170.243

깨달이 님,

옳은 지적입니다.

번제는 고대인의 신앙행태라서

오늘의 눈에 이질적으로 보이지요.

설교 본문에도 지적했지만

번제는 사람을 신에게 바치기도 하던 시대의 이야기에요.

그것에 비하면 동물 번제는 양반이지요.

오늘 우리가 육식을 한다는 것도

먼 후일에 후손들에게는 야만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구약의 문명의 한계는 한계대로 보고

그 행태를 통해서 무엇이 추구되었는지를 포착하기만 하면

구약을 읽는 독자로서는 할 일을 다 하는 게 아닐는지요.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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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October 14, 2009
*.99.193.27

오늘 말씀을 보고

주일예배 안 드리기를 밥먹듯이 하는 저를 돌아보고

당시 소를 잡아 번제를 드렸다는 그 상황을 묵상합니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었을까, 아무리 돈이 있어도 소는 참 비싼 동물이었을텐데...

아마 그 당시에 제가 있었다면 돈이 있어도 비둘기을 잡지 않았을까

내가 속죄의 기도문을 읍조릴때 그 마음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따라 잡을 수 있을까

...흠

늘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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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4, 2009
*.120.170.243

번제물로 바치기에는 소가 너무 비싸다구요?

요즘 돈으로 6,7백만원 쯤 하겠군요.

저런 액수를 헌금으로 내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요. ㅎㅎ

내일 죽는다면 오늘 소를 바치지 않을까요?

번제 드리는 꿈을 오늘밤 꾸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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